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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공심돈을 찾은 중국관광객들, 꽤 많은 어린이들도 부모들과 성곽을 둘러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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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공심돈을 가까이서 본 모습 지붕이 잘 보이지 않는다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蒼龍門)의 북쪽,
동북노대(東北弩臺)의 서북쪽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군사시설로
비교적 너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맨 위에 올라서면 화성 전체의 모습이 훤히 보일 정도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이전에는 없던 형태와 재료로 기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도면에 따라서 다시 중건된 것이다.
외부는 구워만든 벽돌로 둘러싸고,
내부는 돌음계단으로 돌아서 올라가면 맨 위에 한옥으로 된 망대에 오를 수 있으며,
외벽의 벽 위에서는 군데군데 망을 볼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또한 총도 쏠 수 있는 구멍들이 뚫려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기획에 의하여 정약용이 총감독으로 세워진 근세 조선의 특이한 형태의 성곽이다.
화성은 이전에 한국에 있던 성곽들과는 판이하게 성곽의 주변에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외곽을 감싼 돈대와 포루, 암문, 노대, 공심돈 등의 망루와 포대 등을 지었다.
이는 당시 중국에 있던 성벽이나 서양의 요새들을 차용하고,
또한 전래되어오던 우리의 전통 석축기법의 축성기법을 합성하여 좋은 점들만을 모아서 쌓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특이한 형태의 성이 공사를 시작한지
단 2년 만에 자연지형을 이용한 4.5km의 성곽과 관아와 행궁
그리고 성안에 살아갈 백성들의 민가들까지 모두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 경이적인 일이었다.
요즈음 최신 기법과 최신 기계들을 동원하고도
하나의 신도시를 만드는데는 적어도 5년의 기간은 필요한 것이 오늘의 현실임에 견주면 말이다.
이 공사를 책임졌던 공사감독 정약용은
당시 주로 간단한 도구와 인력만으로 하던 공사에 자신이 책에서 보았던 기계들에서
그 원리를 따다가 거중기등을 고안하여 무거운 돌들을 쉽게 들어올려 높은 성벽에 큰 돌들을 쌓기도 하였으며,
또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에게는 무상 노역을 시킨 것이 아니라,
농한기를 이용하여 유휴도동력에 충분한 품값을 주고서 공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백성들로서는 좋은 일자리였던 셈이다.
그러니 공사에 참여한 백성들도 불평불만이 없이 신이나서 열심히 일을 한 덕에
한 번도 해보지도 않은 거대한 공사를 단 2년만에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유가 다른데 있다.
화성은 세워진 연대로 볼 때는 불과 200여년 밖에 되지 않은 그리 오래된 성도 아니고,
또 처음 건설했던 성곽과 관아 행궁들은 식민지시대와 격동의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대부분 훼손되어 화성을 세우면서 지었던 주요 건물들은 헐리거나 이전되고,
행궁과 관아자리에는 일제관아와 경찰서 학교등이 들어서서
정말로 큰 가치를 느낄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를 총 감독했던 정약용은
당시 공사에 사용되었던 자세한 설계도와 공사물량 공사에 동원된 연인원
그리고 지불했던 품싻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화성공사에 이용되었던 기계등 모든 공사에 대하여 공사완료보고서를 작성하여 간행하였는데,
이 책이 바로 '화성성역의궤'다.
이 책이 있었기에 사라진 성내 모든 건축물들의 규모와 형태를 원래대로 그대로 다시 설계하여 지을 수 있었고,
그 근거에 의해서 복원된 것이었기에 화성은 어찌보면 재 공사를 하다시피 새로운 건물이 복원되었지만,
유네스코 감독들이 그 가치가 인정하게 되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신도시 화성이 이제는 수원의 중심이 되었고,
수원은 인구 100만이 넘는 경기도 최대도시로 성장하였다.
200여년 전에는 허허 벌판이었던 이곳에 들어선 신도시 화성의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그 시대를 이해하고, 이루지 못한 정조의 정치개혁의 뜻을 되돌아보는 답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