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 처음으로 장군 승진자 계급장을 달아 주고 있을 때였다.
대령에서 진급, 새내기 장군이 된 준장 한 분이 김대통령의 축하 악수를 받으며 감격에 겨워 펑펑 눈물을 쏟자 속마음을 꿰뚫어 본
대통령은 이 장군의 어깨를 지긋이 감싸 주며 “오랫동안 죽어지내느라 고생 많았다”며 위로의 말을 던졌다.
이 말을 들은 장군은 더욱 격한 눈물을 쏟았다. 후에 알고 보니 이 장군의 동기생들은 모두 별 셋 또는 둘을 단지 오랜데 오직 자기 홀로 ‘호남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대령으로 늙어 온 장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방색 집단 왕따의 행태가 대한민국의 어느 분야에서나 상식처럼 벌어지고 있는 서글픈 현실임을 부인할 자 있는가? 이거야 말로 하루속히 극복해야 할 망국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신복룡 교수님의 저서,‘한국사새로보기’를 읽고 이 글만은 호남인들은 물론 동서 분열로 멍든 대한민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는 모든 한민족이 다 읽어야 할 글이라고 생각해 왔다.
조국의 남북 분단의 현실도 서러운데 5.16 쿠데타 이후 일부 몰지각한 정치꾼들의 지방색 악용을 통한 정적 죽이기 등으로
우리 한민족은 4분 5열 되어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고향 호남 땅을 떠나 호남인들이 타향살이 하는 중 받은 냉대와 멸시의 눈,
집단적 왕따로 받은 엄청난 불이익과 서러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신교수는 이것이 바로 ‘훈요십조 제8조’ 때문이라며 그
허구성을 철저히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고질적인 민족 간 불협화음을 하루 속히 바로 잡기 위해서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을 각종 SNS를 통해 전 국민 누구나 볼
수 있게 알려서 다시는 우리의 잘 못 된 거짓 역사로 지방색에 따르는 겨레 간 불협화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주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거야 말로 단결된 민족을 만드는 훌륭한 애국, 애족하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신복룡 교수님이 많은 후학들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자신은 호남인이 아니면서 비호남 인사들의 눈총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바른 역사 세우기만을 위해 꿋꿋하게
사학자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양심파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역사학자 가운데 이러한 잘 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학자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나는 현재 청주에 계시는 신복룡 교수님과 잘 못된 우리의 역사를 더 알기 위해서 여러 차례 통화를 했다. 이 글 등 신교수님의 글을 인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 분의 자세는 글의 출처만 밝힌다면 누가 어디에 인용해도 좋다고 했다.
아래 신교수님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이유는 이 글이 다른 글과는 달라서 필자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개입되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아래는 그 글 전문이다.
호남의 한恨은 “훈요십조”에서 비롯
흔
히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에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朴述熙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車峴(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아래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고려사’ 태조 26년 4월조條)
이러한 차별의 근거는 호남이 배산역수背山逆水(임금이 있는 반대 쪽으로 산과 물이 달린다)의 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왕건이 남긴 이 유언은 제도적 차별도 정당화 했지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이 유언이 사회적 차원에서 호남인들에 대한 편견을 유발했다는 점이다.
풍토적으로 볼 때 백제의 유산을 받아 이지적이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감적情感的인 호남인들은 이로 인해 깊은 내상內傷(상처)을 입었다.
그
런데 왕건의 ‘훈요십조’와 여기에서 시작하여 풍수지리설로 굳어진 이 ‘배산역수‘ 의 논리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의 의혹이
있다. 여러 문헌으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이 정말로 ‘훈요’를 남겼는지, 그것이 꼭 10조였는지, 그리고 그 8조에 ‘호남기피’의
조항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훈요십조‘가 의심을 받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
째로,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태조편에 ‘ 훈요십조’가 기재된 경위에 의혹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사”의
태조편의 사초史草(사관이 기록한 실록)가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顯宗시대(고려 8대 왕,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왔을 때 사초가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 : 태조편”의 사초를 다시 편찬했다.
이 때 최재안崔齋安이라는 인물이 최항崔沆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어 넣었다.(“고려사”열전, 최승로崔承老.재안조齋安條)
최항은 경주의 황룡사의 중창重刱(고쳐짓기)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서 신라의 후예였다. 최재안은 고려 초기의 중신이었던 최승로의 손자이며, 최승로는 경주 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 벼슬을 지낸 최은함崔殷含의 아들이다.
이
미 불타고 없어졌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眞僞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개인집)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둘째로,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남길 만큼 백제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다. 고려사를 살펴볼 때, 왕건이 이 ‘훈요’8조대로 호남인들을 관직에서 배제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왕
건이 후백제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1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인해서 백제를 미워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왕건이 견훤甄萱과의 원한 관계로 인하여 호남을 미워했을 개연성도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정황을 보면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청주 일대의 호족(지방유지) 저항세력이었지 지금의 호남 세력은 아니었다.
왕건의 호남 기피는 입증되지 않는 허구
오
히려 호남인 중에는 당시에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왕건이 평소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道詵國師와,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국가유공자에게 주는 명예직)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왕자,부마 등에 주는 최고위 정일품 관직)가 된
최지몽崔知夢 등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비요, 2대 왕 혜종惠宗의 모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는 나주인이었으며,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과 문성왕후文成王后는 승주 태생의 순천 박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서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은 곡성 사람이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사람이었는데 ‘호남사람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백제 사람을 불러 전했을 이가 없다.
셋
째로, 고려왕실이 그토록 호남을 기피했다면 거란의 침입 당시에 현종이 굳이 호남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는다. 즉,
“고려사“(현종 2년 정월 기해조己亥條)에 의하면 거란의 침입 당시 현종이 전주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건의
‘훈요십조’가 사실이고 또 후손에 대한 훈요십조의 영향력이 그토록 강력했다면 왕은 ‘훈요십조’에 따라 영남이나 강원도로 피난했어야
옳았지 호남으로 피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
째로, 훈요십조와 호남 기피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풍수지리설의 견지에서 볼 때 금강이나 차령산맥이 개경開京(지금의 개성)에
대하여 배산역수가 아니라는 점이다. 개경에 대한 배산역수를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신라의 젖줄이오 생활 터전인 낙동강과 태백산맥이
배산역수이다. 호남의 젖줄인 금강과 차령산맥은 경주(신라)에 대해 배산역수이지 개경에 대해 배산역수라는 것은 기하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결
국, 호남을 배산역수로 보는 것은 고려인의 시각이 아니라 신라(경주)인의 시각이었다. 금강의 역수론에 대해서 이익李瀷(조선 후기
실학자)은 좀 더 색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금강은 반궁수反宮水, 즉 강의 모습이 마치 개경을 향해 활을
겨냥하고 있는 듯한 형국이기 때문에 흉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은 논증이다. 왜냐하면 개경에 대한 반궁수를 따지자면 턱
밑에 있는 한강이 먼저이지 6백리나 멀리 떨어진 금강을 거론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중환의 “택리지擇里志”가 사태를 악화시켜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를 합리화한 배산역수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적시한 저술은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였다. 그는 8도의 풍물과 인심을 기록하면서 유독 전라도에 대해서만 악의적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은 반역과 요사妖邪와 미신과 재앙의 땅이었다.
그
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밟아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행이라면
원악遠惡(멀고 험한)한 오지도 아니오, 인심 좋고 구경거리 많은 호남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설령 여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외갓집이 나주(나주 오씨)였기 때문에 정리情理로 보더라도 한 번쯤은 가보았음직한데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 놓지도 않고 그런
무책임한 글을 썼다.
이
중환이 호남 땅에 발도 들여놓지 않는 이유는, 그가 병조정랑兵曺正郞(현재의 육군대위=정5품)으로 있으면서 목호룡睦虎龍
사건(1725)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 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광주지역) 김씨 김일경金一鏡의
고변告變(고발)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후 유배에서 풀려나 20여년을
유리걸식遊離乞食(떠돌며 걸식)한 다음에 “택리지”를 썼으니, 거기에 담긴 호남 인식이 결코 호의적일 이가 없었다.
호남 기피는 신라인이 저지른 집단 따돌림
요
컨대, 한국현대사의 아린 상처를 남긴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는 오랜 역사성을 가진 집단 따돌림이었다. 호남 푸대접의 책임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뒤집어씌우기로 한다면 그 이전에 이미 호남 출신의 학생이나 신혼부부들이 타지에서 하숙집이나 전셋집을 얻기
어려웠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객지생활에는 응어리(원한)가 맺혀 있었다. ‘이 땅에 호남이 없었다면 이 나라도
없었다’若無湖南 是無國家 라던 이순신李舜臣의 말도 호남인들을 위로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한을 풀어 줄 선지자를 기다리던 차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났고 ‘차별이 없다’고 그 이름이 지어진 무등산 無等山은 1980년 5월에 그 천년의 한을 토해냈다.
*추기
이 글이 나간 후로 격려 전화와 함께 많은 욕설 전화를 받았다. 비난 전화는 한결같이 “너, 전라도 놈이냐?“는 것이었다. 나,신복룡은 경상도(신라)나 전라도 ‘백제’와는 아무 아리고 쓰릴 것이 없는 충청북도 괴산 출신이다.
필자 ; 신복룡 (건국대대학원장 및 미 조지타운대객원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역임).
저서 ; ‘한국사새로보기’, ‘한국현대정치사상사’ 등 3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