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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아 10장 9절 ~ 17절
접시에 입힌 은은 타시스에서 가져온 것이며 또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기술자와 주물장이의 손으로 만든 작품은 청색과 자색으로 옷입혔나니 그것들은 모두 장인들의 작품이라. 9)
Silver spread into plates is brought from Tarshish, and gold from Uphaz, the work of the workman, and of the hands of the founder: blue and purple is their clothing: they are all the work of cunning men. 9)
타시스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타시스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도망간 곳이기도 합니다. 지중해의 끝에서 끝의 거리입니다. 먼곳에서 가져온 것은 귀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바스는 오빌, 오필과 같은 곳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오필의 금은 질이 좋은 정금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위 말씀의 뜻은 좋은 은과 금으로 만든 것들은 모두 장인들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귀금속 세공품은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교함으로 따지자면 들의 꽃보다도 허술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들의 꽃의 위대함은 잊어버리고 사람이 은과 금으로 어설프게 만든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함은 너무 흔하기에 잊어버리고 사람이 둔한 망치로 만든 금속장식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사실상 착각이자 오류입니다.
그러나 주는 참 하나님이시며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의 진노하심에 땅이 떨며 민족들이 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리라. 10)
But the LORD is the true God, he is the living God, and an everlasting king: as his wrath the earth shall tremble, and the nations shall not be able to abide his indignation. 10)
abide 1.준수하다 2.지키다 3.따르다 4.살다 5.거주하다
indignation ① 분노 ② 분개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중에는 없겠지만 세상사람들은 여러 종교중의 하나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나무로 만든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시는 부분입니다. 나무나 돌로 금속으로 장인들이 만든 우상은 이 세상을 창조하지도 못했고,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할 수도 없습니다. 종교들의 우상과 하나님은 전혀 다르며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댓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도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교회문화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중심에는 형식의 문화의 교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교회이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며, 우상숭배하는 종교들보다도 더 큰 진노를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죽음의 길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무당과 절이라면 스스로의 양심이 잠들지 않아 금방 깨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많은 교회가 하나님과 말씀으로 위장된 우상 교회숭배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형식에 속아 스스로의 반성도 잊어버리고 잠이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이러한 우상 숭배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죽음으로 향하고 있으며, 제대로 보지 않으면 그 우상 문화에 젖어 함께 침몰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 저 또한 그 형식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저의 잘못을 고난으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
마태복음 23장 15절
신앙은 하나님과 각자의 일대 일의 구원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심판에서는 다른 사람의 문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속였다고 하였더라도 속인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 맞으므로 그가 그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속은 나의 책임에 대해서 하나님앞에서 내가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때에 가까워지는 지금 한국교회의 문화에 잠들어 있는 많은 한국의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입니다. 교회와 구원은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등한시하고 자신이 가진 문제들을 덮는 면죄부처럼 감싸고 있다면 스스로가 자신에게 가장 큰 위험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문화를 피해 교회를 떠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교회는 부가적인 공동체이고, 교회를 자신의 신앙과 일치해서는 안됩니다.
신앙을 가지고 모이는 곳이 교회이지 부족한 신앙을 채우기 위한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성경의 진도를 가지고 자신만의 기도로 하나님과의 화평을 이루고 그러한 상태에서 연합을 이루어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 아니고 사람의 뜻입니다.
잘못된 길을 가는 교회는 무당이 있는 곳보다도 더 위험한 곳입니다. 위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곳보다도 더 위험한 잘못된 교회숭배를 가는 교회는 그들에게 알려주고 듣지 않으면 나와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매우 연약합니다. 제가 몸이 아파보니 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너희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할지니 하늘과 땅을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과 하늘들 아래로부터 망하리라." 하라. 11)
Thus shall ye say unto them, The gods that have not made the heavens and the earth, even they shall perish from the earth, and from under these heavens. 11)
위 말씀에서 하늘과 땅을 짓지 아니한 신들중에는 우상들도 있겠지만 각자 자신들도 들어가 있으며 교회의 문화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신들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위 말씀에 망하는 것 perish 즉 소멸은 심판에서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더 잘 속을수록 더 잘나가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하고자합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힘든 고난을 맞게될 미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도 편하고 수월하게 하나님의 사명을 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하면 바로 사탄의 눈에 들고 사탄은 고소의 대상으로 당신을 선정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고소에 대해서 혐의없음을 입증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과정이 곧 이 세상에서의 고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무서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을 피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욥이 겪은 일들에 대해서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서 이기시는 분입니다. 약한 자를 들어쓰시는 이유는 그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유약함과 고난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조금 내려놔야 합니다.
지금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해도 그것은 우리의 시각인 것일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다가 지옥에 미끄러져 가는 것이 지금의 우리의 눈에는 부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그러한 고난이 그냥 우연이고 운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을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그 고난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메시지와 의도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시한부임을 직시하십시요. 시한부 인생은 과정이 곧 결과인 것입니다. 과정에 우리의 삶에 승부를 걸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 훗날의 결과를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악에 타협하지 마십시요. 우리의 삶은 지금의 모든 순간들이 기록되고 승패가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상을 세우셨으며 그의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도다. 12)
He hath made the earth by his power, he hath established the world by his wisdom, and hath stretched out the heavens by his discretion. 12)
discretion ① 결정권 ② 분별 ③ 자유 재량
위 말씀을 보면서 느껴지는 점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었다는 점이고 그분께서는 그것을 강조하시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인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이 우상을 따르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가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느껴지는 것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의 중요성입니다. 하나님외의 모든 것은 우상입니다.
신앙의 순서로 보자면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 일의 관계가 가장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이어주신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대로 사람들은 교회공동체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오류를 가지므로 스스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가정도 불화하고, 교회에서도 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분란이 나는 것은 교회에 대한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거기에는 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거는 문화에 젖어있으니 그런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가 그의 음성을 내시니 하늘들에 많은 물들이 생기고, 또 그가 땅 끝들로부터 수증기를 올라오게 하시며 비와 함께 번개를 만드시고 그의 보고들로부터 바람을 끌어내시도다. 13)
When he uttereth his voice, there is a multitude of waters in the heavens, and he causeth the vapours ti ascend from the ends of the earth; he maketh lightings with rain, and bringeth forth the wind out of his treasure. 13)
utter 1.입 밖에 내다(pronounce) 2.말하다 3.쓰다 4.발언하다 5.입에 올리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더라.
창세기 1장 3절
태초에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하늘과 땅에 지으시고 그 다음에는 그의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의 창조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구체적 현실로 여기고 말씀은 추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말씀이 곧 우리가 만지는 모든 물질의 기원이자 존재하는 이유가 됩니다. 즉 우리의 육체를 보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그의 권능을 생각해야 합니다. 건강한 몸 아름다운 육체에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느껴야 하며, 주어진 건강이 있다면 감사하게 여겨야 합니다. 잠시 육체의 고통속에 있어보니 누렸던 건강이 비로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지만 공기가 없으면 한 호흡도 힘든 것처럼 건강도 이와같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건강도 어떠한 목적이 있습니다. 선물처럼 주어진 건강이 제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평범한 삶을 소망하였지만 이것도 매우 많은 복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 복이란 결국 말씀의 뜻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므로 제가 제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건강함은 무의미한 일로 결국 건강이 필요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바람과 바다의 물의 운행등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우리 몸의 혈액의 순환 근육등도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그렇게 주어진 건강으로 음란등의 죄를 지음은 그 기능이 빼앗기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합니다.
목적에 맞는 기능의 수행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함이 우리가 지어진 목적이며, 그럴때에 존재가치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긋난 길을 기다려주시기에 우리가 죄를 지어도 당장 아무런 변화가 없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모르고 점점 대담해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 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지식에 우둔하고 모든 주물장이가 새긴 형상으로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의 부어 만든 형상은 거짓되고 그것들 속에는 호흡이 없음이라. 14)
Every man is brutish in his knowledge: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and there is no breath in them. 14)
brutish ① 잔인한 ② 짐승의 ③ 흉포한
confound 1. (종종 수동태) 당황하게 하다2. …을 혼동하다3. …을 논박하다
위 말씀에서 우상의 모습을 설명하시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우상의 모습이나 지금의 세대에는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의 모습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위험한 우상은 부어만든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외에 우리가 매달리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저에게도 있어서 저의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소망도 우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지고 숨쉬고 피가 돌고 하는 모든 이유는 말씀의 뜻의 실천에 있지 소박하더라도 인간적인 행복한 삶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척 험하게 느껴지지만 이런 원칙은 가슴속에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고 공의로우셔서 우리가 삶의 행복을 느끼도록 하시는 것에 취하면 안됩니다. 그래야 고난이 와도 그것이 악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게 됩니다.
부어만든 형상을 추종하던 자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듯이 세상을 사랑함으로 그것에 매달리다가 그것으로 인하여 수치와 당황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글은 이렇게 쓰지만 실천으로 행하지는 못함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시한부인생임을 직시하면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장 이렇게 못하지만 기도로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안에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헛된 것이요, 잘못 만들어진 것들이라. 그들의 감찰의 때에 그들이 멸망하리라. 15)
They are vanity, and the work of errors: in the time of their visitation they shall perish. 15)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죄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자유의지가 죄를 짓는 기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적함이 곧 죄이고 그것은 오류 errors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음은 감찰의 때에 멸망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 바로 징계가 오는 것은 은혜입니다. 감찰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멸망을 위한 것이라면 죄에 대해서 바로 징계함이 오는 것은 구원해주시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인생에서 고통이 온다면 기뻐해야 하는 이유이며, 악인들이 형통한 것은 그들의 멸망을 위한 것이니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버리고 자신에게 고난이 온것에 기뻐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야곱의 분깃은 그들과 같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이 만물의 조성자시요, 이스라엘은 그의 유업의 막대기임이라. 만군의 주가 그분의 이름이라. 17)
The portion of Jacob is not like them: for he is the former of all things; and Israel is the rod of his inheritance: The LORD of host is his name. 17)
야곱의 분깃과 다름의 대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로 멸망받을 자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나 여려분이 구원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야곱의 분깃을 누리겠다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도구이며, 그분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멸망하지 않고 구원에 이르게 하심입니다.
O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
세상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예레미아 10장 15절에 나타나듯이 멸망하지만 야곱의 분깃으로 그의 유업의 대상이 되는 모든 자들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는 대상이 됩니다. 이처럼 정확하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분은 매우 확실하지만 세상에서는 이 구분이 매우 모호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헛된 것을 쫓는 사람들은 절이나 무당집에 있지만 이들만이 헛된 우상을 쫓아가서 멸망에 이르는 자들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안다고 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을 우상으로 삼고 헛된 것을 쫓아가는 사람들도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서는 살아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에서 우상에게 절을 하고 무당에게 의탁하는 사람들을 믿음이 있다고도 표현하지 않습니다. 즉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장 26절
우리의 몸이 지어진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을 이루지 않는 몸은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이며, 죽은 것과 같음입니다. 믿음은 곧 목적이며, 목적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위의 예레미아 10장의 말씀이 반복하여 우상으로 멸망할 자들과 구원받을 자들을 구분하시는 것의 경계는 이러한 차이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은 이러한 차이가 결정되는 과정이며, 우리가 세상을 위하여 살면 죽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살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은 많은 반복된 선택들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에서 우리가 지어진 목적대로 잘 선택함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잘못된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경고를 주시면 우리가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경고는 고난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말씀의 뜻을 알고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의 길로 선택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이겨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선택으로 들어서고 수습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답이 안나와서 인내의 길로 들어서는 것조차 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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