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이차돈
석대각(釋大覺 : 1055~1101)
천 리 길 돌아와 사당에 문안드리니
청산에 홀로 서서 몇 봄을 지냈는가?
만약 말세를 만나 불법을 행하기 어려우면
나 또한 임처럼 몸을 아끼지 않으리
厭觸舍人廟(염촉사인묘)
千里歸來問舍人(천리귀래문사인) 靑山獨立幾經春(청산독립기경춘)
若逢末世難行法(약봉말세난행법) 我亦如君不惜身(아역여군불석신)
[어휘풀이]
-厭觸舍人廟(염촉사인묘) : 염촉사인의 사당. 厭觸(염촉)은 신라의 불교 순교자 이차돈(異次頓:503~527)의 자(字)이다. 성은 박씨이며 갈문왕(葛文王)의 손자로 법흥왕과는 5촌이 되는 왕족이라고 한다. 사인(舍人)은 벼슬 이름이다.
-靑山獨立(청산독립) : 염촉사인의 사당이 청산에 우뚝 선 모습
[역사 이야기]
석대각(釋大覺)은 대각국사(大覺國師). 자는 의천이며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다. 고려불교의 융합을 실현하였으며 한국 불교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신라 법흥왕 때의 일로 왕이 불도(佛道)를 파려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봉착했다. 그때 이차돈이 나기를 참형하여 분분한 반대를 진정시키라고 아뢰었다. 임금은 “내 본시 불고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어찌 사람을 죽이겠는가?”라고 반대하였다. 그 후 왕은 다시 군신을 모아 불교를 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물었으나 여전히 반대했다. 그러자 왕은 이차돈(異次頓)에게 말하기를 “모두가 반대하는데 어찌 너 혼자 다른 주장을 하느냐?” 하고 그를 참형했다. 이차돈은 내 죽음에는 반드시 기이(奇異)한 일이 있을 것이라 예언했는데, 과연 그를 참하자 젖같은 흰 피가 한자나 높이 용솟음쳤다. 이를 본 군신들이 모두 놀라 불교에 대한 반대가 없어졌다고 한다.(『삼국사기』)
-신라 불교의 전례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불교 수용이 무려 150년이나 늦었다. 신라에도 이차돈의 순교 이전부터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귀족 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당초 6개의 부족이 모여 나라를 이룬 신라는 각 부족 출신과 이를 이끄는 귀족들이 건국 당시의 민간신앙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에게도 무격신앙(巫覡信仰)이 뿌리를 내렸다.
특히 귀족들이 민간 토착신앙의 토대인 천신과 지신을 자기들의 직계 조상으로 섬기며 굳건한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선진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면 자신의 존립 기반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차돈이 절을 지으려고 했던 천경림(天鏡林)은 천신이 내려와 자신과 결합한 장소로 믿어 백성들이 신성시하던 곳이었다. 반면 국왕으로서는 토착신앙에 뿌리를 둔 귀족 세력의 기득권을 누르지 않고는 고대국가 체제의 정착과 효율적인 통치 행위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토 확장과 여러 제도의 정비로 신라 사회가 기존의 민간신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급속한 변화를 겪자, 이를 헤쳐 나갈 새로운 사상에 대한 갈증이 컸다. 법흥왕이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미리 이차돈과 이을 도모했다는 기록이 이와 같은 시대 분위기를 방증한다. 이차돈이 순교한 뒤 법흥왕은 천경림에 흥륜사를 짓고 진흥왕(재위 540~576)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스스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가 공인되자 신라에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통치 이데올로기가 확립되었고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불국토가 된다. 모든 부족은 부처님의 제자라는 인식이 퍼져나갔다. 국왕은 귀족세력이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권력을 가진 자가 되었고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은 불교의 내세관과 윤회설로 큰 위안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