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사천법문중에서 염불법을 부촉하시다!
석존께서 관무량수경에서 위제희부인의 청에 따라 13정관을 설하시고, 무문자설로 3복9품을 설하셨습니다.
제7 화좌관에서 석존의 위신력으로 위제희부인과 대중들이 무량수불 친견했고,
제9관에서 一一光明,遍照十方世界,念佛衆生,攝取不捨로 염불법을 설하시고,
제12관에서 12부경(部經)과 합치되는 묘법을 연설하셨고,
상품중생(上品中生)에서는 반드시 방등경전(方等經典)을 수지(受持)하고 독송하지 않더라도 대승의 뜻을 잘 이해하라고 설하시고,
상품하생(上品下者)도 역시 인과(因果)법을 설하시고,
중품상생(中品上生)에서 5계(戒)를 수지하고 8재계(齋戒)를 지니며, 모든 계를 받아 지키며, 5역(逆)을 짓지 않음과 고(苦)와 공(空)과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연설하시고,
중품하생(中品下生)에서는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부모를 효도로써 봉양하고, 세상에서 인의(仁義)의 행함을 설하시고,
하품상생에서 12부경의 이름을 들은 까닭에 1,000겁의 중죄가 녹아내리고,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면 50억겁동안의 생사죄가 없어짐을 설하시고,
하품하생에서 부처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일순간에 80억 겁 동안 지은 생사의 죄가 소멸함을 설하시고,
임종의 순간에 나무아미타불 염불로 80억 겁동안의 생사죄가 없어지고,아미타불의 열 가지 위신력을 찬탄하여 말하고, 저 부처님의 광명이 지닌 신통력을 널리 찬탄하며, 또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을 찬탄하면, 그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8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는데,
나무아미타불을 염념불사하면 무량 겁 동안의 생사죄가 없어짐을 설하시고,
하품상생에서 염불법을 설하시고 마지막인 하품하생에서 염불법을 설하셨습니다.
석존께서 세상에서의 인의와 인과법,고공무상무아법,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 대승법,염불법 등 팔만사천법문을 설하시고 마지막에 팔만사천법문중에서 아난존자에게 염불법을 부촉하셨습니다.
평소의 나무아미타불 염불 일성으로 80억겁의 생사중죄를 소멸하는 것도 불가사의하나 결국 무량겁동안의 생사죄가 없어지고,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지럽고 난잡함이 특성인 중생들의 망념은 어디로 튀어 타락하여 윤회고를 받을지 모르니 항상 오직 전일하게 나무아미타불 염법만을 집지하도록해서 중간에 내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간절한 노파심으로 설하셨습니다.
이 인연으로 한중생도 빠짐없이 모두 왕생성불할 수 있도록 극히 원만하게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부처님의 지혜는 부사의합니다.
이런 지극히 대비심이 많은 원만한 법을 어찌 친견할 수 있었는지 감은할 따름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관무량수경]
부처님께서 아난과 위제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고뇌를 없애는 법을 분별하여 해설하리라. 너희는 이를 기억하였다가 널리 대중들을 위해 분별하여 해설해 주어라.”
부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실 때 무량수불(無量壽佛)께서 공중에 머물러 계셨고, 관세음(觀世音)보살과 대세지(大勢至)보살 두 분이 좌우에서 무량수불을 모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 광명이 눈부시게 빛나서 이루 다 볼 수 없었으니, 백천의 염부단금색(閻浮檀金色)으로 비교할 수 없었다.
이 때 위제희가 무량수불을 뵙고 나서 두 손을 무량수불의 발에 대고 예배드리고 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부처님의 힘으로 인하여 무량수불과 두 보살님을 뵈었습니다. 그런데 미래의 중생은 어떻게 해야 무량수불과 두 보살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제9관]무량수불에는 8만 4천 종류의 상호가 있으며, 하나하나의 상호마다 각각 8만 4천 개의 수형호(隨形好)가 있으며, 그 낱낱의 상호 중에는 다시 8만 4천 개의 광명이 있고, 낱낱의 광명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 염불하는 중생을 버리지 않고 거두어들이느니라.
모든 부처님에게서 나는 소리가 12부경(部經)과 합치되는 묘법을 연설하는 것을 듣고 선정에서 나왔을 때에도 잘 기억하고 잊지 말라.
"하품상생(下品上生)이라는 것은 혹 어떤 중생은 비록 방등경전(方等經典)을 비방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많은 악업(惡業)을 짓는데,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악법(惡法)을 많이 지으면서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다가 목숨이 끝나려 할 때 선지식을 만나 그가 대승 12부경(部經)의 첫머리 이름을 말해 주면, 이와 같은 모든 경전의 이름을 들은 까닭에 1천 겁 동안 지은 지극히 무거운 악업이 없어지느니라.
지자(智者)가 다시 합장하여 손을 마주잡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라고 가르치면, 부처님 명호를 부른 까닭에 5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가 없어지느니라.
"하품중생(下品中生)이라는 것은, 혹 어떤 중생이 5계나 8계나 구족계를 헐뜯거나 범하는 경우이니라.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승가의 재물을 훔치고, 공양 받은 승려의 물건을 도둑질하며, 청정하지 않은 설법을 하면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온갖 죄업을 저지르고도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장엄한다면, 이와 같은 죄인은 악업으로 인하여 마땅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나니, 그가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 지옥의 수많은 불꽃이 일시에 몰려들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 때 선지식을 만나 그 선지식이 대자비로써 이 사람을 위하여 아미타불의 열 가지 위신력을 찬탄하여 말하고, 저 부처님의 광명이 지닌 신통력을 널리 찬탄하며, 또 계(戒)·정(定)·혜(慧)·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을 찬탄하면, 그 사람이 이 법문을 듣고 나서 80억 겁 동안의 생사의 죄를 소멸하느니라.
"하품하생(下品下生)이라는 것은, 혹 어떤 중생이 불선업(不善業)과 5역(逆)과 10악(惡)을 지어 온갖 착하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악업으로 인하여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져 여러 겁을 거치면서 무궁한 고통을 받을 것이니라.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 선지식을 만나 그가 여러 가지로 안심시키고 위로하며 그를 위하여 미묘한 법을 말해 주고 염불(念佛)하도록 가르치느니라. 그러나 그 사람이 고통으로 핍박받아 염불할 경황이 없으므로, 선우(善友)가 다시, '그대가 만일 염할 수 없다면 무량수불(아미타불)을 부르도록 하라'고 하면,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열 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면, 부처님 명호를 부른 공덕으로 일순간에 80억 겁 동안 지은 생사의 죄가 소멸하느니라.
그리하여 목숨이 끊어질 때 금련화(金蓮花)가 마치 태양처럼 그 사람 앞에 있는 광경을 보게 되고, 한 찰나에 곧 극락세계의 연꽃 속에 왕생하느니라. 12대겁(大劫)을 다 채우면 바야흐로 연꽃이 열리고, 꽃이 필 때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대비(大悲)한 음성으로 그 사람을 위하여 실상(實相)을 자세히 말해 주어 죄법(罪法)을 없애게 해 주느니라. 그러면 듣고 나서 환희하며 곧 보리심(菩提心)을 내는데, 이를 하품하생이라고 하느니라.
"아난아, 이 경의 이름은 극락세계의 무량수불과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관하는 경[觀極樂國土無量壽佛觀世音菩薩大勢至菩薩]이라고 이름하고, 또 업장을 없애고 모든 부처님 앞에 태어나는 경[淨除業障生諸佛前]이라고도 이름하느니라. 그대들은 마땅히 잘 수지하여 잊지 말라. 이 삼매를 행하면 현재의 몸으로 무량수불과 두 대사(大士)를 보게 될 것이니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단지 부처님의 이름과 두 보살의 이름만 듣기만 하여도 무량 겁 동안 지은 생사의 죄가 없어질 것이거늘, 하물며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憶念]이겠느냐? 만일 염불(念佛)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곧 사람 가운데서 분다리화(芬陀利花)와도 같으니,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그의 훌륭한 벗이 될 것이며, 마땅히 도량에 앉아 부처님의 집인 극락세계에 태어날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말을 잘 지니도록 하라. 이 말을 지니라는 것은, 곧 무량수불의 명호를 지니라는 것이니라."
정토종 행자의 시대감과 사명감 (중)
[淨傳스님]
■ 제종이 정토로 회귀하는 시기
이어서 당나라 말기 이후부터 쭉 내려와서 청나라 말년·민국 초년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을 거치면서 중국불교는 제종(諸宗:모든 종파)이 정토로 융합되고 회귀하는 그러한 역사적 시기로 진입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판교가 있었기 때문에 각 종파의 특색은 비교적 분명했습니다. 이어서 상호간에 교의를 천명하고 해석할 때 피차간에 교차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요. 마치 방금 드린 비유에서 건물의 층수와 구조를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건축자재를 말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건축자재를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시공방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각 종파의 교의敎義 사이에는 융통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겨난 것이고, 비록 융통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각 종파의 입장에 서서 여전히 본종의 해석방법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중생들의 근기가 점차적으로 어둡고 둔해져서 각 종파의 조사선지식들은 모두 한결같이 정토로 인도하셨고, 잇달아 본종의 인연 있는 신도들을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인도하셨지요. 예컨대 천태종의 지자대사님 같은 경우에는 『관경소』『아미타경의소』『정토십의론』등을 지으셨는데, 천태의 교리로써 정토를 해석하셨고, 최후에는 길상와吉祥臥의 자세로 서방정토에 왕생하셨습니다. 화엄종의 4조이신 징관대사님께서도 『관경소』를 지어서 정토신앙을 선양하셨고, 선종의 수많은 조사대덕님들께서도 모두 정토법문을 제창하셨으니, 송나라의 영명연수대사님 같은 경우 연종의 6조로 존중받았고, 동시에 그분은 선문 법안종法眼宗의 3조이기도 하셨습니다.
제종의 회귀가 정토법문을 장대 시켰다
이렇게 되다 보니 어떠한 추세를 형성했을까요? 바로 모든 종파가 정토로 회귀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회귀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토법문을 신속하게 장대壯大 시키고 왕성한 기세로 발전시켰다는 점입니다. 이는 마치 수많은 지류들이 장강에서 합류하면서 강물이 아주 넓게 변한 것과 같습니다. 선종의 조사님들께서도 염불을 말씀하시면서 “수행은 염불이 온당하다”고 하셨고, 천태종에서도 염불을 말하면서 “교학은 천태를 따르되 수행은 정토로 돌아간다”고 하셨으며, 『반야경』을 공부하는 스님들께서도 “교학은 반야를 따르되 수행은 정토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고, 『화엄경』을 공부하는 스님들께서도 “교학은 화엄을 따르되 수행은 정토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셨으며, 남산 율종에서는 계율을 홍양하며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시지만 역시 “수행은 정토로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각종 각파의 선지식들이 모두 인연 있는 중생들을 서방극락세계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하셨기에 정토문이 굉장히 보급되고 굉장히 광대해진 것입니다.
현재 모두들 다 같이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것은 거의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어서 다들 모두 똑같은 인식과 지견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모든 종파의 회귀가 정토법문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제종의 회귀가 정토의 종지를 흐려놓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말한다면 제종의 회귀도 역시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정토종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정토종’이라는 개념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들 아마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정토법문이 이렇게 발전되었는데, 어떻게 정토종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토법문’과 ‘정토종’ 이 두 가지 명사가 대표하는 함의에 대해 일반 신도님들은 그다지 구별을 하지 않고, 심지어 수많은 스님들조차도 구별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정토법문이 바로 정토종이고 정토종이 바로 정토법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실 교리의 분판으로부터 말한다면 엄격한 구분이 있어서 법문과 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종’은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이후에 형성된 일대 특색이어서 중국에만 있고 인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법문’은 그렇지가 않아서 인도에서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석가모니불께서 8만4천 법문을 설해주셨기에 ‘법문무량서원학’이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우리는 ‘종도 무량하게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중국에는 8대종 또는 10대종만 있었기에 종은 아주 적습니다.
종은 조사님들께서 창립하신 것이고, 법문은 석가모니불께서 드러낸 것이기에 근원이 다릅니다.
물론, 조사님들께서 종파를 창립하신 것 역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 의거한 것이기는 하나, 아무튼 그것은 조사님들께서 창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법문은 굉장히 많아서 이른바 8만4천이나 되지만 종은 그렇게 많지가 않습니다.
나아가 종은 모든 법문에 대해 분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법문자체에서, 예컨대 ‘나는 정토법문을 닦는다’, 혹은 ‘나는 참법을 닦는다’, 혹은 ‘나는 좌선을 한다’, 혹은 ‘나는 지계를 한다’고 말할 때,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수행하는 법문들입니다. 법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법문마다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서 당신은 당신대로 배우고 나는 나대로 배우므로 피차간에 분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이 형성되고 나면 다르지요. 종사(종파를 창건한 조사)께서는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모든 법문에 대해 분판을 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신의神醫가 남겨 둔 약방에 대해 분류를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약방들은 전염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이 약방들은 뼈와 관련된 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이 약방들은 무슨 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따라서 종은 모든 법문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리 있는 분판을 함으로써 본종의 종지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문자체는 분산되어 있는 것이고 각자 근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만약에 정토종이라는 관념이 없다면, 그가 정토법문을 배우는데 있어서 마음속에 자신이 없게 됩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어느 것이 맞습니까? 왜 이렇게 해야 하고 왜 저렇게 해야 합니까? 실상염불도 염불이고, 관상觀想염불도 염불이고, 관상觀像염불도 염불이고, 지명염불도 염불이며, 석가모니불께서 설하신 삼복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는 것을 포함해서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정토법문인데, 이런 것들을 정토법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신앙하는 정토법문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제종이 정토로 회귀하면서 당연히 각자의 교리로써 정토를 해석하였기에 이로 인해 정토법문에서 여러 가지 색깔이 잇달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참선을 좋아하고 당신은 독경을 좋아하고 그는 다라니를 좋아하므로 전부 그것을 회향하여 왕생을 구하고는 있지만, 왜 좋아하는지를 모르고, 어떤 방법이 왕생의 정인인지는 더욱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정토종이라는 관념이 없는 것입니다.
왕생하는 일은 개인의 취향을 따르는 게 아니다
왕생을 하는 일은 개인의 취향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마치 환자가 약을 먹을 때 의사의 진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정해서 “내가 병이 나서 이 약을 지으러 온 것은, 내가 이 약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약의 포장이 보기 좋고 이 약의 맛이 달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당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불법의 수행으로부터 말한다면, “내가 이 법문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회향하여 왕생한다”는 것은 엄숙하고 진지한 태도가 아니고 또한 여법하지도 않습니다.
종에 대한 관념이 생기고 나면 우리는 엄격한 분판이 있게 되므로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함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선생님이 당신에게 무슨 약을 주면 무슨 약을 먹어야지 환자 자신의 기분을 따르는 게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각 종파의 조사님들은 의사의 직책을 이행하며 석가모니불의 이런 약방들을 가지고 분판을 하시어 어느 종류의 약방이 어느 부류의 중생과 대응하는가를 변별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분판의 이론원칙에 의거하여 종이 형성된 것이지요.
정토종의 입장에서서 염불을 선택하다
네 가지 염불을 말할 때 왕왕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왜 염불을 하냐고요? 저는 깨닫고 싶어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염불을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관상을 하고 싶지만 관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염불을 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제가 깨달을 수 있다면 저는 깨달음을 얻으러 갈 거예요” 마치 어쩔 수 없이 칭명염불을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정토종의 관점에서 본다면 설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하더라도 깨달음을 자본으로 삼지 않고 또한 깨달음을 칭명보다 수승하게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칭명을 가장 수승하게 여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바로 정토종 교판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왜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하더라도 여전히 칭명염불을 할까요? 왜냐하면 깨달음은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서 선택하신 왕생의 방법이 아니고, 아미타불의 명호야말로 아미타불의 본원에서 선택하신 극락왕생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무량수경』에서 법장비구의 제18원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지요. “만약 내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중생들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내지 십념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
정토종의 이러한 분판이 있은 다음에 법문선택의 조리는 매우 뚜렷해집니다. 남들에게 염불을 권장할 때도 증거가 아주 확실하여 ‘네가 옳네’‘내가 옳네’라며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법문에는 높고 낮음이 없어서 당신도 옳고 나도 옳습니다. 예컨대 당신이 삼복을 닦아서 이를 회향하여 왕생하는 것도 역시 정토법문이어서 우리 모두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선도대사님의 정토종의 관점에서 판단한다면 당신이 닦은 것은 요문에 속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미타부처님의 ‘내지 십념으로 왕생할 수 없다면 성불하지 않겠다’는 본원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순하지 않으므로 요문에 속하고 잡행에 속하여 왕생이 결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경전의 증거가 있고 조사님들의 해석이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승복하지 않을 수 없게 하지요.
우리 자신이 정토법문을 수학할 때, 이럴 때는 자신의 지견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래도 잡행잡수를 좋아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왕생을 더욱 좋아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잡행잡수를 매우 좋아하기는 하나, 만약에 왕생할 수 없다면 역시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목적은 왕생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따라서 정토종의 일향전념의 도리를 안다면 우리는 자신의 지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아무튼 정토종의 건립은 우리가 법문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아주 도움이 됩니다.
제종에서 해석한 정토
정토법문이 중국에서 천여 년을 거치면서 각종파의 관점들이 스며든 이후로 비록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이 각 종파로 보급되기는 하였으나, 선도대사님의 교판사상이 중국본토에서 실전失傳되었기에 이 부분의 역사에 대해 마땅히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선도대사님의 『관경소』『관념법문』『법사찬』『반주찬』『왕생예찬』, 그리고 담란대사님의 『왕생론주』와 도작대사님의 『안락집』 등등이 당나라 말엽 이후로 전부 중국에서 실전되었다가 민국초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일본으로부터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지요. 따라서 천여 년의 시간 동안에 정토법문은 있어도 정토종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토종의 특색이 매몰되고 상실되었으니까요. 따라서 정토법문의 수행자들은 왕왕 전부 선종·천태종·화엄종의 관점으로 정토를 해석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똑같은 문제를 놓고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게 되었고, 나아가 각자 근거가 있게 되었지요. “여기에 경전의 증거가 있어요! 어느 어느 대덕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수학하려는 사람들은 왕왕 누구를 따라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중생들의 근기로는 요문과 계합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천년의 역사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과거에, 옛날 사람들은 근기가 비교적 맹리猛利하였기에, 만약에 이런 요문의 수행방법을 의지한다면 설사 명확한 교문의 분판이 없다하더라도 역시 겹겹으로 에워싸인 포위망을 뚫고서 탈출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누락될 수밖에 없었지요.
특히 요즘 시대에 현대인들의 근기는 더욱 졸렬하고 번뇌 역시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만약에 여전히 이처럼 애매모호한 정토법문의 관념(법문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어떻게 수행하든 간에 모두 회향하여 왕생할 수 있다)을 의지한다면, 우리로서는 결택을 하기가 매우 어렵고 또한 시대와 근접해 있고 중생들의 근기와 근접해 있는 해탈법문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정토종 관념의 회복은 대세의 흐름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전祖典의 회귀
저는 아미타부처님께서 너무나 자비로우시고 확실히 부처님의 눈은 걸림이 없으셔서 중생들의 근기가 성숙하였다는 것을 관찰하셨기에 백여 년 전에 선도대사님의 저서들이 일본에서 중국으로 돌아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니라 하나의 큰 사건입니다. 이 큰 사건은 불교가 두 번째 시기에서 세 번째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시기에서는 제종이 정토로 회귀함으로써 정토종의 특색이 매몰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치에 밝지 못하게 되었지요. 선도대사님의 저서의 회귀는 교리방면에서 명확하게 정토종을 독립시키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연지대사·우익대사·인광대사가 노력한 방향
명나라 말기의 연지대사님과 우익대사님, 그 뒤로 다시 인광대사님에 이르기까지 이 세분의 조사대덕들, 그분들이 노력한 방향은 모두 정토법문이 제종에 혼융되어 본래면목을 상실하기에 이른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정토종을 독립시키고자 각 종과 비교를 하실 때, 정토법문의 초월성과 수승함을 드러내 주셨습니다. 연지대사님의 『미타소초』가 바로 이러한 출발점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후인들이 봤을 때 역시 쉽게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익대사님의 『미타요해』에서도 이 같은 뚜렷한 경향이 있었는데, 비록 천태의 교판을 사용하셨으나 천태교리의 틀을 돌파하셨습니다. 예컨대 천태에서는 사토의 분판을 말하지만 우익대사님은 이 사토에는 횡사토橫四土가 있고 수사토竪四土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사토란 바로 자신의 수행의 경지·공행의 깊이에 따르는 것으로서, 만약에 혹업(번뇌)를 끊지 못하였다면 범성동거토에 태어나고, 만약에 아라한이 되었다면 방편유여토에 갈 수 있으며, 무명을 깨트렸다면 실보장엄토에 가게 되고, 부처님은 상정광토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사토입니다. 동시에 대사님께서 또 횡사토를 말씀하셨어요. 범부로서 번뇌를 끊지 못하고 범성동거토에 왕생하는 동시에 세 가지 불퇴三不退를 증득하게 되는데, 이른바 행불퇴行不退·위불퇴位不退·염불퇴念不退입니다. 그다음 범성동거토에서 당장에 바뀌지 않고서도 사토로 융합해 들어가서 부처님과 같은 수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은 사실상 이미 천태에서 자력에 의지하여 수사토를 달성하게 되는 그러한 관념을 돌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돌파가 있기는 하나 어쨌든 우리로 하여금 조금 동떨어진 얘기 같아서 그다지 뚜렷하지도 않고 그다지 통쾌하지도 않게 느껴지므로, 선도대사님의 말씀처럼 “범부가 보토로 들어간다!凡夫入報” 왜 그런가? “부처님의 원력에 올라탔기 때문이다(乘佛願力)”는 것과 같지가 않습니다.
왜 우익대사님은 이 정도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대사님께서 선도대사님의 사상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원력을 타고 범부가 보토에 들어간다’는 점을 지적해내지 못한 것입니다. 천태종의 틀 속에는 이러한 사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이런 조사대덕님들께서 정토종을 독립시키고 분명하게 밝히려고 하셨으나, 유감스럽게도 유력한 교리기초를 만나지 못하셨던 것이지요.
인광대사님께서도 『문초』 속에서 거듭 강조하신 것이 바로 정토법문은 특별법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특별법문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바로 이 법문은 제종의 법문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광대사님께서 ‘특별법문’이라는 이 명사를 말씀하신 자비심이 바로 정토종을 독립시켜서 제종의 사상이 혼재되어 있는 선정과 지혜의 색깔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었으니, 이른바 ‘입으로 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마음이 산란하다면 목이 터져라 불러도 헛수고다’‘염불이 만약에 청정심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왕생할 수 없다’는 것들입니다.
일반적인 정토학인들은 왕왕 이러한 성도문 타 종파의 관점·일반법문의 관점으로써 정토의 수승한 이익을 판단하고 있었지요. 인광대사님께서는 이처럼 애매모호하고 사람을 그르치는 정토수행의 관념들을 바로잡는데 주력하여 정토법문은 특별법문임을 거듭 강조하시면서 “일반법문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일반법문의 교리로써 논판論判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정토법문과 제종의 법문을 분리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인광대사님께서 하신 일은 그분의 출현이 바로 이러한 역사의 인연을 완성해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대사님께서 재삼 이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선도대사 정토사상의 시대적 의의
이 점만 갖고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왜 여전히 부족할까요? 그 이유는 현대인들의 지견이 매우 번잡하여 만약에 하나의 체계적이고 조리분명한 이론구조가 없다면 아마 소수의 사람들만 이러한 인도로 인해 정토종으로 들어올 수 있을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거기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제가 예전에 『인광대사문초』를 봤을 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떨 때는 아주 쉽게 느껴지다가도 어떨 때는 또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데 여전히 갈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선도대사님의 정토사상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선도대사님은 엄격한 교판체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한 걸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상인, 혜정법사님의 출현이 바로 선도대사님의 이처럼 온전한 정토종의 이론구조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선도대사님의 이런 이론구조는 정토종을 위한 것이기는 하나, 사실상 전체 불교를 위해 튼튼한 기초를 건립한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전체 불교에서 8종이든 10종이든 간에 말법시대에 이르러 만약에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번뇌를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해탈을 해야 한다면 아무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들 정토로 회귀하면서 “정토종, 우리 모두 당신을 의지하겠습니다!”고 말한 것인데, 만약에 정토종에서도 “아!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남들이 길을 물으면서 “우리는 길을 모르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를 몰라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의지하겠습니다!”고 말하는데, 만약에 당신도 “저도 안 됩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되면 모두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각 종파들이 모두 정토종을 의지하는데 만약에 정토종 자신마저도 교리의 분판방면에서 또 명확하지 않다면, 예컨대 “당신들은 나를 의지해야 하지만 나 역시 당신의 원만한 계정혜를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렇게 되면 법이 근기와 맞지 않아서 중생들은 해탈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따라서 현재 정토종을 반드시 온전하게 독립시켜서 불법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건물 한 채와 같아서 이 건물에 다섯 개의 기둥이 있는데 사방에 각각 한 개씩 있고 중간의 기둥 하나가 주가 됩니다. 그런데 현재는 네 개의 기둥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만큼 약해져서 차츰차츰 기울어져서 중간에 있는 이 중심이 되는 기둥을 의지하게 됩니다. 중간에 있는 이 중심이 되는 기둥이 만약에 “나도 버틸 수 없습니다!”고 말한다면 이 건물은 무너지고 말겠지요. 중간의 이 주 기둥이 바로 정토종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정토법문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법문을 말한다면 높고 낮음이 없어서 다들 거기서 거기이고 각자 자신의 기호와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을 말한다면 다르지요. 종은 모든 법문에 대해 하나의 분판을 해야 하거든요.
물론, 이것 역시 어느 것이 높고 어느 것이 낮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당신이 성도법문의 근기여서 계정혜를 원만히 닦아 번뇌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수행하셔도 됩니다. 만약에 이러한 근기가 아니라면 당신은 정토종을 배워야 하겠지요. 왜냐고요? 아미타불의 원력을 의지하면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교판이론입니다. 교리의 근거가 있고 경전의 근거가 있으므로 우리 모두 매우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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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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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합니다.
일체중생의 성불을 발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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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공법계 제 중생
자타일시 성불도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