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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h21.hani.co.kr/arti/COLUMN/44/5849.html
치외법권적 대전협정에서 SOFA까지… 끔찍한 주둔군 범죄의 토양은 어떻게 변해왔나
꽃다운 나이의 여중생 효순이와 미선이가 육중한 미군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지 벌써 두달이 되어간다. 온 나라가 월드컵 열풍에 뜨겁게 달아 대∼한민국을 외치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월드컵 4강이라는 자존심은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여지없이 무너진다. 누구 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들 비극이 아닐까만은, 가해자쪽이 뻔뻔스럽게 나올 때면 슬픔은 분노로 바뀐다. 어쩌면 단순한 교통사고에 의한 과실치사였을 수도 있는 이 사건이 국민적 관심을 끄는 사건으로 번진 데는, 그리고 가해자쪽인 주한미군이 뻔뻔스럽게 나온 데는 역사적·구조적 배경이 있다. 약칭으로는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또는 SOFA(Status of Forces Agreement), 정식명칭으로는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라는 아주 긴 이름의 협정이 그것이다.
왜 ‘조약’이 아니라 ‘협정’인가
이 협정은 흔히 한미행정협정이라고도 하는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명칭일지 모르나 우리 입장에서는 적절치 못한 이름이다. 미국에서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상원에서 출석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는 의회의 견제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정한 범위의 조약에 대해서는 행정협정 형태로 대통령의 책임만으로 체결하기도 하며, 이런 행태가 관행으로 인정되고 있다.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역시 그 범위 안에 속하는 것으로 미국에서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외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조약은 미국과 SOFA를 체결한 1966년 당시의 헌법 제56조에 국회의 동의가 필요한 조약으로 명시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미 간에 체결된 미군 지위협정은 단순한 행정협정이 아니라, 독립적인 기본조약이라는 것이 법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오랜 역사는 법적 지위를 기준으로 크게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1945년 9월8일 미군이 첫발을 들여놓은 날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48년 8월15일까지는 미군이 점령군으로 이 땅에 미군정을 실시한 시기다. 이 기간에 미군은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았고, 현재 논란이 되는 형사재판에 관한 관할권 같은 것은 거론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미군이 한국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미군 법정에서 영어로 재판을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다음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49년 6월30일 미군이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철수할 때까지는 미군의 지위가 48년 8월24일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에 의해 규정된 시기다. 이 협정은 본문이 5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뒤의 SOFA보다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미군, 군속 및 가족들에 대한 전속적 관할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내용은 아주 강력하고 불평등한 것이었다.
셋째,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50년 7월1일 미군 스미스 부대가 부산에 도착한 이래 67년 2월9일 SOFA가 발효될 때까지의 시기는 50년 7월12일 체결된 이른바 대전협정, 즉 ‘주한미군 군대의 형사재판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협정’과 52년 5월24일에 체결된 한미경제조정협정(마이어협정)이 미군의 지위와 미군과 한국 정부, 한국민의 관계를 뒷받침하던 시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67년부터는 SOFA가 주한미군의 지위를 규정하고 있다.
로마에 가도 내 법대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른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주한미군에게 이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매우 불평등한 조약이지만, 67년에 SOFA가 발효되기 이전의 미군에게는 더 더욱 그랬다. 한국전쟁 초기의 다급한 상황에서 체결된 대전협정은 미군 범죄의 종류와 장소 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미군 당국에 형사재판권을 부여했다. 아무리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대전협정은 형사주권을 여지없이 포기했다는 점에서 독립국가가 맺을 수 있는 협정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 협정은 한국인이 미군 또는 그 구성원에 대해 가해행위를 했을 때는 그 한국인을 미군이 구속하는 것을 인정했다. 대전협정은 헌법이 정한 법관에 의해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조약으로 박탈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국회의 비준과 동의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 명백히 헌법을 위반한 협정이다.
미군에 의한 범죄를 한국 법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미국 군법회의에서 재판받도록 한 것은 제국주의 시대 치외법권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조치였다. 치외법권이란 한 나라의 국민이 다른 나라에 거주할 때 두 나라 간의 조약에 의해 주재국의 영토 안에서 주재국의 법령에 복종하지 않고 본국의 법령에 복종하는 특권을 말한다. ‘문명국’ 출신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지로 삼고자 눈독을 들인 ‘야만국’의 법률과 관습을 철저히 무시했다. 문명국 국민인 백인들이 ‘미개인’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그 범죄에 대한 판단은 문명국의 법정에서 문명국의 법률에 의해 재판을 해야지 절대로 ‘야만국’의 법률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에 열강들이 약소국과 맺은 여러 불평등조약에서 가장 핵심적 내용이 이 치외법권, 또는 형사재판권이었다. 전시라는 다급한 상황에서 체결된 대전협정은 주한미군에게 치외법권을 연상케 하는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53년 7월 정전을 맞으면서 이승만 정권은 정전협정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미국에게서 약속받았다. 그해 8월7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가조인을 하면서 채택된 이승만과 미 국무장관 덜레스 간의 공동성명은 양국이 상호방위조약 효력 발생 직후 미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전시에 맺은 불평등한 대전협정을 정전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걸맞은 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시도는 미국쪽의 무성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54년 후반 미국에 행정협정 체결을 요구한 데 이어, 다음해 4월 행정협정 체결을 위해 초안을 작성해 미국에 전달하면서 교섭의 개시를 촉구했고, 57년 9월에도 다시 한번 협상을 촉구했으나 미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국쪽은 휴전은 했지만 한반도는 기술상 전시상태라고 고집했다. 미국은 한국의 법질서와 그 운영에 대한 불신과 한국의 정치 질서의 불안정성 등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웠지만, 이미 습성화된 특권적 지위 때문에 주둔국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려는 교섭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군부는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교섭문제가 나오면 미군의 전시특권을 빼앗기고 미군에 대한 한국의 재판권을 인정하느니 주한미군을 철수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무부는 미 대사관에 형사재판권 문제를 제기하는 어떠한 협상도 피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미국이 처음으로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의 체결이 가능하다고 밝힌 것은 58년 1월23일 주한 미 대사 다울링의 성명을 통해서였다. 미국이 마지못해 교섭에 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 실제로 교섭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은 주한미군의 범죄행각에 대한 비등하는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여론에 불을 지핀 것은 이른바 양주(楊洲) 열차강도사건이었다.
57년 4월12일 밤 인천에서 미군 PX용 물품을 가득 싣고 인천에서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으로 가던 군용열차가 의정부와 덕정 사이 고갯길에서 갑자기 멈췄다. 열차에서 누군가가 손전등으로 신호를 보내자 9명의 한국 민간인이 열차로 달려가 산소 용접기로 문을 절단하고 양담배 24상자를 들어냈다. 이때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3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나머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총에 맞은 1명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 사건은 뜻밖의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 경찰이 최초로 미군을 심문한 계기가 되었다. 체포된 범인들에 대한 심문과정에서 범인들은 이 사건이 범인들에게 발포한 윌슨 상사와 공모한 일이었다고 털어놓았고, 정차한 열차에서 손전등으로 신호한 사람도 바로 윌슨 상사였다고 자백했다. 범인들은 윌슨과 범행을 모의할 때 화차의 문고리를 교묘히 따서 증거를 남기지 않기로 했으나 산소 용접기로 절단하여 흔적이 남자, 경비 책임자인 윌슨이 책임을 모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공모사실 은폐를 위해 범인들에게 총을 쏜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쪽은 윌슨이 범인들과 사전에 만나고 손전등으로 신호한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이는 범인 일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함정수사였다는 것이다.
구두닦이 김춘일군 린치사건
그런데 총을 맞은 세 사람은 바로 윌슨과 공모한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들은 윌슨의 공모사실을 모르는 단순 가담자들이었다. 윌슨이 공모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살해하려 했다는 한국인들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의 파장이 커지자 한국 각료와 주한미군 수뇌부의 회담을 거쳐 미군은 한국 검찰의 윌슨에 대한 한국쪽의 조사에 동의해, 5월6일 미8군 장교구락부에서 한국 검사에 의해 심문이 시작되었다. 한국쪽은 윌슨의 사전 공모에 대한 심증을 굳혔으나, 윌슨을 기소할 수는 없었다. 대신 한국 정부는 윌슨을 절도사건의 공범이자 살인범으로 규정한 기소장 사본만 미군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 사건에 뒤이어 크고 작은 미군 범죄가 꼬리를 무는 가운데 다울링의 성명이 나왔는데, 그 직후에 김춘일군 린치사건이라는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58년 2월25일 아침 의정부의 미군 1군단 헬기장에 비행기 부속품 상자가 도착했다. 상자를 내리던 카투사들은 상자 속에서 들려나오는 비명소리에 놀라 상자를 뜯어보았다. 그러자 얼굴에 콜타르를 뒤집어쓴 채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한 소년이 나왔다. 그는 그날 새벽 부평의 미공군 정비창 하사관 숙소에 물건을 훔치러 간 열네살의 구두닦이 소년 김춘일이었다. 토머스 제임스 소령과 마빈 캠프 대위 등 미군들은 김춘일을 붙잡아 다섯 시간 동안 사정없이 몽둥이로 때리고 발길로 걷어차고, 칼로 양쪽 무릎과 팔을 찌르고는 머리도 자르고 얼굴에 콜타르를 부은 뒤 비행기 부속품 운반용 상자에 넣고 못질한 뒤 의정부 1군단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전신주에 거꾸로 매달아 가혹한 매질
역설적인 일이지만, 피해자가 살해당한 사건보다도 피해자가 살아서 미군의 만행을 증언하거나 만행 증거가 사진으로 공개될 때 더 큰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 사건의 대표적 예가 60년 1월2일 발생한 동두천 여인 삭발사건이다. 이날 새벽 동두천의 두 여인은 전부터 알고 지낸 미군을 만나기 위해 7사단 탱크대대 철조망 구멍을 통해 영내로 들어갔다. 두 여인은 막사로 들어가 자기가 알고 지내던 미군을 깨웠으나 어둠 속에서 사람을 잘못 보아 다른 사람을 깨웠다. 그 미군은 두 여인을 붙잡고는 동료들을 깨웠고, 10여명의 미군이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두 여인을 에워싸고 희롱하기 시작했다. 보고를 받고 달려온 중대장 메케네리는 한 하사관과 함께 가위와 전기 이발기로 두 여인의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다. 미군들은 청소용 빗자루로 여인들의 머리를 쓸어대며 손뼉을 치고 괴성을 질러댔다.
미군 부대에 무단잠입한 것은 여인들의 잘못이었지만, 이런 만행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대전협정에 미군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한국인을 미군이 체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조항이 이런 만행이나 사형(私刑)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자주 일어난 각종 린치사건이 이 조항과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미군 대변인은 “서방세계에는 부대를 따라다니는 자들을 삭발로 벌하는 오랜 전통이 있다”는 망언으로 미군의 만행을 두둔하기도 했다.
이런 충격적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미국은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의 교섭에 응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교섭이 처음 이뤄진 것은 4·19혁명 이후인 61년 4월10일의 일이다. 다울링의 성명에서 첫 교섭이 이뤄지기까지 3년 동안에도 어김없이 미군의 탈선과 만행이 자행되었고, 국회는 두 차례에 걸쳐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해 행정협정 체결을 촉구하였다. 그렇지만 미국이 교섭에 응한 것은 4·19혁명에 이어 61년 초 미국과의 경제협정 등을 둘러싸고 민족주의와 반미감정이 고조된 뒤의 일이다. 특히 60년 말 전국미군종업원노조에서 추진한 한미행정협정을 촉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이 여론의 지지를 받자 미국으로서도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61년 4월17일에 처음 열린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체결을 위한 교섭은 곧이은 5ㆍ16군사반란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협상은 중단되었지만, 미군 범죄는 끊이지 않았다. 62년 전반기는 전 세계적인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미군에 의한 총격사건·린치사건 등에 대한 비판여론이 끓어올랐다. 특히 1월6일 일어난 파주 나무꾼 사살사건은 큰 충격을 주었다. 애초 미군은 비무장지대에 들어온 나무꾼 2명이 순찰병의 정지명령을 어기고 도주하다가 사살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진상은 달랐다. 이들이 살해당한 장소는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미군 부대 주변 출입금지 구역이었고, 칼빈이나 M1 같은 군용무기가 아니라 사냥용 산탄총을 맞고 살해당했으며, 더구나 피살자 가운데 1명은 나체상태에서 총을 맞았다. 그들의 몸은 산탄총에 맞아 벌집이 되었지만, 한 피살자의 옷에서는 바늘구멍도 없었고,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이어 2월12일에는 미군 초병이 무단침입자를 사살한 사건, 2월24일에는 미군에 폭행당한 임산부가 낙태하는 사건을 비롯한 많은 사건들이 신문에 보도되었고, 5월29일에는 미군 장교가 부대 안의 한인 종업원을 모아놓고 절도혐의자를 전신주에 거꾸로 매달아 가혹한 매질을 한 파주린치사건이 일어났다.
유엔군 사령관의 이례적 사과
이 당시는 5ㆍ16군사반란 이후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었음에도 학생들의 항의시위가 이어졌다. 62년 6월6일 고려대생 2천여명은 “한미행정협정 체결하라”, “린치사건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자 엄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걸고 데모를 벌였고, 6월8일에는 서울대생 1천여명이 같은 구호에 “고대생 석방하라”는 내용을 추가해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국민적 지지를 받자 미국도 긴장했다. 매우 이례적으로 유엔군 사령관이 미안하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국무성도 유감의 뜻을 표명한 뒤 백악관에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과 관련한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박정희도 계엄상황이었지만, 이번만은 관대히 처분한다면서 구속된 학생 전원의 석방을 지시했다. 군사정부는 성명을 발표해 행정협정 체결 교섭이 지연되는 것은 미국이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해온 때문이라고 이례적으로 미국을 비판했다. 유독 <조선일보>만이 “쥐을 잡으려다가 독을 깨서는 아니된다”는 사설을 게재해 미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데모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6월15일 마침내 미국은 조건부로 협상 재개에 동의했다. 협상은 지금 시작하지만, 협상 체결은 합헌적인 민정이 수립된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군사정부가 이를 수락해 62년 9월 20일 17개월 만에 실무자회의 협상이 재개되었고, 65년 5월18일 박정희 방미를 앞두고 초안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초안은 모든 1차재판 관할권을 미국쪽에 넘겨주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초안의 일부 내용이 알려지면서, 학생들과 미군기지 노동자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정부는 재협상을 통해 초안의 굴욕적인 조항을 수정했다. 협상이 마무리된 것은 66년 7월8일로, 한국 정부가 처음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체결을 촉구한 지 13년 만의 일이었고, 실무자 교섭이 시작된 후 3년9개월간 82회의 공식회의와 많은 비공식회의를 거친 뒤의 일이었다.
7월9일 조인된 SOFA는 10월14일 국회의 동의를 거쳐 67년 2월9일에 발효되었다. 이때 체결된 SOFA는 31개조의 방대한 분량에 합의의사록·합의양해사항·교환서한 등 3건의 부속문서가 딸려 있다. 본협정은 외형상 나토군 지위에 관한 런던협정 등과 비교해볼 때 큰 차이가 없으며, 대전협정에 비하면 많이 진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본협정과 같은 효력을 갖는 3개 부속문서가 큰 문제였다. 사실상 본협정의 내용을 뒤엎는 자동포기조항을 통해 미군의 형사재판권에 대한 실질적인 관할권을 보장해주는 등 불평등한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SOFA는 체결당시부터 명분만 살린 불평등협정 또는 껍데기협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파병의 대가로 ‘무법천지’를 잠재우다
65년의 초안에서 미군에게 완전히 보장해준 재판관할권이 형식적이나마 한국쪽에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학생 등의 시위도 영향을 끼쳤지만,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미국이 선심을 쓴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입장에서 볼 때 SOFA는 엄청난 불평등조약이지만, 베트남 파병의 피의 대가로 미군의 ‘무법천지’를 적어도 외형상으로나마 끝낼 수 있었다. 미군 범죄는 67년 이후 해마다 적을 때는 1100여건, 많을 때는 2300여건이 일어났는데, 67년 이전에는 통계조차 없다. 다만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SOFA 채택 이후 미군 범죄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하니 미군 범죄가 그동안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힘겹게 마련된 SOFA는 그 뒤 35년간 두 차례 개정되었을 뿐이다. 80년대 이후 반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미국도 SOFA의 개정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91년의 개정에서는 본협정과 합의의사록은 전혀 손대지 않은 채, 합의양해사항과 교환서환을 폐기하는 대신, 두개의 부속문서를 대체하는 양해사항을 새로 채택했다. 대신 주한미군의 주둔비를 방위비 분담이라는 명목하에 한국에 물리기 시작했다. 2001년의 개정도 매우 미흡한 수준이었다. 67년의 SOFA 5조 1항은 “합중국 군대의 유지에 따르는 모든 경비는 합중국이 부담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한국의 방위비 분담으로 이 조항은 사문화된 것이다. 미군기지에 대한 무상지원, 카투사 등 인력 및 군수지원비, 기지이전비 등을 포함할 경우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되는 주한미군 주둔비용은 92년 25.4억달러, 93년 24.1억달러로 주한미군 주둔비의 78%를 우리가 부담하는 것이다. 이는 일본이 76%, 독일이 33%, 나토 회원국들이 25%를 분담하는 것과 비교할 때 세계 최고다. 필리핀이 미군기지 사용료를 받는 것과 비교하면, 그리고 쥐꼬리만한 대북지원과 비교하면 ‘퍼주기’도 이런 ‘퍼주기’가 없다. 게다가 미국의 무기강매는 ‘퍼가기’ 수준이다.
SOFA에 관해서 일반인들에게는 주로 형사재판권 문제가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환경, 노동, 재산권, 민사, 여성 및 아동인권 등 어느 것 하나 문제가 아닌 곳이 없다. 형사재판권이 국가와 국가 간의 주권에 관한 문제라면, 다른 항목들은 국민 개개인의 인권과 재산권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국가가 만만하게 보이는데 그 국가의 국민이 입은 인권침해나 민사상의 피해가 미군 눈에 제대로 보일 리 없다. 더 큰 문제는 SOFA의 근거가 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이제까지 한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주둔의 목적규정이 결여되어 있고, 무상주병권이 인정되고 있으며, 미군 철수에 관한 협의규정도 없고, 조약의 시효가 무기한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미군에게 무상·무기한으로 우리 영토를 내주는 것은 SOFA의 어떤 조항보다도 한국의 주권을 가장 심각하게 침해하는 조항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전면적 재검토 없이 그 부속협정에 지나지 않는 SOFA의 어떠한 개정도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효순이, 미선이 두 소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가 거세게 일자, 미국은 뒤늦게 국무장관까지 나서 유감과 사과를 표하고 있다. 95년 오키나와에서 초등학생이 미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했을 때 10만명이 모여 항의집회를 열어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와 일본 SOFA의 개정을 끌어냈다. 미국은 이렇게 일이 커져야만 SOFA를 바꿀 생각을 하는 정녕 그런 천박한 나라인가?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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