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묻다 / 김사인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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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하고픈 말 다 하고 살 수는 없다’고들 한다.
살다보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억울하다는 말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차마 말하지 못한 사연들도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 혹은 인간관계 때문에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들 - 흔히 가슴에 묻어둔다거나 무덤까지 가져간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렇게 가슴에 묻어둔 것들이 어쩌면 한(恨)이
되어 또 다른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지만, 맞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하고픈 말 다 하고 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김사인의 시 <깊이 묻다>를 읽으면
내 가슴 속에 깊이 묻어둔 말들이 떠오른다. 떠오를 뿐이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들이다. 시의 내용이래야
단순하다. 열거법 이외에 특이한 구성도 아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상념에
젖게 만든다. 김사인 시의 매력이다.
전체 다섯 개의 연은 모두 ‘사람들 가슴에 ○○ 있다’라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은 무엇일까.
차례대로 ‘텅텅 빈 바다’, ‘길게 사무치는 노래’,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겁에 질린 얼굴’, ‘충혈된 눈’,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파란 불꽃’,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인데,
때로는 ‘하나씩 있다’고도 하고 혹은 복수를 쓰기도 했으며
어떤 것은 ‘숨어 있다’고도 한다.
여기서 바다, 노래, 그림자, 얼굴, 눈, 조선낫, 불꽃, 대숲이
무엇을 뜻한다고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시인이 생각하며 그 단어로 표현한 것과 독자들이 그 어휘를
통해 상상한 것이 꼭 같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같은 단어라도 앞에서 수식하는 관형구들에 따라
다른 뜻이 담기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모두를 한 마디로
묶는다면 제목 ‘깊이 묻다’에 나오듯이 바로 ‘가슴 깊이 묻어둔
것들’이다. 즉 살아오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혹은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둔 사연들이다. 물론 이들 모두가 하나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부정적인 것도 있고 긍정적인
것도 있다. 그리움, 사랑, 기쁨, 트라우마, 미움, 증오, 열정…
무슨 단어로 바꾸어도 뜻은 통한다. 이를 ‘하고픈 말’ 혹은
‘하고픈 이야기’라 할 수 있으리라. 다만 그 단어들을 통해
어떤 상상을 하는지는 독자들마다 다 다를 것이기에 그냥
상상에 맡겨 두는 것이 좋다. 분명한 것은 독자마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시를 읽어 내려가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사실이다. 살아가며 누구나 겪는 일,
그러나 저마다 그 감정의 크기가 다 다를 이야기들 -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가슴 깊이 묻어둔 이야기들을 어쩌면
이리 편안하게 풀어놓았을까. 시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내 가슴 속 깊이 묻어둔 말을 꺼낼지도 모르겠다.
/ 이병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