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閔妃暗殺⑦-2
왕 일가가 경복궁으로 옮긴 1868년은, 일본의 명치(明治)원년이다.
이해 12월, 명치정부는 쓰시마(對馬) 번의 가신을 사자(使者)로 하여 조선으로 보내, 「도쿠가와(德川)막부가 쓰러지고 신정부가 성립되었음」을 알리고, 「다시 국교를 열고 싶다」는 국서를 제출했다. 부산의 조선 측 관리는, 국서 중에 그때까지 쓴 적이 없는 문자가 있다는 것을 서울의 중앙정부에 통고하였으며, 공적인 접수를 거부했다.
국서에는 「皇上登極(황상등극하고, 萬機親覽(만기친람)한다」고 되어 있었으며, 그밖에도“황(皇)”이나 “칙(勅)”과 같은 문자기 쓰여 있었다.
그때까지 조선의 외교관례에 따르면, “皇”이나 “勅”은 종주국인 중국황제로부터의 국서에만 허용되어 있던 문자이다. 지금까지 조선과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일본이, 어째서 갑자기 이와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가, 하고 부산의 관리가 일본 측에 건네준 각서에는, 강한 비난이 스며있다. 그 밖에 그때까지 양국 간의 서계(書契)에 써왔던 인장은, 조선이 쓰시마 번에 준 것인데, 그것을 일본이 일방적으로 변경한 것을 비롯하여, 여전히 몇 가지인가 문제가 있었다.
그 후, 1876년에 강화조약이 맺어질 때까지 7년간, 일∙조간의 교섭은 진전을 보이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조선이 일본의 국서를 거부한 이유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1)조선의 쇄국정책에 따른 것
(2)서계의 형식이 전과 다르기 때문에 다시 쓰라고 요구한 것은, 조선 측의 교섭지 연 구실이었다.
(3)조선을 세력 하에 두고자 하는 명치정부의 속셈을, 조선 측이 감지했다는 것.
제3의 설을 취하는 강재언(姜在彦/花園大學 교수, 문학박사---京都대학)은 저서 『조선의 양이(攘夷)와 개화』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 측이 이와 같이 서계를 수리하지 않고 수정을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이 “皇”과 “勅”을 고집하여 문제를 악화시킨 이면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구교(舊交)의 회복이라고 하면서, 실은 “尊皇征韓(존황정한)”사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조선 측이 그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국왕은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의 역대 쇼군(將軍)과 대등관계이며,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日本國 大君)은 천황의 신하이기 때문에, 조선 국왕도 일본 천황에게 “신예(臣隸/역자 주:신하로 종속됨)”라고 해야 된다는 명치정부의 논법이다.」
1869년 9월, 일본정부는 조선과의 교섭은 외무성이 직접 나서기로 하고, 宗氏가 임의로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금했으며, 외무성 관리 2명과 외무소록(外務小錄) 森山 茂(모리야마 시게루)에게 조선시찰 을 명했다. “조선시찰”이라고 해도, 그들 3사람에게는 부산 이외 여행의 자유는 없었으며, 여기에서의 조사를 정부에 보고했는데, 이때 이미 무력을 배경으로 하는 대사파견을 건의하고 있다.
1870년(명치3년) 10월, 일본정부는 새삼 외무권소승(外務權小丞) 吉岡弘毅(요시오카 코오키), 권대록(權大錄) 森山 茂(모리야마 시게루), 외무성 관리 廣津 弘信(히로츠 히로노부)의 3인을 조선에 파견하고 교섭을 하게 했다. 그러나 조선 측은 양국간의 교섭은 이제까지 해온 대로 對馬(쓰시마)의 宗氏를 통해서 한다는 주장을 바꾸지 않았으며, 일행은 1년 남짓 부산에 체재하였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체, 이듬해 연말에 귀국했다.
이 무렵, 대원군은 점점 강대한 권력을 잡고, 뜻대로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그때까지 많은 개혁을 이루어왔으나, 특히 강한 결의로 부디 친 것이 서원(書院)의 철폐였다.
서원이란 본래, 선현에게 제사지내고, 지방 사족의 자제에게 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을 강의하는 교육의 장이었다. 그것이 난세 중에 타락하였고, 고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각지에 난립한 서원이 약 680서원이었으며, 그중에 많은 곳이 양반 유생의 악의 온상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민중을 박해하고, 기부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형(私刑)을 가하는 전횡을 보였으나, 중앙정부나 지방관의 위령(威令)도 서원에는 통용되지 않았으며, 범죄인조차 은닉하는 형국이었다.
대원군은 집정하자 지체 없이, 1865년에 서원 철폐에 착수하였으나, 이때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고, 다시 1868년에 엄중한 단속을 폈다. 그리고 1871년, 그는 국왕으로부터 직필편액을 받은 47개소의 서원만을 남기고, 다른 전부에는 철폐령을 내렸다.
이 철저한 조치로 각지의 유생들은 대거 서울로 올라와, 왕궁을 둘러싸고 철폐중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인민에게 유해한 것은, 가령 공자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물며 이 나라의 선유(先儒)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서원이, 도적의 소굴이 되어 있다니 어찌된 일인가!” 라고 일갈하여 그들을 성 밖으로 쫓아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원군다운 말이다.
더욱 대원군은 토지조사에 착수하였으며, 지방관이 토지장부에 올리지 않고 세수를 착복하던 토지를 조사하고, 호족들의 탈세를 적발하여, 국가재원을 확보했다. 또 그때까지 상민(常民/양민)에게만 부담시키고 있던 군포제도(軍布制度/병역세)를 고쳐 양반에게도 호포(戶布/호구세)를 부담시켰다. 여러 해에 걸쳐 특권을 잃은 양반들 사이에서 강한 불만의 소리가 나왔다.
유생이나 양반을 억누를 때의 대원군은 득의만면(得意滿面)이 절정에 이르렀지만, 머지않아 그 청구서를 그는 권력과 바꾸어 치룰 처지가 된다.
-飜譯書-閔妃暗殺⑦-3
1866년에 일어난 “셔먼호 화공사건(火攻事件)”은 그 후, 진상이 전해지지 않은 체 북경, 상해, 천진 등의 구미인 사이에서 여러 가지 억측이 일어났다. 이 배의 행방을 쫓아 몇 번인가 미국 배가 조선으로 갔으나, 1868년에 대원군의 솔직한 회답에 의해 진상이 판명되었다.
1871년, 조선 개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미국은, 국무장관 피시가 주청 미국공사 로와 연락을 취하고,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으로 함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조선과의 교섭이 정돈상태에 빠진 것을 고려하는 일본은 크게 관심을 기울이고, 미국과 협의했다. 일미 양국은, 조선에 개국을 앞당기려는 입장에 일치하고 있었다. 주일 미국공사 데⦁롱과 회담한 외무경택(外務卿澤) 宣嘉(노부요시)의 말에, “(조선은) 본디 일본의 속국이었습니다만”이라는 한마디가 있다.
5월, 미국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의 지휘 하에 5척의 함대는 나가사키(長崎)에서의 650명 육전대와 합류하고, 수송선과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이때도 강화도가 전장이 되었으며, 격전 후 미국군은 초지진(草芝鎭)포대, 광성진(廣城鎭)포대를 점령하고, 일시 정전이 되었다.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죄와 개국승인이 목적인 미국은, 전투의 장기화를 바라지 않았으며, 여기에서 교섭에 들어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측의 전의는 왕성하여 교섭에 응할 기색도 없이, 500명의 결사대가 광성진에 야습을 감행하였으며, 미국 육전대는 고전 끝에 겨우 이를 잠재웠다.
이튿날 로저스 제독은 강화성 공략계획의 포기를 발표했다. 미국은 조선의 전권대표를 교섭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의도도 덧없이, 7월, 청국과 일본에 있는 각각의 기지로 상륙했다.
5년 전 프랑스 동양함대의 강화도 내습이래, 대원군은 백인과 싸우기 위한 신식군비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구미의 무기나 장비를 연구 하려고는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조선 독자적인 힘으로 싸우고자, 전국에 공시문을 내붙이고 군비의 신안을 모집했다. 그것이 구체화하여 미국과의 전투에서 나타난 예를, 이규태(李圭泰/조선일보 논설위원)은 요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한국 국제문화교류협회 발행 『아시아공론』 1986년10월호).
「조선 병사는 너무나도 무겁고 두꺼운 군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행동이 부자유스러웠고, 일단 군복에 불이 붙으면 끌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나 강으로 투신한 자가 100명을 웃돌았다」
방탄복 이외에 시작(試作) 단계까지 진척된 학우선(鶴羽船)이 있었다. 선체는 가벼운 학(鶴)의 깃털로 만들고, 매미(蟬)의 아랫배와 같은 고복(顧復)을 붙여 그 신축에 의한 바람으로 하늘을 날았다가, 다시 수면에 떠서 항행도 할 수 있다는 공수양용의 비행선이다. 총탄을 맞아도, 선체가 깃털이기 때문에 탄환구멍이 자연히 메어지는 것이 특징인 듯하다. 이 때문에 전국의 학이 씨가 마를 만치 잡아들였다고 하나, 실험단계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실용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 후에 대원군이 실각하였을 때 「학의 원한」 이라는 소문이 났다고 전해진다.
마포(麻布)방탄복도 학우선도, 세계의 발전에 등을 돌린 대원군의, 완고한 쇄국주의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프랑스와 미국 함대를 격퇴한 2번의 “양요(洋擾)”에 의하여, 조선의 쇄국주의는 점점 굳어지고, 위정척사사상은 일세를 풍비하기에 이르렀다.
대원군의 만족과 득의는 어느 정도였을까---. 대원군은 세계대세에 어두웠고, 선진국에 관한 지식에 결핍했다. 그는 조선을 <독력으로 프랑스, 미국 등 구미 제국을 배격하고, 러시아에는 문호를 닫고, 일본과의 수호를 배척하는 세계 최강의 왕국>이라고 믿었으며, 자기는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상상 된다.
대원군은, 관민이 굳은 결의로 한 덩어리가 되어 쇄국정책을 관철하면, 세계의 움직임과는 무관하게 조선은 언제까지나 평안하고 태평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해, 그는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斥和碑(척화비)」를 세웠다. 비문의 의미는 「침범하는 양이와 싸우지 않으면, 결과는 그들과 화해하게 되고, 화(和)를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다」라는 것으로, 그 좌측에 「우리 자자손손을 훈계하며, 丙寅年(1866년)에 제작하고, 辛未年(1871년)에 건립한다」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