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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 신화하고 육화하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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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09 03:07
- 신화하고 육화하는
오늘 복음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이제 사도들과 함께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는 내용이지만
산 위에서 기도하시고, 사도들을 뽑고, 사도들도 거기로 부르신 다음
사도들과 산 위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산 위의 행위와 산 아래 평지의 행위가 나뉘어 있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신화神化의 행위와 육화肉化의 행위로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꿔서 얘기하면
매우 세속적인 우리는 산 위로 올라가 주님처럼 기도함으로써 신화되고,
신화가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산 위에 머물지 말고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데
바로 육의 할례와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란 무엇입니까?
표피를 떼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례란 무엇입니까?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떼어내고 무엇을 씻어내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지만
죄를 씻어버리는 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보면
옛날 말로 삼구三仇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삼구란 옛날 교리로 세 가지 원수를 말하는 것인데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먼저 세속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世俗과 속세俗世는 같은 두 글자, 세와 속으로 이루어졌고
두 글자를 뒤집어놓은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출가出家하다와 가출家出하다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출하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이고, 현실 도피적인 것인 데 비해
출가하는 것과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의 패배자로서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옛날에는 육신을 도매금으로, 곧 그 자체로 죄악시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고 편하고 감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육신,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육신을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권고에서 육신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우리는 육신을 다스릴 수 있기에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함께 가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마귀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냐고 하는 분이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례 갱신 때 하듯이
마귀의 허례허식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육의 영을 몰아내고 주님의 영을 모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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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뿌리내린 정주의 삶
<기도, 일, 공부>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시편145,8)
말그대로 대혼돈의 시대입니다. 기후위기, 정치위기, 사회위기, 교육위기, 가정위기 등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좀처럼 길이, 답이, 희망이,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국내 안팎 현실이 그러합니다. 매일 인터넷 뉴스를 통해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나오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언젠가 열심한 분과 주고 받은 문답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좌파입니까 혹은 우파입니까?”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로, 제 신원은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입니다.”
극단의 확신에 뿌리 내린 눈먼 무지의 이단적, 광적, 맹목적 위험천만한 영적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뿌리 내린, 기도와 일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안정과 평화의 정주의 삶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요즘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날로 극우화되어 가는 심각한 위기의 현실은 바로 영성의 핵심인 균형과 조화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관용과 자제의 삶도 균형과 조화의 영성에서 나옵니다.
새삼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금의 현실같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의 보편적 영성이요,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균형과 조화의 온전한 영성이 베네딕도회 영성입니다. 바로 이에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살기위해, 영혼의 살기위해, 균형과 조화, 내적 안정과 평화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에는 늘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은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에는 신비가가되고 일에는 전문가가되고 공부에는 학자가 되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매일 스스로 마주할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가지라.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외딴곳이 필요하다.”
우선적인 순위가 기도요 삶의 위기나 중대한 일을 앞뒀을 때 어김없이, 지체없이 외딴곳을 찾았던 주님입니다. 마침내 개인의 복음 선포 활동에 한계를, 공동체의 필요를 느낀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며 그분 안에 깊이 머물러 친교의 일치를 이뤘던 관상기도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21세기 대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자발적 기도를 위한 고독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 된 세상입니다.
에수님은 밤샘기도후 날이 새자 당신 제자들가운데 열둘을 뽑아 당신의 하늘나라 복음 선포 활동을 함께 할 이들을 뽑으시니 바로 열두 사도들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면모들이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당신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 온 군중들과 직면하십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 애썼고 그분에게 힘이 나와 손을 댄 모든 사람이 치유됩니다. 그대로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을 가리킵니다. 새삼 예수님 일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기도의 일상화, 기도의 생활화를 이뤄준 외딴곳의 기도처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가톨릭 교회 신자들에게 영적 주식과 같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영성이야말로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만들어 주는 우리의 보편적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영성의 토착화, 생활화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콜로새 신자들에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충만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혼돈의 위기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세상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복음적 삶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험하는 영적 현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균형과 조화’의 정통신앙, 정통영성에,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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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 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사도”란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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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2일, 교구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14번째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인사이동은 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교구장님의 특별한 면담이 있었습니다. 적성 성당으로 갈 때는 “성당이 작고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 주셨고, 저는 실제로 그곳에서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은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으로 갈 때였습니다. 비자 문제로 사전에 알려 주셨고, 저는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신 주교님께서 저를 평화신문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새로운 사목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34년 동안 맡겨진 소임 하나하나가 저에겐 꽃자리였습니다. 제가 인사이동을 할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입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종종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해서 가시방석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꽃자리인지, 가시방석인지는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마음을 지배하면 어디든 가시밭이 되고, 겸손과 감사가 마음을 채우면 그 자리는 곧 꽃밭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시밭에서도, 돌밭에서도, 심지어 길가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생명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불가마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를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옥중에서 복음을 전하며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분들의 자리는 감옥이었고, 불가마였고, 죽음 앞이었지만, 그곳이 바로 꽃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받으셔야 할 분이, 스스로 기도 하셨습니다. 발 씻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기도와 섬김, 십자가는 결국 부활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제자들의 이름을 지금도 외우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했고, 병자를 고쳤고, 마귀를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었고, 그 꿈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신앙은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표면이 아니라 깊이입니다.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지 않고, 땅이 흔들린다고 뽑히지 않는 믿음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외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꽃자리라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불평 대신 감사로, 원망 대신 기도로, 권리 대신 섬김으로 살아갈 때, 그 자리는 영원한 생명의 꽃자리로 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꿈을 이루는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꽃자리로 바꾸어가는 복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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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내면의 권력(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8일 월요일- 서른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지배에서 친교로
성경은 권력의 오용에 대한 매우 단도직입적인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권력에 대한 이해와 그 사용에 있어 다른 방식을 살펴봅니다:
위에 인용한 두 개의 성경 구절은 권력이 공동체를 살리는 선한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자기 이익을 위한 악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둘 다 잘 설명해 주기를 희망합니다. 첫 번째 구절에서 바오로는 자기 공동체에게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존중해 주라고 격려합니다. 두 번째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은 자기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전통을 오용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뉴스를 본다거나 위원회에서 일을 해보거 몇몇 결혼 생활의 모습을 지켜본다면 우리는 권력이라는 문제를 사람들 대부분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내면의 권력"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신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권력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또 이 권력을 다른 사람들에 대해 과도하게 휘두르게 됩니다. 가부장제나 백인 우월주의, 규제되지 않는 자본주의와 같은 지속적인 "권력 지배" 구조는 대부분의 개인 권력, 즉 내면의 진정한 힘을 너무 오랫동안 제한해 왔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인간의 의식은 아주 서서 교회와 정치, 그리고 가정에서마저 이타적인 권력의 사용과 권력의 공유, 그리고 자비로운 권력 사용에
인간의 의식은 아주 서서히 교회, 정치, 가정에서 이타적인 권력 사용, 권력의 공유, 자비로운 권력 사용에 이르도록 해 줍니다. 달리 말해 권력의 성숙한 형태, 즉 타인을 위해 권력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영적 성찰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선한 권력은 켄 윌버(Ken Wilber)가 "성장 계층"이라고 일컫는 개념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1] 이는 단순히 누군가가 위에 있고 아래에 있는 구조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책임과 돌봄을 통해 약자를 보호하고 공동체를 성장시키는 계층 구조를 의미합니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권력이 없는 이들, 즉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 그리고 전체 자연 세상을 보호해 줄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악한 권력은 "지배 계층"을 만들어 주는데, 여기에서 권력은 다른 이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자신과 자기 그룹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들어 높이는 데에만 사용됩니다. 계층 자체는 본질적으로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영적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권력이란 단순히 "(선한) 목적을 달성하는 능력"이며 사랑과 정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권력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필요한 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권력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사랑과 정의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2]
창세기에서부터 묵시록까지 성경의 핵심 사상 중 하나는 권력 남용에 대한 매우 직설적인 비판입니다. 성경은 처음서부터 지배의 권력을 무너뜨리고, 다른 형태의 권력 - 즉 무력함(powerlessness)을 가르칩니다. 성경에서는 바닥이나 가장자리, 혹은 주변부는 특전적이고 영적인 위치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계시는 혁명적이기도 하고 또 체제 전복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위 "보잘것없는 이들"(마태 8,6)이나 "영으로 가난한 이들"만이 가르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열두 단계 프로그램에서 말하듯이, 무력함이 하느님의 출발점인가 봅니다. 우리가 "우리는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참된 힘이 인식되지도 않을 것이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이며, 심지어 추구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지금까지 저는 삶을 살아오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찾으려는 사고의 과정에 집중했었지만, 이제는 무언가를 찾는 대신 고요와 침묵을 수양하는 쪽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상의 공간 안에서, 가장 예상치 않은 순간에 강력한 통찰력이 떠오릅니다. 이 통찰력은 제 노력의 결과나 정신적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저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지성은 총명하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밤하늘을올려다보거나 나비를 바라보는 순간에는, 우리의 정신은 고요하고 온화한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자리를 내어 드리고 뒷 자리를 차지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정신과 지성만으로는 삶의 깊은 의미나 하느님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니다.
—David M.
References
[1] Ken Wilber, The Integral Vision: A Very Short Introduction (Shambhala, 2018), 68.
[2] Martin Luther King, Jr., Where Do We Go from Here: Chaos or Community? (Harper and Row, 1967), 37.
Adapted from Richard Rohr, Things Hidden: Scripture as Spirituality, rev. ed. (Franciscan Media, 2022), 89–90, 94–9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al gao,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나"에서 "우리"로 - 움직여 간 우리는 서로의 선물을 존중해 주고,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의 기술을 나누며, 홀로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더 커다란 전체를 만들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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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게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
예수님께서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신 후 당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는데, 그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 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밤을 새워 기도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실수하신 것일까요? 분명히 아니겠지요?!!
여기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잃었던 아들(탕자)의 이야기를 해 주시며 한없이 용서해 주시고 끌어안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해 말씀해 주신 분이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듯이, 유다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겠습니까?!
교회는 완벽한 사람들이 공동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개인인 '나' 안에도 유다는 존재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마음이겠지요?!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을 기다리지 못하고 안달하며 '내' 뜻을 이루려는 마음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유다의 '죄'입니다. 유다의 죄의 핵심은 하느님이신 분, 그리스도를 팔아넘긴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펼쳐지는 과정을 기다리지 못한 성급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 내면에 있는 유다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삼아 주시는 하해 같은 가슴을 지니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어가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초점이 맞추어진다면 우리에게는 절대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모든 결함과 한없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끌어가 주시는 착한 목자 주님께 시선을 두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나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 그리고 십자가상의 죽음 앞에서 다들 '나몰라라하며' 줄행랑을 친 사람들이 예수님의 밤샘 기도 후에 뽑힌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내' 힘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합니다.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예수님을 따르기에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하지만 합당하게 되는 것조차도 우리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늘 기다리지 못하는 유다가 존재하지만, 또한 동시에 끝까지 기다려 주시며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조차 가능하게 만들어 주시는 주님도 우리 안에 계십니다.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힘이 단 하나의 조건으로 펼쳐지는 상황을 목격합니다. 그 단 하나의 조건이란 그분 사랑의 힘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이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노먼 커슨스(Norman Cousins)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치유에는 꼭 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믿음은 꼭 필요하다."
노먼의 이 명언에서 '믿음'이란 단순한 확신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저는 믿고 싶습니다.
우리가 구제불능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의 패배적인 생각이 만들어낸 말일 뿐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존재가 구제가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안 돼! 안 돼!" 하는 생각을 우리는 자주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의 패턴을 만드는 것입니다.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 안에는 구제불능이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루카 17,6).
마르코 복음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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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3.16)
유다도 뽑으신 예수님
유다도 뽑혔는데, 그것은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였습니다. 적의를 품은 일꾼조차도 그 길을 제지당하지 아니함은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당신의 자비보다 당신에 대한 평판을 위험에 빠뜨리는 길을 택하신 주님의 고결함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분은 인간의 나약함을 취하셨고, 그래서 인간의 약한 모습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버림받고자 하셨고, 기꺼이 배신당하고자 하셨고, 기꺼이 당신 사도들에 의하여 넘겨지고자 하셨거니와, 이는 여러분이 동료에게 버림받고 배신당했을 때 그 일을 잘 견뎌 내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인간의 신화는 이레네우스와 같은 창조 중심의 신학자들은 물론이고 동방 교회의 사상가들에게서도 드러나는 익숙한 주제다. 가령 알렉산드리아의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한다.
세례를 받은 사람 “안에는 말씀이 둥지를 튼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아름다운 모습의 말씀을 소유한다. 그 사람은 아름다워져서 하느님과 동화된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사람이 신이고, 신이 사랍이다”라고 한 것은 과연 옳다. 이 신비는 실로 말씀 속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은 사람들 속에 있고,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다.
엑카르트는 이토록 중요한 주제인 인간의 신화를 장황하게 전개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주제는 그가 단죄된 이래로 서양의 영성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엑카르트는 비유를 들면서 조심스럽게 구별한다.
예언자는 한 방울의 아침 이슬이 거친 바다와 견줄 수 없을 만큼 작듯이 만물도 하느님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작다고 말합니다(지혜 11,22 참조). 한 방울의 물을 풍랑에 이는 바다에 떨어뜨려 보십시오. 그러면 그 물방울은 바다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가 물방울로 변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영혼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영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시면. 영혼은 신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영혼이 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영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시면. 영혼은 제 이름과 힘을 잃지만 의지와 존재를 잃지는 않습니다. 그런 다음 영혼은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이는 마치 하느님이 하느님 자신 안에 머무르시는 것과 같습니다 5(465)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성체성사(현존, 희생, 그리고 친교의 신비) / 로렌스 페인골드
제 1부
기초
제 1장
그리스도께서 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는가?
성체성사에 대한 적합성의 이유들
1. 현존 (Presence)
완덕(完德)의 가르침
사랑은 사랑받는 이가 굴욕이나 위축됨을 느끼지 않도록 그의 수준으로 내려온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낮아짐, 겸손의 예는 성체성사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성과 인성의 모든 위대함을 가리시고, 겸손하고 평범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에 현존하신다. 만일 그분께서 타보르 산에서처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두려움에 압도되어 가까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성체성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대한 깊은 신뢰로 응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사랑은 또한 모든 것을 인내한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과 신성을 믿지 않는 이들, 중죄 상태에 있는 이들, 당신께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들, 심지어 고의적으로 성사를 모독하는 이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도록 스스로를 내어주신다. 그분께서 이렇게 허용하시는 것은, 우리 각자의 자유로운 사랑의 응답을 최대한 존중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불성실할지라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겸손과 자기희생, 가난의 완전한 모범이다.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성체 안에서, 베들레헴이나 갈바리아에서보다 더 깊이 자신을 낮추신다. 베들레헴과 갈바리아에서는 당신의 신성을 가리시고, 인간의 나약하고 고통받는 모습으로만 드러내셨다. 그러나 성체성사 안에서는, 신성뿐만 아니라 인성마저도 빵과 포도주의 겉모습 아래에 감추신다. 그분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양뿐만 아니라, 당신 거룩한 인성의 아름다움조차도 포기하신다. 이는 곧 가난의 극치이며, 갈바리아에서처럼 모든 소유를 버리신 것을 넘어, 이제는 인간의 형상마저도 버리신 것이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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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폴레옹 황제,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 왕, 아니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뽑으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1위는 13세기 몽골의 칭기즈 칸입니다. 그의 영토는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러시아 남부, 동유럽 일부까지 약 2,400㎢였다고 합니다.
이 칭기즈 칸은 자기의 가장 큰 무기를 ‘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귀가 나를 가르쳤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그는 다른 이의 말뿐 아니라, 자기 내면의 말까지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잘 들었기에 단일 군주로 최대 규모의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뜻하는 영어의 ‘stupid’의 여러 뜻 중 하나는 ‘듣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듣지 않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가 참 많습니다. 세상의 소리, 진리의 소리, 자기 양심의 소리…. 그런데 엉뚱한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들으려고 하고, 자기를 반대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나만 사랑하라는 것으로 왜곡해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들으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들으셨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따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병으로 힘들어하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낫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이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십니다. 잠깐 하느님께 안부 인사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오랫동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많은 군중이 몰려왔습니다. 복음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그렇게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기도하시는데,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바람만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워낙 바쁘신 분이라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의 유일한 한계는 우리 스스로 마음으로 설정한 것들이다(나폴레온 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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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예수님의 사도(使徒, apostolus)라고 불리는 열두 제자 /
사도란 무엇을 하는 이인지?
우리가 예수님 사도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 사랑을 전하며 산다는 것일 게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웃에게 사랑을 불어넣어 그분께 감사드리도록 하는 게 사도이다.
우리로 말미암아 세상이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른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리라.
하느님 일을 인간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 될게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에는 ‘라삐’라는 걸출한 스승들이 있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직접 뽑아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그들을 뽑으신 건 당신 말씀을 전하게 하시려는 거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열둘을 뽑으시어 ‘사도(使徒, apostolus)’라고 직접 부르셨다.
사도는 파견된 자로 ‘사자’(使者)를 일컫는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뽑은 열세 번째 자랑스러운 사도일 게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오르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손수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로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나중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밤새 기도하셨다.
하느님 아들이시며 안식일 주인이신 그분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변덕스럽고 나약하다는 것을 잘 아시기에, 아니면 당신 선택이 잘못될까 봐?
열두 제자를 뽑는 일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이기에 매우 중요했을 게다.
그러기에 하느님 아버지와 깊은 ‘친교’가 필요했으리라.
그래서 밤새워 기도하셨다.
그분께서는 뛰어난 자질과 능력 갖춘 이들을 선택하시는 것이 아닌,
어쩌면 아버지가 원하신 이들을 뽑아 사도로 파견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실 때처럼 중요한 일에는 기도 중에 하느님 뜻을 물으셨다.
그분은 사도로 이미 준비된 사람을 미리 뽑아 두신 게 아니다.
준비된 이들을 뽑으면 자신의 능력과 공로를 자랑할 수 있기에.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 자신들의 재주나 능력이 아닌,
주님께 의지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만을 수행해야 할게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분만을 따른다는 마음과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분께 대한 오직 신뢰뿐이리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아버지의 이 뜻을 알리려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느님 말씀을 전하시며 하느님의 능력이 당신에게서 나옴을 보여 주셨다.
우리도 중요한 일을 선택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우리의 선택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분의 사명만을 전하는 사도직을 따를 게다.
사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주어진 사명을 성실히 수행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들을 손수 뽑으시려고 아무도 없는 산으로 가시어 밤새 기도하셨다.
그만큼 신중을 기하여 사도들을 뽑으셨다는 뜻일 게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도와 제자, 군중을 구분하셨다.
그분께서는 교회라는 중차대한 공동체를 세우시려고 먼저 기초를 만드신 거다.
기초인 질서가 없으면 필연적으로 싸움과 분열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고 교회 내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우리도 세상 기준보다, 예수님처럼 기도로 정해야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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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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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뽑으신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많은 지파가 소멸하고, 남은 지파도 서로 합쳐져 겨우 두 지파 정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이라는 상징적 숫자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회복시키시어 이스라엘 구원에 관한 하느님 약속을 실현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두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사실 첫 번째 사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적용되는 이 직분을 제자들에게도 주시면서 제자들을 당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십니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하기를 바라시며, 이 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 것에는 큰 뜻이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시고 이 일이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열두 사도 가운데는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고, 다른 제자들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점차 드러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뜻에 따른 선택이지만 우리 눈에는 완전해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그분의 개념이 다른 것은 아닐까요? 이 열두 사도의 부족함과 잘못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시거나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의 완전하심이 오히려 더 드러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점차 그 사랑을 닮아 갑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사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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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묵상] AI는 거울일 뿐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중 제23주간 화요일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카 6,12
밤 새 의논하던 그 자리
예수님은 12명의 사도를 선택하시기 전, 산으로 올라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의 핵심이 될 제자들을 부르시는 중대한 순간, 예수님은 홀로 아버지와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존재와 존재와의 만남의 자리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누신 밤새의 기도는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존재가 존재를 향해 열려 있는, 가장 근원적인 친교의 시간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보다 먼저,
“나는 당신 안에 있습니다”라는 깊은 머묾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밤의 만남은 결국 새로운 공동체, 곧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존재와 존재가 깊이 맞닿을 때, 새로운 생명이 나오듯이,
예수님의 밤새 기도는 새로운 백성을 낳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만남은 단순한 개인적 위로가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창조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밤새 나누신 기도는 존재가 존재와 마주하는 깊은 친교였고,
그 만남 속에서 제자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호명되며,
결국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나는 생명의 자리였습니다.
AI가 하느님 자리를 대체하는 시대
요즘 대세는 AI입니다.
사람들은 건강이 걱정될 때, 혹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AI와 먼저 의논합니다.
사업 계획을 세울 때에도, 회의를 준비할 때에도, 심지어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하는 순간에도
AI의 대답이 곧 나의 답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왜일까요?
첫째, 빠른 답 때문입니다.
AI는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기도처럼 길고 긴 침묵을 견딜 필요가 없습니다.
둘째, 편안한 위로 때문입니다.
AI는 우리를 꾸짖지 않습니다. 아픔이나 약점을 드러내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부드럽게 받아줍니다.
셋째, 통제의 환상 때문입니다.
AI의 답은 결국 우리가 입력한 데이터를 토대로 나옵니다. 결국 우리가 듣고 싶은 답을 되돌려주기 마련이지요.
이것은 내가 여전히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줍니다.
하느님과의 만남 vs. AI와의 만남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느님과의 존재적 만남과 AI의 활용과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숙고해 보았습니다.
만남의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만남은 인격과 인격, 존재와 존재가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만남입니다.
자유 안에서 이루어지는 친교이며, 상호 사랑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변화시키는 만남입니다.
“나는 너 안에, 너는 내 안에”(요한 17,21)라는 표현처럼 깊은 내적 일치로 이어집니다.
AI와의 만남은 인간과 알고리즘, 존재와 비존자의 접촉입니다.
상호성이나 자유로운 응답이 아니라, 입력과 출력의 관계이고, 데이터에 의해 작동하므로, 나를 ‘알아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내 정보를 반영해 거울처럼 되돌려줄 뿐입니다.
만남의 결과는 어떠한가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만남은 변화를 요구합니다. 아브라함은 떠났고, 모세는 돌아갔고,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변화로 인해 존재가 더 깊은 사랑과 자유로 확장되고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길, 새로운 역사가 태어납니다.
만남의 끝은 생명입니다.
AI와의 만남은 안심과 확신은 줄 수 있으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의 현재 상태를 정당화하거나 강화하는 경우가 많고, 더 많은 질문, 더 많은 의존으로 이어지지만 새로운 삶을 열어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끝이 없는 순환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의 만남은 “존재가 존재를 낳는 창조적 만남”입니다.
그 속에서 자유와 사랑, 그리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합니다.
반면, AI와의 만남은 “존재가 거울을 만나는 반영적 만남”입니다.
그 속에서 편안함은 얻을 수 있지만, 근원적인 변화나 생명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재와 존재의 만남은 나를 넘어서는 사랑과 자유의 사건이고, AI와의 만남은 나를 되비추는 편리한 거울에 가깝습니다.
도구와 주인을 구분하기
물론 AI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AI가 하느님의 자리를 대체하려 할 때, 즉 인생의 근본적 질문과 존재적 고민의 상담자가 되려 할 때입니다.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정보 검색을 위해 AI를 활용하는 것과, 내 존재의 방향과 의미를 AI에게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나는 어떤 만남을 하고 있나요?
어떤 만남을 갖고 싶습니까?
오늘 나는 누구와 의논했습니까? 내 결정의 배경에는 누구의 목소리가 있습니까?
편안함을 주는 인공지능의 목소리입니까, 아니면 때로는 불편하지만 진실을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까?
나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으로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는 존재와 존재의 만남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떻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첫째, 침묵의 시간을 마련해보세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즉각적인 답을 구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 앞에 나 자신을 내어놓고 기다려보는 시간을 가져보세요.
둘째, 불편한 질문을 피하지 마세요.
AI는 절대 묻지 않을 질문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삶에서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세요.
셋째, 변화를 각오하세요.
진정한 기도는 내가 원하는 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춰가는 과정입니다. 때로는 십자가를 지라는 부르심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세요.
예수님이 밤새 기도하시며 아버지와 나누신 그 깊은 교감을, 우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그 만남을 위해, 다시 산으로 올라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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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가십니다.
밤새 기도하신 다음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이야기는 세 복음서에 다 있지만
이야기들은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마르코에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 가운데
열둘을 세워 사도로 부릅니다.
마태오에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셨는데
그들이 그대로 열두 사도로 불립니다.
루카만의 특징이 있다면
이미 많은 제자 가운데 열둘을 뽑아
그들을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고
그들 가운데 특별히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사도라는 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파견을 염두에 둔 사람들입니다.
제자라는 단어로 가르침을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면
사도라는 단어는 파견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에서는 마태오복음에서처럼
파견이 사도 선출에 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 이야기를 전합니다.
파견에 앞서
예수님께 소임을 받기 전에
사도들은 직접 파견의 필요성을 몸소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제자 가운데 자신들을 특별히 뽑으신 이유를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많은 군중을 예수님 혼자 감당하시기에는
사도들의 눈에도 힘들어 보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파견 받은 사람으로
그 일에 함께할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파견은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과 함께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도 세상과 함께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과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세상과 나누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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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9.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6,12-19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할 열 두명의 핵심 제자단을 선발하시는 장면입니다. 선발 작업을 하시기 전, 예수님은 홀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어떤 기준으로 뽑는 것이 아버지의 뜻에 부합될 지, 어떤 사람을 뽑아야 그를 통해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날 지 치열하게 묻고 또 들으신 겁니다. 그렇게 밤새 고민하신 뒤, 다음 날 새벽 당신을 따르는 제자단 전체를 산으로 부르시지요. 십계명을 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무르는 평지로 내려온 것처럼 제자들에게 내려가시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산으로 올라오게 하신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습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거룩한 장소이지요. 그 산으로 제자들을 올라오게 하심으로써, 엘리야 예언자가 자발적으로 하느님 앞에 나선 것처럼, 그들이 제발로 하느님 앞에 나오게 하신 겁니다. 당신 뒤를 따르는 제자의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극성과 자발성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서 열 둘을 뽑으십니다. 그들이 특별히 잘나서 뽑으신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들을 원하셔서 뽑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그들을 원하시고 직접 뽑으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이 드러납니다. 나를 부르신 분이 어떤 식으로 이끌어가시는가에 따라 내가 나아갈 길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이미 갖추어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뽑으시고 당신 뜻에 따라 이끌어 가시는 과정 안에서 변화되고 성장하여 사도다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늠름하고 씩씩하게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겠지요.
그렇게 뽑힌 이들에게는 크게 세 가지 임무가 주어집니다. 첫째 언제나 주님 곁에 머무를 것, 둘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담대하게 선포할 것, 셋째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능력을 거저 베풀어 아픈 이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낼 것. 그들이 그 임무들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을 이끌고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이 머무르는 평지로 내려가시어 병자들을 치유해주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렇게 직접적인 시청각 교육을 통해 제자들을 양성하신 후, 당신께서 가실 고을로 먼저 보내실 것입니다.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준비하는 ‘선구자’이자 ‘목소리’의 역할을 맡겨 파견하시는 것이지요. 그 역할과 소명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르는 충실한 제자로서 주님을 내 삶의 첫번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또한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이웃에게 드러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악을 적극적으로 피하고 선을 열심히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 곳곳으로 흘러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느님 나라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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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41
9월9일 [연중 제 2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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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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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오세찬 스테파노(연수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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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축복 중의 축복, 참 스승을 만나는 일!>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다양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여러 유형의 축복 가운데, 제가 참으로 감사드리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 축복은 내 좁은 안목을 넓혀주신 스승을 만나게 된 축복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디 그런 스승 만나기가 쉬운가요? 아무리 애를 써도, 사방을 둘러봐도, 그런 스승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런 분들께 저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은 사방에 널려있습니다. 비록 시대의 간극으로 인해 그분을 직접 만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분의 말과 생각, 인생 전체가
담긴 책들이 있지 않습니까? 좋은 책 한 권을 만나는 것은 어찌보면 좋은 스승 한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인간의 길, 참삶의 길이 무엇인지 지식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온몸으로 보여주신 스승, 부족하고 덜떨어진 나를 더 넓은 바다로, 더 광대한 지평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신 스승,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소중한 영역들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스승...
여러 축복 가운데 그런 스승을 만난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제자로 불림 받은 열두 사도들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승 중의 스승,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열두 사도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재수좋은 사람들,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의 삶, 한마디로 별 볼 일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미건조했고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 새장 안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인생, 꼬여도 어찌 이리 꼬였나?’ 하며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기를 쓰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의 삶을 한바탕 흔들어놓으십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일종의 혼동상태 앞에서 제자들은 어리둥절했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시작된 ‘깊고 심오한 삶의 이동’을 통해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는 인생의 후반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전반전과는 사뭇 양상이 다른 인생의 오후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 하느님의 정렬 상태가 전반전과는 크게 달라진 인생의 후반부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열두 제자 못지않은 행운아들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의 창조주요 구원자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스승 중의 스승, 참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에 깊이 감사드리며, 열두 사도들처럼 그분께서 남기신 어록들, 일거수일투족을 있는 그대로 추종하는 우리가 되고자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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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과분하게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사도로 부르시는 주님!>
과거 어려웠던 시절, 바자회를 자주 했습니다. 청소년 시설 운영비며 인건비를 직접 마련하다보니 늘 쪼달렸기에, 연중 치러지던 가장 중요한 행사는 기금 마련을 위한 축제나 바자회였습니다. 축제날이 다가오면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할 정도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축제 전날이었습니다. 같이 살고 있던 초등학교 꼬맹이들이 하교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저를 보고는, 자기들도 돕겠노라고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거의 도움이 안되었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도 함께 돕겠다는 그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메시아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인류 구원 사업, 당신 홀로 충분히 이행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도움이 조금도 필요없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도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 인간들을 협조자로 부르셨습니다. 엄청나고 위대한 당신의 인류 구원 사업에 별 도움 안되는 우리를 동역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 시기로 접어드신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심으로 당신의 사명이 지속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명의 제자를 사도, 다시 말해서 당신의 사절로 부르셨습니다.
그 누군가의 사절은 곧 그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유다 율법의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합법적이고도 직접적인 대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에 따르면 열두 사도는 예수님을 추종하고, 그분과 함께 지내는 것을 넘어, ‘파견된 사람’(Apostolos)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목격한 증인으로서, 그분의 사명을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할 의무를 지닌 이들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따르면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목격한 목격 증인이어야 하고, 동시에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선포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사도인 우리들이 꼭 명심해야 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사도는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사도는 다름 아닌 ‘파견 된 사람’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의 힘과 개인적 권위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들은 왕이 아니라 사절입니다. 손이 아니라 연장입니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도 직분을 수행하기에 앞서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겸손한 신원 의식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십시오. 그분은 지혜로운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고 어부들과 세리들을 뽑으시어,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와 재물, 권력과 귀한 신분에 이끌려 믿음에 드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도는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암부르시우스 교부)
오늘도 별 도움 안되는 우리들을 당신의 사도로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과연 무엇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분의 인류 구원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겠는지,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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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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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때문에 상처 받지 않는 법>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 많은 나라가 어딜까요? 이것도 역시 한국이 1위를 하였습니다. 외롭다는 말은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관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상처를 많이 받는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관계에서 상처받아야 할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상처줄 수 있는 사람은 나도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안 만나고 살면 되냐고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안 만나면 뱀만 만나며 살아야 합니다. 뱀은 자아이고 악의 세력들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처받지 않고 만날 사람을 선택하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의 반석이 될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주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당신의 기준으로 뽑지 않으십니다. 대신 그분은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불러 그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이름 붙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명단에는,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름 하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배신자가 된 유다’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장차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을 왜 뽑으셨을까요? 이것은 신학적으로 풀 수 없는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밤새워 기도하고 골몰히 생각해서 유다를 뽑으셨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기대하셨을 것이고 그러면 유다가 배신하였을 때 상처 입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기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사람을 만나되 상처 입지 않는 비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누구를 뽑을까?’ 하고 깊이 고민하신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는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주시는 사람을 알아보게 해 주십시오.’ 바로 이 마음으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왔거나, 형제의 인도로 왔으니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증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어땠을까요? 아마 예수님 마음에는 전혀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를 뽑으신 이유는 단 하나, 밤샘 기도 중에 ‘이 사람 또한 아버지가 너에게 보낸다.’라는 확신을 얻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을 뽑으면 후회가 없습니다. 나중에야 ‘아, 그래서 아버지가 그를 보내셨구나!’ 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기도를 통해 나의 생각을 비우지 않고, 오직 나의 지식과 경험만으로 사람을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결혼할 배우자를, 회사의 직원을, 그리고 우리 본당의 봉사자를 말입니다. 그 선택은 종종 후회와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여기, 자신의 뛰어난 안목과 생각만으로 사람을 뽑았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입니다. 1983년, 젊은 스티브 잡스는 자신이 세운 애플을 더 큰 회사로 키우기 위해 전문 경영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당시 펩시콜라의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찾아갔습니다. 스컬리는 마케팅의 귀재였고, 잡스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는 스컬리에게 역사에 남을 유명한 말로 그를 유혹했습니다. “남은 인생을 설탕물이나 팔면서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시겠습니까?”
스컬리는 잡스의 열정과 비전에 감동하여 애플의 CEO가 되었습니다. 잡스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허니문은 길지 않았습니다. 현실적인 경영인 스컬리와 이상주의적인 예술가 잡스는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잡스는 스컬리가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분노했고, 스컬리는 잡스가 회사를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1985년, 존 스컬리는 이사회를 소집하여, 스티브 잡스를 그가 세운 애플에서 쫓아내는 비극을 연출합니다. 잡스는 자신의 똑똑한 머리로,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 사람을 바로 자기 손으로 뽑았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일로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요? 그 이유 때문인지 그의 몸 안엔 암세포가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반면, 나의 생각을 비우고 나보다 더 뛰어난 지혜에 의탁하여 사람을 뽑았을 때,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더라도 나중에는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한창일 때, 북군의 총사령관 자리는 계속해서 패배의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 링컨은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해야만 했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인물은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참모가 그의 임명을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그랜트는 안 됩니다! 그는 지독한 술주정뱅이입니다. 전투 중에도 술에 취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로 그랜트는 알코올 중독 문제가 심각했고, 성격도 무뚝뚝했습니다. 링컨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그는 결코 마음에 드는 인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의 생각을 비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했습니다. ‘이 사람은 계속해서 이기고 있다.’ 링컨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하느님께서 뽑으신 증거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는 반대하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랜트가 마시는 위스키 상표가 무엇인지 알려주시오. 내가 다른 장군들에게도 한 통씩 보내주겠소.” 링컨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줄 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랜트는 남북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끌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이유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구원 사업을 위해 누구를 보내주시는지를 알아듣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뽑을 때, 내 생각과 내 마음에만 의지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됩니다. 나의 능력은 한계가 있고, 나의 이해력은 편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뽑아서 기대를 하기 때문에 상처도 받습니다. 그렇게 점점 두려워지고 고립되고 외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귀족이었던 하느님의 종 예카테리나 데 후에크 도허티(Catherine de Hueck Doherty,
1896-1985) 여사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고 캐나다로 망명했습니다. 그녀는 가난과 싸우며 살다가, 어느 날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너의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장 작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라.’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녀는 캐나다의 시골 마을 컴버미어(Combermere)에 ‘마돈나 하우스’라는 작은 집을 짓고,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그녀는 사람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저 문을 두드리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손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상처 입은 젊은이, 길 잃은 영혼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생각으로 그들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들 안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녀의 순종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그녀가 우연처럼 받아들였던 그 상처 입은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고 위로하며, 오늘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거대한 ‘마돈나 하우스’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제발 나를 믿지 맙시다. 나를 믿으면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기 위해 선택의 상황 앞에서 기도합시다. 주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모든 책임을 주님께 지웁시다. 그분의 생각은 나의 생각보다 넓고 깊고 강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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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2일, 교구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14번째 인사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인사이동은 늘 규정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 가운데 두 번은 교구장님의 특별한 면담이 있었습니다. 적성 성당으로 갈 때는 “성당이 작고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라고 하시며 “그래도 잘 지낼 수 있을 거야”라고 격려해 주셨고, 저는 실제로 그곳에서 참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 한 번은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으로 갈 때였습니다. 비자 문제로 사전에 알려 주셨고, 저는 본당 사목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신 주교님께서 저를 평화신문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도 새로운 사목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34년 동안 맡겨진 소임 하나하나가 저에겐 꽃자리였습니다. 제가 인사이동을 할 때마다 마음에 새기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입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종종 지금 내가 있는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해서 가시방석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꽃자리인지, 가시방석인지는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마음을 지배하면 어디든 가시밭이 되고, 겸손과 감사가 마음을 채우면 그 자리는 곧 꽃밭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만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가시밭에서도, 돌밭에서도, 심지어 길가에서도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생명의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불가마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매를 맞고, 굶주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도 옥중에서 복음을 전하며 편지를 남겼습니다. 그분들의 자리는 감옥이었고, 불가마였고, 죽음 앞이었지만, 그곳이 바로 꽃자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받으셔야 할 분이, 스스로 기도 하셨습니다. 발 씻김을 받으셔야 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 앉으셔야 할 분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기도와 섬김, 십자가는 결국 부활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꿈을 이루시기 위해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제자들의 이름을 지금도 외우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전했고, 병자를 고쳤고, 마귀를 쫓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었고, 그 꿈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신앙은 뿌리를 내리는 일입니다. 표면이 아니라 깊이입니다. 바람이 분다고 쓰러지지 않고, 땅이 흔들린다고 뽑히지 않는 믿음이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이 자리가 불편하고, 답답하고, 때로는 외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꽃자리라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불평 대신 감사로, 원망 대신 기도로, 권리 대신 섬김으로 살아갈 때, 그 자리는 영원한 생명의 꽃자리로 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꿈을 이루는 제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꽃자리로 바꾸어가는 복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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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두 명을 뽑아 사도로 세우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뽑으신 데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자 하는 뚜렷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가운데 많은 지파가 소멸하고, 남은 지파도 서로 합쳐져 겨우 두 지파 정도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이라는 상징적 숫자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회복시키시어 이스라엘 구원에 관한 하느님 약속을 실현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열두 제자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사실 첫 번째 사도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적용되는 이 직분을 제자들에게도 주시면서 제자들을 당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십니다. 또한 여기에는 당신의 구원 사업을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도 함께 하기를 바라시며, 이 사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시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 것에는 큰 뜻이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시고 이 일이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 열두 사도 가운데는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 있고, 다른 제자들도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점차 드러냅니다. 완전하신 하느님 뜻에 따른 선택이지만 우리 눈에는 완전해 보이지 않습니다. 완전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그분의 개념이 다른 것은 아닐까요? 이 열두 사도의 부족함과 잘못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신 것을 후회하시거나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십니다. 이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의 완전하심이 오히려 더 드러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점차 그 사랑을 닮아 갑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사랑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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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12-19: 열두 제자를 뽑으시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12절)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기 위해서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로 임명하셨다. 그분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으시고 어부들(마태 4,18 참조)과 세리들(마태 10,3 참조)을 뽑으셨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제자직은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게 해주셨다. 이것이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 실행하여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닮을 수 있고,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고,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이다. 항상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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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산을 오르내리다>
루카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예수님과 군중)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내리다>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오르다
하느님을
만나니
사람을
만나러
산에서
내려오다
사람을
만나니
하느님을
만나러
산에
오르다
그리 오르고
그리 내려오다
그리 내려오고
그리 오르다
산은
늘 곁에 있어
산에
늘 오르니
하느님과
늘 함께
산은
늘 곁에 있어
산에서
늘 내려오니
사람과
늘 함께
산을
오르며
하느님과
늘 함께하니
사람과
늘 함께
산에서
내려오며
사람과
늘 함께하니
하느님과
늘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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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모든 신앙인은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2-19)
1)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사도들을 뽑으신 이유와 목적을 잘 나타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증언’하는 일을 하라고 사도들을 뽑으셨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 되어라.”, 또는 “너희는 이 일을 증언하여라.”입니다. ‘이 일’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모두 가리키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수난, 죽음, 부활’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을 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는데(마태 4,17),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예수님이 곧 메시아이시며,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복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2) 사도들이 마티아를 사도로 선출할 때에도 사도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예수님 부활을 증언하려면 그 전에 먼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증언하고 설명해야 하고,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일들을 모두 증언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부활만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을 증언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됩니다.
3) 묵시록에서는, “열두 사도는 새 예루살렘(하느님 나라)의 열두 주춧돌”이라고 말합니다(묵시 21,14). 바오로 사도는 ‘교회는 하느님의 거처’이며 ‘사도들은 그 건물의 기초’ 라고 말합니다.(에페 2,20-22)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에(1코린 12,27), 사도들이 하는 일은 곧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직책과 직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든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선포와 증언을 믿고 받아들여서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믿음을 증언하면서 사도들의 일을 이어받게 됩니다.>
4)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말로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말’과 함께 ‘삶’으로도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말’보다 ‘삶’이 더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도들의 선포와 증언을 믿는 것은, 바로 그들의 ‘삶’과 ‘죽음’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로 복음 선포가 되고,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우리도 그렇게 ‘나의 삶’으로, 예수님의 복음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진리’라는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만일에 자신이 믿는 것으로만 그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자신의 신앙을 감추면, 마치 등불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꺼지는 것처럼 신심이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신앙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어디서나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생생한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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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품이 커서 스승이다>
주님께서 '힌남노’ 초강력 태풍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기를 청합니다.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도 허물도 많고,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가 6,12)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중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기에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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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따로 뽑으시는 장면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을 뽑으시기 전에 그분께서 보여 주신 행동은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당신의 최측근이 될 사람들을 뽑으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자주 조명합니다.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고 계셨고, 그때 성령께서 내리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3,21-22 참조)
예수님께서는 바쁜 일정 중에도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셨습니다.(5,16; 11,1 참조)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장면의 배경에도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9,18 참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실 때도 그분께서는 기도하고 계셨습니다.(9,28-29 참조) 수난을 앞두고 올리브산에 가셔서 다음과 같이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는 중에도(“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23,34]), 심지어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에도(“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따로 기도하실 필요가 없어 보이는 그 전능하신 분께서 그토록 많은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특히 중대한 일을 앞두시고서는 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도, 거룩한 변모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도, 붙잡히시기 전에도, 그리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도, 아드님께서는 아버지와 끊임없이 대화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나약한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하여야 하겠습니까?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중요한 결정을 하여야 할 때,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아버지 하느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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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폴레옹 황제,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티무르 왕, 아니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뽑으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1위는 13세기 몽골의 칭기즈 칸입니다. 그의 영토는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러시아 남부, 동유럽 일부까지 약 2,400㎢였다고 합니다.
이 칭기즈 칸은 자기의 가장 큰 무기를 ‘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귀가 나를 가르쳤다.”라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지요. 그는 다른 이의 말뿐 아니라, 자기 내면의 말까지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잘 들었기에 단일 군주로 최대 규모의 영토를 정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뜻하는 영어의 ‘stupid’의 여러 뜻 중 하나는 ‘듣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듣지 않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가 참 많습니다. 세상의 소리, 진리의 소리, 자기 양심의 소리…. 그런데 엉뚱한 것만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말만 들으려고 하고, 자기를 반대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특히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나만 사랑하라는 것으로 왜곡해서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소리를 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도 들으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들으셨고,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주 따로 외딴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병으로 힘들어하고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낫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점이 오늘 복음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열두 사도를 뽑기 전에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십니다. 잠깐 하느님께 안부 인사드렸던 것이 아닙니다.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오랫동안 기도하시며 하느님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많은 군중이 몰려왔습니다. 복음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여기도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만이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까요? 주님께서도 그렇게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기도하시는데, 우리는 들으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바람만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워낙 바쁘신 분이라 용건만 간단히 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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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예수님께서 오늘 12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뽑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시며’ 뽑은 사람들입니다. 우연히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도하시어 뽑으셨기에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를 뽑아 주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이곳에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는 뽑혔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우리는 뽑혔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고통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사도직의 소명이기에 우리는 뽑혔습니다.
우리는 아주 중요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뽑혔습니다. 너무나 소중한 주님의 일이기에 그 일은 거룩합니다. 목숨까지 바치며 해야 하는 주님의 일은 우리 삶의 목적이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뽑으셨고 우리는 응답하였습니다.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새기겠다고 주님의 제단 앞에서 선언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뽑으셨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 축성되었습니다.
주님 안에 축성된 우리는 자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축복을 받기에 거룩한 표지를 입게 된 사람들입니다. 축성되어 봉헌된 우리의 삶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의 징표들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를 드러내도록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하느님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뽑으시어 축성되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삶을 봉헌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 뽑으신 우리는 그리스도를 입고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콜로새서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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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신부님]
신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어언 2년이 지나자 자꾸만 바깥세상이 궁금했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아졌습니다. 처음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의 설레는 마음은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 성소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외출이 되지 않는 신학교 생활은 답답했고 그곳에서의 규율이 모두 저를 억압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큰 문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지, 내 귀에 목소리라도 한 번 들려주신다면 기꺼이 성직의 길을 걸어 갈 텐데 꽁꽁 숨어있는 모습이 야속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많은 걸 포기했는데 정말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의심과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던 중, 제 앞에 놓여있는 성경이 보였고,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을 거라면 눈으로 읽게라도 해 달라며 성경을 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너희가 나를 뽑아 내세운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내세운 것이다.”라는 요한 복음 15장 16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구절을 보고 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느님이 인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내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닌 하느님이 나를 선택했기에 내가 신학교에 있음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이란 것이 바로 이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직접 선택해서 천주교를 믿게 된 것 이라 생각하고 나의 의지로 미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르심이 완성되는 데에 있어서 인간의 응답은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 응답을 위해서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추천, 부모님의 인도, 내 마음 속의 동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응답에 앞선 주님의 부르심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이들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누군가에게 존중받기엔 힘든 인물들이었습니다. 고기 잡는 어부, 매국노라 불리던 세리, 이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열성당원 등등 오히려 갈등과 실수의 위험을 안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뒤 이 부족한 이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밤을 새워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는 것. 이 대목은 저에게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를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부르실지 예수님께서는 결코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언제나 신중하게 우리와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하느님의 견고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부족한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자리로 불러내시고 은총을 가득히 전달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군중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뒤에서 그분을 돕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는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 이라는 더욱 큰 책임과 권한이 맡겨집니다. 이러한 우리의 구체적인 임무를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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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신 장면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2-13)
이는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를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거룩한 곳, 시나이 산으로 불러올리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산으로 불러올리시어 그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그분께서 ‘먼저’ 부르시고 뽑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르신 이, 뽑으신 이가 누구신가? 입니다. ‘누가’ 부르시고 뽑았는지가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부른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응답한 이의 삶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부름을 받은 이는 대통령이 부여한 일을 하며 대통령의 영광을 입은 것이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이는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나 자신이 누구에게 부르심 받았고 누구에게 뽑힌 이인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시기에 앞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자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밤 새워 기도하여 뽑은 이들은 능력 있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힌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뽑힐만한 충분한 자격이나 조건들을 갖춘 거룩한 이들이었기 때문에 뽑힌 것이 아니라, ‘뽑혔기에 거룩해지게 된 이들’인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뽑힌 사도들은 이름 없는 무명인들이었고, 뽑힌 후에도 그다지 특별한 내력을 전해주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사도”란 그렇게 ‘이름 없이 주님의 뜻을 위해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기나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그러하리라 여기면 될 일일 것입니다.
사실, 교회는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둥이 건물을 지탱해주고 있다면, 그 기둥을 받치고 있는 것이 기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초는 잘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대단히 겸손하지 않으면 튼튼한 기초가 될 수가 없고, 또한 공동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그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교회의 기초인 사도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 이들로 뽑혔나 봅니다. 마치 기초가 건물을 떠받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듯이, 그들은 타인을 떠받들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를 뽑으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들과 함께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해 나가십니다. 오늘 우리도 겸손한 자로, 예수님과 함께 세상 안에서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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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주님!
하고 싶은 바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라 하신 바를 행하고, 아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알려주신 바를 선포하는 겸손함을 주소서!
이름 없이도 사랑하고 드러나지 않아도 당신 뜻을 실행하며, 이 세상에 당신의 나라가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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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기도, 일, 공부>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시편145,8)
말그대로 대혼돈의 시대입니다. 기후위기, 정치위기, 사회위기, 교육위기, 가정위기 등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총체적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좀처럼 길이, 답이, 희망이, 방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국내 안팎 현실이 그러합니다. 매일 인터넷 뉴스를 통해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저절로 나오는 절박한 물음입니다. 언젠가 열심한 분과 주고 받은 문답이 생각납니다.
“신부님은 좌파입니까 혹은 우파입니까?”
“저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로, 제 신원은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입니다.”
극단의 확신에 뿌리 내린 눈먼 무지의 이단적, 광적, 맹목적 위험천만한 영적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뿌리 내린, 기도와 일과 공부가 균형과 조화를 이룬 안정과 평화의 정주의 삶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요즘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날로 극우화되어 가는 심각한 위기의 현실은 바로 영성의 핵심인 균형과 조화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관용과 자제의 삶도 균형과 조화의 영성에서 나옵니다.
새삼 베네딕도회의 영성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작금의 현실같습니다. 인공지능(AI)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교회의 보편적 영성이요, 한마디로 기본에 충실한 균형과 조화의 온전한 영성이 베네딕도회 영성입니다.
바로 이에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살기위해, 영혼의 살기위해, 균형과 조화, 내적 안정과 평화의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요 기도에는 늘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나중에 남은 얼굴은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입니다. 기도에는 신비가가되고 일에는 전문가가되고 공부에는 학자가 되라는 말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말씀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매일 스스로 마주할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을 가지라. 인간에게는 자기만의 외딴곳이 필요하다.”
우선적인 순위가 기도요 삶의 위기나 중대한 일을 앞뒀을 때 어김없이, 지체없이 외딴곳을 찾았던 주님입니다. 마침내 개인의 복음 선포 활동에 한계를, 공동체의 필요를 느낀 예수님은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기도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며 그분 안에 깊이 머물러 친교의 일치를 이뤘던 관상기도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21세기 대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말처럼 자발적 기도를 위한 고독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 된 세상입니다.
에수님은 밤샘기도후 날이 새자 당신 제자들가운데 열둘을 뽑아 당신의 하늘나라 복음 선포 활동을 함께 할 이들을 뽑으시니 바로 열두 사도들 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면모들이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당신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 온 군중들과 직면하십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 애썼고 그분에게 힘이 나와 손을 댄 모든 사람이 치유됩니다. 그대로 기도의 힘, 믿음의 힘, 하느님의 힘을 가리킵니다. 새삼 예수님 일상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기도의 일상화, 기도의 생활화를 이뤄준 외딴곳의 기도처였음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중심과 질서’를 잡아주는 우리 가톨릭교회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가톨릭 교회 신자들에게 영적 주식과 같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가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전례영성이야말로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만들어 주는 우리의 보편적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전례영성의 토착화, 생활화를 통해 바오로 사도가 콜로새 신자들에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충만한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혼돈의 위기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세상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복음적 삶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험하는 영적 현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균형과 조화’의 정통신앙, 정통영성에, 명품종교,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만들어 줍니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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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화하고 육화하는>
오늘 복음은 제자들 가운데 열두 사도를 뽑으시고,
이제 사도들과 함께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는 내용이지만 산 위에서 기도하시고, 사도들을 뽑고, 사도들도 거기로 부르신 다음 사도들과 산 위에서 내려와 평지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산 위의 행위와 산 아래 평지의 행위가 나뉘어 있는 것인데 저는 이것을 신화神化의 행위와 육화肉化의 행위로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꿔서 얘기하면 매우 세속적인 우리는 산 위로 올라가 주님처럼 기도함으로써 신화되고, 신화가 된 다음에는 더 이상 산 위에 머물지 말고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데 바로 육의 할례와 그리스도의 할례와 세례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란 무엇입니까?
표피를 떼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세례란 무엇입니까?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을 떼어내고 무엇을 씻어내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그것은 죄를 씻어버리는 것이지만 죄를 씻어버리는 것을 조금 구체적으로 보면 옛날 말로 삼구三仇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삼구란 옛날 교리로 세 가지 원수를 말하는 것인데 세속, 육신, 마귀입니다.
먼저 세속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속세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속世俗과 속세俗世는 같은 두 글자, 세와 속으로 이루어졌고 두 글자를 뒤집어놓은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출가出家하다와 가출家出하다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가출하는 것과 속세를 떠나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이고, 현실 도피적인 것인 데 비해
출가하는 것과 세속을 끊어버리는 것은 세상을 떠나지 않고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세상의 패배자로서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됨으로써 세상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잘 이해해야겠습니다.
옛날에는 육신을 도매금으로, 곧 그 자체로 죄악시하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고 편하고 감각적인 만족을 구하는 육신, 하느님께로 가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육신을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도 권고에서 육신을 통하여 우리가 죄를 짓기는 하지만 우리는 육신을 다스릴 수 있기에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하느님께 함께 가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마귀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요즘 세상에 마귀가 어디 있냐고 하는 분이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세례 갱신 때 하듯이 마귀의 허례허식을 끊어버리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성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기도와 헌신의 영으로 육의 영을 몰아내고 주님의 영을 모시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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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루카 6,12.13)
<제자와 사도!>
오늘 복음(루카 6,12-19)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말씀과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많은 군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붙여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루카 6,14-16)
그들은 이렇게 하느님이신 예수님으로부터 '특별한 제자로' 뽑혔습니다. 그것도 산으로 나가셔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뽑혔습니다.
열두 사도들의 모습은 어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사람도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이유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었고, 그 죽음의 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동적인 움직임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보다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뽑힌 열두 사도는 '성령강림 후' 본격적으로 사도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많은 군중이 사방에서 예수님께로 몰려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영과 육의 아픔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영과 육의 건강을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됩시다! 그래서 영과 육의 건강을 다시 찾고, 더 나아가 너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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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루카 6,13)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열두 사도들을
뽑으시고
불러주신
참으로 고마우신
은총입니다.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향한
부르심입니다.
기도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열두 사도의
선택은
은총의 부르심이자,
공동체적 삶이며,
세상 속 파견이고,
다양성 안의
일치를 살아내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특권이 아닌
봉사이며,
모든 봉사는
기도로
뿌리내릴 때
참된 열매를
맺습니다.
열둘은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였습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예수님의 선택은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새 계약 공동체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선택은
삶의 방향을
새롭게 열어가는
구체적인 삶의
길이 됩니다.
우리의 삶도
선택과 응답을 통해
새로워지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진정한 자유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책임 있게
응답하는 데
있습니다.
부르심은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세상으로
향하는 파견의
사명입니다.
작은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서
신앙인의 길을
만들어 갑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 부르심을
증언하며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선택은 은총이며,
사명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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