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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
과 하와가 나눈 대화에서, 하와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와가 한 말처럼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와는 잘못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가 알고 있는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하와가 한 말 중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는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런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한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달랐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기록된 말씀에 더하거나 말씀에서 빼지 말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셨습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거룩한 성에 참여함과 생명나무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고 말씀에서 뺐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라고 했습니다. 동산 중앙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뿐 아니라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하와의 말대로라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실과도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는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만지지 말라.’는 말씀은 안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더하고 말씀에서 제해 놓고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와가 뱀에게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에는…’이라고 했다면
괜찮았을 텐데, ‘하나님의 말씀에’라고 했습니다. 자기 생각이라면 잘못된 것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니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잡고 있는 것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음식이라도 변질되면 먹을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실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해 인간에게 사망이 왔습니다.
우리가 사망과 사단의 속임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대충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시 자기 세계를 만드는 데 쓰여집니다.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 주지 못합니다. 정확한 말씀만이 그 일을 해 줍니다.
언젠가 어떤 분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분이 하나님은 없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내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왜 그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느냐?’라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이 병에 걸려 점점 시력을 잃어 가는데,
유명한 안과를 다 다녀 봐도 병명도 몰라 답답하기 그지없어서,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답니다.
교회에서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아들은 결국 소경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하고 원수진 사람이라도
그렇게 간절한 기도는 들어 주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 없으니까 안
들어 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
죄가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내어서,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으실 수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말씀 앞에서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무엇이라고 말씀해 놓으셨는지에는 관심이 없고,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되는 줄
아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른다면 무엇을 따라가겠습니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 대부분이,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갑니다. 전자제품을 사려고 할 때 전문 지식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사는 물건을 사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을 상고하지 않을수록 정통을 중요시 여깁니다.
그래서 큰 교회나 큰 교단에 모입니다. 성경에서 길을 찾지 못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따르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신앙을 대충 알고 합니다. 관념적으로 신앙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정확한 말씀에서 떠나 변질된 것들은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다 줍니다.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와가 하는 이야기에 큰 차이가 안 나 보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념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으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여기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확한 말씀을
알아야만 사단에게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 아래 있다
사람들은 성경도 나름대로 추측해서 해석합니다. 그러한 해석은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왜 아벨과 그
제사는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느냐?”라고 물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성이 부족해서 그렇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근거 없이 한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상고하는 데에 길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 데에 길들여져 있지, 성경을 상고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생각이 없는 것은 참 좋지만, 성경 말씀까지 없는 것은 안
됩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이단에 빠집니다. 언제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교회, 영생교, 아가동산…, 그런 사이비 집단들에 사람들이 잘 넘어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아예 만나지 말고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가르칩니다. 왜요? 거기에 넘어갈까봐.
그러나 진리가 이단을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언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피해다녔습니까?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으로 그들의 시험과 올무에서 벗어나면서,
그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이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공부하며, 그 교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런 부분 외에는 성경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합니다. 성경을 조금만 알면 얼마든지
그들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데, 모르니까 아예 도망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사단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이단 종파가 생겨나 이끌면 거기에 쉽게
넘어갑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시작한 후, 로마 교황청의 핍박을 피해 도망다니면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은 그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경이 평민들에게 보급되면서,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모를 때에는 무조건 교황청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성경을
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교황청이 틀렸구나!’ 그러면서 개혁이
힘있게 일어났습니다. 그 개혁 정신이 뭐냐 하면, ‘교황도 성경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개신교의 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교단의 교리가 성경
위에 올라가 있습니다. 성경 말씀보다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더 위에 있습니다. 물론 교리나
목사님의 이야기가 성경보다 위라고 말은 안 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성경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모르면, 잘못된 길을 가도 그런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많아지자, 이제는 성경을 흐려놓는 일을 합니다. 각
개개인의 마음에서 말씀을 흐려놓습니다. 또한, 여러 번역판을 만들어 내서, 성경의 의미를
흐려놓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변질된 번역판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만, 그러한 사단의 계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야 정확한 믿음을 갖습니다.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잘못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고,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처럼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를 속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믿음
제가 한번은 충무에 집회를 인도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충무라고 하지 않고
통영이라고 부르지요. 가는 길에 밥을 먹다가 아내에게, “충무 김밥은 충무에서 나온
김밥을 말하는 것일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닐 거라며, 서울 충무로에
가면 충무 김밥 집이 많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서울에서 살았고 나는 잘 몰라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충무에 도착해서 제 아내 이야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도로변에 충무 김밥 집이 너무 많았습니다.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집도 있고, TV에 나온 집이라고 자랑하는 집도 있고….
충무에서는 충무 김밥을 ‘상놈 김밥’이라고 부릅니다. 옛날에 뱃사람들이 여름에 밥을
싸 가지고 일을 나가는데, 보통 김밥처럼 싸 가지고 가면 밥이 쉬는 겁니다. 그래서 김에다가
밥만 말아 가지고 가고, 김밥 속은 따로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렇게 먹던 것이 충무 김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내가 ‘충무로에 충무 김밥 집이 많아서 충무 김밥이라고
한다.’고 하면 제가 속겠습니까? 분명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속지 않습니다. 물론 제
아내가 고의로 속인 것은 아닙니다만, 정확히 모르면 그런 것입니다. 모르면 잘못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도 잘못된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으면 되게 무식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제가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제 혈액형을
군대 가서야 알았습니다. 한번은 헌혈을 하는데, 간호원이 피검사를 하더니 B형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O형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간호원에게 ‘난 B형이 아니라 O형이다.’라고
했더니,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우겨 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86년에 급성 맹장염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침대에 붙어 있던 내
신상 카드에 O형으로 적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신중하게 검사를
해 주었는데, 역시 B형이었습니다. 간호원이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B형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헌혈대에 누워서 주먹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때는 O이었다가 지금 B형이 될 리는 없고,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병원에 입원한 때가 일요일 저녁이어서 전문의가 없을 때 입원했습니다.
혈액형을 물어 보기에 O형이라고 했더니, 그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맹장염 수술에는
수혈할 일이 없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 전에, 누가 저에게 “혈액형이 B형이지요?” 하고 묻기에 O형이라고 하자, “이상하다.
성격을 보니까 B형 같은데….”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라고 하면서 O형이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잘 본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제가 가지고 있던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혈액에 대해서는 누가 잘 압니까? 적십자 혈액원에서 가장 잘 알지요. 거기는 혈액만 다루는
곳이니까요. 거기서 하는 검사는 틀림없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검사하는 약 때문이었습니다. 그 약을 피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검사를 해야 하는데, 중간에서 떼어먹다 보니 실제로 검사할 때에는 이쑤시개 끝에 적은
양을 묻혀서 검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검사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초등학교에서부터
나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 준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O형이라고 하면서 다녔습니다. 모든 기록 카드에 O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인식표가 있는데, 거기에는 국적과 군번, 그리고 혈액형이 찍혀 있습니다.
거기에도 제 혈액형은 O형이라고 찍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서는 B형이라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어색해도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때까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든지 간에,
정확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못 알았을
때에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신을 확증하라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진단받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 신앙을 확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런데 우리 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엉터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어떻게 말했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인데, 우리 보기에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예수님을 흠모하거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자기가 보는 것을 의지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내가 보는
것을 내려놓고 성경 안에서 ‘이분이 메시야인가, 아닌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이 볼 때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어떠하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보기에 어떠한가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중심인 사람은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을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봅시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행 24:5)
성경적으로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지만, ‘우리가 보니’ 염병이고 이단의 괴수였습니다.
그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것을 내려놓아야만 사도 바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연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세계가 끼어 있으니까,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종과 연합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참된 종으로 받아들이려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과연 성경적으로 그러한가?’ 하며, 성경 중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가 볼 때 어떻게 보이는가를 내려놓아야,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참된 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무시되어야 하고,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가
볼 때 어떠한가를 너무 크게 여기고 있습니다.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너 중심적으로 보고 있는가, 하나님 중심적으로 보고 있는가?’ 한번 검사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잘못 믿고 있어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잘못되었지만, 자기가 볼 때에는 나름대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