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閔妃暗殺⑥-1
슬픈 왕비의 자리
천주교 탄압으로 시작된 1866년, 구미 열국의 “이양선(異樣船)”관계로도 실로 사건이 많은 해였다.
8월, 교역을 목적으로 아시아 각국을 순회하고 있는 미국 기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을 목표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대원군이 각지의 항만이나 수상경비를 특히 엄중하게 하기 위해 “해방령(海防令)”을 내린 직후의 일이다. 당시 미국은 동양제국에 교역시장을 찾아 활약하고 있던 때였고, 셔먼호는 승조원 24명, 대포와 다수의 무기, 탄약을 싣고 있었다. 미국인 선주 프레스톤은 온건하게 평양에서의 교역을 청하였으나, 통역을 맡은 영국 목사 토머스는,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의 처형을 격렬하게 힐책하고, 머지않아 프랑스함대가 보복하러 온다고 위협하고 교역을 강요했다. 조선의 관리들은 교역을 거절하고 퇴거를 명했으나, 셔먼호는 관원 한 사람을 배로 납치하여 더욱더 평양으로의 항행을 계속하고, 연안의 군중에게 총을 난사하여 사상자를 냈다.
이것을 안 평양민중은 격분하여 강변으로 운집하였고, 배를 겨누어 활을 쏘았으며, 총을 쏘아 병사들을 지원하여 사기가 크게 상승했다. 뭍과 배와의 전투는 길게 끌었지만, 이윽고 소총병 일대가 작은 배로 셔먼호에 접근하여 불을 질렀다. 선내의 화약은 무서운 폭발음을 내고 선체는 맹렬한 불에 싸여, 이미 불타서 죽었을 승조원 전원과 함께 가라앉았다.
천주교 탄압의 난을 피한 세 사람의 선교사중 한 사람인 리델은 수개월 후에 겨우 천진(天津)에 다달았다. 그는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조선의 천주교탄압 실정과 선교사 처형을 상세하게 알리고, 상처 입은 조국 프랑스의 명예의 만회를 바라면서 절절하게 호소했다.
사령관 로즈에게는 노대국인 청국조차도 우리의 군사력 앞에 하잘 것 없이 굴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물며 그 번속인 소왕국 조선 같은 것은 일격으로 쳐부순다고 처음부터 상대를 깔보고 있었다. 주청 프랑스 공사 베로네도 “조국의 명예”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로즈에게 동의하고 조선침략계획을 진행했다.
기함 부리모게를 비롯하여 3척의 프랑스함대가, 선교사 리델과 두 사람의 조선인 신도를 수로 안내인으로 하여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에 접근한 것은 9월이었다. 여기에서 부터는 물이 얕아 항행이 불가능했다. 부리모게호는 고장으로 늦고 있었다.
2척의 배는 각각 한강연안의 조선군과 포격전을 개시했으나, 격전에 이르기 전에 먼저 1척이 퇴각을 시작했다. 잇따라 다른 1척도 이에 따랐으며, 늦었던 부리모게와 합류하여 3척은 영종도(永宗島)부근에 정박했다.
여기에서 작전회의가 열렸다. 간부 일동의 의견은, 조선군의 방비병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대하고, 프랑스 측의 현재 전력으로는, 승리가 매우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진용을 재정비하여, 재기를 도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그들은, 아무런 보람 없이 이를 갈고 전투계속을 바라는 리델 등을 뿌리치고, 강화수역을 떠났다. 결과부터 본다면, 이때의 프랑스 함대는 적정을 정찰한데 불과하다.
프랑스함대 퇴거의 보고를 받은 대원군은, 반드시 그들은 다시 온다고 판단했다. 그는 한층 방비를 강화하고, 정보기관을 살치하고 의용병을 모집하여 더욱 민중의 전의 고양을 도모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하여, 이때만큼 외적에 대한 방비태세가 정비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대원군의 예상대로, 프랑스함대의 제2차 출동은 결행되었다. 이때는 기함 게리엘을 비롯, 7척 편성의 함대와 특히 일본 요코하마(橫浜)에 주둔하고 있던 육전대 600명이 참가했다. 지난번과 같이 리델이 통역 겹 정보통으로 종군했다. 조선에 대한 보복에 리델은 집념이 불타고 있었다.
함상으로부터의 지원사격 후에 먼저 육전대가 강화도에 상륙하고, 로즈제독도 스스로 한 부대를 이끌고 강화성 공략에 나섰다. 프랑스 군과, 약 2.000의 병사가 지키고 있던 강화성 사이에 격렬한 공방전이 계속되었으나, 머지않아 성은 의외에도 맥없이 함락되었다.
강화도는, 서울의 수로인 한강 하구를 가로막는 듯한 위치에 있다. 강화성 함락의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민심은 동요하였고, 화의(和議)를 바라기도 하는 등, 대원군의 시정방침을 남모르게 비판하는 자도 있었다. 국방비 팽창뿐만 아니라, 경복궁 재건도 대중의 생활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속은 엄격하였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조선군 총사령관 이경하의 명의로, 로즈제독에게 다음과 같은 강경한 도전장을 보냈다.
「타국에 침범하여 국법을 범한 사교도가 처형된 것은, 당연하다. 그대들은 조속히 퇴거하라」
대원군의 강직한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한 문면이다.
로즈제독은 조선 측에서 화의를 제의할 것으로 기대하고, 그 조건이 어떤 것이든, 프랑스의 면목만 세워주면 함대를 철수할 계획이었다. 이에 반하는 도전장에 격노한 그는, 대원군에게 못지않은 줄행랑을 칠만한 요구를 들이댔다.
「9명의 프랑스 신부 살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처형 책임자를 이쪽으로 보내라. 또한 통상개시를 위한 전권대사를 파견하라.」
이에 대하여 조선 측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머지않아 강화도 탈환을 노리는 조선 측은, 강계(江界)지방의 포수병 1.000여명을 서북부에 상륙시켜,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웅거했다. 그들은 호랑이 사냥으로 수완을 단련한 명포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의도한 로즈는, 암석이 날카롭게 난립한 산위의 성으로 정예부대를 보냈다. 성 주위에는 돌덩어리로 쌓아올린 두껍고 높은 성벽이 둘러싸 있었다. 적을 깔본 프랑스 군이 성이 가까운 곳까지 육박했을 때, 돌연 성벽 위에 튀어나온 다수의 수비병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프랑스 부대는 병사의 반수를 잃을 정도로 참패했다.
리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로즈 제독은 이것을 듣고, 경악자실하고, 드디어 전 함대의 철퇴를 결심했다.」
이때는 로즈의 부하들 사이에도, 정족산의 설욕을 바라는 자, 서울 진격을 주장하는 자 등, 퇴거에 반대하는 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이 이상의 희생은 피해야 한다는 제독의 판단은 바뀌지 않았고, 프랑스 함대의 모습은 강화수역에서 사라졌다.
청국의 힘도 빌리지 않고 독력으로 프랑스 함대를 격퇴한 것은, 강경한 “힘의 정책”에 대한 대원군의 자신을 한층 굳히게 했다.
1866년은 타국의 몇 차례에 이르는 무력적 협박을 받았고, 그 격퇴로 분주하게 쫓기는 해 였으나, 전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재건공사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경복궁은 이씨조선왕조를 창건한 이성계에 의하여, 1395년에 완성되었으나, 豊臣秀吉(도요토미 히테요시)의 침략으로 소실된 후에는 폐허로 방치되고 있었다. 제23대 왕 순조말기, 섭정이었던 세자 익종(翼宗/追尊) 이 재건을 계획했으나, 구체화하기 전에 죽었다. 그 아들 24대왕 헌종(憲宗)은, 김씨 일족의 세도정치시대였고, 왕실권위의 상징인 왕궁을 새건할 권력도 재력도 없었다.
대원군은 조 대왕대비의 동의하에, 주위의 반대를 억누르고, 이 대 토목공사에 착수했다. 고종은 익종의 후계자로 왕위에 오른 복잡한 사정이 있고, 익종의 유지를 잇는 경복궁 재건사업 수행은, 왕실의 권위를 천하에 과시함과 동시에, 고종을 강한 인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대원군에게는 시종일관하는 정치적 신념이 있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세도정치 하에 약체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중앙집권적인 군주제의 재 강화에 의해 국내체제를 정비하고 , 왕조의 대내 대외적인 위기를 극복하자는 굳은 결의였다. 세도정치의 근절도, 인사의 개혁에 의한 인재등용도, 부덕한 관리의 숙청도, 쇄국양이책(鎖國攘夷策)에 의한 천주교탄압이나 외적에 대한 반격도, 그리고 처음부터 큰 어려움이 예상된 경복궁 재건도, 모두 그의 정치적 신념이 뒷받침하는 “철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경복궁 재건을 위한 재원은 먼저, 원납금(願納今)의 기부를 요구하기 시작하고, 그 대가로 관직이 주어졌다. 이는 사람들의 명예심을 자극하여 “원납금”은 예상 이상의 금액에 달했다.
공사 진행에 따라 각지에서 많은 노동자가 “庶民自來”라고 쓴 깃발을 세우고 연일 서울로 흘러들어왔다. “自來”가 아니라 징발된 사람들이었으나, 도감본부는 그들의 의욕을 향상시키기 위해 舞童隊, 농악대, 연예단 등을 조직하여, 각 공사장을 순회시켰다. 대원군의 발안이 아니었을까---
「아리랑」은 누구든지 알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민요다. 민비에 관심을 가지기 전의 나 조차도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
「아리랑」은 경복궁 재건 때에 생긴 노래라는 설이 있다. 이 대 토목공사에 동원된 농민이 고통스러운 노동이 한이 되어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대원군이 노동자를 격려하기 위하여 스스로 작사하여 그들에게 부르게 했다고도 전해진다.
원래, 조선의 민요는 하나의 기본적인 멜로디가 있고, 그것을 때에 맞추어 즉흥적인 가사를 붙여 불러왔다고 한다. 어떤 것은 금방 없어지고, 어떤 것은 오래 이어져 먼 지방에 까지 전해 졌으며, 여러 가지 변화를 겪으면서 전승하여 불러온 것 같다. 경복궁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머나먼 고향 집의 아내가 그리워,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의 안타까운 마음을 추측하는 사이에, 그런 생각이 입을 따라서 나온 노래이기도 했을 것이다. 대원군의 작자도 그들에게 노래 불리는 동안에, 보다 소박한, 시골정취에 넘치는 것으로 변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리랑」멜로디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고 해도, 오늘에 전해지는 가사 중 몇 개인가는 경복궁 재건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오래지 않아 “원납금”도 한고비를 지나고 자금융통이 어려워진 참에, 건축현장에서 화재가 일어나, 임시 가옥(假屋) 800 여체와 귀중한 자재 전부가 소실되었다. 관계자 일동이 좌절감에 기력을 잃고 있는 가운데, 대원군은 기죽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점점 모금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원납금”만으로는 조달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해 졌다. 대원군은 토지세를 인상하고, 서울 도성 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통행세를 매기는 등, 서민생활을 압박하는 세금이 점점 무겁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실가(實價) 20분의 1에 지나지 않는 “당백전(当百錢)”이라는 신 화폐를 주조하여 국비에 충당했기 때문에, 물가상승을 불러왔다. 이에 대한 서민의 불만이 격화되자, 청국에서 전화(錢貨)를 수입하여 통용하게 했으나, 이와 같은 고식책(姑息策)으로 경제의 혼란이 수습될 이 없었다.
대원군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에도 이경하에게 명하여 엄하게 단속했으나, “대원군을 퇴위시켜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그는 기죽지 않고, 오로지 공사의 완성을 서둘렀다.
고종5년(1868년, 민비의 왕궁생활은 3년째를 맞이한다. 경복궁 완성도 가까웠다고 대원군이나 왕의 기쁨이 왕궁내의 분위기에도 반영되어 궁녀들도 어딘가 신바람이 나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고참 상궁들에 의한 왕비교육도 전부 끝난 민비는, 언제나 조용한 미소를 띠고, 날마다 어려운 관습의 임무를 실수 없이 해나가고 있었다.
어느 자료에도, 이 시기의 고종은 민비를 거의 돌아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민비는 남편의 양친인 대원군 부처를 잘 받들고, 주위에 대한 왕비로서의 깊은 마음씀씀이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또한 이 무렵의 민비가 이상할 만치 열심히 독서를 하였는데, 그녀가 특히 애독한 것은 『春秋』와 『左傳』이었다는 것도 많은 자료에서 말하고 있다.
『춘추』는 노(魯)나라 사관의 손으로 이루어졌으며, 공자(孔子)가 필을 더했다는 기원전 722년부터 242년간에 걸친 춘추시대의 역사서이며, 『좌전』은 좌(左)씨에 의한 그 주역서이다. 주(周)나라가 쇠해지고, 제후 상호간에 병합에 전념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는 약육강식의 시대가 상세하게 적혀 있다.
『춘추좌씨전』은, 일본에서는 8대쇼군(將軍) 吉宗(요시무네/역자 주: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밑에서 경륜을 닦은 유자 荻生徂來(오기유 소라이)가 문하생이나 우인에게 널리 천거한 사서로, 그 후에 陸奧 宗光(무쓰 무네미쓰)나 福澤 諭吉(후쿠자와 유키치)의 애독서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