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대 산책길
방학에 들면서 한 달여 근교 산행이나 산책 가 볼만 한 곳을 여럿 메모해 두었다. 대개 집에서 시내버스나 농어촌버스를 환승해 목적지로 가는 정도였다. 일월 중순 화요일은 생활권과 좀 떨어진 부산 용호동 이기대 해안선 산책길을 떠나려고 길을 나섰다. 언제나 혼자였는데 - 사실 야외에선 혼자가 아닌 낮이면 내 그림자가 늘 곁을 같이 따라붙음 - 동행이 있어 함께 가게 되었다.
가끔 교류가 있는 대학 후배였다. 그는 함안 칠원 살면서 창녕 어느 학교에 근무하였다. 오래 전부터 연락이 오길 산행을 한 번 같이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해발고도가 높은 산비탈을 오르려면 무릎에 무리가 올까 봐 산행보다 산책을 가자면서 행선지와 교통편을 미리 알려주었다. 순천에서 포항으로 가는 무궁화호를 그는 창원역에서 출발하게 하고 나는 중앙역에서 탈 것이라 했다.
후배는 그와 통하는 퇴직 선배를 한 분 더 모셔 출발한다고 했다. 단 둘이 길을 나서는가 싶었는데 한 사람이 더 늘고 말았다. 평일 열차여서 승객이 혼잡하지 않아 빈 좌석이 더러 보였다. 진영을 지나면서 후배는 초면인 퇴직 선배를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새로이 사람을 사귀는 게 부담으로 와 닿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탄 열차는 낙동강을 건너갔다.
후배의 청이 없었다면 혼자 이기대 해안 산책길을 걸을 셈이었는데 판이 커지고 말았다. 삼랑진에서 원동을 지나는 낙동강 강변은 열차를 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아도 무척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나는 그런 강변을 걸어서도 몇 차례 오르내려 주변 지형지물이 익숙했다. 우리가 탄 열차가 사상에서 부전을 지나 수영역에 이르렀을 때 내렸다. 그곳서 택시로 동생말 이기대 입구로 갔다.
이기대 해안 산책로는 부산 갈맷길 한 구간이었다. 나는 차량에 동승해 빙글 둘러보기는 두 차례였어도 산책로 탐방은 처음이었다. ‘이기대(二妓臺)’는 진주 남강 의암처럼 임진왜란 때 승전 연회에 붙들린 두 기생이 왜장을 껴안고 바다로 뛰어들었다는 얘기가 전한다만 논개 전설 같은 구체성은 결여된 면이 없잖아 있다. 오래전 해안 군사시설구역에서 해제되어 일반인에 개방되었다.
나는 지난해 정초 해운대 송정에서 청사포 폐선 철길을 걸은 바 있다. 영도 해안선을 걸어 송도를 거쳐 자갈치까지도 걸어보았다. 을숙도에서 다대포까지도 걸었다. 그렇지만 이기대 해안선 산책은 처음이었다. 아마 번잡한 도심을 거치지 않은 부산 외곽이었으면 진작 찾았을지도 모른다. 탁 트인 반도 동남쪽 바다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뚫어 주는 듯했다. 후배 몇 차례 찾았다고 했다.
후배는 붙임성이 좋아 낯선 산책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하고 찍어 달라고도 했다. 가던 길에서 되돌아보니 광안대교와 동백섬 주변 마천루처럼 높이 솟은 초고층 아파트가 그림 같았다. 수평선에는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어로작업 배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미포에서 오륙도를 두르는 유람선이 오갔다. 더 가까이 갯바위로는 철석거리며 밀려온 파도는 하얀 거품이 되어 부서졌다.
해식해안엔 바위 형상을 딴 ‘치마바위’와 ‘농바위’ 등의 쉼터가 있었다. 해안선 따라 데크와 출렁다리는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했다. 평일이어서인지 산책길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부산 사람들보다 서울이나 안양 등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이르자 대만에서 온 여학생들도 보였다. 두 시간 남짓 걸려 오륙도 앞에 닿았다. 저만치 영도 태종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세 사람은 점심 자리를 찾아 시내로 이동했다. 난 자갈치로 가 생선구이를 들고 싶었으나 후배는 생각이 달랐다. 부전시장으로 가면 돼지국밥집을 하는 고향 친구가 있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니 늦은 점심을 드는 손님들이 더러 있었다. 이태 전 평교사로 정년을 맞은 분은 영혼이 참 맑았다. 사회 변혁과 환경 운동에도 많은 관심을 가진 영원한 현역이었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언이라. 17.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