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나무 아래
윤태원
줄기 저 끝까지 살아 있네요
속속들이 빛을 머금고 있는 푸른 내부
움직이고 흐르고 있어요
나름의 방식으로 험한 계절을 버티고 있죠
성안드레아병원 숲 속 너른 정원
하얀 날개를 접고 나무 아래
조현병 환자 남녀가 누워 속삭인다
사십 퍼센트
그 숫자가 나의 목을 옥죄고 있어요
제발 풀어주세요 끊어주세요
의사의 건조한 설명 속에 갇히기 싫어요
우리가 결혼하면 아이에게 병이 유전될 확률
사슬로 연결된 가족이 사막을 끝없이 걷는 모습이 떠올라요
먼지를 걷어내면 다시 먼지가
어둠을 걷어내면 다시 어둠이
우리들의 움막에 드리울 거예요
어슬렁거리는 사자 거친 숨소리
우리는 알고 있어요
숲 속의 안개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숨어 있다는 걸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약을 먹어야 해요
혼미해져 악귀가 팔을 벌리면 비명을 질러 쫓아버려야 해요
병동의 깜빡거리는 형광등처럼 생각이 자주 끊겨요
당신을 향한 항해가 나침반을 잃고 멈추어요
멍하니 바라보는 기울어진 돛
아득한 바다를 돌고 돌아 희미하게 보이는 섬으로 가요
당신과 함께 달리고 싶어요
해변에서 춤추며 모래에 남기는 아기자기한 발자국
소금기 있는 바람의 맛을 느껴 봅니다
환청을 상쇄시키는 단순한 파도 소리
저 나무도 병에 굴하지 않고 팔을 벌리고 있어요
스스로 검은 낙인을 찍지 않아 숲과 어울려 자라고 있어요
줄기가 막히면 다른 줄기로
잎이 막히면 다른 잎으로
집착이든 망상이든 꿈을 꾸겠죠
언제나 나를 읽고 쓰면 당당할 수 있어요
육십 퍼센트
우리의 아이가 건강할 확률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요
그저 상상 속에서 욕심을 내어
아이 두 명과 둘러앉은 아름다운 식탁
이제 주절거림 그만해요
빛이 남아 있을 때
고통의 고리를 저 나무에 걸어두고 당신과 잠들고 싶어요
면
우연한 펼침, 갑작스런 출현이 아니다 나의 곳곳 나의 때때 멈추고 움직인 모든 것이다 죽은 듯이 숨 쉬는 겨울곰이 동굴에 오기까지 바람과 풀, 사소한 도구, 냄새까지 작용했으니 어찌 장난이라고 하겠는가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촛불의 형태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 순간의 선택일 뿐이다
눈여겨본다고 알 수도 멀리 놓고 본다고 모양을 파악할 수도 없다 문득 만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간혹 걸리는 시간의 문턱에 놀랄 것이다 빛이 머물러 있다고 어둠이 깔려 있다고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노출을 꺼려하지도 쉽게 허용하지도 않는, 몸짓에 집중해 있는 무용수다
지금 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니다 좌우로 걸어보라 물결을 타듯 움직여 보라 한 바퀴 돌아서 보라 여러 가지 조합으로 재배치된다 이음새는 분명하지 않다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밥그릇의 크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남자와 여자 놀이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시간의 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더 잘 보려는 시도는 부질없다 계단은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분리되어 공중에서 춤춘다 어느 시점에 특정 계단이 내 발 아래 놓여진다 그 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계단은 수시로 바뀌고 시야도 달라진다 조합에 의존하겠지만 그 조합도 나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지만 절대 각도가 정해져 있지 않다 무한 각도에 의해 열이 백이 되고 백이 천이 된다 어느 각도에서 당신은 침에 날개를 달 수도 있고 혀로 춤을 출 수도 있다 판단을 유보하는 인내가 신상을 유지시킨다
작용의 숫자는 무한대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꿈틀댄다 심지어는 묘지에 입성한 후에도 다른 사람들의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 방금 나는 그것을 들먹거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을 수식케 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이름이 없기에 소유가 아니기에
그것의 끝은 있는가 나도 모른다 저 아름다운 담양 메타세콰이어 가로수 길의 푸른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길을 잘못 걷고 있다 끝은 또 무엇을 만들기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기에 나를 가려줄 수도 내가 가릴 수도 있는, 바람에 열렸다 닫혔다 하는 아름다운 통로이기에
성 안드레아, 마음의 고향
정신병원은 사람들에게 지친 영혼의 쉼터와 같은 좋은 의미보다는 강제, 통제, 억제와 같은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호전된 환자나 경증 환자가 입원하는 개방 병동도 있지만 대부분 폐쇄 병동이다. 인간이 자유롭지 않고 갇혀 있다는 건 그 자체가 정신적 고통을 추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긴장, 초조, 자살, 폭력 등의 증상이 있는 경우엔 자신 또는 타인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므로 집중 관찰 및 사고 방지를 위해 폐쇄 병동 입원이 필요하다. 폐쇄 병동에서 환자를 최대한 안정시키기 위해서 직원들의 치료적인 태도, 내부 시설, 다양한 프로그램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연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면 창밖의 푸른 전망, 꽃과 나무의 산책길, 저소음 등 시내의 정신병원엔 없는 이점을 갖게 된다. 성안드레아병원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위치해 있었고 천주교 수도원에서 경영하여 종교적 위로까지 얻을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정신병원이었다.
1991년 나는 의대 실습생으로 처음 그 병원에 갔다. 그곳은 경기도 이천 마장리 큰길에서 갈라진 오솔길 끝에 있었다. 푯말을 보고 굽이진 길로 들어가니 이내 너른 마당에 도달했는데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붉은 벽돌 건물을 보고 마법의 성과 같은 신비감을 느꼈다. 그 후 나는 우여곡절 끝에 2000년부터 4년 동안 그 병원에서 정신과 수련의로서 근무하였다. 매주 집단치료 지도를 위해 왔던 이시형 박사는 입원 환자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정신병원이라고 하였다.
병원 안에 기도실, 성당이 있어 천주교 신자인 환자들에게 입원 기간 내내 안식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나는 발리, 두바이 등 외국 여행을 할 때 사원에 들어간 적이 몇 번 있었다. 내가 믿지 않는 종교임에도 과도한 욕망과 갈등이 용해되고 소원을 빌며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가 아닌 환자들에게도 성안드레아병원은 마음의 평화를 선물했을 것이다.
병원의 사면이 숲이어서 어느 창문으로나 숲을 볼 수 있었다. 가끔 노루가 지나가면 순수했던 나의 과거가 떠오르곤 하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숲으로 난 길을 따라 환자들은 치료자들의 인도에 의해 산책을 했고 호전된 환자들은 혼자서 자유롭게 산책했다. 그 병원은 국내 최초로 쇠창살이 없는 강화유리 창문을 설치했고 환자들의 인권을 위해 다방면으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대한민국 인권상,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았다.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2013년엔 아시아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많은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코로나 상황이 되자 적자가 누적되어 2022년 1월에 문을 닫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폐원 후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에 게시된 성안드레아병원에 대한 글을 몇 개 올려본다.
‘열악했던 1990년대 초에 인권 치료를 표방하며 주목받았던 병원이 운영 적자로 인해 문을 닫는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아쉬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이 병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당사자와 가족은 인권 치료를 표방한 더 많은 정신병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성 안드레아! 나에겐 너무 감사한 이름. 나에겐 너무 익숙한 이름. 내가 정말 아팠을 때 들어간 병원이다. 그곳은 정말 좋았다. 그곳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오려 한다. 사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병원 덕분이다. 원장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저 치료해주셔서 감사해요.’
‘정신병원도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안드레아병원을 통해 알았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눈을 감고 상상 속에서 가보는 안전지대로서 성안드레아병원이 환자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필자의 「조현병 나무 아래」는 성안드레아병원에 입원해 있는 남녀 두 환자가 산책 시간에 숲을 거닐다가 어느 나무 아래에 누워 대화하는 장면을 그린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