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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한일 관계(韓日關係)
임진왜란과 통신사
그러던 중 1555년(명종 10년)에는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 연안을 노략질하여 전라 병사 원적(元績)·장흥부사(長興附使) 한온(韓蘊) 등이 전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니 이를 을묘왜변이라 일컫는다. 정부에서 비변사라는 특별기관을 설치한 것은 이 왜변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뒤에도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내왕을 금하였고, 두 나라 사이의 정식 교섭도 정지되었다. 한편 선조 초기 일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타나 전국(戰國)의 혼란을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였으며 이에 따라 왜구의 활동은 억제되었다.
임진왜란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경략(大陸經略)의 계획을 세우고 대군(大軍)을 보내어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전후 7년에 걸친 대란(大亂)의 전단(戰端)을 열었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한국 전토를 유린하여 국민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국가의 재정은 극도로 피폐하여졌다.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양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대체로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를 전기와 중기로 구분한다. 이와 반대로 일본은 한국의 도자기·활자·주자학 등을 가져감으로써 그들의 문화는 크게 향상되었다. 이 난을 계기로 일본에서는 도요토미가 망하고 도쿠가와(德川家康)가 새로 정권을 잡게 되었다. 도쿠가와는 조선과의 평화적인 국교를 바라고 수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여기에 좀처럼 응하지 않다가 1607년(선조 40년)에야 처음으로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함으로써 국교가 다시 열렸다. 그 뒤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12회 다녀왔다.
일본은 통신사와 그 일행을 통하여 높은 수준의 문화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한국 통신사들은 대체로 그곳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막말(幕末)의 소란기를 당하여서는 내외의 정세가 복잡하였으므로 국교는 서로 정지 상태에 빠졌다. 그 뒤 막부를 넘어뜨리고 메이지유신정부(明治維新政府)를 새로 수립한 일본은 왕정복고(王政復古)를 통고하고 국교를 새롭게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쇄국 정책을 펼치면서 일본에서 보낸 국서를 거부하여 왔다. 이로 인해, 한때 일본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시끄럽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19세기 ~ 20세기 전반: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1873년 음력 11월,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 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과의 평화적인 교섭을 포기한 일본은, 1875년(고종 12년) 음력 9월 20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을 배경으로 조선에게 개항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에서는 찬반 양론이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 찬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화되어 1876년 음력 2월 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로써, 쇄국정책을 써오던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 조약을 체결한 뒤부터 일본 세력은 점차 국내에 침투하여 협박과 간계(奸計)를 일삼다가 1910년에는 한국의 주권을 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에 따라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뒤이어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82년 7월 19일(음력 6월 5일) 군료 배급과 관련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구 훈련도감 소속 구식 군인들의 폭동은 7월 22일(음력 6월 8일), 흥선대원군의 지휘하에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구식 군인들은 이날 일본 공사관을 포위 습격하였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 일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도피하였고, 공사관 건물은 불타버렸다. 또 한편의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 하도감(下都監)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살해하고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하였다.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상호군 조영하(趙寧夏)의 제안에 따라 별기군 영병관 윤웅렬(尹雄烈, 윤치호의 아버지)을 통해 일본공사 앞으로 서한을 보내어 군변사실을 통고하고 자위책을 강구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이미 공관원 전원은 인천으로 탈주한 뒤였다.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청나라에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조선과 일본 간에는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임오군란). 임오군란의 뒤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나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대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한중 관계)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그러나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졌으며, 지나치게 대일 의존도가 높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 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갑오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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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층의 위정 척사 운동은 청-일-러 3파전으로 대표되는 열강의 각축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으로 국가 재정이 궁핍해져 농민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팽배해졌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졌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였다(1894년).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봉기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으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다.
한편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급기야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청일전쟁). 그 와중에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nowiki />이 부분의 본문은 을미사변, 아관파천, 삼국간섭, 및 시모노세키 조약입니다.
조선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대한제국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일본은 러시아와 대립하면서 한일 의정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1904년(광무 8년) 제1차 한일 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고문을 두고 대한제국의 내정에 간섭하였다(고문정치).
이 때에 고문으로 들어온 메가다(目賀田)는 소위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의 토종 자본을 몰락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일본에 의해 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위촉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는 일제의 침략 의도를 미화하는데 앞장섰다. 스티븐스는 훗날 장인환, 전명운에 의해 미국에서 처단되었다.
1904년(광무 8년) 한반도와 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러일 전쟁은 1905년(광무 9년) 일본이 승리를 거두어, 일본과 러시아 간 포츠머스 조약의 체결로 매듭지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이해 일본은 일방적으로 제2차 한일 협약의 성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한성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였다(통감정치).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 통치를 인정하며 그 대가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조선에 대한 '보호 통치'를 인정할 것을 약속하였다.
사회의 각계각층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 조약의 폐기를 주장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민영환 등은 자결로써 항거하였으며, 조병세 등은 조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다. 장지연은 주필로 있던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일본과 을사오적을 규탄하였다. 오적 암살단 등이 조직되어 을사오적의 저택을 불사르고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였으며, 민종식, 신돌석, 최익현 등은 의병을 조직해 무장 항전을 벌였다.
또한 독립 협회가 해체된 뒤 개화 자강 계열의 단체들이 설립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면서 구국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군주제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1905년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이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광무 11년, 융희 원년) 2월 대구에서 김광제, 서상돈 등이 제안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 원을 국민들이 갚고자 한 운동이었다.
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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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4월)의 결과로 일본 제국에 의해 고종이 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 로 정하였다. 순종이 즉위한 직후 일본은 한일신협약(7월 24일)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次官)을 두어 대한제국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으며(차관정치), 이면 협약을 통해, 8월 ~ 9월에는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1909년(융희 2년) 7월 12일에는 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경찰권, 교도행정에 관한 업무를 일본 제국에게 넘겨 주게 되고(기유각서) 이로써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국권만 보유하게 된다. 일본 제국은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남한 대토벌 작전 등으로 무력 진압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1910년(융희 4년) 8월 22일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한일 병합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한국에서 약 4,000년간 지속되던 군주제도 막을 내렸다. 일본 제국은 한국을 식민 통치 지역으로 편입한다.
20세기 후반 ~ 현재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서로 외교 관계가 없다가, 양국은 1951년부터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또는 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결국, 한국의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1965년 6월 22일 도쿄에서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을 조인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였다. 1998년 11월 18일에는 1965년에 수교와 함께 체결했던 기존의 어업협정을 파기하고 신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하였다. 2003년 양국은 정상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통해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정했다. 2004년 40년간의 기밀이 해제되고 한일 협정 문서가 공개되자, 한동안 논란에 싸였다. 그러나 2005년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되면서 미국과 일본 정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나 긍정적 평가의 계기가 마련된 측면도 있으나 이와 함께 한일 협정을 통해 한국 정부가 받은 일본의 청구권 자금이 개인 피해자들의 몫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경제개발 자금으로 전용한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한국의 광복 직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전후 일본의 처리와 새로운 아시아질서 수립의 일환으로서 선포된 연합국의 카이로 선언(1943년)과 포츠담 선언(1945년)에 의해서 1945년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완전 분리되어 1945년 8월에 주권을 회복하고, 이어서 1952년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1년 9월 체결, 1952년 4월 발효)에 의해 연합국 점령당국으로부터 국권을 완전히 회복한 이후부터 한국과 일본은 동등한 국제적 지위에 입각해서 새로운 관계를 전개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 따라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였고, 따라서 한·일간에 과거의 역사적 관계를 청산하는 새로운 기본관계의 수립을 가져오게 했다. 동조약의 제4조는 35년간에 걸친 한·일 두 나라의 재정적·민사적인 채권·채무관계를 협정에 의해 해결할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일본은 동조약 제9조에 따라서 한일간에 어업협정의 체결의 의무를 명시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내에 계속 주거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와 처우에 관한 문제 및 기타 일본 통치에서 생긴 양국간의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양국간에 새로운 우호선린관계의 수립을 필요로 했다.
1948년 초가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정한경(1949년 1월 주일대표부 대사로 임명), 김양천 비서, 김동성 공보처장, 이정순 공보국장 4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1박2일은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1950년 1월 맥아더는 한일 관계의 촉진을 위해서 이승만을 다시 일본으로 초청하였다. 이승만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 자기의 집무실로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를 불러 이승만과의 회담을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엇갈려있는 두 노련한 정치가는 양국간 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회담이 필요없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동안 입을 열지 않고 있다가 요시다 시게루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국에는 아직도 호랑이가 많지요", "당신네 조상인 가토가 임진왜란 때 한국을 침략했을 당시 한국 호랑이를 모두 잡아먹어 이제 그것도 없소" 맥아더가 모처럼 주선한 한-일 정상회담은 이 농담으로 유산되고 말았다. 1949년 1월 7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가진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일 배상 청구 문제를 거론하고 쓰시마 섬 반환을 일본에 요구했다.
1950년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무효화될 예정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해양 경계선을 획정하고,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이른바 "평화선"(Peace Line, Syngman Rhee line)을 설정하였다. 평화선은 된 한국과 주변국가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李承晩ライン)으로 부른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러한 이승만 정부의 선언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는데, 특히 당시 일제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의 불법 조업 어선을 여러 차례 나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어업 종사자가 죽기도 하고, 한국 경찰관이 중국에 납치되기도 하였다. 1956년 5월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익희는 한 강연회에서 "만약 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일본 지도자들과 회담할 용의가 있다. 한일 양국 정부는 무엇보다 먼저 부당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신익희를 친일분자로 비난하였다. 이승만은 5월 3일 논산훈련소에서 수만 장병이 도열한 가운데 행한 연설에서 "일본과 회동하여 국가의 독립과 자유를 발전케 하겠다는 것은 다시 국권을 일본에게 빼앗겨도 좋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이 재일동포의 북송을 추진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1959년 공작원을 일본에 파견하여 니가타 현에서 테러를 기도한 사건이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깊게 관련된 미국은 두 동맹국 간에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
1960년대
1965년에 한일기본조약(또는 한일협정)이 타결되기까지, 한국과 일본은 1951년부터 14년간 총 7차례에 걸쳐 회담을 가졌다. 제3공화국 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경제개발의 자금 충당이 동기가 되어, 지지부진 하던 회담을 재개하였다. 야당과 학생운동권에서는 일본의 사죄 없는 한일협상은 굴욕외교라며 시위를 벌였고, 조약 조인 이후에도 시위가 격화되자 정부는 위수령을 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야당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한-일 양국의 국교관계에 관한 조약’이 조인되고(1965년 6월 22일), 비준서가 교환(12월 18일)됨으로써, 한일 양국의 정부는 수교를 하였다. 양국은 또한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재산과 청구권(請求權)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들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이 적절했는지 논란이 있어 왔다. 양국 간의 수교로 양국의 대사가 교차 임명되고, 일본의 장관급 인사가 한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미국은 협상의 진전을 위해 독도의 공동소유를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은 이를 일축하였다.
미국의 압력과 야당·학생의 반대
미국은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압력을 한국에 가하였다. 제3공화국 정부는 실패를 거듭해왔던 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고 1961년 겨울부터 일본과의 협상을 추진하였다. 1961년 10월 20일 재개된 제6차 회담은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는 미국의 압력과 경제 개발을 하는데 지원자금을 충당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가 없이 한일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에 대개 야당에서는 굴욕외교라 주장하였고, 장택상, 윤보선, 허정, 박순천, 함석헌 등 야당 지도자들은 굴욕외교 반대라는 명목으로 시위를 하였다. 1964년 6월에는 한일굴욕외교 반대 명분으로 전국 대학생의 시위가 발생했다. 1964년 6월 초, 한국 정부가 총리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자 당시 한일협정에 대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 내걸고 시위가 일어나면서 연이어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시내 곳곳에서는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정부에선 비상계엄령을 발표후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6·3 항쟁의 주동자로 구속되었던 인물 중에는 고려대학교의 총학생회장이자 훗날 17대 대통령이 되는 이명박 등도 있었다.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1965년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그는 학생들의 국회해산과 조약무효를 주장하는 것과 데모 만능 풍조를 비판하였고, 시위를 독려하며 데모학생을 영웅시하는 교육자 등을 비판하였으며 구 정치인을 학생데모에 의존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던 반동분자라고 강경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이어 1965년 8월 26일 아침,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 8월 27일 시위 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문교부 장관 윤천주와 서울대학교 총장 신태환을 경질하고 후임에 법무부 차관 권오병과 교수 유기천을 각각 임명했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하였다.
국교 정상화
위와 같은 각계의 반발에 불구하고 박정희는 한일 외교를 재개해 나갔다. 결국 1965년에 한일협정을 체결하였다.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1965년 12월 18일 오전 10시반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1951년 10월 20일에 제1차 한일 회담이 열린 이래 14년 1개월 28일간에 걸친 양국 간의 교섭을 거쳐 이날 양국 대표는 비준서 교환 의식을 끝냄으로써 두 나라의 수교는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지 60년 만에 다시 한일협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협정들의 주요 내용
한일협정외에도 1965년 6월에 양국은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에 관한 협정", "재산과 청구권(請求權)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문화재 및 문화협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특히 기본조약 제2조에 의해 일본은 한국에 대한 과거 일본의 침략적인 모든 조약과 협정을 법적으로 무효화시켰고, 한·일간의 불행한 과거를 청산했다.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해결 내용은 일본이 한국에 10년간 무상(無償)으로 3억 달러를 지불하는 동시에 정부간 차관으로 2억 달러를 연리(年利) 3.5%, 7년 거치(据置) 20년 상환의 조건으로 10년간에 제공하며, 1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商業借款)을 제공키로 약속되었다. 이 합의는 양국간의 경제협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일본정부는 60만 재일교포에 대한 법적지위 및 처우 문제의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들과 이들 자손에게 일본 영주권을 획득할 권리를 부여했고, 이들이 일본의 국법을 위반하여 중형에 처해지지 않는 한 이들이 일본으로부터 강제퇴거 및 송환당하지 않도록 이들의 주거보장을 약속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생활보호 및 국민건강에 있어 일본국민과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 협정으로 인해 재일교포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한국정부의 법적·외교적 보호를 받게 되었다. 또 어업협정은 평화선(平和線)을 12해리의 한국의 배타적인 어업관할 수역(水域)으로 대치했으며, 한국의 인접수역에 있어 어업자원의 보존·개발, 어민의 권익보장, 양국간의 어업협력을 내용을 했다.
보상금 논란
한일협정 과정에서도 보상금 8억 달러라는 보상금을 놓고도 적은 액수라는 비판이 있었다. 한일협정의 내용 중 대일 청구권 자금으로 불리는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이 적절했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일각에선 이 협정에 대해 ‘굴욕 외교’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결렬되어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않던 한일 협정은 완전타결을 보았다. 그를 통해 받은 대일 청구권 자금은 후일 한국 경제를 도약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및 일제에 의해 징병 혹은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적절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청구권문제와 함께 어업문제, 문화재반환문제도 한국측의 지나친 양보가 국내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다. 현재 일본측에서는 한일 협정을 통해 모든 보상을 마쳤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 중이다. 이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현재까지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한일 수교의 조건으로 이승만은 20억 달러를 요구했고, 장면은 28억 5천만 달러를 요구했다. 필리핀은 14억 달러를 받았다. 한편 북한은 계속해서 일본에게 과거사 배상금을 요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도 전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일협정 체결 5개월 전 독도밀약이 있었고, 이 밀약은 독도가 우리땅임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
외교 인사 교류
1965년 12월 18일, 일본의 시나 에쓰사부로 외무대신이 방한하였고, 일본 정부는 북한계 한인 3명에 일본 재입국을 허가하였다. 1966년 1월 14일, 김동조 주한 초대 대사가 쇼와 천황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월 17일,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이 발효되었다. 2월 6일, 일본은 10명의 북한행 민간사절단을 승인하였고, 2월 15일 한일어업공동위 준비회의가 개최되었다. 2월 25일, 한일어업공동위원회 제1차 정기회의가 개최되었다.
독도 문제
딘 러스크 당시 미국 국무장관은 1965년 5월 17일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에게 독도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과 일본이 독도에 등대를 설치해 공동 소유하는 방안을 제의했으나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축하였고 미국의 한일간 외교장관 회담 제의에 대해서도 “일본이 우리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별도 회담 없이도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담이 무의미하다”고 발언하였다. 하지만 1965년 1월 이미 독도밀약을 맺었다. 그 해 6월 22일 독도를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하는 한일어업협정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