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閔妃暗殺」⑤-2
왕비가 될 때까지 민 소녀는, 어디에서 나라났는가---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곳은 「京畿道 驪州郡 根東面 閔致祿私邸」이다.
정신과 의사이고 수필가인 이규동(李揆東/현, 이규동신경정신과의원 원장, 서울대 의대 외래 부교수)은 그의 저서 『위대한 콤플렉스』(1985년 출판) 가운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비의 성장기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성장한 것은 서울 안국동의 감고당(感古堂)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녀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부모와 사별한 후인지, 그 이전인지, 연대는 명확하지 않다. 감고당은 숙종(肅宗/제19대 왕)의 계비였던 인현왕후(仁顯王后/민씨)의 친정 소유로, 그 후에 민씨 일족이 번갈아 살았던 집이라는 데서, 아마도 민비는 부모와 사별한 후에 이곳으로 맡겨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계비(繼妃)”란, 첫 왕비가 죽은 후에 맞이한 두 번째 왕비를 말하는 것이며, 민간의 말로 하면 후처를 뜻하는 것이다.
1985년(소화60년) 5월 나는 민비의 생가를 방문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자동차 거리 1시간 남짓한 조용한 농촌지대였으며, 현재의 지명은 여주읍 능현리(驪州邑 陵峴里)이다. 지붕이 낡은 목조 문을 들어서자, 황폐해진 뜰을 사이에 두고, 문과 같은 무렵의 연대로 보이는 집 한 채가 있었다. 검고 굵은 기둥이 있는 방 앞에, 손녀 지키기를 하는 허리가 굽은 노파가 있었다. 여기가 민비시대부터 3대째의 ‘閔家’라고 노파가 말해 준다.
“내가 시집을 왔을 무렵에는 훨씬 큰 집이었다”고 하면서, 노파가 집 밖을 안내해 주었다. 문을 나서 왼쪽으로, 담벽이 끝나는 데서부터 상당히 넓은 빈터가 있고, 공지 끝에 한국의 독특하고 산뜻한 색채의 당(堂)이 있었다. 옛날에는 여기까지가 민가의 저택이었다고 한다. 노파는 당을 가리켜 “여기가 민비의 공부방이 있었던 곳”이라고 했다. 당 안에 2미터 반쯤 되는 하얀 돌비석이 있고, 정면에 「명성황후탄강구리(明成皇后誕降舊里)」, 옆에 「광무팔년 갑진오월 일배수음제경서(光武八年甲辰五月 日拝手飮涕敬書)」로 되어 있다. 민비의 아들, 이씨조선왕조 최후의 왕이었던 순종의 필적이다.
당을 등 뒤로 하고 서자, 앞쪽에는 한눈으로 바라보이는 논이고, 부드럽게 펼쳐진 녹색 들판에 때때로 하얀 선이 움직인다. 백로다. 전방뿐 아니라, 좌우까지도, 완만하게 이어진 야산이 멀리 희미하게 보인다. 어린 날의 민비가 보았던 그대로일 것이다. 변화라고 하면 백로의 모습이 적어졌다는 정도일 것이다.
노파의 안내를 받아, 집 뒤 언덕에 올랐다. 정상에 주위와는 어울리지 않을 만치 훌륭한 묘가 있었으며, “이것은 인현왕후 양친의 묘로, 민비의 아버지가 묘지기를 하고 있었다”고 노파가 말했다. 묘비에는 「閔維重之墓」 라고 되어있고, 그 왼쪽에 李씨와 宋씨라는 2사람의 부인 이름이 있다.
감고당에서 자랐다는 민비와, 부왕(夫王/역자 주:왕비가 자기 남편인 왕을 이르는 말)으로부터 친정 양친을 살게 하려고 감고당을 받은 인현왕후와의 사이에는, 이런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인현왕후의 남편은 제19대 왕, 민비의 남편은 26대 왕으로 시대는 약 200년이 떨어져 있다. 그러나 민비는 단순히 민가(閔家)의 딸이었을 뿐이 아니고, 양친 사후에 감고당에 맡겨질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감고당이 있었던 장소는 경복궁과 창덕궁의 거의 중간, 현재의 덕성여자고등학교다.
민비를 연구하기 시작해서 이 책을 다 쓰기까지 3년간, 나는 민비나 대원군에게 마음을 가까이 하여 그들의 심정을 살피기 위해 노력해 왔다. 상상 속의 민비는 그녀의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동포인 나에게 언제나 차갑고 냉엄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 민비가 단지 한번 보여준 “애교”는 생가를 찾은 나에게 그녀의 후예(後裔)를 보여준 것이었다.
知賢(지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장아장 걷는 어린 여자애와 민비와의 피붙이는 상당히 멀지만, 그렇다고 해도 「날씬하고 화사한 몸매의 미녀」였다는 민비의 후예로서는 닮지 않았으나, 터질 듯이 익은 빨간 볼을 가진 건강 우량하였다. 나를 잘 따른 어린 소녀를 품고 일본어로 말하면, 의미도 모르는 체 밝게 웃는 얼굴을 기웃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무릎에 전해오는 어린 소녀의 따뜻하고 포근한 체온을, 민비가 나에게 보여준 친밀감처럼 느낀 날을, 나는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반도를 자본주의 세계로 편입시키려는 구미열강은, 그 수단으로 천주교 전교나 통상요구 뿐만 아니라, 무력침략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그에 대하여 조선은 강렬한 쇄국양이책(鎖國攘夷策)을 취해 왔으나, 이를 사상적으로 떠받쳐온 것이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었다. 한말 유학자들이 주창한 위정척사론은, 침략을 배제하려는 조선 인민의 소박한 애국심으로 이어져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쇄국조선의 구미열강에 대한 긴장도는, 대원군 집정시대에 들어와 최고조에 달했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포교되기 시작한 것은 1780년대 부터로,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널리 각층에 침투했다. 그러나 1810년의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사건과 같은 천주교도의 반국가적 행위에 의해서, 천주교 전파는 외부로부터의 침략을 불러온다고 믿어, 금지령이 내렸다. 같은 해 중국인 사제(역자 주: 周文謨 신부)와 조선인 영세자 300명이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그 후에도 엄청난 탄압이 이어졌다.
그것은 천주교라는 종교를 금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신봉하는 구미열국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선진각국의 사회제도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심까지 척사사상에 의하여 압살되었다. 이리하여 점차로 진척되었던 서학(서양 학문, 종교 등의 연구)의 길이 끊어진 것은,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켰으며, 지체 없이 세계의 대세에 대처할 준비가 불충분한 체, 개국이라는 새로운 사태를 맞이하는 결과가 된다.
프앙스는 1839년의 천주교 탄압(역자 주:기해박해) 후에도 계속해서 선교사들을 잠입시켰으며, 점차 포교의 실적을 올리고 있었다. 1860년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이래, 종주국인 청(淸)이 천주교를 인정한 영향도 있어, 조선 국내의 신자는 상류계급에 까지 퍼졌다. 대원군 부인은 영세를 받는 것은 뒤로 미루었으나, 이 무렵 이미 열심 한 신자였다.
1886년 연말, 본디 고관(승지---왕의 비서관)의 한사람으로 천주교 신자인 남종삼(南鍾三)이, 대원군에게 중대한 제안을 했다. 그 요지는---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천주교 전도를 허락하고, 신도를 보호하는 보장을 보이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부동항을 얻으려고 노리는 러시아를 격퇴해 줄 것입니다. 대원군께서 결단을 하시면, 베르네와 다블뤼 두선교사에게 상의하여, 북경주재 양국 공사라든지 동양함대 사령관을 설득하여 양국 군사력을 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런 것이었다.
쇄국하의 조선에도, 남종삼과 같이 일찍부터 서학을 연구하여 개화사상을 지니고, 언젠가는 개국의 때를 맞이할 것을 예측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위정척사론에 억눌려 일반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물론, 영, 불 두 나라에도 침략의 의도가 있다고 믿는 대원군은, 남종삼의 제안에 찬성할 이가 없다. 그러나 그는 이 안을 검토한데가가, 하여간 두 사람의 선교사를 만나보자고 답했다.
남종삼은 곧 준비에 착수했으나, 빠르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베르네 선교사가 지방 순회 중이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지만, 선교사가 정치문제에 관계하는 것에 의문을 가진 그가, 본국에 연락을 취하고 태도를 결정한 때문이었다.
약 10개월 후에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는 이민 늦어, 대원군은 이 지연을 이유로 회견을 거부했다. 그 무렵 국경지대의 러시아 병 퇴거 보고가 올라왔고, 청국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도 달라졌다. 더욱이 조 대왕대비나 영의정 조두순을 비롯하여 각료 일동의 의견이 천주교 탄압으로 굳어졌기 때문에, 대원군은 자기 세력의 유지를 위해서도 선교사와의 회견을 거부했다고 생각된다. 이리하여 그는 이듬해인 1866년 초, 천주교 대 박해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당시, 조선국내에 있었던 외국인 선교사는 12인이었고, 그 전부가 프랑스 인이었다. 그들을 비롯하여 남종삼, 홍봉주(洪鳳周) 등 조선인 전도사나 신자 다수를 체포하기 위해 포도대장 이경하(李景夏)의 지휘 하에 포졸들이 팔방으로 뛰었다. 이때의 난을 피한 외국인 선교사는 세 사람 뿐이었다.
먼저 베르네를 비롯한 4명의 외국인 선교사가, 노량진 사장의 형장에 끌려나왔다. 그들은 옥중에서 받은 고문 때문에 몹시 쇠약해져 있었으나, 유창한 조선어로 “일반신도들에게 관대하게 해 달라”고 호소하고, 최후의 기도를 바치고는, 태연하게 형을 받았다. 그 형은 2대의 우차(牛車)로 몸을 좌우로 찢는 참혹한 것이었다.
같은 날, 남종삼과 홍봉주 두 사람도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에 처했고, 수급(首級)은 서울 번화가에 내 걸었다. 학문에 열중하여 신앙심이 두터운 남종삼의 노부(老父)는 은거하는 곳에서 체포되어, 공주 옥에서 옥사했다. 조부와 같은 옥에 갇혀 있던 장남은 전주로 옮겨져, 15세 법적인 성년에 달한 1867년에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남종삼의 처와 두 딸, 특히 4살인 차남은, 각각 다른 곳에서 관비나 노복으로 팔리게 되었으나, 왕이 불쌍하게 여겨, 남겨진 세 아이는 모두 어머니의 유배지인 경상도 창녕(昌寧)현으로 흘러갔다. 어머니는 1875년에 여기에서 처형 되었으나, 3남매의 유아(遺兒)는 개항과 신앙의 자유시대의 물결에 구조되어 살아남았다.
다블뤼를 비롯한 4사람은, 왕비 민씨를 맞아들이는 식전과 시기가 겹쳤기 때문에, 서울에서 떨어진 곳에서 처형했다. 민비의 성혼식전은, 그녀의 미래를 암시하듯이, 전국에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올려졌다.
탄압은 거의 6개월에 걸쳐, 국내 여러 지역에서 계속되었다. 대원군의 복심인 포도대장 이경하가 타고난 잔학성을 발휘하여, 5가족을 1단위로 연대책임을 지우고, 밀고를 장려했다.(역자 주: 오가작통법)
또 일가권속, 근친일족을 섬멸하는 “절종단족(絶種斷族)의 형”이 실행된 것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이때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병인박해(丙寅迫害)라고 하는 이 천주교 탄압에서, 신자와 그 가족 32.000명 중에, 8.000명이 순교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대원군은 포도대장 이경하를 부추겨, 세계의 그리스도교 수난사 중에서도 최대 규모의 하나라고 하는, 대 탄압을 철저하게 수행했다. 그러나 그 반면, 그 부인의 애소에 응하여 외국인 선교사의 감형---구체적으로는 국외퇴거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또 그는, 탄압기간 중간 무렵에, 유아(幼兒)의 처형을 중시시키기도 했다.
대원군이 천주교도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가 부인의 신앙을 용인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아마도 긴 세월 불우했던 시절의 체험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의 대원군이, 「자기 세력의 유지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실히 결정한 것은, 가령 저항을 느껴도 그것을 억누르고 단행하는 그런 사내였다. 내가 다시 이것을 떠올린 것은 민비 살해 때 대원군의 심경을 생각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