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천년의 古都 慶州는 온통 역사의 현장이다. 둘러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다. 욕심을 내다 보면 답사는 뒤죽박죽이 되게 마련이다. 이번에는 삼국통일에 관련된 국보와 유적만 취재하기로 미리 범위를 좁혔다. 韓民族 형성과 발전에 있어 결정적 轉機를 마련한 사건은 누가 뭐래도 新羅의 삼국통일이며, 그 주역은 金春秋, 金庾信, 金法敏이다. 필자는 우리 民族史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3人의 영웅에게 바짝 다가서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慶州로 향해 서울을 떠났다
국보 제25호 太宗武烈王陵碑
목숨을 건 統一외교의 기상이 솟구치다
大영걸의 소박한 무덤
삼국통일의 설계자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金春秋는 실제로 어떤 인물일까? 우선 그의 무덤부터 찾아가서 해답을 구하기로 했다.
太宗武烈王陵은 경주시 서악동 구릉 동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 바로 남쪽의 西川橋(서천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건천-대구 방면으로 연결되는 4번 국도를 따라가면 2km 정도의 거리다.
이곳엔 다섯 基의 대형 원형 무덤이 一列縱隊(일렬종대)로 배치되어 있다. 마치 기동 중인 함대와 같은 모습이다. 사적 제20호 太宗武烈王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내부구조는 橫穴式(횡혈식) 돌무덤으로 추정된다.
지난 8월23일 오전 9시 필자는 太宗武烈王陵 앞에 섰다. 평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다른 참배객은 없었다.
무덤의 규모는 높이 13m, 주위 둘레 112m. 噴口(분구)의 언저리에는 띄엄띄엄 막돌이 박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했더니, 무덤을 보호하는 護石(호석)이라고 한다. 별 꾸밈도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호사스런 모습의 다른 왕릉과는 전혀 딴판이다.
太宗武烈王 金春秋라면 신라의 역대 임금 56人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筆寫本 花郞世紀(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金春秋를 다음과 같이 讚(찬)하고 있다.
<세상을 구제한 영걸한 임금이다. 한 번 천하를 바로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그런데도 그는 소박한 幽宅(유택)에 들어가 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오히려 大영웅의 本色에 걸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金春秋는 당당한 풍채의 미남자인데다 부드러운 말을 구사하면서도 설득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一然은 三國遺事에서 그를 「하루에 쌀 서 말, 꿩 아홉 마리를 먹은 엄청난 大食家(대식가)」로 기록했다. 다소 과장스럽기는 하지만, 신라의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발산해야 했던 巨人 金春秋에게는 걸맞은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이 마흔 때부터 高句麗, 倭國, 唐을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벌인 當代 제1류의 世界人이었다. 그것은 화려한 儀典外交(의전외교)가 아닌 사나이의 한 목숨을 걸었던 일대 모험외교였다.
서기 642년, 百濟(백제)가 大耶城(대야성·지금의 합천)을 함락시키면서 王京 서라벌의 숨통을 죄어오자 그는 請兵(청병)을 위해 대담하게 평양성으로 들어가 고구려의 寶藏王(보장왕), 최고실권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을 만났다. 淵蓋蘇文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했던 쿠데타 직후였다.
金春秋는 고구려측에 대해 羅·麗(신라·고구려) 군사동맹을 제안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새 집권세력은 對 신라 강경파였다. 寶藏王은 100여 년 전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은 竹嶺(죽령) 이북의 땅을 도로 내놓으라고 金春秋를 협박했다. 협상은 결렬되고 金春秋는 객관에 억류를 당하고 말았다.
목숨을 잃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그는 「토끼와 거북」의 寓話(우화)를 절묘하게 활용하여 寶藏王을 기만했다. 귀국하면 임금을 설득하여 죽령 이북의 땅을 고구려에 반환토록 하겠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겨우 死地(사지)에서 벗어나 서라벌로 귀환할 수 있었다.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에 능했던 斗酒不辭의 人傑
金春秋는 器局 큰 호쾌한 인물이었다. 그런 만큼 그의 모험외교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647년, 그는 백제의 전통적 동맹국인 倭國(왜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왜국에서는 독재자 소가 이루카(蘇我入鹿)가 참살당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여 새 집권세력에 의해 大化改新(대화개신)이 진행되고 있었다. 金春秋는 왜국의 정세를 살피는 한편으로 백제의 고립을 겨냥하여 왜국의 새 집권세력과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국의 새 집권세력은 金春秋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日本書紀엔 金春秋에 대해 「美姿顔善談笑」(미자안선담소), 즉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斗酒(두주)를 不辭(불사)하는 當代의 人傑(인걸) 金春秋는 倭人들에게 驚異(경이)의 대상이었을 터이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金春秋는 하루에 술 여섯 말을 마신 大酒家(대주가)였다.
金春秋는 왜국에서만 높게 평가받은 것이 아니었다. 唐太宗(당태종)도 신라 使臣(사신) 金春秋를 한 번 만나보고는 「神聖(신성)한 사람」이라며 우대했다. 그런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羅唐 군사동맹이 성립되었다. 648년의 비밀협약이었다. 비밀협약의 골자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을 羅唐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羅唐 군사동맹의 성립은 신라가 麗濟(고구려-백제) 동맹에 대항할 수 있는 유력한 맹방을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의 귀국길은 험란했다.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황해를 횡단하여 옹진반도에 접근했을 때다. 여기서 그가 탄 배는 연안항로의 길목을 지키고 있던 고구려 해상순라대의 급습을 받았다.
배가 나포되기 직전의 절박한 순간에 수행원 하나가 재빨리 金春秋의 옷을 벗겨 입고 변장함으로써 고구려軍의 집중공격을 받고 난도질을 당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金春秋는 쪽배에 몸을 싣고 고구려 함대의 포위를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신라의 對唐 통로인 黨項城(당항성:경기도 남양)에 입항할 수 있었다.
金春秋·金庾信의 동맹
太宗武烈王陵 앞에서 40m 떨어진 동북쪽에 비각 하나가 보인다. 그 안에 국보 제25호 太宗武烈王陵碑(태종무열왕릉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태종무열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文武王 원년에 세운 것이다. 碑身(비신)은 없어지고 지금은 碑身의 臺石(대석)인 龜趺(귀부)와 碑身 위에 얹혔던 갓머리 장식인 이수만 남아 있다.
신라인들은 金春秋의 功業(공업)을 과연 어떤 문법과 표현으로 돌에다 새겨 후세에 전하려 했을까? 아쉬운 것은 碑身이 없어졌므로 碑文의 내용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死後, 134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대목에서 그의 行狀(행장)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해야 할 것 같다.
그는 603년 서라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龍樹(용수)는 荒淫政亂(황음정란)하다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폐위된 신라 제25대 임금 眞智王(진지왕)의 장남이었다. 그러니까 眞智王이 귀족연합세력에 의한 쿠데타로 폐위되지만 않았더라면 金春秋는 龍樹에 이어 왕위에 올랐을 인물이었다. 그는 당당한 眞骨(진골)귀족이긴 했지만, 廢王(폐왕)의 손자였던 만큼 왕위계승권을 지닌 聖骨(성골)의 지위에는 오를 수 없었다.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것은 그의 어머니 天明夫人(천명부인)이 제26대 眞平王(진평왕)의 장녀라는 점이었다. 이런 가문적 배경 때문이었던 듯 그의 아버지 龍樹는 內城私臣(내성사신: 국왕 경호실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龍樹는 短命(단명)했다.
龍樹는 죽음에 앞서 그의 아내 天明夫人에게 그의 동생인 龍春(용춘)을 섬기도록 유언했다. 오늘날의 도덕관으로는 해괴망칙한 일이지만, 신라의 귀족사회에서는 형의 死後(사후)에 아우가 형수를 娶(취)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니까 金春秋에게 龍春은 삼촌이며 義父(의부)인 것이다.
金春秋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비범하고 생각하는 바가 깊고 넓었다. 그는 金庾信이 화랑조직의 제1인자 風月主(풍월주=國仙)일 때 그 직속의 제2인자인 副弟(부제)가 되었다.
그때 이미 金庾信은 여덟 살 年下의 金春秋가 장래에 大成할 인물로 내다보고 접근했다. 그것이 결국 결혼동맹으로 이어졌다. 金春秋가 金庾信의 둘째 여동생 文姬(문희)를 아내로 맞았던 것이다. 金春秋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었다.
새로운 리더십으로 王位 경쟁에서 승리
善德女王 11년(642)은 신라 최대의 위기였다. 이 해 7월 백제 義慈王(의자왕)은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40여 성을 탈취했다. 이어 11월 백제 장군 允充(윤충)은 군사 1만명을 휘몰아 신라의 大倻城(대야성: 합천)을 함락시켰다.
가야산의 대야성은 신라의 급소였다. 당장에 신라 경제의 핵심지역인 낙동강 서안 지역의 지배권을 위협당했던 것이다. 더욱이 대야성에 오르면 대구-경산-영천 -서라벌로 이어지는 통로가 내려다 보인다. 의자왕에겐 신라의 王京 서라벌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황이었다.
대야성이 무너지면서 성주 品釋(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가 자결했다. 고타소는 金春秋와 死別한 그의 첫 부인 寶羅宮主(보라궁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비보를 접한 金春秋는 온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 한번 깜짝거리지 않을 만큼 분노했다.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꺾을 수 없으랴』
위기의 신라에서는 즉각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그 하나는 金春秋가 백제의 고립을 겨냥한 주변외교에 신명을 걸었던 것이고, 다른 하나는 金庾信이 신라의 수도권을 방위하는 押梁州(압량주: 경산) 軍主(군주)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백제의 날카로운 攻勢(공세)에 신라는 守勢(수세)를 면치 못했다. 드디어 善德女王 16년(647) 서라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의 명분은 女主不能善理(여주불능선리)였다. 여왕의 리더십으로는 국가적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반란의 주모자는 舊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귀족회의 의장) 毗曇(비담)이었다. 그때 마침 金春秋는 왜국에 건너가 있었다. 반란군은 그의 평생동지 金庾信에 의해 완전히 진압되었다.
반란의 와중에 善德女王이 병사하고 眞德女王이 즉위했다. 이후 신라 조정은 金春秋-金庾信 주축의 新귀족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654년 봄 3월, 진덕여왕이 재위 8년 만에 병사했다. 이제 왕위계승 자격자인 聖骨은 아무도 없었다. 和白(화백)회의에서는 상대등 閼川(알천)에게 섭정의 지위에 오를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알천은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힘의 진원지가 金春秋-金庾信 동맹임을 깨닫고 『春秋公은 실로 濟世(제세)의 영웅이오』라면서 왕위 경쟁을 포기했다. 이로써 金春秋가 신라 제29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東아시아 세계가 羅唐의 동서동맹과 麗-濟-倭의 남북동맹으로 양분되어 국제전을 향해 돌입하려던 시기였다.
통일전쟁기의 씩씩한 기상을 표현한 陵碑
태종무열왕릉비는 當代 최고 수준의 예술품이다. 龜趺(귀부)는 높이 1.3m, 길이 3.8m, 폭 2.49m 규모이다. 목을 길게 쳐들고 힘차게 뒷발로 땅을 밀며 전진하는 거북의 모습에서 삼국통일기 신라의 씩씩한 기상이 나타나고 있다. 거북 등어리 부분의 전면에 龜甲文(귀갑문)을 조각하고 그 주위에는 飛雲文(비운문)을 둘렀다.
거북의 입과 목 부위에 주황색 얼룩이 있다. 녹물 같은 것이 스며든 때문이 아니라 石材에 산화철 성분이 섞여 있어 그렇다고 한다.
비석의 갓머리인 이수의 前面에는 여섯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다.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꿈틀거리며 비천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수의 높이 1.06m, 너비 1.36m, 두께 38cm. 그 중앙에는 篆書體(전서체)로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여덟 글자가 양각되어 있다. 바로 이 여덟 글자에 의해 태종무열왕릉이 신라의 능묘들 중 유일하게 피장자가 명확한 무덤이 되었다.
碑身(비신)은 파괴되었다. 그 파편 하나가 1935년 4월2일 무열왕릉 앞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碑文(비문)에는 사방 3.3cm씩의 네모 눈금을 그린 다음 그 안에 한 글자씩 새겨 넣었다. 그 가운데 「中體」라는 두 글자가 확인되었다. 나머지는 한두개의 획만 보일 뿐이다. 서체는 楷書(해서)다.
碑文은 태종무열왕의 둘째아들 金仁問(김인문)이 짓고 쓴 것으로 전해진다. 金仁問은 일생 동안 일곱 번 22년 간이나 唐나라에 들어가 宿衛外交(숙위외교:일종의 인질 외교)를 했다. 孝昭王(효소왕) 3년(694) 4월29일 병환으로 唐의 서울 장안에서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孝昭王은 金仁問에게 太大角干(태대각간)을 추증했다. 金仁問의 묘는 20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太宗武烈王陵과 마주보고 있다. 일제 때 태종무열왕 父子의 무덤 사이를 신작로로 갈라놓았던 것이다. 또한 金仁問의 묘 바로 아래엔 철로까지 부설해 놓았다. 국권 상실기가 아니었다면 이런 무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잘못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신라 31대 神文王 12년(692)에 唐의 中宗은 사신을 보내 金春秋의 廟號(묘호)를 太宗武烈王이라고 한 데 대해 시비를 걸었다.
『우리 太宗文皇帝(태종문황제)는 공덕이 千古에 뛰어나 붕어하는 날 廟號를 太宗이라고 했는데, 신라의 先王(선왕: 金春秋)에게도 동일한 廟號를 쓴 것은 매우 참람한 일이니 조속히 고치라』
이에 神文王은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생각컨대 우리 先王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생전에 良臣(양신) 金庾信을 얻어 同心爲政(동심위정: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함)으로 一統三韓을 이루었으니 그 功業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唐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끝내 金春秋의 廟號를 고치지 않았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 또 한 가지 있다. 신라 임금의 이름으로 삼국통일은 金春秋와 金庾信의 同心爲政에 의한 것임을 선언했다는 사실이다.
국보 제199호 斷石山 神仙寺 磨崖佛像群
金庾信이 석굴에서 統一 염원을 기도하다
興武大王으로 추존된 장군
金庾信 장군의 무덤은 태종무열왕릉과 그리 멀지 않다. 경주 도심 서쪽에 있는 서천교를 지나 우회전하면 1km 남짓한 거리다. 서천을 끼고 북상하는 길은 興武路(흥무로)라고 명명되었는데, 길 양쪽의 가로수가 우거져 터널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다.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은 사적 제21호 金庾信의 무덤은 太宗武烈王陵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호화롭다. 묘의 지름은 30m 정도이며 주위에 護石과 돌 난간을 두른 원형분이다. 護石에는 말, 소, 돼지, 양, 뱀, 닭 같은 十二支神像을 새기는 등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興德王(826~836)의 능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金庾信은 興德王에 의해 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大王으로 추존되면서 金庾信의 묘가 대대적으로 개수된 것으로 보인다. 5년 전 失火(실화)에 의한 산불로 무덤 주위의 숲이 불탔는데, 이제는 거의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무덤 앞에는 조선 숙종 36년(1710)에 경주부윤이 세운 表石이 있다. 護石에 새겨진 十二支神像은 모두 평복에 무기를 잡고 오른쪽 방향을 보고 있다. 매우 정교한 솜씨다.
金庾信의 무덤 앞에 서면 그의 유언이 생각난다. 그는 그의 집으로 문병을 온 文武王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며, 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文武王은 울면서 老장군의 유언을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773년 7월1일 金庾信은 일흔아홉의 나이로 별세했다.
名將의 출생과 성장배경
金庾信은 595년 만노군(충북 진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532년 신라에 멸망당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仇衡(구형)의 손자인 舒玄(서현), 어머니는 眞平王의 여동생(동복남매 간이지만 아버지는 다름)인 萬明夫人(만명부인)이다.
舒玄과 萬明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이 불가능했다. 두 남녀는 신라의 변경 지역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감행했다. 舒玄으로선 신분상승을 위한 승부수였는지 모르지만, 왕족 가문에서 성장한 萬明으로선 도피생활이 대단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眞平王이 萬明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舒玄에게 만노군 태수로 임명했다. 이로써 둘의 혼인이 겨우 기정사실화 했다.
金庾信은 만노군에서 소년기를 보낸 것 같다. 野合(야합)과 掠奪婚(약탈혼)을 저지른 舒玄- 萬明 부부에 대한 신라 귀족사회의 평판이 나빠 王京으로 돌아올 형편이 아니었다.
異人으로부터 전수받은 兵法
시골소년 金庾信에게 기회가 왔다. 眞平王의 어머니인 萬呼太后(만호태후)가 金庾信의 비범함을 전해 듣고 그를 서라벌로 불러올렸다. 金庾信을 만나 본 萬呼太后는 대번에 『진실로 내 손자』라고 하며 기뻐했다. 이는 망국의 후예 金庾信의 신분이 母系(모계)의 혈통에 따라 眞骨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萬呼太后로부터 손자로 인정받은 金庾信은 곧 신라 청년들의 엘리트 코스인 화랑조직의 상급 리더로 도약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金庾信은 不敗의 신화를 남긴 大장군이다. 그렇다면 金庾信은 어떤 수련과정을 거친 인물일까? 그는 17세 되던 해 고구려와 백제가 잇달아 신라를 침범하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적들을 토벌할 뜻을 품고 홀로 中嶽(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심신을 닦으면서 하늘에 서원했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나 범처럼 우리 영토를 침범하여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갓 보잘 것 없는 신하로서 재주와 용력이 없사오나 재앙과 난리를 없앨 뜻을 갖고 있사오니, 오직 이를 살피시어 저에게 힘을 주소서』
나흘째 되던 날 金庾信은 한 異人(이인)을 만났다. 難勝(난승)이란 이름의 異人은 金庾信에게 비법을 내렸다. 이때 難勝이 金庾信에게 전수한 것은 諸葛亮心書(제갈량심서)라는 병법서일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金庾信의 기도처인 中嶽은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斷石山(단석산: 827m)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5嶽 중 하나인 中嶽의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지만 中嶽=斷石山이 다수설이다.
8월24일 아침 필자는 단석산 답사에 나섰다. 단석산이라면 1998년 가을에도 한 번 오른 일이 있었던 만큼 길은 낯설지 않았다. 4번 국도를 타고 태종무열왕릉 앞을 지나 20여 리쯤 달리면 건천읍 네거리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청도로 가는 20번 국도로 접어들어 15리쯤 달리면 길 왼편으로 송선저수지가 보인다. 송선저수지를 벗어나면 단석산 神仙寺(신선사) 가는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승용차 하나가 다닐 만한 길을 따라 500m쯤 전진하면 다리가 하나 걸려 있다. 다리 옆에는 「단석산장」이라는 간판을 붙인 민박업소가 있다. 승용차를 다리 옆 빈터에 주차시켜 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갈 데까지는 가 보자는 생각에서 승용차를 무리하게 전진시키다가 五悳禪院(오덕선원) 옆 오르막길에서 돌뿌리에 찍혀 차체의 밑바닥이 심하게 망가지고 말았다. 자칫하면 연료가 새어 나오는 사고의 우려가 있어 경부고속도로 건천인터체인지 부근에 있는 자동차정비소를 향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8월25일 아침 다시 단석산 답사에 나섰다.
단석산 등산로는 상당히 가파르다. 2㎞ 남짓한 거리를 오르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으니까 어지간히 꾸물거렸던 셈이다. 神仙寺에 이르는 동안 사람 그림자 하나 만나지 못했다.
화랑도의 순례지 斷石山
斷石山에는 화랑바위, 하늘받침돌 등 화랑 관련 유적, 그리고 그것에 얽힌 전설이 적지 않다. 頂上에 오르면 언양의 가지산, 청도의 운문산 등 「영남의 알프스」라 불리는 연봉들이 눈앞에 전개된다. 이곳은 신라가 낙동강 서쪽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로 삼았을 주요 교통로상에 위치해 있다. 이런 지형이라면 당연히 화랑의 순례지가 되었을 것이다.
석굴은 단석산 頂上의 서남쪽 바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네 개의 거대한 바위가 동·남·북 3면에 병립되어 ㄷ자형의 石室(석실)을 이루었다. 석실 안에는 칼로 내리친 듯한 10여m의 벽면에 10구의 불상과 부처에게 공양하는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바로 국보 제199호 磨崖佛像群(마애불상군)이다.
석실 동북쪽에 독립한 큰 바위에는 全面 가득히 높이 약 7m의 여래입상을 양각했으며, 이 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측과 전면에 보살입상 각 1구씩을 조각했다. 앞의 여래입상과 더불어 삼존상을 이룬 것이다.
삼존 중 主尊如來(주존여래)가 지니는 둥근 童顔, 그리고 前面 위주의 조각 방식과 통견대의의 양식 등에서 불상의 조성연대는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金庾信이 中嶽의 석굴에서 수도했던 시기(611년)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석실 북쪽 바위에는 또다른 불상 네 像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삼존상보다 훨씬 작은 규모다. 서쪽의 세 像은 모두 왼손으로 동쪽을 가리키며 서 있는데, 동단의 불상 하나만 正面을 향한 반가사유型의 보살좌상이다. 이것이 원위치를 지키면서 완전한 자태를 보이고 있는 신라의 반가사유상으로서는 유일한 존재다.
북쪽 바위의 하단에는 인물상 두 像이 동쪽을 향해 각기 향로 등을 들고 있는데, 그들의 의관이 삼국시대 服飾(복식)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인물상 아래 바닥면 가까이에는 크기가 가장 작은 여래 하나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동벽면과 북벽면에 새겨진 불상들은 햇볕을 받는 오후 한 시경에 더욱 장엄하게 보인다.
석굴 내 남벽면에는 약 30행으로서 매 행 19字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약 200字가 판독되고 있는데, 이로써 절 이름이 神仙寺이고, 주실에 봉안된 불상이 미륵삼존임이 밝혀졌다.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金庾信과 그를 따르던 낭도들은 龍華香徒(용화향도)라고 불렸다. 龍華라면 바로 미륵의 세계이다. 이런 점에서도 단석산 석굴은 화랑도, 특히 金庾信과 연관지을 수 있다.
金庾信은 中嶽 석굴에서 수도한 이듬해에도 홀로 보검을 차고 咽薄山(열박산)으로 들어가 병서를 읽고 무예를 단련했다. 열박산은 지금의 경북·경남 도계에 위치한 「영남의 알프스」 연봉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三國史記에는 열박산 수련 직후에 그가 화랑도의 최고 지위인 國仙(국선)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金富軾(김부식)은 三國史記에다 『소에게 꼴을 먹이는 아이들도 金庾信을 안다』고 썼다. 그의 대표적 공적만 요약한다.
35세(629)=낭비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南進勢를 꺾었다.
50세(644)=백제에 빼앗겼던 7개 성을 되찾았다.
54세(648)=백제로부터 전략적 요충지 대야성을 탈환했다.
55세(649)=도살성(충북 청주) 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파했다.
60세(654)=金春秋를 국왕으로 추대하고 상대등에 올랐다.
66세(660)=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을 敗死시키고 사비성을 공략, 백제 義慈王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 전공으로 大角干(대각간)이 되었다.
67세(661)=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의 淸野(청야)전술에 걸려들어 고전 중이던 唐軍을 구원하고, 회군 도중에 추격해 온 고구려軍 1만명을 전사시켰다.
74세(668)=羅唐연합군이 평양성을 攻取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는 신병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국왕 不在 중의 서라벌에서 후방지원을 총지휘했다. 그 공로로 太大角干에 올랐다.
국보 제112호 感恩寺址 3층 석탑
統一大王의 魂이 살아 숨쉬는 곳
羅-唐 8년 전쟁에서 승리한 결단의 君主
太宗武烈王 金春秋의 갑작스런 병사 후 大統(대통)을 이은 임금이 文武王 金法敏이다. 그는 진평왕 48년(626), 金春秋와 金庾信의 여동생인 文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文姬가 金春秋와 야합하여 임신을 하자 金庾信은 그 행실을 문제 삼아 그녀를 불에 태워 죽이겠다고 소동을 벌인 것은 三國史記에 기록된 유명한 일화다. 그것은 金春秋와의 결혼동맹을 노린 金庾信의 自作劇(자작극)이었다. 왜냐하면 金春秋를 자기 집으로 불러들여 文姬와 정을 통하게 유도했던 장본인이 바로 金庾信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곡절을 겪으며 태어난 金法敏은 소시적부터 영걸의 풍모를 보였다. 金春秋가 왕위에 오르자 弱冠(약관)의 그는 兵部令(병무령: 국방부장관)이 되었다. 660년 羅唐연합군이 형성되자 그는 함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상의 덕물도에서 唐軍을 접응, 唐의 노장 蘇定方(소정방)과 백제 정벌을 위한 전략을 협의했다.
36세에 父王의 뒤를 이은 文武王은 馬上에서 3軍을 지휘하여 백제부흥군을 토벌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軍人君主(군인군주)였다. 그런 그를 三國遺事에서는 文虎王이라고 일컬었다. 모두가 文武를 겸비한 임금이라는 뜻이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부터 신라와 唐은 戰後처리 문제를 놓고 예각적으로 대립했다. 唐이 백제와 고구려의 故土(고토)에 식민통치기구인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나아가 신라까지 먹으려 했기 때문이다.
文武王은 唐과의 전쟁을 결심했다. 文武王의 결단이 없었다면 한반도에 唐三郡(당3군) 같은 唐의 식민지가 들어섰을 뻔했다.
신라는 對唐戰線(대당전선)에서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과 연합했다. 唐高宗(당고종)의 명령에 의해 신라 정벌의 책임을 떠맡은 안동도호 薛仁貴(설인귀)는 671년 7월, 文武王에게 唐軍의 압도적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文武王은 즉각 답서를 보내 唐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천명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 문건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로서 사실상의 開戰(개전) 외교문서였다.
答薛仁貴書에서는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제1의 戰功(전공)은 신라에 있으며, 점령지 분할을 위한 648년의 비밀협약을 배신한 쪽은 唐이라는 사실을 선언했다. 당시의 슈퍼파워를 상대로 한 문서였던 만큼 그 표현은 부드럽지만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名文(명문)이다.
對唐 8년전쟁은 결국 신라의 일방적 승리로 종전되었다. 675년 9월29일, 신라군은 買肖城(매소성: 경기도 연천)전투에서 唐-말갈 연합군을 격파했다. 對唐 8년전쟁의 마지막 결전은 기벌포(충남 장항) 해전이었다.
文武王 16년(676) 11월, 신라 장군 施得(시득)은 서해 해상을 통해 기벌포로 쳐들어온 唐의 수군과 22회에 걸친 접전에서 전승했다. 기벌포 해전으로 신라는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唐軍은 전의를 상실하여 평양에 있던 그들의 반도 경략 근거지인 안동도호부를 新城(신성: 요녕성 무순)으로 퇴각시켰다. 이로써 삼국통일이 이룩되었다.
大王岩의 비밀
8월25일 오전, 필자는 文武王의 水中陵(수중릉)이 있는 甘浦(감포)로 출발했다. 그곳에는 수중릉뿐만 아니라 感恩寺址(감은사지)와 利見臺(이견대) 등 文武王과 관련한 유적들이 모여 있다.
甘浦지구는 동해를 향한 慶州의 숨구멍이다. 경주 도심에서 4번 국도를 따라 동쪽으로 달리면 普門湖(보문호)와 德洞湖(덕동호)가 도로 왼쪽으로 펼쳐져 있어 한여름에도 쾌적하다. 덕동호를 끼고 돌면서 추령으로 오르는 길은 꽤 험하다.
수년 전만 해도 甘浦로 가려면 추령 정상부에 이르는 S자 도로를 거쳐야만 했는데, 이제는 추령의 허리부분에 터널이 뚫려 길이 훨씬 수월해졌다. 추령터널을 벗어나 계곡 위로 뻗은 고가도로를 타고 내려가면 동해바다로 다이빙하러 가는 기분이 든다. 장항리 삼거리까지 내려오면 大鐘川(대종천)이 보인다. 여기서 10여 리를 더 달리면 검문소 삼거리가 나온다.
感恩寺와 문무대왕릉으로 가려면 여기서 929호 지방도로로 접어들어야 한다. 길은 大鐘川을 따라 이어져 있다. 大鐘川 좌우는 논이다. 929호 지방도로를 20여 리 달린 지점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언덕 위에 석탑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국보 제112호 感恩寺址 3층 석탑이다. 이 지점에서 500m만 더가면 봉길리 해변에 이르게 된다.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에 큰 바위가 네 개 솟아 있다. 이곳이 바로 文武王의 수중릉이다. 文武王은 재위 21년 만인 681년 7월1일에 별세했다. 왕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한 그의 유골로 東海口에 있는 큰 바위 안에 장사를 지냈다. 그래서 大王岩(대왕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썰물 때 대왕암 남쪽으로는 작은 바위들이 징검다리처럼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護石처럼 보인다. 이곳 토박이들은 1960년대 이전엔 대왕암을 「탱바위」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산횟집의 아주머니는 『우리가 젊은 시절에는 다라이(커다란 플래스틱 용기)를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탱바위에 가서 전복 등의 해산물을 많이 땄다』고 말했다. 요즘은 무단출입이 금지되어 바다갈매기들의 천국이 되고 있다.
이번 답사 때는 배편을 마련치 못해 대왕암에 올라갈 수 없었다. 5년 전에는 모터보트를 타고 대왕암에 상륙하여 돌 밑에 어딘가에 뼈를 담은 사리함 혹은 어떤 장치가 없는가 뒤져보기도 했다.
대왕암은 바닷물이 드나들 수 있도록 水路(수로)가 사방으로 트여 있다. 특히 外海(외해) 쪽으로 나 있는 水路로는 바닷물이 바위에 일단 부딪치고 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런 구조 때문에 큰 파도가 밀려와도 대왕암 안쪽의 수면은 호수처럼 잔잔하다.
내부의 수면은 생각보다 넓적한데 그 한가운데에 長大石(장대석)이 남북으로 놓여 있다. 수면은 이 長大石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지난 4월 KBS-TV 답사팀도 長大石 밑에 어떤 장치를 한 것이 아닌가 하여 水路를 막고 물을 퍼낸 다음 탐사작업을 했지만, 아무런 시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文武王의 사리는 藏骨(장골)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뿌린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이 정면으로 보이는 해변의 천막에서 잡어 회에다 소주 한 잔을 곁들인 늦은 점심은 별미였다. 뒤돌아보면 언덕 위로 利見臺(이견대)가 보인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利見臺에서 神文王은 동해의 護國龍(호국룡)이 된 아버지 文武王으로부터 萬波息笛(만파식적)을 얻었다. 만파식적은 불기만 하면 천하가 화평해 지는 보물이었다고 한다.
일부러 오후 3시에 맞춰 感恩寺址로 갔다. 그 시각이면 感恩寺址의 쌍탑이 햇볕을 정면으로 받아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感恩寺址 3층 석탑은 삼국통일을 이룩해 낸 신라인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感恩寺는 神文王이 父王인 文武王의 뜻을 이어 완공했다. 처음 이곳에 절을 세우려 했던 창건주는 文武王이었다. 佛力(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鎭國寺(진국사)라고 정했다. 그러나 文武王은 절이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생전의 文武王은 智義法師(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龍이 되겠다』는 유언을 했다. 그래서 金堂(금당) 아래에 龍穴(용혈)을 파서 용이 된 文武王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구조를 했다. 금당 터에는 아직도 그런 石造 구조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는 三國遺事의 기록과 부합된다. 당시에는 感恩寺의 축대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感恩寺는 黃龍寺(황룡사) 四天王寺(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廢寺(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에는 國寶 제112호인 3층 석탑 2기가 서 있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이다. 제일 윗부분인 擦柱(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에 현존하는 石塔(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신라 石塔 중에서 가장 초기 형태이지만, 조형미는 최고 수준이다.
높이는 각각 13.4m이며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 위에 세워진 平面方型(평면방형) 3층 석탑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열두 장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상층 기단 역시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었고, 갑석은 여덟 장으로 되어 있다. 기단석의 돌과 돌 사이의 탱주는 하층 기단에 세 개, 상층 기단에 두 개로 구조되었다. 탑 맨 꼭대기에 있었을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에 올린 네모난 돌만 남았을 뿐 그 위의 앙련, 복발, 보주 등은 다 없어져 버렸다.
1959년 서편 3층석탑이 해체 복원되면서 왕이 타는 수레 모습의 寶輦形(보련형)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이후 1960년과 197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각종 유물이 수습되었고 절의 전모도 확인되었다.
통일신라의 기상과 예술혼이 만든 금자탑
感恩寺는 一堂雙塔(일당쌍탑)의 가람으로서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조된 점과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翼廊(익랑)을 둔 점이 특이하다. 동·서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金堂 터가 있다. 정연하게 쌓아올린 2층 기단의 4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가공된 갑석과 지대석이 보인다.
金堂의 바닥 구조는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石材遺構(석재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았다. 다시 그 위에 柱礎(주초)를 배열하고 건물을 세운 특이한 구조로서 金堂의 밑바닥에서부터 높이 1m에 가까운 공간을 형성했다.
感恩寺 답사를 마치고 장항리 삼거리까지 되돌아나왔다. 이번에는 4번 국도를 버리고 토함산 동쪽 기슭을 타고 오르는 길을 통해 國寶 제24호 석굴암 석굴을 둘러보았다. 석굴암이라면 통일신라시대의 국력과 예술 감각이 피크에 달했을 때 신라인의 기상과 솜씨를 응집시켜 놓은 곳이니만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줄기찬 對唐항쟁을 통해 唐제국의 영토적 야심을 꺾음으로써 이룩되었다. 그것은 바로 민족의식 형성의 기틀이 되었다. 통일신라는 민족 융합의 용광로로서의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면서 한국 문화를 한 차원 높여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늘의 한국인에겐 통일신라의 모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특히, 최근 일본역사교과서 왜곡파동을 관찰하면서 느낀 점 하나가 있다. 日本人들은 朝鮮왕조 말엽의 無力함을 부각시켜 한반도의 역사와 韓民族의 落後性(낙후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에게 통일신라의 先進性과 自主性을 주지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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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scipmbgv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성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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