비움과 채움 / 김중위
정치의 현장을 떠난 지가 상당히 됐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나를 정치인으로 본다. 허긴 강단을 떠난 교수에게는 언제 떠났느냐와 관계없이 언제까지나 교수라고 부르는 것과 같으리라. 은사는 또 죽을 때까지 은사이니 그리 탓할 일만도 아닐 것 같다.
그러나 무대를 떠난 배우와 산사(山寺)를 떠난 스님에게도 계속해서 배우라거나 스님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조금 어색하지 않겠나 싶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처럼 배우의 길을 접고 정치인이 된 사람이나 노래를 부르던 가수가 의사가 된 경우에 사람들은 그의 전직(前職)에 집착해서 그를 호칭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내 경우에는 전직(前職)에 대체할만한 새로운 직함을 상대의 기억 속에 입력시켜 놓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설사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여전히 정치인으로 치부해 버릴 것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오랫동안 정치 현장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여러 갈래인 것으로 느껴진다.
“다음에는 꼭 다시 출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것 다해 봤는데 아쉬울 게 뭐 있습니까? 이제 그만 쉬시지요!” 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이제 마음을 비우시고 인생을 즐기세요!”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뭐 새로운 큰 역할을 다시 해야지요.”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말이 되었건 모두가 휴지(休止) 상태의 정치인에게 보내는 연민의 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들이 건네는 한마디 한마디는 내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그 어떤 것도 나에게는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출마하라는 것이나 무언가 큰 역할을 해 보라는 것이나 이제 그만 마음을 비우고 인생을 즐기라는 말도 어쩐지 나에게는 모두 공허한 것처럼 들릴 뿐이다.
어떤 커다란 정치적 역할을 하기도 어정쩡하지만 마음을 비우라니 무슨 마음을 비우라는 것인지 어정쩡하기는 매일반이다.
마음속에 어떤 비울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있어야 비울 것이 아닌가 해서다.
스님들이 무소유(無所有)와 <비움의 미학>을 설법하고 있지만, 그분들이야 처음부터 그러기를 작정하고 불문(佛門)에 들어간 분들! 그들의 무소유 철학을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어떻게 감히 좇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그러나 그분들도 처음부터 마음을 비우고 불문에 들어갔을까?
그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음을 비웠다면 불문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굳이 수도(修道)를 위해 머리를 깎은 이유는 뭔가 부족함이 있어서가 아닐까?
옳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채우기 위해서다. 그것을 득도(得道)라 하는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채워야 비워 지는 것이지 채우지도 못한 주제에 무슨 비우겠다는 생각부터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은 한시도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무소유로 말하면 거지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지의 무소유와 스님의 무소유가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거지의 무소유에는 처음부터 비움이라는 개념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지만 스님의 무소유에는 득도(得道)라고 하는 <채움>이 전제가 되어 나온 개념이 아닌가 해서다.
이쯤 되면 이제 너는 비우고 싶은 마음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맞는 얘기다. 채웠건 못 채웠건 비우려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거지 무슨 궤변인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비움에 아쉬움이 남거나 비움을 즐거워 할 줄 모르면서 말로만 비운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참다운 비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말하자면 아무런 찌꺼기도 남겨놓지 않을 만큼 모두를 비워 낼 수 있을까 해서다.
참으로의 비움이 버림과 일직선상으로 통해 있는 것이라면 비움의 궁극적 행태는 <버림>으로까지 가는 것이고 그 버림에는 육신(肉身)까지를 포함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나눔>은 될지언정 비움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눔은 또 그것대로 어렵기도 하지만 그런대로 감내해 나갈 수 있는 문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나의 존재와 소유 지분을 인정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움은 버림이기 때문에 나의 존재도 나의 소유 지분도 깡그리 무시할 만한 용기가 마음속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리하여 비움에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비움>도 <버림>도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아 본 적이 없다.
내가 과연 나를 어떻게 감히 버릴 수 있을까?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된다. 부족함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비움을 말하기 전에 채움이 선행되어야 할 일이겠다. 채우고 또 채워도 모자랄 일이다. 죽을 때까지 채워도 못 다 채우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채우는 노력을 죽기 전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다.
피카소가 말년에 유치원 애들 그림같이 그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물었다. 무슨 그림을 그렇게 유치하게 그리느냐고. 그때 피카소는 “그런 소리 말아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평생을 그린 거예요.” 라고 말했다. 운보(雲甫) 김기창 화백도 바보산수화를 그릴 즈음, 제자들의 비슷한 질문을 받고 피카소가 한 말과 같은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런 것들도 어쩌면 비움의 또 다른 형태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아이가 되는 것 말이다.
어떤 주교(主敎)가 머릿속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까지 내려오게 하는데 80년 세월이 걸렸다고 하는 자기 고백이 있었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마음속에 비움이 꽉 찬 상태의 자화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비움이 곧 채움이고 채움이 곧 비움>인 것을 이제야 겨우 다시 한번 어렴풋이나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하는 얘기다. 이것이 바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 같기도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