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閔妃暗殺」⑤-1
閔妃 登場
전왕 철종의 3년 상을 치룰 무렵부터, 왕실에서는 왕비책봉이 화제가 되고, 일반 백성들도 이에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왕실에는 3대에 걸친 대왕대비, 왕대비, 대비의 세 미망인 이외에, 누대의 측실 등 많은 여성이 있었으나, 그 중심이 되어야할 왕비는 공석인체 였다.
대원군은 아들이 왕이 된 이래 <왕비를 뽑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안동 김씨 일족의 60여년 세도정치는, 대원군 개인의 생활을 어려움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국운이 기울어지기까지의 부패한 모습이었다. 이도 저도 왕비 친족의 전횡이 원인이었다.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대원군의 굳은 결의는, <내가 생각해도 잘 견뎌 냈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굴욕적인 체험으로 뒷받침 되고 있다.
대원군은 전에 김병학에게 협력을 구할 때,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 당신의 딸을 왕비로 삼는다”는 조건을 제시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대원군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고, 김병학의 인물 됨됨을 인정해서였지만, 그가 그것만으로 만족할 터인 좌의정이라는 고위직을 준 것이다. 김씨 일족이 몰락한 후에도 정계에서 살아남은 김병학은, 자기 딸이 아닌 여성이 왕비로 결정된 이듬해, 영의정이라는 최고위직까지 올라갔다. 대원군이 왕비가 될 여성에게 붙이는 조건은, 섭정인 그의 권세에 순종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것, 또 아버지나 오라버니 등 혈연의 가까운 친족 중에 세도정치에 야심을 품을만한 유력자가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종래의 왕비선정에서 친정의 중요 조건이었던 명문, 거족(巨族), 세력가 등은 대원군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비가 될 여성이, 어떤 집 딸이라도 상관없다는 것은 아니다. 역시 왕실을 비롯하여, 일반 백성들도 납득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 그런 기본적 조건을 갖추고, 또한 대원군이 바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여성을 찾아내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많은 후보자가 거명되었지만, 왕비 선정은 난항했다. 대원군이 초조해 하는 빛을 보이기 시작할 무렵, 그에 이어 왕비결정에 강한 발언권을 가지는 대원군 부인이, 그녀의 생가인 여흥 민씨 일족의 딸을 추천했다. 민치록(閔致祿/역자 주:영주군수 역임, 현재 영주 구성공원 입구에 민치록의 선정비가 있음)의 외동딸인데, 8살 때 양친을 잃은 고아였다.
조선에는, 현대의 한국에도, 일본처럼 외동딸에 양자를 들여 후사를 이어가는 습관이 없다, 아들이 없으면 동족으로부터 후계자를 맞아들이고, 그 집 딸은 다른 집으로 출가시킨다. 아들이 없는 민치록의 집에서는, 동족인 민치구(閔致久)의 둘 째 아들, 升鎬를 맞아 가계를 이었다. 그 민승호가 대원군 부인의 오라버니였다.
<閔>이라는 성의 본관은 <驪興(여흥)> 하나뿐이다. 따라서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은 모두 여흥 민씨로 동족이다. 이 일문은, 제3대왕 태종의 원경왕후(元敬王后), 제19대왕 숙종(肅宗)의 인현왕후(仁顯王后), 두 왕비를 낸 명문이며, 일찍이 몇 사람이 고위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족 중에 권력자가 없고, 재력도 없었다.
명문의 딸이지만 부모도 형제도 없다는 것은, 곧 대원군이 희망하는 그대로였다. 게다가 대원군 부인은 “왕비로서 부끄럽지 않은 용모를 지니고 있으며, 예의범절 같은 가정교육도 익히고 있습니다. 특히 학문에서는, 양반집 어떤 딸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원군 부인은 민치록의 딸을 집으로 불러, 남편과 대면 시켰다. 훗날 국운을 걸고 투쟁을 계속하는 정적끼리의 첫 만남이다.
이때 대원군이 받은 첫 인상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총명은 좋은데, 이 새끼 고양이는 암컷 호랑이가 되지 않을까” 하고 고개를 기웃거렸다---는 설이 일반적이고, 이 설의 지지자는, “대원군 정도의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한 사람이, 민 소녀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을 이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시한 가족관계에서는 이 이상의 후보자가 없었으므로, 그녀를 왕비로 뽑았을 것이다.”라고 한다. 두 번째 설은, “정숙하고 순종하는 모습에 만족했다”는 것으로, 이 말에 대한 지지자는, “민 소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녀가 야심가가 된 것은 그 후의 일이고, 이 때는 정말로 순종하는 소녀였을 것이다”라고 한다. 두 설 어느 것도 결정적일 수는 없다. 어떻든 대원군은 그녀를 고종의 비로 결정했다. 민 소녀에게 “민비”로 삼을 것을 약속했다.
<민비>란, 당연하게 왕비가 된 후의 칭호이고, <명성황후(明成皇后)>란 사후에 주어진 칭호이다.
나는 그녀의 풀 네임(Full name)을 찾았으나, 간단히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 이름은 끝끝내 알 수 없었다. 어떤 자료에도 <閔致祿 女>라고 쓰여 있을 뿐으로, 한국 학자나 연구자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몰랐다. “민비의 퍼스트 네임(First name)은?” 하고 묻는 나의 질문은, 한국에서는 이상한 것인 듯 했다.
서울 체재 중에 나는, 정비석(鄭飛石)작가의 장편소설 『閔妃』에 왕비의 이름이 “자영(紫英)”이라고 쓰여있다---고 들었다. 한글로만 쓰여 진 소설이므로 나는 전혀 읽을 수 없었으나, 이 이름은 저자의 창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마음대로 붙인 이름은 아닙니다.” 라고, 정비석은 말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역사연구가가 ‘이것이 민비의 이름이다’라고 가르쳐 준 것이 머리에 남아 있어, 소설을 쓸 때 그대로 쓴 것입니다. 어쨌든 근거는 없으나 나는 이것을 본명으로 믿고 있습니다”
“紫英”이란 민비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료의 뒷받침 없이 내가 이것을 본명으로 쓸 수는 없다.
조선에서는, 현재의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자나 여자나 태어났을 때에, 부계를 따라서 거슬러 올라가는 씨족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되고, 여자는 결혼을 해도 아버지의 성 그대로인 체 일평생 바뀌지 않는다. 이 ‘부계혈통사회’에서는 왕비도 예외가 아니며, “金妃” “韓妃”라고 하는 것과 같이 친정아버지의 성만으로 기록되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것이 다른 나라의 역사상 유명한 여성이라면, 민비보다 오래된 시대에도, 賴朝(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역자 주: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무장, 정치가/1147~1199)의 처는 政子(마사코), 루이 16세의 비는, 마리 앙투아네트로, 조사할 것도 없이 이름을 알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씨조선 왕조의 역사를 보면, “민비”라고 불렀던 왕비는 4사람이 있다. 전술한 2사람과, 이 책의 주인공인 고종의 비, 게다가 민비의 아들인 제27대왕 순종(純宗)의 비도 민씨 일족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 “민비”라고 하면,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고 비명의 죽음으로 끝낸 고종의 비만을 기리키는 이름으로 되어 있다.
1866년3월20일(음력), 창덕궁 인정전에서 왕비책봉의 성대한 식전이 거행되었다. 고종은 세는 나이(집에 나이)로 15세, 민비도 세는 나이로 16세였으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의 <철종2년 신해9월25일 생)이 맞다면, 그녀는 만14세 6개월이었다. 조선왕조사에 민비의 등장이다.
이날 민비의 복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복식 연구의 제일인자인 단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민족박물관장인 석주선(石宙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학박사인 석주선교수는, 백발에 핑크색 한복이 잘 어울리는 몸집이 작은 아름다운 노 부인이었다.
“왕이나 왕족은 물론이고, 고관들의 복장은 형태도 무늬도 색깔도 전부 엄격하게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용(龍)무늬는 왕 부처와 그 직계만이 쓰는 것입니다만, 그것도 왕과 왕비는 5조(爪)의 용, 왕세자는 4조의 용, 왕세손은 3조의 용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왕비책봉의 날 민비는, 이 나라 여성 중에 단 한사람에게만 허용되는 금실로 수놓은 “五爪龍袍(오조용포)를, 가슴, 양어깨, 등에 붙인 찬란한 대례복 차림이었을 것이다. 서조(瑞鳥/상서로운 새)로 왕비의 복장에 자주 쓰인 꿩 무늬를, 그 천에 섞어 새겼을지도 모른다.
머리에는, 좌우로 크게 팽팽하게 한 군 머리라고 하는 가발을 높다랗게 얹고, 다시 왕비의 권위를 과시하는 갖가지 장식이 쓰인다. ‘군 머리’는 옛날에는 사람의 모발을 굳혀서 손질 했으나, 고종시대에는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제일 예장(禮裝)때의 가발은 몹시 무거워서” 라고, 고종의 셋째 왕자로, 조선왕조 마지막 왕태자(왕세자) 영친왕(英親王)의 비였던 李方子(이 마사코/梨本宮守正王의 장녀)는 말했다. “혼자서는 머리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 였습니다. 걸을 때는 등 뒤에서 키가 큰 여관이 바쳐 주었습니다.”
대정(大正)11년(1922년), 처음으로 조선을 방문했을 때의 추억 이야기다.
지금 미망인인 李方子는 일찍이 민비가 성혼식전을 올린 창덕궁 안의 낙선재(樂善齋)에 살면서, 망부 영친왕의 유지를 따라, 심신장애아 복지사업에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낙선재는, 옛날부터 미망인이 된 왕비나 왕세자비가 살기로 되어 있는 장소이다.
전후의 한국에는 배일(排日)의 폭풍이 거칠게 분 시대도 있었으나, 한국 사람들은, “그럴 때도, 일본의 황족이었던 方子비에게 미워하는 마음을 보낸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方子비를 동포로 받아들이고, 깊은 경애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민비는 몸집이 작고, 화사한 몸매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만 14세로 왕비책봉의 식전에 임한 그녀는, 가냘픈 목을 똑바로 뻗고, 가발의 무게를 잘 견뎠다. 총명하고 억척스러운 이 소녀는, 왕비로서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는 태도를 지키기 위해 몸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진한 화장으로 가꾸어진 얼굴은 인형처럼 아름다웠지만, 어깨나 가슴도 아직 살이 붙지는 않았다.
왕위에 오르고 3년째인 고종은, 왕궁의 의식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이날의 대례복은 평소의 예복보다 묵직하고 머리에 얹은 장방형의 면류관(冕旒冠) 앞뒤에는 구슬을 꿴 장식이 늘어져 있고, 그것을 지탱하는 모자의 적자색 끈이 턱밑에 굳게 매여져 있어 섣불리 목을 움직일 수도 없다.
왕은 이날부터 그의 비가 되는 여성에게 거의 무관심하고, 단지 의식의 진행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직 소년인 왕은 여성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생활은, 모두 미녀들인 궁녀들에 의해서 화려하게 꾸며지고 있었다. 왕은 여성의 아름다움에 관심도 있고, 그녀들과 노는 즐거움도 알았지만, 그때의 민비는 아직 딱딱한 꽃봉오리 상태로, 꽃잎의 색깔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왕은, 그 꽃봉오리가 열릴 때의 아리따움을 상상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왕비책봉의 식전은 무사히 끝났으나, 이튿날부터 거듭 사흘간, 별궁에서 영친례(迎親禮)가 있었다. 14살의 새 왕비에게 이 4일간은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마음의 의지가 되어주는 양친도, 오라버니나 언니도 없는 그녀는, 생활의 격변에 따를 중압을 혼자 몸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축하연은 밤늦게 까지 이어졌고, 아침에는 일찍부터 또 머리를 틀어 올리고, 화장하고, 옷매무새가 시작된다. 아마 수면시간도 부족하고 심신이 다 같이 피로의 극에 달했다고 생각되지만, 그녀는 <훌륭한 왕비>가 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자 훌륭하게 행동했다. 얌전하면서도,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일원인 듯한 기품을 갖춘 태도는,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 기특한 노력도 왕의 가슴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또한, 왕은 너무나 어리다고 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