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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5-17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아침식사를 마친 뒤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던 베드로에게 세번이나 다른 어떤 것들보다 예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는지 물으신 뒤에 예수님의 양 떼를 먹이라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셔서 그 기적을 확인하게 하신 뒤 빨리 아침을 먹자 하시며 예수께서 직접 빵을 가져다 주시고 물고기도 역시 가져다 주셔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다. 이어지는 말씀은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세번이나 사랑하느냐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는 내용이다.
원어에서 15절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것은 14절에서 나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 자기를 나타내셨다는 말과 연결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이 세번째라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분명하게 부활하셨으므로 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완전하게 확증하셨으므로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을 맡기기 전에 먼저 자신의 부활을 분명히 확증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야 제자들은 그 일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며 물으신 것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개역개정이나 새번역 모두 “이 사람들보다” 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사물이나 어떤 사건들일 수도 있다. 다른 것과 비교한 말과 함께 쓰인 경우는 요한복음에서 세 번 더 나오는데(1:50, 5:20, 14:12) 모두 다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더구나 바로 뒤에 이어지는 24절에서는 같은 말이 “이 일들” 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수도 물론 있다.
“이것들”이라는 말을 보통 세가지로 해석한다. 첫째는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으로 해석한다. 다수의 학자들은 예수께서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베드로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26:33절에서 베드로 자신이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며 장담한 것을 염두에 두고 질문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증언하고 있는 것은 요한복음의 문맥을 근거로 해석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끼리 사랑 경쟁을 시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일 수 있다. 이 경우 상당 수의 성경 학자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 대상이 아니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그렇게도 끔찍이 사랑했다는 것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증거가 없다.
셋째는 이것들이란 고기를 잡는 그물과 배들이나 아니면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들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다. 앞에서 예수님 말씀에 순종했을 때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문맥상 이러한 해석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이것들이란 배와 그물들과 잡은 엄청난 양의 물고기들을 뜻한다고 보는 것이 요한복음의 문맥상 타당하다.
물고기를 잡는 도구나 153마리나 잡힌 물고기들은 모두 세상의 재물들을 뜻한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재물과 명예와 권력 같은 모든 세상 것들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3마리가 잡힌 물고기와 그물과 배를 옆에 두고 식사를 마치신 뒤 예수님은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턱으로 가리키시면서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와 셋째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세상에 속한 것들이란 면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사람이든 아니면 세상에 속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명예든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다른 신들이나 세상에 속한 다른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혈기에 따라 세상적인 것들을 더 사랑했던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을 통해서 높아지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이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이제 예수님을 세상 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예,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양을 먹일 수 있다. 만약 양을 먹이는 목자가 주인을 재물보다 더 사랑한다면 주인의 양들을 잘 돌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목자가 세상 재물을 더 사랑한다면 주인을 속이고 양들을 팔아서 자신이 이득을 보려할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세상 것들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 떼를 먹이라” 라고 하셨다. 여기서 먹인다는 말은 주로 양 떼에게 풀을 뜯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둔 말이다. 어린 양 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 먹여서 키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내 양” 이다. 내 양은 예수님의 양이지 절대로 목자의 양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양 떼를 맡기기 전에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지 묻고 난 뒤 말씀하신 것이다.
과거에 베드로는 어부였다. 어부는 잡아서 먹고 팔아서 이득을 취하기만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잡은 물고기들도 역시 과거 베드로가 사랑했던 것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부인 베드로를 부르시며 목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어부와는 달리 목자는 양 떼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양 떼를 잘 돌봐야 하는 것이다.
16절에서 예수님은 두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 하는냐?” 라고 물으셨다. 이러한 두 번째 질문에도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같은 말로 대답을 했다. 베드로의 사랑을 두번째로 확인한 예수님은 이번에는 “내 양 떼를 쳐라” 라고 하셨다. 첫번째 질문에 답했을 때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치라고 하셨다. 양 떼를 친다는 말도 먹인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좀 더 정확히 구별한다면 친다는 말은 돌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먹이고 잘 지키는 것까지 목자의 모든 의무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역시 이번에도 “내 양 떼” 라고 하셨지 베드로의 양 떼라고 하지 않으셨다.
먹인다는 말과 친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특별히 구별한다면 친다는 말은 양 떼가 공격을 받거나 위험한 곳에 빠지지 않도록 잘 감시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5절에서 베드로는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라고 한 것이다.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님께 돌아왔다는 뜻이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목자가 되어 내 양떼를 치라고 한 것도 역시 예수님과 같은 임무를 맡기신 것이다. 한글 성경에서는 감독이라는 말로 번역하여 마치 성공회의 감독이나 카톨릭의 주교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원어의 의미는 살펴본다는 뜻이다. 목자도 양 떼를 살피는 자이고 감독도 역시 양 떼를 살피는 자이다. 예수님의 목자이면서 예수님의 양 떼들을 살펴보는 일을 맡은 자는 절대로 높은 자리에서 감시하는 자가 되면 안된다. 예수께서 맡기신 양 떼가 상하지나 않을까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잘 살펴보는 자가 바로 목자요 감독이다. 예수님처럼 살펴보며 지켜 주는 것이 목자와 감독의 의무인 것이다.
17절에서 예수님은 세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그런데 앞에서 두번은 아가페로 물으셨는데 여기서는 필레오 라는 말로 물으셨다. 이것을 가지고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필레오는 형제 사랑이라고 말하며 억지로 구별하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두 단어의 차이를 구별하려고 자신들의 책에서 많은 지면을 할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가페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곳에도 많이 쓰였다(Matt 6:24; Luke 7:5, 11:43, 16:13; John 3:19, 12;43). 따라서 아가페에서 필레오로 바뀐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경우 다른 단어로 바꾸어 쓰는 것은 고대의 말과 글에서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라고 했다. 불안해서 라는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많이 약화시킨 번역이다. 개역도 ‘근심하여’ 라고 했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원문의 의미보다 많이 약하다. 이는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서 두 번 같은 질문을 하셨을 때는 자신있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같은 말로 세 번째 물으시자 자신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이 갑자기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과거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죽더라도 배신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친 것도 다 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제사장의 뜰에서 세 번이나 부인하신 것도 다 아신다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말한 뒤에 또 다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라고 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도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숨김없이 고백하는데 이제는 진짜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다시 내 양 떼를 먹이라고 하셨다. 첫번째는 어린 양 떼를 먹이라 하셨고 두번째는 양 떼를 잘 돌보라고 하셨다. 세번째는 다시 먹이라 하셨는데 이번에도 역시 양 떼를 잘 먹이라고 하신 것이다. 돌본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지만 목자의 가장 중요한 일은 양 떼를 잘 먹이는 것이다. 그래서 먹이라는 말로 시작하시고 먹이라는 말로 끝내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은 베드로에게만 맡긴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표이기에 이는 모든 제자들에게 물으시고 맡기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특별한 권한을 가졌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것도 베드로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다. 남의 양 떼를 먹인다면 그 주인을 사랑할 때만 잘 먹일 수 있다. 주인을 미워한다면 주인이 보지 않을 때 양 떼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은 먹이라 하셨고 한 번은 잘 돌보라 하신 것이다. 특별히 어린 양들은 잘 먹여야 한다. 양 떼란 어린 양들과 어른 양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잘 먹이는 것이다.
만약 강아지나 고양이를 사랑하며 잘 키운다고 한다면 그 뜻은 잘 먹인다는 뜻이다. 털 잘 빗기고 예쁘게 다듬어 주고 예쁜 핀을 꼽고 예쁘게 장식해주고 사랑해 주는 것도 잘 키우는 것의 한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잘 먹이지 않고 예뻐해 주고 장식해 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물을 장난감을 생각하는 정신병적인 집착일 뿐이다. 화분을 잘 돌본다는 것도 역시 물 잘 주고 거름 잘 주고 햇빛 잘 받게 해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잎사귀를 우유 묻혀 닦아주고 아름다운 종이로 화분을 감싸주기만 한다면 그것도 역시 살아있는 화분을 잘 돌보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양 떼인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잘 돌본다는 뜻은 잘 찾아 다니고 사랑해 주고 위로해 주고 밥 잘 사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나 행사를 많이 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것도 아니다. 형제 자매들을 잘 돌본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먹여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잘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말씀으로 잘 먹여 키우지 않고 자주 찾아가서 예뻐해주고 늘 필요를 채워줘서 마음을 빼앗기만 한다면 양들을 학대하는 죄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이는 영적인 죽음으로 이끄는 심각한 죄에 해당한다. 먹여 키우지 않고 비위만 맞추고 이익을 얻는 사람은 양의 목자가 아니라 양의 도둑이고 양을 잡아먹는 늑대나 이리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말씀으로 먹이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를 삼는 일이고 예수님의 양 떼를 먹이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을 딸 흩어져 그물을 던져야 한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도하여 믿게 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라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양 떼를 먹이라고 하신 것은 그렇게 믿게 된 형제 자매들과 함께 모여 그들을 먹이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단순히 먹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실 뿐 아니라 함께 먹으며 교제를 나누는 일도 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교제란 진실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섬김의 본을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