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방
신철규
끈적거리는 햇빛
빛이 뿌린 온기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것들
방에 크고 작은 벌레가 기어다닌다
다리가 여섯 개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도 있다
벌레에겐 모든 곳이 수평이다
위로 기어오를 때는 무거운 길이 있고
아래로 내려갈 때는 미끄러지는 길이 있을 뿐
무당벌레가 모니터 모서리를 타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붉은 색 바탕에 검은 점
날개를 접으면 둥글둥글한 몸통
더듬이로 끊임없이 자기 앞을 탐지하면서
벌레도 눈이 있나?
눈이 감겨서 못 뜨나?
나는 벌레를 싫어한다
어떤 작은 벌레도 소리를 낸다
스스스스 사사사삭
갑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내장 기관들이 있다
다행히 뇌는 없다
물컹한 벌레와 단단한 벌레
물컹한 마음이 단단한 마음이 될 때까지
벌레를 터뜨려 죽이면 검은 빛깔의 액체와 약간의 붉은 피가 새어나온다
내가 네 마음을 짓이겼을 때도 그와 같은 것이 새어나왔을까
네가 내 말을 질겅질겅 씹었을 때도
죽은 벌레들을,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벌레들을
방구석으로 쓸어버린다
아직도 옴직거리는 것들이 있다
미세하게 다리를 허공에 젓거나
희미하게 날개짓을 하거나
가늘게 꿈틀거리거나
세화
우리는 끝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
흐린 수평선에 걸린 구름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서 죽은 물
하얗게 누운 비석
외계에서 온 사람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이 되어
서로 먼저 등을 돌리라고 재촉한다
뒷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
뒷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우리는 난민이 될 수 있을까
마음속에 일어난 난을 피해 우리는 어디로 망명해야 할까
어디까지 망가질지 몰라 두려운 사람들이 선을 긋는다
감은 눈 속에서 다시 한 번 눈을 감고
눈 속의 눈을 감고
입속에 갇힌 수백 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런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
해변을 걷다 보면 다시 또 여기로 오겠지
여긴 벗어날 수 없는 한 덩어리의 땅이니까
아이들은 모래사장에 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린다
두고 온 집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윤곽만 남은 얼굴들을
성급하게 식은 용암은 구멍이 많은 돌이 되고
몸보다 앞서간 말들은 툭툭 끊기고
부러진 늑골 같은 구름들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기어온 매캐하고 검은 연기를 피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해변으로 끌려왔다
그들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육지일까 바다일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우리만 볼 수 있는 어떤 빛
해변과 수평선 사이에 당신을 오래 세워두고 싶다
무지갯빛 슬리퍼 한 짝이 파도의 끄트머리에 걸려 밀려왔다 밀려간다
* 앤서니 도어의 소설 제목. - 『심장보다 높이』
속수무책
― 불편한 말들과 침묵의 시
새해가 시작되고 여러 일이 겹쳐서 일어났다. 서울 톨게이트 근처에서 추돌 사고가 일어나 병원에 며칠 입원을 했고 그와 함께 코로나까지 걸려서 2주 넘게 고생을 했다. 육체적인 통증은 거의 사라졌고 코로나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는 잔기침과 가래도 많이 가라앉았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밀린 원고들을 쓰고 있다.
사고가 나는 순간을 복기해본다. 대개의 톨게이트 상황이 그렇듯 들어가려는 차는 많고 진입로는 한정되어 있으니 차들이 서행하기 마련이다. 일요일이어서 지방을 갔다 오거나 행락객들이 많아 서울에 가까워지면서 정체되는 구간이 곳곳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톨게이트 앞에서 앞차의 브레이크등이 들어오면서 비상등이 켜졌고 다급한 상황까지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아슬아슬하게 앞차 뒤에 멈춰 섰다. 순간적으로 후방 거울을 보니 뒤차가 따라붙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 사고 나겠는데, 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쿵, 하는 충돌음이 들렸고 내 바로 뒤에 있는 차가 내 차를 박는 충격에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아주 센 충격은 아니었지만 아찔하기는 했다. 이렇게 사고가 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동안은 멍한 채로 차 안에 가만히 있었다. 곧이어 요란한 경고음을 울리며 견인차가 사고 주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내 차 앞에도 견인차 하나가 내 차를 견인하기 위해 후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견인차 차주가 경광봉을 들고 내려서 뒤따르는 차들이 우회하게 하는 것을 보고서는 이제는 안심해도 되겠다 싶어 차에서 내렸다. 사중 추돌이었다. 충격음이 두 번 들린 것으로 보건대 제일 마지막 차가 들이받으면서 연쇄 추돌로 이어진 상황이라는 것이 짐작이 갔다. 톨게이트 앞 도로가 약간 언덕 구간을 거쳐서 내려오는 형태를 보였는데 마지막 차는 앞의 정체 상황을 언덕 구간을 지나 갑작스럽게 맞닥뜨리면서 피할 수 없이 낸 사고였던 것으로 보였다. 세 번째 차에 탄 여성분은 사고 충격 때문인지 허리를 구부린 채 등 뒤로 손을 받치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하얗게 질린 채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톨게이트가 가까운 곳이어서 이내 사고 차들은 톨게이트를 지나 갓길의 여유 공간에 모여들었다. 차주들은 내려서 차의 망가진 부분을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행히 내 차는 제일 앞차여서 파손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고 범퍼가 뒤틀리고 부서졌으며 트렁크 문짝이 살짝 일그러진 것이 다였다.
마흔 무렵, 꿈에 종종 교통사고가 나는 꿈을 꾸었다. 꿈의 패턴은 일정했다. 내가 운전하면서 가는데 꿈속에서 졸음 때문인지 실신에 가까울 정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순간순간 의식을 잃으면서 차가 제멋대로 간다. 차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앞에 있는 차나 벽에 가 부딪힌다. 이대로 가다가는 사고가 나기 빤한데도 나는 어찌할 수가 없다. 심지어 브레이크를 아무리 밟아도 스펀지를 밟은 듯 제동이 되지 않는다. 느린 속도로 가다가 결국 부딪히면서 꿈은 마무리된다. 심지어 어떤 꿈에서는 내가 차에서 내렸는데 차가 슬슬 기어가서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결국 사고는 나고 마는 꿈을 꾸기도 했다.
요즘의 나의 시는 나와 너무 가깝다. 거기에 쓰여 있는 말들은 나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 더 걸러지지 않은 날것의 발화들과 정제되지 못한 이미지들이 넘쳐 있다. 요리를 못 하는 사람들이 재료에서 우러난 맛을 못 살리고 간장과 설탕, 고춧가루, 그리고 조미료로 맛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것 같은 시를 쓰고 있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다.
말라르메에게 쓰는 행위는 어떤 극단적 상태로 주체와 언어를 밀어붙이는 것이며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무’라는 심연이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정도까지 시구를 파들어가면서, 나를 절망하게 하는 두 심연과 맞닥뜨렸다오. 하나는 무(, Néant)인데, 불교를 잘 모르면서도 나는 거기에 도달했지요. 아직도 너무 침통한 상태라서 나는 내 시를 믿을 수 없으며, 이 생각에 짓눌려 포기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군요.
시적 언어는 의미가 텅 빈말,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하지 못한 한계에서 비롯된다. 어떤 완벽한 하나의 시구를 찾아내고 뚫고 들어가는 작업은 단순히 정합적인 언어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절대적인 세계의 창조에 이르는 것이며, 그 언어가 절대적인 세계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시구詩句를 파는 자는 죽어 가고, 심연과도 같은 자신의 죽음을 만난다.”
모든 언어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맥락과 역사적 시간의 축적에 의해 변형되면서 관용적 표현으로 귀결됨으로써 방언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단일성은 불가능하다. 또한 언어는 사물의 실체에 가닿을 수 없으며 그 효과로 암시할 수 있을 뿐이다. 지시성과 재현에서 벗어난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침묵으로 돌아가는 말이기도 하다. 순수함 또는 무 그 자체인 말은 유용성과 무관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 바로 침묵 덕분에 언어 속에서 존재들이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베일에 가려져 있기에 익숙한 것이라는 환영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멀고 낯설고 기이한 것이다. 언어는 순수한 매개(수단)가 아니다.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진 즉각적인 것의 환영과 보증을 제공하는 일상적인 언어와 달리 존재와의 결별이 현실화한 세계를 만들겠다는 결단을 보여 주는 침묵의 움직임인 사유의 말은 본질적 언어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언어는 순수 관념에 도달한다는 측면에서 투명하며, 그 물질성이 극대화되어 하나의 울림이 된다는 측면에서 불투명하다. 그것은 언어의 지시성을 최소화함으로써 사물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자신을 얇게 만드는 것이며, 그 자체의 순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측면에서 자신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라르메가 추구했던 절대적인 순수 언어이다.
하지만 블랑쇼에 따르면, 시적인 말은 일상적 언어뿐만 아니라 사유의 언어와도 대립한다. 시적인 말속에서 존재들은 침묵한다. 다시 말해, 말이 곧 존재이며 존재이다. 이러한 말은 죽음처럼 순수 현전과 순수 부재, 사라짐이 사라짐의 상태와 겹치는 지점,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상태로서의 언어를 가리킨다. 그것의 발화 방식은 언어의 유한성과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며 사물과 관념 사이에서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과 육체에 동시적으로 작동하면서 감성과 지성의 완벽한 결합에 이르는 ‘순수 관념’을 창조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바깥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를 통한, 이러한 언어를 찾는 글쓰기는 ‘지워지는 글쓰기’이며, ‘침묵의 글쓰기’이다. 그것은 텅 빈 중심에서 울려 퍼지는 침묵의 부름을 듣는 것이다. 이때 시는 우연이 배제된 ‘강력한 언어의 건축물’이 된다. 작품이 존재가 될 때 언어는 총체적으로 실현된다.
요즘 내 시들의 말은 너무 안쪽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것 같다. 말이 말로서 풀려나오는 자리를 바깥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안쪽에서만 맴돌고 있으니 말이 힘을 갖지 못하는 느낌이다. 내 말이 나를 떠나 헛돌고 있거나 아무리 내가 막으려고 해도 제멋대로 가버린다. 사유와 정신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데 대충 봉합해버린다. 속수무책이다.
아프고 몸이 힘들어서 그간 미뤄두었던 책들을 읽을 시간이 생겼다. 15년 동안 열 번 넘는 시행착오 끝에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다 읽었다. 이 정도가 이번 겨울에 기록할 만한 성과라서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