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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5)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요 14:16-21 / 이동원 목사
미국 큰 도시마다 위치한 구세군 센타는 고통받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받는 피난처여서 늘 자원 봉사자나 전도자들이 자주 찾아와 자선을 하고 전도를 하는 곳입니다. 저도 첫 미국유학 시절 신학교 학생들과 매주 토요일 마다 구세군 센타에 나가 전도하고 봉사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여러 해 전 미국 시카고 구세군 센타에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전도하던 분 가운데 부스 터커(Booth Tucker)라는 이름의 전도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하나님의 위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 도중 갑자기 한 중년 사내가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설교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위로라고요? 만일 당신의 아내가 죽고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면서 칭얼대고 있다면 그래도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말할수 있겠습니까?"고. 설교자는 설교를 중단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몇주후 이 설교자가 다시 이 동일한 강단에 서서 이렇게 설교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오늘 또다시 하나님의 위로에 대하여 설교 하고자 합니다. 몇주 전 제가 설교를 할때 이곳에서 누군가가 제 설교를 중단시키며 당신의 아내가 죽고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다면 그때에도 당신은 하나님의 위로를 설교할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면 이제 그 대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지난주 교통사고로 제 아내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은 엄마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몇주 전 그 질문을 하신 분의 고통스런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마찬가지로 제 가슴은 찢어져 있고 저와 제 아이들의 가슴은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것은 이순간 저와 저의 가족의 유일한 위로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하는 이 순간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위로가 되시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23편의 기자는 그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위로)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주께서는 어떻게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인생을 위로하십니까?
1. 함께 하심으로서 입니다.
이미 시편기자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고백한바가 있습니다. 함께 하심이야말로 주께서 고통받는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땅에 계셔서 제자들과 3년동안을 함께 하시다가 제자들의 곁을 떠날때가 되었다고 암시하시자 제자들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어려움에 직면할때마다 기적을 베푸시며 도우시던 그분, 기회있을 때마다 자상한 하늘의 교훈으로 소망을 주시던 그분, 그분없이 어떻게 제자들끼리만 인생의 격랑을 헤쳐가며 살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바로 이때 주께서 주신 약속이 본문에서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혜사는 희랍어로는 파라클레테(paraclete)라는 단어가 쓰어집니다. "누군가 부름을 받아 곁에 있어주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는 'comforter'로 되어 있습니다. 위로자라는 말입니다. 보혜사와 위로자는 같은 단어인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위로자였던 것입니다. 여기 본문16절에 '또 다른'이란 말은 질적으로 같은데 다른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과 동일한 품성과 사랑을 지니신 위로자-그가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17-18절의 약속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와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함께 하심, 이것이 바로 인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며 상처받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미국 남가주 대학 교육학 교수였다가 말년에는 사랑의 교실을 운영한 고 레오 버스카글리아(Leo Buscaglia) 교수의 글에 보면 한 부인을 잃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부인을 사별한후 집에서 나오지 않으시고 말을 잃어버린채 심각한 우울증세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위로가 되어보려고 여러 가지로 격려의 말씀을 드리고 선물도 전달하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사는 이따금씩 이 할아버지의 말벗이었던 어린 소년 하나가 이 할아버지를 방문한후 할아버지는 갑자기 증세가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소년에게 도대체 네가 할아버지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해드렸느냐고 묻자 이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무말도 안했고요. 그냥 할아버지하고 껴안고 같이 울었어요" 이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상처받은 이웃들에게 마음으로 온전히 함께 할수만 있다면 굉장한 치유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목장교회에서 예배보다도 성경공부보다도 '나눔'을 강조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나눔이란 단순히 말로 자기의 고통을 나누는 일이 아니라 이웃의 고통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마음으로 고통받는 이웃들곁에 함께 있어주는 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인 것입니다. 다시 17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성령은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영어 표현에 "fully present"(온전히 함께 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과 대화하면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몸은 함께 있어도 마음은 함께 하지 못하거나 피상적으로만 함께 할 때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실뿐 아니라 우리 속에도 계시겠음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적인 성령의 내주 이상의 약속이십니다. 온전히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온전히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주님의 온전히 함께 하심-그 이상의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2. 구조 하심으로서 입니다.
주께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인생을 위로하시는 또 하나의 방편은 우리가 위기에 처할때 구체적인 도움을 베풀어 우리를 구조해 주시는 일입니다. 이때 선한 목자가 우리의 구조를 위해 지팡이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중동의 양떼들이 가장 위험에 처하는 때가 골짜기에서 고산 방목장으로 이동하는 시기와 다시 이 고산 방목장에서 내려오는 시기입니다. 이때 목자는 양떼들 곁에 밀착하여 행진함으로 양들을 안심시킵니다. 목자의 밀착된 임재야 말로 양들의 용기와 희망의 근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행진에서 가끔 길에서 넘어지거나 뒤집어지거나 혹은 길에서 이탈하여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지는 사고양들이 생깁니다. 그때 목자는 재빨리 지팡이를 사용하여 양들의 목을 잡아 일으키거나 구덩이에서 건져 올립니다. 중동지방의 목자의 지팡이는 우리 한국에서 노인들이 사용하는 지팡이처럼 끝이 구부러져 있거나, 부드러운 갈고리가 붙어 있기도 합니다. 이 지팡이로 양들을 구조하는 역할을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은 목자의 지팡이가 안보이면 불안해 한다고 합니다. 이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선한 목자는 양들의 구조신호에 늘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 인턴 목자들이 능숙한 목자들에게 목자훈련을 받을때 제일 여러시간을 보내는 것이 양들이 내는 여러 가지 소리의 의미를 분별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기분좋아 내는 행복한 소리, 배고픈 소리, 산책하고 싶은 소리, 위기에 처한 소리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분별시킵니다. 무엇보다 위기의 신호에 대해서는 지체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훈련시킵니다. "음매에~"이 소리가 위기신호라고 합니다. 이 신호만 들리면 목자는 즉각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양을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내는 위기의 신호는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로 SOS 신호를 보내는 방법에 익숙해 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떻게 약속하십니까?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그리하면 내가 대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그는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직전인 요한14:14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지팡이를 들고 달려 오시는분-그분이 바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3. 보호 하심으로서 입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더불어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경우에 따라 어떤 목자는 지팡이를 거꾸로 잡아 지팡이를 동시에 막대기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막대기는 지팡이보다 길이가 짧은 것으로 허리춤에 찼다가 비상시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막대기의 기능은 이중적인데 보편적으로는 야생짐승들이 양들을 공격할때 막대기를 내리치거나 던져서 짐승들을 쫓아 냄으로 양들을 보호하는 용도요, 또 다른 경우는 양떼들이 잘못할때 이 막대기로 가볍게 양들을 치는 징계용이었습니다. 징계도 보호의 방편입니다. 작은 경고로 더 큰 실수나 위험을 예방하려는 조처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7:14에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사랑의 징계는 징계후에 징계하는자와 징계받는자를 더 가깝게 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징계가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으로 징계받는 자녀는 부모의 매를 맞고 오히려 더 큰 사랑과 위로를 느끼지 않습니까? 채찍이 사랑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가장 현저하게 경험하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주님께서 누구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 주신다고 했습니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곧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주의 자녀이면서도 불순종의 삶을 살고 있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주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우리를 그대로 두실수는 없으십니다. 그래서 징계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징계를 경험한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12:6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국 모택동 시절에 지하교회 지도자와 전도자로 유명한 왕명도(왕밍따우)목사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한때 중국 공안당국의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지독한 핍박당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고통에 못이겨 예수를 부인하고 감옥에서 풀려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석방되어 나오자 그는 주님에 대한 송구스런 심정으로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됩니다. 두통이 떠나지 않고 그를 괴롭힙니다. 그는 그것이 바로 주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다시 기도하고 결심한 다음 북경(베이징)거리로 나와 목에다 간판을 걸고 거리를 다니며 울면서 외쳤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습니다. "저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저는 저를 사랑하신 저의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제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그는 즉시 다시 체포되어 그후로 19년동안의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의 회복의 소식은 지하교회 지도자들에게 큰 귀감이 되어 그의 뒤를 따르는 많은 지도자를 일으켜 세웠고 하나님은 중국 지하교회들가운데 기적적인 임재로 놀라운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때 라비 재커라이스(Ravi Zacharias)라는 유명한 인도출신 전도자가 그를 만나 그가 감옥의 무서운 고난을 어떻게 이겨낼수 있었느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웃으며 대신 찬송을 부르고 싶다고 했답니다.
몸은 늙었고 손마디 마디는 뒤틀려 있었고 그의 아내는 앞을 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빛나는 눈동자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찬송후에 그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이 찬송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찬송의 가사처럼 하늘의 위로가 주님의 위로가 저에게 있었기 때문에 19년 동안 저는 행복했답니다" 이제 우리가 시편기자의 고백을 이해할수 있을까요? "내가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보혜사 성령님
요 14:16-27 / 김태복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절 후 50일째되는 주일이 성령강림주일인데 금년도에는 부활절이 빠른 바람에 가정의 달 사이에 지키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은 대단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돌봐주시던 예수님이 떠나신다면 자기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반대자들이 이어서 자기들도 모두 체포하고 처형할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여러번 반복하신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반복하셨고, 그 다음으로 많이 반복 하신 내용은 성령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요14장부터 16장까지를 읽어보면 성령님에 관한 말씀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관해 네 번이나 반복하시는 이유는 너무 중요한 탓입니다. 성령님이 누구십니까?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사역을 행하셨고,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사역을 행하셨다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님이 오셔서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님들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가장 가까이 계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결과, 성령님의 도우심도 받지 못하고 성령님과 동행하지 못함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못함으로 매우 어렵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은 성령님이 과연 어떠하신 분이가를 분명히 배우고 체험하심으로 성령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1.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 이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 했습니다. '보혜사'란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 '보혜사'란 '옆에서 돕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이'란 뜻입니다.
보혜사(保惠師)'를 한문으로 풀이하면 '보호하고 은혜를 주고 가르치는 자"란 말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헬퍼(helper)'로 그 뜻은 '돕는 자', 요즈음식으로 표현하면 '도우미'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을 돕기 위해 성령님을 우리 곁에 보내 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이 진리만 바로 깨달으면 우리는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고, 그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분이 우리를 돕는 자로 와계신다니 우리가 무엇을 근심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한 가지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 다른 보혜사'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이라는 말은 성령님 외에 다른 보혜사가 또 있다는 말인데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가시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한 손에 쥐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입니다. 거기에 앉으셔서 주님은 보혜사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요일서2:1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연약하여 죄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육신이 약해서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회개합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은 자기 손의 못자국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면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언자'라는 말과 '보혜사'라는 말이 원어로는 '파라 클레토스'라는 동일한 단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범죄 하는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롬8:34에도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시라면, 성령은 땅에 오셔서 우리를 돕는 보혜사십니다. 롬8:26에 보면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늘과 땅에 각각 우리를 돕는 보혜사를 가진 사람들이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시면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도와주시는 모든 은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받아 누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슨 어려운 일만 만나면 고아나 된 것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말할 수 없이 탄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자녀가 무슨 사고로 다쳤다고 합시다. 그래서 무엇인가 도와주려고 해도 믿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면서 마치 고아인 것처럼 탄식하고 있다면 부모는 너무나 슬플 것이요, 탄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에서 도우시는 보혜사들이 계신 것을 믿고 담대히 믿고 기도로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든지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부흥사가 쓴 글에 의하면 경남 진주에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충성하는 구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에게 점심을 대접받으며 들은 간증이라고 합니다. 그 분은 밤을 따서 일본에 수출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해에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도 밤 풍년이 들어서 일본에서 온 사람이 밤값을 자꾸만 깎으려 했답니다. 그래서 밤을 팔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도우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때 우리나라로 접근하던 태풍이 갑자기 제주도 근해에서 일본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일본을 강타했습니다.
이 태풍으로 인해 일본의 밤들이 모조리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일본 사람이 이 구장로님을 찾아 와서는 몇 배의 값으로라도 우리 밤을 사겠다고 간절히 요청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분은 3억 원의 이윤을 남겼다는 간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우리 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성령님이 도와만 주신다면 승리할 줄 믿으시고 무슨 일이든지 성령님께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령님은 우리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1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 했습니다.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약속이십니다. 또 17절을 보십시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압니다. 성령님이 교회 곧 우리 안에 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사건은 신학적으로 '내주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내 마음속에 와서 거하시면서 영원토록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하신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나 감격적인 생각을 금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더욱 감격스러운 말씀은 18절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입니다.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외톨이로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사실 제자들과 함께 했던 3년 동안 예수님은 어머니와 아버지 같았습니다. 제자들을 먹이고 입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을 데리고 다녔으며,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떠나시게 되자, 남은 제자들은 자신들이 고아처럼 여겨져 한없이 슬퍼하며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 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내가 가면 성령을 보내겠는데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내가 지금 있을 때 보다 너희가 훨씬 더 행복해 질 것이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3년 동안 있을 때는 내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으니까 내가 안 보이면 너희들이 찾아 다녔지 않느냐? 내가 배를 타고 가다가 자면 너희들이 흔들고 깨웠지 않느냐?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너희들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성령과 함께 너희 속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너희는 어느 때든지 내 이름만 부르고 기도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했지 않느냐? 내가 너희 속에 있기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그것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가 말했지 않느냐? 그렇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는 행복이니라. 너희는 고아가 아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 계시던 성령님이 지금 우리 마음에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거의 날마다 고독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느끼는 공허함과 고독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현대인들은 젊은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가만히 혼자 있지를 못합니다. 인기척이 없는 적막이 죽음처럼 느껴져 혼자 있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켰다 껐다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혼자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혼자 있을 때면 음악을 틀든지, 텔레비전이라도 켜 놓고야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인해야 마음이 놓이는 것이 바로 현대인들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혼자의 고독을 견딜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고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존적인 고독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우리는 다릅니다. 물론, 우리 역시 인간인지라 때로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외로워서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느끼는 실존의 고독은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영혼의 빈곳을 가득히 채우고 계십니다. 그의 생명의 풍요로움이 우리 마음을 물댄 동산처럼 만들고 계십니다. 주님은 절대 우리를 혼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출석하면서 이런 놀라운 감격을 모르고 사는 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성령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답을 너무나 잘합니다. '예수님이 누구냐?'하면 역시 대답을 잘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고아처럼 울고, 고아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의 근심과 고독과 무기력은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의 예수님은 그만큼 많이 알고 있는데 왜 이토록 무기력합니까?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시지 않은 탓입니다. 성령님을 모실 때에 동시에 예수님도 우리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간부터 고아라는 영적 고독감과 공허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님 앞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옵소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제는 거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체험하게 하옵소서."라고 해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떤 유대인 청년이 액클레이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와서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니, 왜 날 보고 예수 믿으라고 합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예수를 믿습니까? 십자가에 처형된 젊은이를 내가 왜 믿어요?" 그러자 액클레이라는 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맞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어요. 그러나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요. 내 마음속에 계셔요. 나는 날마다 그분과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과 이야기하고 그분과 함께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극복하고 있어요. 지금 내 안에 계신데 안 보여요?"
유대인 청년이 볼 리가 없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액클레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찬송을 쓴 것이 바로 찬송가 151장입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 나 항상 섬기네/ 온 세상 조롱해도 주 정녕 사셨네/ 그 은혜로운 손길 부드러운 음성/ 내 평생 주님 함께 늘 계시네/ 예수 예수 늘 살아계시네/ 주 동행하여 주시며 늘 말씀 하시네/ 예수 예수 내 구세주 예수/ 내 맘에 살아 계시네 늘 살아 계시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아직도 마치 자기가 고아인 것처럼 고독과 공허를 느끼고 계신 분이 이 자리에 계십니까? 보혜사 성령님을 마음에 모셔 드리십시오. 그 때에 성령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거하시면서 부모처럼 영원토록 여러분과 함께 거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옆에서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영원토록 계시면서 도우십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자기의 능력까지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하지만 않으십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그 능력을 성령님을 통해서 주십니다. 사람에게 육신의 힘도 중요하고 정신의 힘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 영적인 능력이 있어야 신앙생활도 바로 하고 선행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근심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 하지 말라"고만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님만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그 능력을 통해서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히려 하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소유한다고 하셨습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리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120 문도들은 에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믿고 성령님의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오순절날 성령님의 능력을 받고 그들의 삶이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그들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담대한 용기를 꺾을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 속에서 솟구치는 기쁨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입에서 찬송을 빼앗아 갈 수 있었습니까? 아무도 할 수 없었 습니다. 아무리 채찍을 들고 때려도, 감옥에 투옥시켜도, 맹수나 검투사 앞에 끌고 가도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그들을 강하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아무도 상대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300년도 안되어 로마 제국이, 단 한명의 군대도 없는 그 초라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앞에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래서 롬8:35 이하에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빌4:12-13에서는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바로 이러한 존재입니다. 이왕지사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그 성령님의 손에 붙들려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나 혼자 너무 외로운 고아와 같습니다.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세상 유혹과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일어서야 될지 잘 모르습니다. 나를 도와주세요. 내 안에 오세요. 내가 믿기를 원합니다."라고 계속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에 성령님이 임하시면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박금출 목사님이 쓰신「실화사전」제 4권에는 이런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남편의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이 남편은 심한 술 중독으로 수입을 몽땅 술로 마셔 버렸습니다. 그러니 집세도 못 내고 그와 가족은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남편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병원 문마다 두드려 보았으나 알코올 중독에서 놓여나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중에도 가정을 지켜오던 부인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다면서 남편에게 결별을 선언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서게 된 남편이 부인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여보 내 힘으로 안 되지 않소. 한번만 봐 주구려." 그래도 부인은 지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면서 헤어지기를 고집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남편은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술 중독에서 놓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다음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 오니 부인이 집을 다 꾸려서 응접실에 내 놓고 남편이 집에 들어가도 본체 만체 합니다.
부인과 자식을 한꺼번에 잃게 되어 지자 급해진 남편이 자기 침실에 들어가 꿇어앉아 침대를 부여잡고 "하나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외면했던 저는 죽일 놈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알코올 중독에 걸렸습니다. 이 알코올중독이 저의 가족을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나의 인생은 이제 파멸입니다. 이것이 그 하나님으로부터 올 리가 없습니다. 저를 알코올 중독에서 구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하고, 고함을 치며 기도하는데 어느 새 그의 기도는 자기 나라의 말이 아닌 이상한 말로 바꾸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성령님의 능력으로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자 뱃속의 창자가 꼬이듯 하더니 커다란 덩어리가 속으로부터 올라오면서 한참동안 입에서 더러운 물을 토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니 속이 시원하면서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알코올중독에서 놓여난 확신을 가져왔습니다. 응접실로 나가자 부인이 "흥 이젠 완전히 미쳐버렸군. 방안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를 다하고"라고 합니다. 귀신이 나가면서 소리 지른 것을 부인은 돼지 멱따는 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여보 그게 아니요 나 이제 새 사람 되었어. 알코올중독에서 놓여났단 말이오. 이젠 다시 술을 입에 대지 않을게." "당신 술 안 먹는다는 결심을 몇 번이나 했어요. 너무 많이 속아서 이젠 금주란 말은 신물이 나요." "여보 이젠 진짜란 말이요." 하고 애원을 하자 부인은 간절히 애원을 하자 남편을 며칠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 지나도 술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전 같으면 몇 시간도 견디지 못하여 술을 먹었습니다. 남편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자 그 가정은 다시 웃음꽃이 피어 행복한 가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성령님의 능력을 가지고 삽시다. 우리가 처한 형편이 어떠하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드림으로 승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 14:18-24 / 김영규 목사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18) 주님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부모 없는 고아가 얼마나 불행할까요? 저는 어느 책에서 고아였던 김 호걸 씨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유년기에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싸리문 있는 시골 집에서 친구들과 논두렁으로 뛰어 다니면서 즐거운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다투고 가정불화가 생겼습니다. 부모의 갈등이 마침내 자식을 버리는 결과가 됐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데려다 딴 사람 손에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가끔 와 보더니 마침내 발길을 끊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데리고 있던 사람에게도 버림받고 고아원 신세가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보호자 없이 뛰놀던 그는 어느 겨울날 사고를 당해 두 눈을 못 보는 장님이 됐습니다. 나이 들면서 맹인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늘 외톨이였습니다. 사람이 싫어졌습니다. 자신을 버린 부모가 원망스럽고, 앞까지 못 보는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면 가족이나 있든지, 가족이 없으면 눈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가끔 그리워지는 것은 부모가 아니라 어려서 기어 다니던 누이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의 주변 장애인 가운데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교회도 부모 갖춘 사람이나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피아노 조율을 배웠기 때문에 조율하러 다니다가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어느 날 찬송가를 귀로 듣고 피아노를 치는데 목사님이 이 소리를 듣고 그에게 반주를 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마침내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혼자 성경을 읽던 중에 놀라운 말씀을 대하게 됐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정말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 내 부모는 나를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는 구나!” 그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늘 기도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나를 버리지 마소서!”
저는 6.25로 말미암아 유복자로 늘 외롭게 컸습니다. 형제자매 갖춘 애들이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지금은 저도 환갑이 지나 상당히 체념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전화번호부에서 아버지 성함을 찾아 무조건 돌려 본 적도 있습니다. 만나서 감격하는 꿈도 자주 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자랐습니다. 결혼해서 세 아이들의 아버지 노릇도 열심히 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도 다 결혼해서 손자가 다섯 명입니다. 그래도 아직 어딘가 살아 계시다면 얼굴이나 한번 뵈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하물며 고아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요즘도 TV를 통해서 부모를 찾는 해외 입양아들이 많습니다. 자기를 버린 부모지만 그렇게 보고 싶어 합니다.
18절 말씀에서 주님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주님이 떠나시면 인생은 고아라는 뜻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없으면 육신의 고아가 되듯이, 영적인 부모가 없으면 영적 고아가 됩니다. 세상에서 부모 없는 불행은 말로 형언할 수 없습니다. 헐벗고 굶주립니다.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힘든 것은 마음의 고통입니다. 항상 외롭고 방황합니다. 자기의 형편을 하소연할 데가 없습니다. 위로받지 못하고, 넘어져도 격려 받지 못합니다. 영적 고아는 육신적 고아보다 훨씬 더 비참합니다. 자기가 온 곳을 모르고 갈 곳도 모릅니다. 인생이 뭔지 모릅니다. 고독합니다. 평생토록 안식처를 찾아 헤매다가 불현듯 죽음이 다가 오면 준비도 안 된 채로 지옥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고아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영적 고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들의 아버지이신 그리스도의 품으로 들어오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와 함께 사시는 하나님
그러면 주님은 부모로서 우리 삶에 얼마나 깊이 관여하실까요?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18-20) 평생 가족,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지상 생애뿐만 아닙니다. 영원히 함께 사십니다. 여름에 해수욕장에 가면 안전 요원이 높다란 망대에 앉아 사람들을 살핍니다. 혹시 물에 빠진 사람이 보이면 뛰어들어 구조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하늘 의자에 앉아 우리를 관찰하실까요? 성도들에게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멀리서 달려오실까요? 하나님은 긴급 시에만 나타나는 안전 요원이 아닙니다. 매 순간, 항상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십니다.
야곱은 형과 원수지고 도망쳐서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 길가에서 홀로 노숙을 했습니다.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낮선 땅에서 홀로 지새워야 했습니다. 몹시 외롭고 두려웠습니다. 들짐승이 물어갈 수도 있습니다. 강도나 도적에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걱정 속에 잠을 청했는데 꿈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28:13-15)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결혼 문제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자녀 출산에 개입하셨습니다.(창29:31) 야곱의 20년 머슴살이에 함께하셨습니다. 야곱의 품삯을 찾아 주시고 재산을 모아 떠나게 하셨습니다.(31:11-13) 아무도 야곱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고(31:24),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께하셨습니다.(32:1,30) 야곱이 노숙하면서 처음 서약했던 벧엘까지 함께하셨습니다.(35:1) 하나님은 야곱의 전 생애에 매 순간 참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생애 전반에 참여하십니다. 전쟁터에서 골리앗과 싸우는 소년 다윗에게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파사의 왕실에서 다니엘의 식탁과 건강을 지키셨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고아로 자란 에스더가 왕비로 간택되도록 함께하시고, 유대인 모르드개가 하만의 음모에서 벗어나도록 함께하셨습니다. 풍랑 속에 바다를 건너는 바울과 시종 함께하시고,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게 하시고, 감옥에 갇혀도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의 생애에 참여하시되, 형제들과의 관계 중에 관여하시고, 종으로 팔려가는 일에 개입하시고,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중에 개입하시고, 감옥에서 죄수로 있는 동안에 개입하시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총리가 되게 하시고, 총리 직을 수행하는 일에 개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도들 속에 임하시는 방식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차이점은 외형적인 것과 내재적인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주로 눈에 보이게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는 보이지 않게 심령 성전에 임하십니다. 두 번째 차이점은 집단과 개인의 차이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민족 단위의 공동체에 임하셨지만, 신약 시대에는 집단이 아닌 각 사람 속에 개별적으로 임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과 생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예수님을 포도나무 줄기로 성도들은 가지로 비유하셨습니다. 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떨어져 나오면 영양분을 받지 못해 말라 죽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만 생존합니다. 생존적인 관련성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에는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 오셔서 함께 먹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일같이 한 식탁에 참여하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가족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주님은 목자요 우리는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양은 목자의 보살핌이 없으면 다 잡혀 죽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이런 인격적인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가 뭡니까? 하나님은 지금 그 문제 중에 임하여 계십니다. 오늘 내 인생의 문제를 주님과 함께 풀어가세요. 주여,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내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알려 주세요!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20)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23하) 마치 혼자 사는 듯이 괴롭게 살지 마세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답게 능력 있고, 힘 있는 모습으로 사세요.
세상에는 숨기고 성도에게는 나타내시고
주님께서 임마누엘을 말씀하셨을 때, 유다(다대오)는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22) 주님은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와 거처를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좀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위력을 세상 권력자들 앞에 나타내 보이시면 얼마나 효과가 클까요? 오바마 대통령이나 시진핑 주석을 굴복시키고, 유엔 사무총장이나 IOC위원장을 굴복시킨다면, G7이나 OECD나 유럽 공동체 의장에게 타나내신다면 전 인류가 굴복할 것 아닙니까? 아무리 전도해도 뺀들뺀들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날벼락을 치신다면, 이 사회의 흉악한 범죄자들을 모두 암으로 죽게 만든다면, 다 주님을 왕으로 모실 것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이나 헤롯 왕을 뒤집어엎으신다면 주님의 나라는 속히 이루어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생각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첫째로, 세상 나라는 본질상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세상 나라는 돈이 지배합니다. 권모술수가 지배합니다. 위선, 사기, 자기 과시, 폭력, 강압이 지배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이 다 그렇습니다. 정의보다는 불의가 지배합니다. 매스컴이란 괴물이 사람들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잘못된 가치관을 만들고 전파합니다. 이 세상은 판이 더럽습니다. 놀자 판, 먹자 판, 춤 판, 과시 판, 욕망과 자극의 판, 살인강도 판, 도적질 판, 사기꾼 판. 한 마디로 개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아무리 신령한 능력을 보인다 해도 결코 왕으로 받들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이적을 보이셨습니까? 그래서 주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있습니까? 세상도 예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주님도 이런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 주님은 세속 권세를 지배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더러운 이 세상은 종말에 사라지고 멸망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요란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않으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시2:1-5,10-12) 세상 나라는 없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의롭습니다. 선합니다. 사랑의 나라입니다. 질서와 화목의 나라입니다. 유다가 기대한 것은 유대 민족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세우시고자 하신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둘째로, 세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없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니 주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조금 있으면 세상이 주님을 다시 못 본다고 하셨습니다. 가까이는 육신적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장사될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한 부활 승천하셔서 사람들 곁을 떠나실 주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제자들에게는 계속 보이리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보리니”(19) 이 말씀은 현재형 동사로서(qewrei'tev) 확실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보리라는 말씀은 단순히 부활하신 육신을 보리라는 말씀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항상 보리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영적인 눈으로 계속 본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계속 볼 수 있게 된 까닭을 주님은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19) 고 하셨습니다. “내가 살았고”(19) 하신 말씀은 현재형이고, “너희가 살겠음이라”(19) 하신 말씀은 미래형입니다. 육으로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셔서 영원히 계십니다. 그리고 육으로 살아 있는 제자들은 주님의 살리는 영을 받아서 영원히 살 것이니 주님을 영원히 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강림하셔서 제자들의 마음에 임하셨을 때,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을 가지게 됐고 영의 눈을 뜨게 됐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입니다. 처음 갈릴리에서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주님과 숙식을 함께 했어도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오히려 마음 깊이 주님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주님은 눈에서 사라졌지만 영적으로 그들은 주님을 더욱 확실히 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육신의 주님을 볼 때 실족했지만 오히려 승천 후에 성령을 받고나서, 영으로 주님을 보게 된 후에는 더욱 담대한 증거자가 됐습니다.
유다는 왜 세상 사람들에게 주님을 나타내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구약시대처럼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실상 주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나타나셨지만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또한 그들의 영안이 어두워서 주님의 신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다른 왕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만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영의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봅니다. 성령을 받고 영의 눈을 떴습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을 육안으로가 아닌, 영의 눈으로 매일매일 보고 따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영적 고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는 감독자가 아닙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사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사는 곳에 함께 계십니다. 형통의 때에든지 고난의 때에든지.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자신을 나타내도 믿지 않습니다. 왕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남은 생애를 영적 고아로 살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곁에 계신 주님, 우리와 함께 사시는 주님을 왕으로 모셔 들이세요. 그리고 성령을 받아서 매일매일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주님의 가족으로 따라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게 하기 위하여
요 14:18-27 / 김경호 목사
어제 우리교회 선교부서에서 수재를 당한 양양의 한남교회를 방문해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바쁜 중에도 성인20명이 참여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금요일 직장을 마치고 출발해서 밤에 동해안에 도착해 눈을 붙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에 도착해서 오후 3시경까지 논 1000여 평의 추수를 하고 논두렁에 박혀있는 장비들을 꺼내 주었습니다.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라서 많은 복구가 이루어 졌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었습니다. 무너진 집은 손도 못 대고 컨테이너 박스에서 임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은 긴급히 길을 복구하고 집안에 뻘 흙을 제거하고, 남은 가재도구들을 꺼내는 정도가 이루어 졌다고 합니다.
직접 가보니 그 참상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습니다. 조립식으로 건축한 집은 콘크리트 기초 째 물에 떠내려가 마치 배처럼 표류하다가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추수를 한 것인데 말이 추수지 사막에서 이삭줍듯 모래더미에 묻힌 낱알들을 골라 잘라내는 것입니다. 마치 풀베듯 추수를 했고, 고구마 캐내듯이 했습니다.
산사태가 나서 나무들이 떠내려 왔는데 마을 앞 교량의 보가 유난히 간격이 좁게 설치되어 거기에 걸리다 보니 다리 자체가 둑이 되어 버려 물이 차 버렸습니다. 그러자 원래의 제방은 압력을 이기지 못해 터져서 마을을 덮쳐버린 것입니다. 마을 아래쪽에 있는 교량하나는 아예 송두리째 떠내려 가버리고 교량이 밑둥만 남아 있는데, 참 이상한 것은 떤내려간 교각에 의당 남아 있어야할 철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연인 즉 박정희 정권 때 세운 다리인데 위에서부터 이놈 떼어 먹고 저놈 떼어먹고 내려오니 정작 다리에 철근하나 넣지 못하고 콘크리트로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니 교각의 거리를 짧게, 원래 설계보다 재게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재가 아니고 부정부패가 낳은 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작업을 한 논 주인은 70세의 할아버지셨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냐?”고 우리가 위로하자 “울고불고 해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다고 일이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하늘의 뜻이려니 하고 지내고 있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신앙인은 아니지만 참 신앙적인 자세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간 한남 교회는 교인 6명의 교회 인데 수재로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요새는 교회를 통해 자원봉사자들이 들어오고 마을 주민들의 일도 처리해 주고 하니 주민들이 교회를 새롭게 인식하고 오히려 교회에 생기가 돈다고 감사하는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들이지만 그 가운데도 감사하며 지내는 마음이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은 항상, 무슨 일이 있든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현재에 대해서는 기뻐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람의 삶은 항상 이웃에게 친절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고 세상이 주는 어떤 가치보다도 그분을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 갖게 하는 방해물로는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적개심’이 그 으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정치는 이 적개심을 다루는 정치에 능숙합니다. 미국은 9.11 테러를 빌미로 마구잡이로 전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50%가 겨우 넘는 부시의 지지율을 무려 90%가 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적개심이 있을 때 단결합니다. 공동의 적에 대한 투쟁에서만 국가는 계급과 집단을 통일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국가의 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황제 빌헤름 2세는 “나는 어떤 정당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독일뿐이다”고 하며 자기 민족 아닌 것은 적으로 삼는 민족주의의 불을 지폈습니다. 국가는 체제의 안전을 위해 적과 아군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이런 원리는 작은 공동체 내에서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별 근거 없이 어떤 사람이 공동의 적으로 몰아 붙여지기도 하고, 그를 짓밟고 일어선 토대 위에 단결이 되고 힘이 모아지는 것을 줄 곳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제발 그런 것 없는 교회였으면 좋겠습니다. 이럴 때는 냉철한 이성이 필요하겠지요.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기분을 갖기 위해서는 악한 적을 필요로 합니다. 적개심을 우리를 집중시키고 강하게 단결하게 만듭니다. 중국영화에서 뛰어난 무사가 나오기 전에는 반드시 그가 어떤 복수심에 불타서 수련을 하지 않습니까? 국가나 공동체, 개인이 적이 없으면 심각한 갈등을 겪고 분열하기 쉽상입니다. 이런 저급한 문화에 길들여지게 되면 개인마저 그 적개심이 사라진 후, 그 개인은 공허하고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고르바쵸프 이후 공산세계가 방향을 선회해서 전부 자본주의 한 체제가 되니까 그동안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서구인들이 하나가 되었는데 이제 적이 없어지니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동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이 사라지자 내분이 일어나고 민족간, 지역간 갈등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각자 자국내의 정치도 하기 힘들어 졌습니다. 적이 사라지니 자기정권 자체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상황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9.11을 통해서 새로운 적들을 찾아냈습니다. 이 새로운 적은 ‘보이지 않는 적’이고, ‘더 무서운 적’이라며 이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힘없는 대상을 골라내 악마로 분장 시키고 자기들의 적개심을 위한 제물로 삼고자 하여 세계를 공포의 분위기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죽이신 분이십니다. 상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는 적개심을 다스리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알고 그 이후를 걱정하시며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 자신 이 후에 성령이 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할은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를 희생시켜 자기만족을 이루는 세계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영광을 받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도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고 예수도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신이 영광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오직 성부와 성자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영이십니다. 온전히 남에게 영광을 돌리시는 영이신 분입니다.
누구를 희생 시키고자 하고 그 적개심의 힘으로 살아가고 나아가 누구를 집단으로 살해함으로 끝나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내가 살고, 너희도 살게 하는 생명의 문화를 꽃 피게 해야 합니다. 새로운 문화 생명의 길을 여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주님의 일하심을 보려면
요 14:19-24 / 이재철 목사
전도를 하다보면 가끔 이런 사람을 만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하면
“당신은 하나님 봤습니까? 내게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하는 말인데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도
‘주여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만족하겠습니다’(요13:8)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선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또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며,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저(우리)를 보시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왜냐면 저(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3절 말씀에,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주님의 거룩한 영이 나와 함께 살겠단 말씀인데요, 성령님을 통해서 주님과 같이 사는 사람들
에게선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저 하늘에 계십니다 :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무소부재 하십니다 : 너무 교리적인 대답입니다.
당신의 하나님 어디 계신가요? 어디서 일하고 계십니까? .....
주님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영혼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순종하며 섬기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다투는 자리에는 결코 안 계십니다.
순종하면서 한 생명이라도 섬기려는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 내가, 우리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21절 말씀처럼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는 자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 입니다.
누가 주님을 사랑하는 자입니까? 주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신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집약한 새 계명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요13:34)
인데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는 새 계명을 지키는지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으로 이렇게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처한 곳에서 일할 때마다 늘 ‘내가 이렇게 해야되는데...’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날 사랑하셔서 내 맘에 심어준 것입니다. 지금 당신 마음속에 내내 떠오르는 생각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주님이 자신을 드러내 주십니다.
그럴 때 ‘아~ 주님이 이렇게 내 안에서 일하셨구나~’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도할 때마다 늘 주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잊어버리려해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순종해 보십시오.
순종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구나’ 하고
주의 일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면...
① 마음의 평강과 기쁨을 주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으로 너희에게 주노라... (27절)
여러 가지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 우리의 마음을 세상 누구도 줄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으로 채워주십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예수님이 떠나감을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떠나가심으로 성령님이 오실 수 있었고,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평신도 세미나 오신 분들 섬기는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
② 하늘의 상급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는 40절 말씀처럼, 세미나에 오신 분들을 섬기는 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마음으로 그분들을 영접하고 반드시 주님은 ‘상급을 주신다’고 41절에 약속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줘도 결코 잊지 아니하겠다...(42절)고 하셨는데 소자란 누구입니까?
* 내가 냉수 한 그릇을 줘도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
* 영적으로 갓난아기, 이제 막 예수님을 영접한 새 신자, 새 가족.
* 현재 우리 교회의 소자는 이번 세미나에 오신 분들입니다.
우리는 제자 삼는 교회로 정착됐지만 세미나에 오신 분들은 제자 삼기를 배우려고 오신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을 사랑으로 섬겨주고, 주님의 계명을 따라서 영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면 하늘의 상급이 클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요 14:21-24 / 문기태 목사
유명한 화가 구스타브 도레에게 그의 학생중 하나가 예수님을 그린 그림을 완성하여 평가를 받고자 제출했습니다. 도레는 적절한 평가의 말을 생각하며 그림을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이윽고 그는 그림을 학생에게 돌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그분을 더 사랑한다면 더 좋은 그림이 나왔을 것이네."
그림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노래를 만들거나 부를 때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른다면 큰 감동이 노래를 통해 흘러 나올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글을 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면 정말 좋은 글이 써질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교회안팍에서 봉사할 때도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긴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훨씬 더 아름다운 예배가 되고 향기가 넘치는 봉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와 사랑의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의 친밀하며 실제적인 사랑의 관계 형성은 뒷전인듯합니다. 사랑의 관계에는 무관심한채 예수님의 능력만을 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없이 기도의 응답만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식은채 의무감에 이끌려 드리는 예배나 봉사 등 모든 교회 활동은 무의미한 종교활동에 머물게 만들고 아무런 기쁨도 감동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우리의 신앙지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완벽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완전한 행위가 아니고 우리 안에세 계속 타오르는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앞에 나아와 자신들의 성경 지식을 나열하며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과 신학 논쟁이나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업신여기는 창녀들은 저들처럼 성경 지식도 없고 율법에 비추어 추하고 부끄러운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들을 정죄하기 보다는 긍휼히 여겨주시는 예수님을 순수하게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책망을 받고 오히려 세리와 창녀들은 예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고 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예수님을 향한 사랑보다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물론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을 많이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통하여 축복을 많이 받을 수 있는가?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성경지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잘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향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이런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면 진실한 사랑이 없이 여자를 다루는 기술만을 터득하여 뭇여성을 유혹하려는 제비족과 같이 진정한 사랑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불행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며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입니까? 종교적인 기교나 기술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기술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다가오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를 통하여 무언가를 얻는 것에 관심을 갖고 매달리기 보다는 먼저 예수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고 그분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우리의 기도소리를 듣고 싶어하십니다. 성경을 무언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동기로 펼치기보다는 예수님 그분의 음성을 듣고싶어서 그리고 순종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깊게 온전히 경험하고 싶어서 성경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의무감이나 습관적으로 나아오는 예배보다는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의 얼굴을 뵙고 그분의 사랑을 더 깊게 느끼고 싶어서 즐거이 나오는 우리들을 기대하십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관심이 많으신 예수님께서는 진실한 사랑을 품고 나아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선물을 주시기를 기뻐하실까요? 어떤 은혜를 약속하십니까?
1.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21)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고 싶습니까?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서도 사랑받아 보지 못해서 살 의욕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가 사랑하는 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아주 행복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 사랑받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인지 아십니까?
사무엘은 나라가 위기에 처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지도자 엘리는 늙고 무능력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야 할 그의 아들들은 불량하고 하나님을 알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멸시하고 온갖 악행을 일삼았으며 전혀 뉘우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나라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법궤도 빼앗겼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나간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지도자 엘리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소년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메시지를 내려주십니다. 사무엘을 통해 블레셋 사람들을 패배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이 사무엘처럼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 16:27)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사랑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면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다윗을 마음에 들어하시게 되니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마다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통하여 크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 갈렙 등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일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려면 예수님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롬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만약 여러분의 자녀를 누군가 사랑으로 잘 보살펴주는 사람과 아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사랑스럽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나타나 주십니다. (21)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도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당신을 나타내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게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여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도 아니요, 열 두 제자에게도 아니요, 바로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녀는 일찌기 귀신들렸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온전해 진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일이 지나고 주일 새벽에 일지기 혼자 무덤에 나타납니다. 무섭지 않았을까요? 아주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그것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무덤의 문이 열리고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시체를 누군가 옮겨간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와 무덤을 한번 훑어 보더니 아무것도 없자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은 시신이라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고 무덤밖에 서서 계속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위로를 주십니다.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고 부활하신 몸을 보여주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살펴보면 어떤 이는 수십년을 다녀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왔다 갔다만 합니다. 아무런 영적인 체험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은 신앙의 감격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를 붙잡고 예수 믿으면 정말 좋다고 확신있게 말 한마디도 못합니다. 쉽게 회의에 빠지고 늘 갈등에 사로잡혀 삽니다. 신앙생활이 능동적이지 못하고 늘 수동적이고 마지못해 끌려가는 생활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신앙의 연조는 짧아도 감격이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하고 교회생활에 아주 적극적입니다. 확신에 차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예수님 자랑과 교회 자랑에 열을 올립니다. 요즘 우리 교회안에 특별히 알파코스를 통과한 새 가족들중에 이런 분들이 많이 눈에 띄고 있습니다. 얼굴빛이 달라졌습니다. 강조하지 않아도 기도와 전도에 열심입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것마다 다 이루어주셨다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믿으니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이제야 믿었는지 후회가 된다고 하며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함께 예수 믿자고 전도합니다. 너무 너무 행복해합니다.
무엇이 이들을 달라지게 한 것일까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령 충만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통해 다가오심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중에 다가오시고 풍성한 응답을 통해 만나주셨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이 나타나 주시고 만져주셨습니다. 어떻게하면 예수님을 우리 삶속에서 명확하게 만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나 주셔야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 만나려해도 예수님이 만나주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에게 나타나십니까?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그가 누구든지, 과거가 어떻든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가리지 않고 나타나시고 만나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여러분앞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생생하게 만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십니다. (23)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혼자서 결정해야 합니다. 인생의 위기를 혼자서 극복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며 만나는 위험을 혼자서 막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외롭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게다가 마귀 사단의 존재는 늘 틈을 노리고 있습니다. 약점을 보이기만 하면 공격해 옵니다. 우리를 송두리채 삼키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누가복음 11장 24절이하에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더러운 귀신이 우리 사람을 집으로 삼고 들어와 거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악한 귀신이 떼로 몰려와 함께 거하므로 그의 인생이 엉망이 됩니다.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정신적으로 황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나쁜 습관을 형성하거나 여러가지 중독증에 사로잡히게 하기도 합니다. 공연히 미움에 사로잡히게 하여 아무 일도 아닌데 늘 싸우며 증오심의 포로가 되어 살게 만듭니다. 우울증으로 시달리게 만들어 살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자살충동을 불러일으켜 멸망으로 몰아 넣습니다. 그 외에도 귀신이 어떤 사람의 인격에 들어가 지배하고 악한 영향을 끼치면 그 사람 자신뿐 아니라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괴롭히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연약한 우리를 얕보고 귀신의 권세가 우리 안에 들어와 제멋대로 파괴시키는 데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귀신은 참신인 예수님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막 3: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그 예수님을 영접하여 우리 마음에 모시고 우리의 주인으로 삼으면 귀신이 모두 쫓겨갑니다.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들어오려다가도 놀라서 도망갑니다. 이미 들어와 있는 귀신도 쫓겨갑니다. 23절에 예수님이'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게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게 하리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실뿐 아니라 아예 거처를 그의 마음에 정하고 함께 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함께 하십니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은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외로와하지 마십시오. 불안해 하지 마십시오. 염려에 사로잡히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사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사시며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사시며 위험으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사시며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저는 제 가족들의 사진을 지갑에 늘 넣고 다닙니다. 그리고 서로 떨어져 있을 때에 생각나면 한번씩 꺼내 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에 한미전도대회를 위해 우리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 가족 사진을 가지고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도 자랑을 합니다. 이게 우리 딸이고 자기 와이프고 이거는 아들이라고 하면서 자랑스럽게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함께 자랑하고 싶어하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막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예언한 적도 없습니다. 설교한 적도 없습니다. 기적을 행한 일도 없고 병자를 고친 일도 없고 귀신을 쫓아낸 일도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한 일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나아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허비하였다고 화를 내었지만 예수님은 마리아의 사랑을 한 눈에 알아 보시고 크게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칭찬하시고 자랑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무 너무 사랑하시어 가는 곳마다 자랑하고 기념하고 싶어하는 사랑이 넘치는 마리아 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
요 14:21-24 / 정필도 목사
우리가 생각할 때, 교회에 사람들만 많이 모이면 교회가 힘이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도들의 믿음만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왜 믿음만큼 힘이 있게 될까요? 그것은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이 좋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고 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통해서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일 때 엄청난 힘이 나오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도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기쁘게 계명을 지키고, 때로는 목숨을 걸고 지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들어가 죽을 것을 각오하고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믿음의 힘’이 이렇게 강한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을 때,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하지 않았고 순교했습니다. 그 믿음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를 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헌금을 해도 그 자세가 다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태도는 그렇게 다릅니다.
‘맨솔래담’으로 백만장자가 된 앨버트 알렉산더 하이드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경제공황 시절에 10만 달러의 빚을 져 망했었는데, 그가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결심을 하고 시작한 것이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제정신이냐며 비난할 때도 하나님의 빚부터 갚아야 한다며 그동안 십일조를 제대로 못 했던 것을 갚기 위해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십일조를 철저히 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의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십일조를 계속했고, 멋지게 재기하여 10의 2, 3, 4조까지 하다가 나중에는 10의 9조까지 드리는 전설적인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십일조 이야기만 해도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확신이 없는 그냥 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삶의 자세가 다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너무 작은 사람들은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그만 환난과 시험이 와도 쉽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니까 믿음이 없거나 약한 사람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1938년에는 장로교 전국 대표들이 총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의를 하고 신사참배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국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 같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안 한 분이 있는가 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예배당에 신사를 차려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까? 만약에 이런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거나 주기철 목사님 같이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까요? 그 비결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어주셨다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믿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들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것은 지키고 어떤 것은 지키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는 계명은 큰 죄라고 생각해서 그런 계명은 잘 지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 보이는 사람 중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은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골에 홀로 계신 부모는 돌보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식을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는 것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일은 안 지켜도 죄가 아닌 줄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는데, 주일 하루를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데, 예배 끝나기가 무섭게 등산을 가고, 놀러다닙니다. 일주일 중에 하루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항상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자기가 하기 싫은 것은 안 합니다. 그것이 전혀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잠언 11장 25절에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는데, 우리가 실천을 해야 하나님의 이 말씀이 진리인지,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실천을 하지 않으니 어떻게 그것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골로새서 3장 23절에 보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일을 해도 적당히 눈치 보면서 사람에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하고, 대접을 해도 적당히 하지 말고 주님을 대접하듯이 하고, 말을 해도 함부로 하거나 남을 깔보며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말하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지키고 싶은 것만 지키고 회개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일입니다. 이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렇게 살면 열매가 좋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똑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은 만큼 자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능히 지키고 목숨 걸고 계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4장 6절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면 능히 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요한일서 3장 23절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믿음만큼 주의 계명을 지키게 되고, 주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 14절에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는데, 사람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 그 계명대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어떤 축복을 받게 될까요?
첫째, 믿음이 살아납니다.
계명을 지키면 믿음이 살아서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영혼이 아주 잘 되고, 강건한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 진짜 믿음의 사람, 예수님의 제자인 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납니다.
빛의 열매(착하고 의롭고 진실함), 성령의 열매(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셋째, 기도응답의 축복을 받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또, 요한일서 3장 22절의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인데,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받는 비결은 그의 계명을 지킬 뿐 아니라 그 앞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계명을 기쁨으로 행하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기도하는 것뿐 아니라 생각만 해도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기가 돌보던 고아들을 위해 쓸 300파운드를 모금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던 중 그 돈을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갖다 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오, 주님! 저희도 이 돈이 필요합니다!” 라고 했지만, 그 음성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조지 뮬러 목사님에게 가져갔습니다. 그때, 뮬러 목사님은 급히 사용해야 할 300파운드를 구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다시 돈을 구해야 하는 스펄전 목사님은 사무실로 돌아갔는데 책상 위에 편지가 하나 와 있었습니다. 열어보니 315파운드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덤으로 더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실 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살면 이런 응답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넷째, 주님의 사랑을 받으며 삽니다.
요한복음 15장 10절에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1절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라는 주님의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느끼며 체험하며 사는 행복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째, 주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성부, 성자, 성령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지키신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믿습니다.
여섯째,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왜 서로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시냐면, 기쁨이 충만하게 사는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일곱째, 주님과 친구가 됩니다.
친구가 되는 것은 비밀이 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깊은 교제를 하고, 깊은 비밀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15절에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친구에게는 비밀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모스 3장 7절에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약 700년 전에도 이사야에게 그 비밀을 자세히 알게 해서 예언을 하게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자의 무덤에 들어갈 것까지 그 비밀을 알고 예언을 했습니다. 바로 친구와 같은 사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며 살면, 우리가 주님과 친구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덟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에 쓰임 받는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일꾼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계명을 즐겁게 지키고, 목숨 걸고 지키고, 그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율법과 복음
요 14:21-24 / 이규현 목사
십계명은 단순한 윤리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새겨 주신 것으로 역사를 지나면서 고대 근동 지방의 한 부족사회에게만 주셨던 말씀이 아니고 역사를 관통하고 모든 시대를 통틀어 삶의 기준이 되는 열 가지 계명입니다.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절대적 기준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현대 사회는 기준이 무너져 있습니다. 각자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개인이 기준이 되어 절대적 기준을 무시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네 마음대로 해.” “네가 그냥 진리야.”라고 부추기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낡은 윤리 교과서로 취급해 버릴 위험성이 있지만 십계명은 어떤 시대든지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적인 기준이고 삶의 원리와 법칙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계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매우 신중해야 하고 대충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번개와 천둥이 치는 가운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마 천둥과 번개가 쳤던 이유 중 하나는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십계명을 소홀히 다루지 말고 삶의 중심에 두고 지키고자 할 때 삶의 방향을 찾게 해주고 축복을 얻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십계명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몇 가지 태도들을 점검하고자 합니다.
첫째, 십계명을 우리의 힘으로만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신자라면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애를 쓰지만 실제적으로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순종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합니다. 성경 공부도 오래 했고, 은혜도 많이 받았고, 결심도 많이 해 보지만 말씀을 실제로 실천을 해보려고 하면 생각같이 되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죄의 본성, 죄의 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성은 늘 자아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부추기고 수없는 유혹 앞에 우리의 욕망이 쉽게 이끌리는 연약성을 갖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살펴보는 가운데 어느 한 계명도 만만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우상숭배, 그 죄가 나와 상관없는 것 같았는데 살펴보니까 우리는 우상 숭배의 죄를 늘 짓습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신약적 개념으로 넘어오면 외적인 행위만 죄가 아니고 우리의 마음의 죄도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탐심이 제거되는 것은 어렵고 끊임없이 생깁니다. 우상숭배의 죄를 끊임없이 짓습니다. 미움이 살인입니다. 미운 사람이 자꾸 생깁니다.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간음입니다. 주님의 말씀들이 마음을 얼마나 힘겹게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외적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까지 다룰 때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계명들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죄를 범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꼬리 꼬리를 물고 이 계명과 저 계명이 다 연결되어져서 함께 죄를 짓는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이라는 죄를 지었지만 간음죄만 지은 게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면 1계명부터 10계명까지 다 범한 겁니다. 우리 안에는 죄의 뿌리가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우리의 영혼은 정욕의 종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힘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의 힘으로 과연 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요? 노력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깨닫는 것이 있을 겁니다. 처절하게 절망을 맛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내가 그 계명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왜 주셨을까? 율법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가운데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직함입니다. 내 힘으로는 계명들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고 믿었으며 열심히 했습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죄가 그 안에 가득한데 외적인 행위로 자신들의 죄를 가렸던 겁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 너무나 나약합니다. 결심은 했지만 또 무너졌습니다. 기도가 강조되는 이유가 뭘까요? 인간의 연약성 때문입니다. 기도란 인간적 자만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일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열심히 기도생활을 하라는 말씀일까요? 어떻게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순간은 한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라는 말의 의미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깨닫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와 싸우려고 하면 할수록 도리어 죄에 빠져 들어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이웃사랑, 원수를 사랑하는 것,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렸습니까? 척은 할 수가 있는데 진짜 사랑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얘기합니다. 공동체 안에서도 마땅히 사랑할 사람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을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계명을 들여다보면서 하나하나 우리가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나의 연약함을 인정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도 주실 줄 믿습니다.
둘째, 아무리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 앞에 주눅이 듭니다. 율법 앞에서 나는 지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무능함을 느낍니다. 우리가 율법 앞에 서면 자유로운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율법은 일종의 거울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정직히 바라보면 소망이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율법 앞에서 소망이 없는 우리가 붙들 것은 오직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 앞에 서면 소망이 없고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 지점에서 율법이 우리를 복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의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 왜 좋은 소식입니까?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돌려놓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아니고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능력이 되는 겁니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본 사람들이라면 복음이 얼마나 기쁜 소식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을 느끼고 절망할 때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십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을 다 지키지 못했을 때 우리가 피할 곳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항상 불안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자신의 죄 문제 앞에 늘 처절하게 고통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교회가 제시하는 모든 것을 다 지키려고 해 보았지만 기쁨이 없고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로마서 1장 17절에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는 이 구절로 그동안 그렇게 자신을 괴롭혔던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로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깨닫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자신을 그동안 괴롭혔던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고 종교 개혁의 기치를 듭니다. 복음이 그를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패하고 낙심할 때마다 좌절하고 절망하지 말고, 낙심하고 절망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지은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큽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소식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행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복음이 있다고 우리는 막 살아도 될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하나의 일은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은 죄 그 자체보다 죄를 짓고 난 다음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귀한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회개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편리하다고 말합니다. 늘 죄 짓고 용서를 구하고, 또 죄 짓고 또 용서를 구하고. 물론 하나님께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회개를 해 보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회개의 자리로 잘 나아가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가장 흔한 모습은 은폐, 죄를 숨기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죄를 숨기는 역사였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죄를 축소시켜 버리고 교묘하게 자기 방어를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종교라는 열심을 통하여 자기들을 숨긴 겁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솔직해지기가 어렵습니다. 이유는 십자가를 의지하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더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정직해 지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막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겨 버리면 우리는 어둠 가운데 거하게 되고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의 위기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가 줄어들거나 형식적이거나 아예 회개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큰 딜레마일 수도 있습니다. 온전하지 않은 회개는 삶의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연속적으로 죄를 반복하여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회개가 분명하지 않고 정직한 회개가 없기 때문에 죄의 악습을 끊어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면 회개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는 정직하고 온전한 회개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회개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칸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양>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앙의 문제를 이창동 감독이 잘 다루었습니다. 주인공 신애가 남편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서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데 그곳에서도 불행이 계속됩니다. 어느 날,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살해됩니다. 고통 속에서 절망하던 신애가 우연히 교회 부흥회에 참여하게 되고 그곳에서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마음의 위안을 얻고 살아가게 되는데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날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하고, 설교에서도 그러니 어느 날 신애가 마음의 결단을 하고 아들을 죽인 유괴범이 갇힌 교도소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유괴범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괴범은 아주 평안한 얼굴로 신애에게 “나는 이미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합니다.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신애는 갑자기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에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교도소를 뛰쳐나와 길거리에서 쓰러져 버립니다. 그리고 방황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내가 너를 용서해 주기도 전에 네가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이 영화를 통해 말해 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을 죽인 유괴범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애가 자신의 아이가 죽고 난 다음에 절망과 분노와 고통 속에 뒹굴었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유괴범은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흉악한 죄에 대한 통렬한 각성 없이 종교적 술어를 남발하고 있는 끔찍함을 꼬집고 싶은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유괴범의 회개는 가짜일 것이라는 무언의 암시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가 용서가 받았다 할지라도 한 가정에 행한 불의에 대해서 가슴 아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도 중대한 것을 너무 쉽게 다루는 이 경박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의 문제에 대한 태도가 그렇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통해 불신자들이 본 기독교의 한 단면을 꼬집고 있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용서하러 갔던 신애의 신앙마저도 의심스러운 것이고 유괴범 역시 제대로 된 회개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역시 너무 가벼운 태도로 심각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심각성, 죄에 대한 폐해, 죄에 대한 깊은 참회가 빠져버린 종교적 술어로 문제를 피해가려는 얄팍함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죄를 반복해서 지을까요? 반복적인 죄의 습성은 결국 온전한 회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입에 발린 회개를 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죄의 습관을 낳게 되고, 그 죄의 습관에 악은 구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의 습관은 무섭습니다. 죄의 반복은 잘못된 회개에서 비롯됩니다. 형식적인 회개, 자기만족에 그친 회개는 삶을 바꾸지 않습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은 좋은 실례입니다. 그의 범죄는 역사 속에 덮여지는 듯했습니다. 세월이 1년 정도 흘렀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회개시들을 살펴보면 다윗이 회개하지 않았던 날들에 그가 겪었던 정신적, 영적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누를 수 있으나 내면에서는 깊은 고통을 더해주는 것이 죄입니다. 다윗은 나단의 지적 앞에서 죄를 회개했지만 더 이상 죄를 누르고 살 수 없을 만큼 양심의 가책이 그의 내면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지만 자신의 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하고 참된 회개를 통하여 그는 다시 살아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지은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위대성이 나타납니다. 신앙은 내가 얼마나 의롭게 살아왔는가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죄를 미워하거나 다른 것들로 은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진실되고 깊은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회개를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은 죄도 가볍게 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변함없는 신앙의 반복은 결국 회개의 깊이가 얕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가볍게 다루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자아가 통렬하게 깨어지고 그 깨어짐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곧 나의 의를 붙들지 않고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은혜를 입은 것은 나의 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열심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넘어지고 또 넘어지지만 결국 우리로 승리의 자리에 있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손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수하고 넘어지면 두려워하지 말고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이 기꺼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며 우리를 의롭다 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율법 자체만 매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사랑하면 지키리라는 말씀이 해답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본문 2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요한일서 5장 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합니다. 사랑하면 그분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사랑하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그 계명이 무겁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우선 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 하나하나 따지면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다 지킬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이 무겁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21절을 보면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여부는 내가 순종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신앙생활은 쉬워집니다. 사랑이 없이 순종만 하려고 하는 그곳에는 의무감만 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빠지고 맙니다. 의무적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의무감을 넘어서 버립니다. 사랑 없이 순종하려고 하는 것은 힘든 것입니다. 계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뭘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하고 사랑을 하면 그 사랑 안에서는 의무가 아닙니다. 의무는 힘든 겁니다. 사랑이 빠지면 의무만 남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의 필요를 미리 압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입만 다셔도 목이 마른가 하고 물을 갖다 줍니다. 사랑이 식으면 물 좀 달라고 해도 “네가 떠 먹어라.”고 합니다. 사랑이 빠져버리면 유혹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약점과 문제들을 얼마든지 극복하게 만듭니다. 서로에 대한 순종은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사랑할수록 우리는 상대에 민감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는 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 연서입니다. 성경이 어려우신 분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연애편지라고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지를 읽으면 문자만 읽지 않습니다. 문자에 담겨 있지 않은 정서,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 냅니다. 이 사이에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내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 반응합니다. 십계명을 마무리하면서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이니라”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말씀에 순종할 수는 없고 하나님도 그것을 아십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100%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주님이 아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행하고자 합니다.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애씀과 노력을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결론입니다. 우리의 십계명에 대한 순종은 결국은 우리를 축복된 길로 인도해줍니다. 십계명을 처음 대할 때 부담스럽습니다.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케케묵은 율법의 조항을 어떻게 지키란 말인가? 꼭 지킬 필요가 있을까?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 놓은 법 조항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우리가 무시하고 살아도 될 율법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복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행복으로 이끌어줄 삶의 기준이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주신 최고의 계명입니다. 이 계명대로 지킨다면 그것처럼 복된 삶은 없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서도 아니고, 구속하기 위해서도 아닌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자유가 찾아옵니다. 우리가 원리와 법칙을 깨면 처음에는 편안할지 모르지만 결국 그 모든 피해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명령은 힘들지만 지킬 때 우리에게 복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자유로워 질 것입니다. 순종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의 살아가는 날들 동안의 이정표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온전한 길로,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한 가이드라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십계명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주셨던 말씀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시기를 바랍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고, 삶에 회복이 찾아오고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축복이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은혜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축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은 오늘 우리 시대의 축복입니다. 이 계명을 붙잡고 실천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할 때 하나님이 힘주실 것입니다. 때로는 실패하고 넘어져도 우리는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얻고,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로 노력하고 애를 쓰면 이 계명은 결코 무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넉넉히 순종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십계명, 그것을 다시 한 번 붙들어 혼란한 이 시대 속에 기준이 분명한 인생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얻는 믿음
요 14:21-24 / 최승윤 목사
지난 주일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갖고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 갖고 있는 증거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 말씀이 가르쳐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는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절)” 요한복음 15:12절에서도 이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만 제한할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모든 말씀을 의미한다고 해도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강조하고 계신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지 않거나, 단 마음으로 붙잡지 않고,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진실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구원 얻는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가복음 6:4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여, 주여 부르면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예수님을 향해서 “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요, 자신을 예수님의 종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종된 자들의 마땅한 바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바로 순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23절 이하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들이 많으리라”고 하시면서 비유 하나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서 문을 닫은 후에 많은 사람들이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문 좀 열어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 사람들을 향해서 주인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알지 못하노라”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주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주께서 길거리에서 가르치실 때 우리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까?”그 때 주인이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에서 강조하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서 좁은 문이라 할찌라도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가르침에 입각해서 살지 아니하면 “행악하는 자”라고 예수님께서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연약해서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몰라서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주의 뜻을 알려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지킬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는가? 나는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가?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인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단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을 지키려고 할텐데, 왜 나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는가?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없다면 그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고,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에도 관심이 없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확증할 수 있겠습니까? 확증할 수 없다면 거기에는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을 것입니다. 확증할 수 없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관심이 없으니까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오바마 대통령을 안다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아는 것처럼 깊이 아는 것입니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그렇게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원, 영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자가 받을 은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과는 뉴앙스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돌보신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관계가 누리는 풍성함의 극치는 바로 친밀감입니다.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친밀함의 극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바로 이것입니다. 특별한 어떤 사람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 그리스도 예수의 계명을 갖고 지키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총입니다. 요한복음 17:20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소망이요, 간구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 사람들이 받는 또 하나의 은총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1절을 보십시오.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23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처 삼아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과의 친밀감은 결국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것이요, 예수님의 뜻을 더욱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칭함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품고 있는 뜻이요,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는 자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만약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차이도 없다면 그것은 공허한 이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금방 생각하는 것이 물질적인 부와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어야 하고,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망해도 나는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단지 물질적인 것으로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떤 목표를 위해서 주어지는 것인지 모르니까 보이는 것으로만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신령하고 고귀한 은혜를 전혀 은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 심리가 우리 모두에게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내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미움입니다. 무관심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하나되는 것입니다. 친밀감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반대는 깨짐입니다. 분리입니다. 깨짐과 분리로 말미암아 미움이 생깁니다. 무관심해집니다. 이것은 죄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성격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완전히 하나가 된 부부가 깨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발생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다음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 바로 살인과 전쟁입니다. 부부 관계의 타락이요, 성적인 타락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분리, 사람과 사람과의 분리에서 나온 열매들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바로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게 아픔이 많고 고통이 심한 것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분리와 깨짐이 만연하기 때문입니다. 분리와 깨짐이 만연한 사회이기 때문에 더욱 폭력적이 되고, 더욱 비인간적이 되는 것입니다.
분리와 깨짐,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해악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분리되고 깨진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가장 놀라운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고귀한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새 계명을 주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랑은 조건과 자격을 따지지 않습니다. 조건과 자격을 따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을 계명으로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계명으로 주셨다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분리와 깨짐이 일어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서로 욕하고, 씹고, 비난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가게 될 것입니다. 갈등과 분열과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이를 갈며 살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쁨과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행복도 없고 풍성함도 없습니다 삭막함만 있을 것입니다. 긴장과 짓눌림과 상처와 보복과 쓴뿌리들만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단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맺는 가장 핵심적인 열매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과 하나된 사람들이 맺는 가장 확실한 열매입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살아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것을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 13:34절-35절)”“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한 15:10절-12절)” “서로 사랑”은 우리를 풍요롭게 만듭니다. 우리를 자유케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 됨을 확증하고 싶으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사랑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싶으십니까?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로 살고 싶으십니까? 서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조금 못해도, 봉사는 조금 부족해도, 헌금은 많이 못드린다고 하여도 서로 사랑하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이 부족하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하고, 천상의 말을 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Nothing입니다.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는 것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우리와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한 자도 쓰임받을 수 있다
요 14:22-24 / 2007.12.25 / 김근중 목사
얼마 전에 전남 곡성 한 시골 마을에 사는 62세 되는 할머니가 독극물을 마시고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위가 중 10만원과 그 동안 모아놓은 돈을 합쳐 23만원이 든 지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산에서 직접 딴 나물을 팔기 위해 시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 지갑을 잃어버리고 나서 몹시 상심하다가 이틀 후에 음독 자살을 한 것입니다. 헌데 그 지갑은 90세가 넘는 동네 할머니가 동네 길에서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지갑 안에 신분증이 있었는데도 글을 잃을 줄 모르고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가지고 있다가 다른 할머니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다른 할머니는 곧 지갑 주인을 알 수 있었고 그 지갑을 돌려주기 위해 갔을 땐 지갑 주인이 이미 자살을 항 몇 시간 뒤였습니다.
자살이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자살 자가 13,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올 해에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5분마다 1명씩 자살을 시도하고 45분마다 1명이 목숨을 잃고 있는 셈이랍니다. 헌데 그 자살 원인이 가난 질병 불화 등 생계형 자살이 많았으나 이제는 염세 비관 절망 등 비생계형 자살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목적을 두셨으니 오늘에 당한 어려움도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데 유익이 되도록 섭리해 나가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인내해야 합니다. 현재는 어떠할지라도 반드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다 도 심히 약한 자였지만 한 부분에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입니다.
유다 라는 이름이 성경에 많습니다. 특히 신약 성경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익숙한 사람을 말하라면 세 사람정도 있습니다. ①예수님의 동생 유다가 있습니다 (마13:55). 아마 신약 성경인 유다서는 그가 기록했다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②예수님 제자 중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룟 사람 유다라는 말입니다 (요6:71). ③예수님의 제자중 가룟 사람이 아닌 유다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 라고 나온 사람이 이 유다입니다. 이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데 (눅6:16, 행1:13) 다대오 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마10:3, 막3:18). 이 다대오라고 하는 유다는 작은 야고보와 마찬가지로 별 행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1. 유다는 주목받기를 원하는 자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다락방 강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고 했습니다. 그 때 현실주의자 도마가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우리가 어찌 그 길을 알겠삽나이까? 라고 대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듣고 이성주의자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하고 합니다. 대꾸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고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다가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라고 대꾸합니다 (요14:1-21).
유다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도 내시라고 간했습니다. 유대의 전통적인 사상은 메시야가 오면 그가 세상의 왕이 되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리라는 사상이었습니다. 유다도 같은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야라고 하면서도 메시야적인 면모도 나타내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고 하니까 유다는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왜 자기들에게만 나타내고 세상에는 나타내지 않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집으로 가는데 간 후에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고 그 성령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것이고 자기도 그 사람에게 나타낼 것이라고 하니까 그 말을 정치적인 메시야로서의 활동을 이야기 하는 줄 알고 지금 예수님이 행동하는 것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자기들에게만 은밀히 말하고 속이는 것 같이 여겨져 속된 표현으로 아니 그렇게 잘났으면 왜 우리에게만 그렇게 말하십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왜 그런 사실을 나타내지 않습니까? 라고 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빌립과 도마 질문 사이에 자기도 한번 끼어 보려는 의식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이 대꾸에서 보면 유다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성품인 것 같습니다. 주목받기를 원하는 자였습니다. 자기 과시욕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고 과시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능력을 나타내고 영광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기 잘남이 드러나면 쓰임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나 무엇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까? 자기 나타내려는 의식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사단이 예수님을 3가지로 시험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마4:1-10). 세상 사람들이 놀랄 만한 능력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나타내고 높아지려는 것은 마귀 미혹입니다. 자기가 영광받으려고 하는 것은 미혹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는 경건 생활의 주제인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온전한 구제 온전한 기도 온전한 금식이 되게 하기 위해서 중요한 포인트는 은밀함 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마6:1-4).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천국 갔다 온 사실을 복음 증거를 위해 부득불 증거하면서도 두려움 마음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이름도 드러내지 않았고 내용을 말하는데 있어서도 자기를 지나치게 생각할까 봐 그만 두었습니다 (고후12:1-6).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마십시오 . 다른 사람의 평가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행하십시오.
2. 예수님은 말씀에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간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 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14:23-24). 예수님이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예수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은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확인된다는 의미입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타내신다는 말이 됩니다. 결국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제자들도 예수님 떠난 후에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도 말씀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역을 하기 전에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사역을 해도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갔을 때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예수님의 광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좋아 그 곳에 집을 짓고 살자고 했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17:5).
요한계시록14:12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했고, 요한일서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고 했고, 본문 요한복음14:21에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22:7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말씀을 지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를 사랑합니다. 그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고 약속한 복을 주십니다. 그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복에는 모두 계명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전제 되어 있습니다 (출20:3-6, 신28:1-14, 말3:10).
하나님 말씀은 지식으로 분석하기를 원하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세계 사상의 양대 흐름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입니다. 헬레니즘은 이성을 강조하고 헤브라이즘은 의지를 강조합니다. 헬레니즘은 귀납적이고 헤브라이즘은 연역적입니다. 이스라엘의 3대 교육기관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베트 하세퍼 (성경의 집),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베트 탈무드 (설명의 집), 대학교에 해당하는 베트 미드라쉬 (연구의 집)이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성경 말씀을 배웁니다. 성구 암송합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말씀을 적용하는 단계입니다. 순종하고 경험을 나누는 것입니다. 대학교에서는 경험하고 나눈 것을 토대로 정리하고 연구합니다. 현대 사상이 대부분 헬레니즘 영향을 받아 이성주의, 지성주의에만 빠질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영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종하므로 기적이 일어납니다.
본문 요한복음 14:22-24의 말씀은 내용 전개상 15절에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15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16-21까지는 진리의 영인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용을 연결하면,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 하나님 나라에 갈텐데 그 후에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그 말씀을 제자들이 당시는 그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지만 성령이 도와서 능히 말씀을 깨닫게 하고 말씀을 지키게 하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깨닫게 하고 지키게 하고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유다는 자기 생각과 달리 별로 주복받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후 성령의 은혜로 인해 예루살렘을 떠나 최초로 외국 선교에 나가는 사도가 되었고, 이방인의 왕에게 직접 복음을 전하는 최초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시리아와 페르시아에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카스피해 근처에서 순교했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은혜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