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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헌신적인 취재·보도 활동의 자취는, 매년 여기자들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최은희 여기자상’을 통해 반추할 수 있다. 무엇이 최은희를 있게 했고 또 회상케 하는지를, ‘조선일보 사람들’ 제3편에서 들여다 본다.
최은희가 기자로 발탁되게 된 데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1892~1950)와의 인연, 그리고 기자 덕목으로서 차고 넘칠 무한한 배포가 작용했다. 최은희가 동경 일본여대 3학년 재학 중인 1924년, 여름방학을 맞아 춘원의 집을 찾았을 때 일이다. 최은희는 춘원의 부인이자 산부의과 의사인 허영숙과 가까운 사이였다.
허영숙은 한 부호로부터 진료비 85원 10전을 떼어 먹힐 처지였고, 최은희는 청부사를 자임했다. 최은희는 채무자 집에 찾아갔으나 그가 외출하고 없자 마루에 돗자리를 펴 낮잠을 자거나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
“의료규정을 알아보시고 부당하거든 고소하세요.” 최은희는 귀가한 부호에게 쏘아 부쳤고, 강짜를 부리다가 차츰 진료비를 깎는 쪽으로 타협하려던 이 악성 채무자에게 “내가 종일 이 집에서 치마에 묻힌 먼지는 털고 갈망정 단돈 10전도 못 깎아 드리겠소”라며 결국 돈을 온전히 다 받고 일어섰다.
마침 그 때 조선일보가 ‘부인 기자’(여기자라는 의미)를 급구했고, 이광수는 이상협 편집고문에게 최은희의 진료비 추심 청부 일화를 들려주며 “그만한 배짱과 수완이면 넉넉하고 부인과 왕래 편지를 보니 문장도 신문기사보다 낫다”고 천거했다.
최은희는 그해 10월 대학졸업장을 포기하고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녀의 당시 전매특허는 ‘변장 탐방’이었다. 조선일보는 “부인기자가 신출귀몰한 변장으로 대담히 출동키로 했습니다”라며 홍보 문안을 내걸었고, 최은희는 땟국 시커먼 행랑어멈 차림에 한살배기 아이를 업고 서대문·무교동·광화문·청진동·종로를 다니며 들키지 않은 채 암행 취재에 성공한다. 수표동 조선일보 사옥 앞에는 그녀의 얼굴을 보려는 인파가 몰렸고, 귀사하는 최은희를 보며 “설마 저렇게 차려 입었을 줄이야…” 하는 탄식이 흘렀다고 한다.
6·10 만세운동 때는 희대의 특종을 남겼다. 1926년 6월 10일 순종 인산(因山)을 앞두고 일제는 대대적 검속에 돌입했고, 6월 6일 저녁 타사 기자들과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함께 거리를 걷던 최은희는 일본경찰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최은희는 고문경찰로 악명 높앗던 미와 종로서 고등계 주임을 발견했고, 다른 기자들을 따돌린 채 종로서로 뒤를 밟았다. 취조실에서 김기전·방정환·차상찬 등 잡지 ‘개벽’ 관계자들을 취조실에서 발견했고, 분위기는 계엄 상태 같았다.
최은희는 그 길로 민태원 편집국장 집으로 달려갔고, 이튿날 ‘모(某) 중대사건 폭로’라는 제목의 사회면 머릿기사는 “천도교 관계자, 주의자, 학생, 직공 등 80여명 체포” “밤중까지 무릇 10여회에 전부 약 100명의 혐의자를 검거”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최은희는 이 특종기사로 신석우 부사장의 상금을 받고 ‘신문계의 패왕’이라는 칭호도 받게 됐다고 한다. 최은희는 매음굴·거지굴 같은 궂은 취재도 앞장 서 했다.
최은희를 수식하는 ‘최초’ 수식어는 허다하다. 1924년 12월 조선일보 주최 무선전화 공개방송 사회를 보아 여성 및 조선인 최초로 라디어 전파에 목소리를 띄웠다. 25년 7월 대구에서 열린 남조선 여자정구대회에서 ‘여성 최초 시구’, 27년 12월 조선일보 비행기에 올라 탑승기를 5회 연재하며 ‘최초 비행 탑승 여기자’ 기록을 남겼다.
최은희는 “여기자는 (당시) 명물 중 명물이었고, 아무리 경비가 삼엄한 곳도 무사통과 됐으며 외국 영사관, 구(舊) 황실, 옛날 중심들의 가정 연회에 반드시 초청장을 받았다”고 술회했다. ‘여성 프리미엄’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특권’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다고 해야 마땅하다.
그녀는 일찌기 ‘강골’ 기질을 발휘했다. 3·1 운동 당시 16세 소녀 최은희는 경성여자고보 학생들의 만세 운동을 이끌었고,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고향 황해도 연백에 돌아온 뒤에도 또 만세운동을 일으켜 투옥됐다.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감한 뒤부터 동경 유학 전까지 아홉차례 연행되거나 유치장 신세를 지며 일경의 집중 감시를 받았다.
1926년 조선일보 퇴사 후엔 사회활동을 한동안 하지 않았고, 1942년 타계한 남편을 대신해 바느질과 우표가게 운영을 통해 삼남매를 모두 교수(이달순 전 수원대, 미순 덕성여대, 혜순 이화여대)로 키웠다.
광복 후 사회활동을 재개해 1945년 9월 여권운동자클럽을 조직하고 46년 5월 서울보건부인회 부회장, 52년 대한여자국민당(당수 임영신) 서울시지부장을 맡았다.
최은희는 타계하기 두해 전인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 범국민 모금운동 당시 조선일보에 100만원을 내놓았다. 이듬해 투병 중에는 5000만원을 조선일보에 기탁하면서 ‘한평생 언론 창달을 염원하고 기여하고자 한 꿈과 뜻이 이뤄지길 바라는 충정’을 표시했고, 조선일보는 ‘최은희 여기자상’을 제정해 84년부터 매년 시상하고 있다.
첫댓글 아하. 이분이 월남 이상재 와 선우휘 대구매일, 조선일보주필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분이구나. 영화배우얘기 인줄 알었습니다.
선우휘 주필의 글 참 좋아하지요. 국제신문 주필이었던 이병주 주필도 엄청 좋아한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절친한 (술)친구였다고..
신상옥 감독의 부인입니다,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