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야기 4부 - 생각의 전환 패러다임
토마스 쿤은 인류의 철학과 과학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사람 중 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토마스 쿤' 이라는 사람은 잘 몰라도 그가 말한 '패러다임'이라는 단어는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토마스 쿤이 1962년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출판했을 때, 오스트리아 빈학파의 논리 실증주의자를 비롯하여 칼 포퍼와 같은 반증주의자들까지 모두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했다. 이 책이 기존의 귀납주의적 역사적 발전에 익숙해져 있던 모든 분야의 학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쿤은 이 책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서 기쁨을 느낀 것은 그것이 과학에 대해서 밝혀주기 때문이기 보다는 책의 주요 논제들을 많은 여타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읽었기 때문이다(339p). 그의 말대로 이 책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정치학, 역사학' 를 비롯하여 철학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과학혁명의 구조 책 표지이미지
패러다임 이전의 시대에서 모든 역사관은 인과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쿤은 역사를 비연속적인 다양한 문화가 병렬적으로 묶어서 이루어진 것이라 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은 법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특정한 원인이 전부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 만들어낸 인류의 족적이란 혼란스럽게 마구 뒤얽혀 만들어져 엉킨 실타래보다 더 심하게 뒤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은 인간의 지식을 '객관적 실재에 대한 반영이라기보다 특정한 사회적 맥락하에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이다' 라고 하였다. 쿤의 주장대로 라면 인간의 지식이란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포스터모더니즘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래서 그는 본인 자신은 그렇게 부인했지만 일부 학자들로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가 만들어낸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이론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했고, 그 결과로 지금의 다분화되고 복잡한 사회가 발생하게 되었다.
우선 이 책은 꽉 짜여진 틀 속에서 정형화된 교육을 받고, 그 체제 안에서 성장해온 사람은 받아드릴 수 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굉장히 독창적인 사고로 책을 읽는 첫 페이지부터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그가 말한 “만일 역사가 일화나 연대기 이상의 것들로 채워진 보고라고 간주된다면, 역사는 우리가 지금 홀려 있는 과학의 이미지에 대해서 결정적인 변형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과학자들 자신도 그런 이미지를 주로 완결된 과학적 업적들에 대한 연구로부터 만들었다” (61p) 이 문장의 의미는 인류의 역사나 연대기가 인류의 지식이 차곡히 쌓여 있는 보물창고같은 것도 아니며, 그것이 지금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의 결정적인 토대를 이룩한 것도 아닐 뿐더러, 결과를 알고 난 후에 사전에 그 일의 결과가 그렇게 나타날 것이라는 걸 예측하는 '사후 확신 편향'이 불과하다는 뜻이다.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전환은 합리성 때문이 아니라 사회학적 역사적 요인에 기인하며, 과학은 객관적 지식도 아니고 인류발전을 위해 진화하지도 않는다” 라고 말한다.
과학사의 아버지인 조지 사튼은 성과가 축적되고 진보하는 것은 과학뿐이라 했는데 토마스 쿤은 과학의 진보는 과학이 아니라 사회학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당시 나는 정작 자신은 모든 성장과 진화에 대한 일관성 있는 법칙은 없다고 하면서 패러다임이라는 문제풀이 방식이 모든 인문 사회 과학에 적용되는 연구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거북했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과연 쿤의 주장대로 역사를 보는 관점을 바꾸어야 할 것인가이다.
쿤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더 이상 배울 것은 없다. 그래서 반증주의 철학자 칼 포퍼는 역사를 이끌고 가는 주체들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정치가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꼴이라고 그를 비판했다.
토마스 쿤은 토론과 비판은 근본적인 것에 우리가 동의 할 때 가능하다고 하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의 속성"을 예를 들어 설명한다.
쿤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대개가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그대로 투영된 결과이겠지만 이미 기존의 경직된 정형화되어 있는 틀에 처박혀 버린 나의 사고관이 그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이다.
물론 토마스 쿤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겠지만 둘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의 문제는 언어의 오용이나 그 본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는데, 쿤 또한 자신을 공격했던 공약불가능성 (Incommensurability)과 상대주의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을 빌려서 언어-문화공동체의 한계성에 대하여 반박한다.
쿤의 말을 살펴보자." 그런 상황들을 논의하는 어휘들이 대부분 동일한 용어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들은 일부 용어들을 다른 방식으로 자연에 연관시키고 있음에 틀림없고, 그들의 의사소통은 불가피하게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한 이론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그 논쟁에서 증명될 수 없다(326p)".
상대주의자라는 비판에 대해 쿤은 이렇게 반박한다. "자연이 제기하는 퍼즐을 설정하고 풀어내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가치가 상충하는 경우에, 한 과학자 집단의 대다수 구성원에게 가장 지배적인 기준이 된다. 그렇지만 다른 어느 가치와 마찬가지로 퍼즐 풀이 능력은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서 모호함을 드러낸다. 그 가치를 공유하는 두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활용해서 이끌어낸 판단에서 차이를 보인다(335p)" 즉, 가치는 공유하되 판단에는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이론과 이론 사이에 비판적 논의가 불가능하다고 쿤이 주장한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과 문화공통체 내부에서 공통적으로 지니는 속성을 공유하지 못하는 다른 집단에서 발생하는 것일 뿐이지 상대주의자적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론과 이론 사이에 비판적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사에서의 여러 예를 들면서 이런 패러다임이 바뀌는 경우를 보여준다. 사람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문제점이 노출되면 문제점을 패러다임에 끼워 맞추려는 노력을 먼저 한다. 이런 문제점이 계속 노출되면 다른 방법을 이용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장하게 된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명백하게 증명된 새로운 패러다임조차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저자가 ‘기존의 패러다임에 익숙한 사람이 모두 죽게 되면 다음 새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쿤은 이런 과정을 '과학혁명'이라고 명하였다.
쿤은 이 책에서 이런 과학혁명의 필연성에 대해 설명하고 혁명을 통해 진보해 나가는 과학의 역사를 이야기 한다.
기존 상태에서 보이는 결함이 혁명의 전제 조건이며 필연적으로 기존 상태의 부분적 파괴를 요구한다. 쿤은 정치적 발전과 과학혁명과의 유사성을 연결했다. 비단 정치적 발전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 자아의 발견 등 인간생활과 관련 있는 모든 변화가 이런 과정을 거친다. 그러기 때문에 쿤이 위대한 것이다.
현대 사회에는 혁명이라고 불릴 만한 과학혁명은 흔하지 않다. 대신에 발전된 과학을 바탕으로 한 기술의 발전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 역시 한 단계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전을 가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문제점을 바탕으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대를 목도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국가나 기업 심지어 개인까지도 기존의 패러다임에 안주하는 것을 죄악시하고 끊임 없는 변화를 시도한다. 즉 기존 생태의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파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워낙 책이 어렵고 난해하기 때문에 제대로 읽지 않고서는 이해가 안되고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지만 굳이 쿤의 책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것이 있다면, 이미 우리의 사고관이 매우 경직되어 있고, 혁명적인 발상은 그러한 경직된 사고관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쿤이 이야기 하는 혁명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첫째, 젊은 사람, 기존의 권위에 주눅들지 않고, 기존에 체계에 순응하지 않으며, 자유로운사고와 독창적인 개성으로 무장한 사람이다. 아인슈타인 이후 최고의 물리학자로 칭송받는 리차드 파인만과 같은 사람이다. 리차드 파인만은 맨하탄 프로젝트에서 당시 세계과학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닐스 보어에 대해 절대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그 결과 닐스 보어는 무조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다른 뛰어난 과학자들보다 이제 신출 나기에 불과한 말단 연구원인 리차드 파인만 하고만 이야기를 했고, 그에게서만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
둘째, 다른 분야에서 온 사람이다. 학문의 분야가 다르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다른 방식으로 해답을 얻으려 노력해 왔던 신선한 사고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모든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가 있다. 그래서 현대사회가 공학과 인문학의 결합을 강조하며, 각각의 이질적인 분야를 융합하여 경계를 허물고, 학제간의 통섭 (Consilience)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이 세상에 아직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기존의 방식, 기존의 틀을 깨고, 인류를 위해 보다 필요하고, 편리하고, 쾌적하고 안전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싶다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사고관에서 탈피해야 한다. 창조와 개혁은 기존의 경직된 사고관에서는 탄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출처 : 세이프티퍼스트닷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