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갈리나 박 씨는 67년전 자신의 어머니를 구해준 알무하노브 가족을 찾은 이야기를 전해왔다.
1937년, 그녀의 부모는 러시아의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 당시만해도 극동 지역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모조리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의 사람이 살지않던 지역으로 추방당했었다. 이는 소련과 일본의 갈등이 발발하며 한국인들이 일본에 협조할 수 있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는 화물 전용 칸에 너무 오랜 기간 갇혀 있어 시간의 개념을 잃었다고 말했다. 갈리나 씨는 당시 10살이었으며, 어머니인 마리아 씨는 90세에 돌아가셨다. 그녀는 생전 ''카작인들이 굶어 죽는 우리를 구해줬다. 감사하다''는 말을 항상 하고는 했다. 이주민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현지의 주민들이었다. 아버지인 천석 씨 또한 강제 이주민이었으며, 4명의 아이를 함께 길러냈다.
갈리나 박 씨는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카작어와 카자흐스탄의 정통을 알고있다. 1952년 겨울, 나의 부모님은 3명의 자녀와 함께 보겟싸이에서 악토베로 강제 이주 당했다. 그 자리에는 나의 1949년생 오빠 비쨔, 1959년생 언지 까쨔, 1살배기 오빠 페쟈가 있었다. 내려진 곳은 너무 나도 추웠다, 거리에는 불이 켜진 곳이 없었다. 아버지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노보로시스크로 갔고, 가장 처음 본 집에 문을 두드렸다. 그 집의 주인은 사정을 듣고 즉각 말에 썰매를 연결하여 어머니와 자녀들을 찾으러 떠났다''고 말했다.
집 주인은 어머니와 자녀들을 찾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아내에게 손님들을 대접하고 몸을 따듯하게 해주라고 말했고, 추위가 수그러들자 고려인 가족은 다시 떠났다.
갈리나 씨는 ''어머니는 그 당시 일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었다. 썰매를 탄 사람이 도착을 했을 때 이미 추위 때문에 눈이 계속 감기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내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1957년 가을에 태어났다. 이후 우리 가족은 노보로시스크를 자주 지나가고는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을 도와준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수십년이 지나고 우리 가족은 악토베로 이사했다. 어머니는 나이가 들며 그때의 일을 더욱 자주 회상했고,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못했다는 것이 한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남은 나와 나의 언니가 꼭 그들을 찾아서 고마움을 전하라고 부탁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드디어 알무하노브 가족을 찾을 수 있었다.
갈리나 씨는 ''우리 가족을 구해준 시셈빈 알무한은 1901년 생이었으며, 1974년도에 사망했다. 그가 살던 집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어머니가 자주 말씀하셨던 우물 또한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자녀들이 집을 팔았으며 악토베로 이사를 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오지파 할머니를 만났으며, 그녀는 시셈빈 할아버지 아들들 중 한 명의 아내이다. 알무하노브 가족은 여전히 착했다. 내가 온다는 사실을 듣고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우리는 옛날의 사진을 보며 알무하노브 할아버지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알무한 시셈빈은 흐롬타우 도로 인근에 거주했으며, 많은 여행자들을 도왔다.
갈리나 박 씨는 ''시셈빈 할아버지의 후손들을 나를 따듯하게 맞이해줬다. 아마 그 시절에도 그들은 나의 가족을 이렇게 따뜻하게 맞이했을 것이다. 알고 보니 나만 이들을 찾았던 것이 아니다. 러시아의 한 가족도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 왔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zakon 카자흐스탄 한인신문
첫댓글 하세요. 글을 읽고 마음이 울컥 했습니다.정도 머물었는데 고려인들이 너무나 친절 하시더군요.
올해 3월에 알마티를 방문했습니다.
한
검소하고 따뜻 했습니다. 한핏줄 이구나 느낌이 왔고 웬지 마음이 찡 했습니다.
한국에 와서도 그분들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리고 그립습니다.
한국에서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살아있는 역사로 재조명 되었으면 하는 바램 입니다.
우리의 형제자매임이 분명 합니다. 그들에게 한국 방문의 초대가 많이 이루어지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