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飜譯書-閔妃暗殺⑧-3
1873년(명치6년) 10월25일, 최익현(崔益鉉)의 대원군 상소가 임금에게 올려졌다. 이씨조선왕조시대, 왕이 직접 그것을 읽는지 어떤지는 별도로 하고, 누구든지 자기의 의견을 써서 왕에게 올릴 수 있는 상소제도가 있었다.
최익현은 위정척사운동의 지도자 이항노(李恒老)의 수제자로, 유학자들 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전에도 대원군을 탄핵한 일이 있고, 그 경력은 민비 일파에게 인정되어, 10월 초에 부승지(왕의 차석비서관)라는 관직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최익현의 대원군 상소내용은, 「정치가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고관들은 정론을 말하지 못하고, 직언을 하지 않는다」 하여 정권 담당자를 엄하게 비판하고, 「인사는 적재적소를 으뜸으로 하지 않고, 천재지변이나 흉년에 대한 대책은 없으며,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곤궁하다」 등,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쓰여 졌다.
왕은 최익현을 전면적으로 지지하고, 그 상소를 “그의 진심에서 나온 훈계의 말이다” 라고 상찬하여, 호조참판(대장성 차관 클래스의 관직)에 임했다.
대원군은 최익현의 상소에 반발하고, 그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 입장 상, 표면에 나서지는 않고, 우의정, 좌의정 등 고관들이 최익현을 비난하는 상소를 제출했다. 이에 이어 많은 관인들도 최익현을 비난했으나, 왕은 강경하게 그를 옹호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계속해서 비난하는 관인 일부를 유배에 처했다. 또한 서울의 유생들도 최익현을 비판했으나 왕은 이를 막았다.
11월3일 최익현은 재차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대원군은 왕의 아버지이며, 최고의 경의로 우대하는 것이 당연하나, 언제까지나 국정에 관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임금님이 성년에 이른 금일, 조속히 집정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의 10년에 걸쳐 이 나라에 군림한 대원군이지만, 그에게 법적인 권력의 근거는 없었다. 「왕이 어리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집정이 되었지만, 법적으로는 언제나 왕이 최고 권력자이고, 명령이나 포고는 전부 왕의 이름으로 내리고 있었다. 왕은 이미 만21세, 「훌륭한 성인이 된 왕의 예지와 인덕으로 친정을 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말하는 데는, 대원군에게 그에 정면으로 거부할 말이 없었다.
최익현의 두 번째 상소문 중에 과격한 언사가 있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가 결정되었으나, 그것은 대원군 파의 테러에서 그를 지켜 주려는 방책이었다. 제주도로 가는 최익현을 본 노변의 사람들은, 그를 “최충신”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1월5일 왕은 「친정」을 포고했다. 그와 동시에 왕궁의 대원군 전용출입문은 폐쇄되었다. 자료에는 쓰여 있지 않지만, 이 기민하고 끔찍한 처치는 민비의 지시가 아니었을까. 대원군의 정치적 실각은, 최익현의 첫 번째 상소로부터 불과 열흘 후에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다.
아버지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으려는 왕의 본심을 알았을 때, 대원군은 경악과 분노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 후의 열흘 동안, 그는 악몽 속을 해매는 느낌이었을 것으로 상상된다. 단숨에 「친정」을 실현하려는 왕의 태도가, 실은 민비의 의지에 이끌린 것이라는 것을 대원군은 언제 알았을까--- 어떤 자료에도 쓰여 있지 않다. 어쨌건 간에 며느리와 시아버지는, 암용과 수용이 “권력”이라는 황금 알을 서로 빼앗으려는 듯이, 한쪽의 목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사투를 전개한다.
왕과 왕비---대원군에게는 “아들 부부”의 배포 같은 것을, 일찍이 억측도 해보지 않았다. 왕은 언제까지나 “순한 아들”이고, “정숙한 왕비”라고 불리는 민비는 “무해한 며느리”에 지나지 않았다. 점차로 표면에 들어나는 민비의 본성에도, 더욱이 민씨 일족의 출세에도, 대원군은 특히 주의를 기우린 적은 없었다. 민가는 왕비의 친정이며, 그의 처가 동리이기도 했다. 그 일족이 우선해서 상위관직에 오르는 것은 당연하고, 체면상으로도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었다. 최익현의 상소 이래, 자기의 실각을 그늘에서 강행하는 민씨 일족을 바라보고 대원군은 깜짝 놀라 눈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물정에 어두웠고, 주의를 개을리 했다. 그러나 대내 대외적으로 난제를 안고 있는 대원군에게는 생각해야 할 일, 할 일이 산 같았고, “가족적인 일”에 마음을 쓸 여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도 민비는 잘 계산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대원군의 맹점을 꿰뚫었다.
당연하지만 대원군의 몰락은, 집안에 대한 그의 부주의만이 원인은 아니다. 급전직하 실각의 배경에는, 10년에 걸친 문자 그대로의 독재와, 권력남용이 있었다. 그것은 서원을 철폐 당한 많은 유생들이나, 면세특권을 빼앗긴 양반, 특히 양반지주들의 원한을 샀다.
또 극한적인 쇄국주의를 고집하는 대원군의 대외정책에, 사람들은 점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일본을 비롯하여 구미 열국은, 조선에 개국을 강요하는 태도를 결코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계속 준열하게 거절하는 것만으로, 이 나라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대원군이 큰 소리 치는 「방위력강화」는 재정을 압박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궁핍에 빠뜨리고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왕궁의 전용 출입구까지 폐쇄당한 대원군은, 자기 저택인 운현궁에 들어앉았다. 형도 장남도 이미 적진에 들어갔고, 가까이 남은 것은 첩에서 낳은 아들 이재선(李載先)뿐이었다.
12월10일,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 많은 건물이 소실되고, 왕 부처는 시종들과 같이 창덕궁으로 옮겼다. 화재의 원인은. 민비 침전에 장치된 폭탄이었다. 범인으로 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의 신분이 낮은 사용인이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없어 미궁으로 들어간 사건으로 끝났다.
민비는 심중에서, 대원군이 그녀를 모살하려고 시도했다---고 단정했을 것이다. 산삼을 주었을 때의 전례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왕에게 호소해 봐도, 거기에서 앞으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할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왕의 아버지에게 혐의를 걸고 조사하는 것도, 항차 처벌하는 것 같은 것은 절대로 허용될 이가 없다. 여기는 유교의 세계이고, 민비도 역시 효도에 등지는 행위를 왕에게 바라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대원군은 왕궁에서 가까운 운현궁을 떠나, 북문 밖 삼계동(三溪洞)에 있는
산장에 은거했다. 다시 그는 아버지 남연군 성묘를 위해 덕산군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몇 안되는 종자를 데리고 양주까지 여행을 계속해서 직곡산장(直谷山莊)에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직곡산장의 대원군이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적막감을 푸념하기 시작할 무렵, 민비는 이중의 기쁨에 만족하여 산욕으로 누워 있었다. 1874년2월8일 산성(産聲)도 가냘프게 허약아이기는 하나, 그녀는 또다시 아들을 낳았다. 신생아는 “척(坧)”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척은 뒤에 제27대왕 순종(純宗)으로, 이씨조선왕조 최후의 왕좌에 취임하게 된다.
첫아들 사후, 민비는 하루라도 빨리 둘째 아들을 얻고싶어 절실히 바랬으며, 왕비는 왕궁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뜨리고, 몸소 충청남도의 신원사(新元寺)로 기원을 하러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1986년(소화61년) 12월, 나는 신원사를 찾았다. 서울에서 공주로 가는 버스는, 서울과 부산을 잇는 넓디넓은 경부고속도로를 맹렬한 스피드로 달려, 청주에서 국도 36호선에 들어가, 약 2시간반 만에 종점에 닿았다. 공주(公州)는 5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60여 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다. 거기에서 다시 차로 30분 쯤 산길을 달려 계룡산(鷄龍山) 남쪽 비탈, 조용한 농촌지역에 신원사가 있었다. 깨끗하게 흐르는 급류위에 걸쳐진 세심교(洗心橋)를 건너서, 넓은 경내로 들어간다. 이 절은 7세기 중반에 창건 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기와가 발견되었다.
젊은 주지 원융(圓融)스님은 “민비는 아이를 얻고 싶은 일심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을 입증하는 서류 같은 것은 없습니다.” 라고 했다. “그러나 이곳의 중악단(中嶽壇)을 민비가 수리 복원한 것은 확실하며, 완성은 순종 탄생 2년 후에 했습니다. 민비는 곳곳의 절에서 기도를 했으나, 왕자를 얻고 답례를 한 곳은 여기뿐입니다”
신원사 대웅전에서 50미터 쯤 떨어진 중악단으로 안내 받았다. 궁전 풍의 지붕에 특색 있는 건축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민비가 좋아했을 것으로 보였다. 중악단은 전국에서 가장 위계가 높은 산신각(山神閣)으로, 지금도 각지에서 무녀들이 계룡산에 모여 산신의 영을 받는다고 한다.
산신신앙은 옛날부터 지금에 전하는 민속신앙으로, 내가 방문한 날도 도회풍의 멋진 양장을 한 몇 사람이 차를 타고 와서 신전에 부복하고 있었다. 일련의 샤머니즘은 산에도 짐승들에게도 모든 것에 영혼이 있다고 하여, 그에 의해서 인간이 지켜진다는 것으로, 옛날부터 불교도 유교도 이 자연숭배를 배척하지 않았으므로, 평화스럽게 공존해 왔다고 한다.
중악단 내부 정면에 산신제단이 있고,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의 화상이 결려있다. 수호신인 산신이 온화한 용모로 그려진 것은 알겠는데, 그 옆에 커다란 호랑이가 웃는 듯이 보이는 것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뒤에 들은 설명에 의하면, 호랑이는 사악한 잡귀로부터 인간을 지키는 영험한 짐승으로 알려져, 옛날에는 사납게 그렸으나, 조선왕조 말기에는 위엄을 지니면서도 친해지기 쉬운 웃는 얼굴의 호랑이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민비의 신앙대상이 산신이었다는 것은, 그녀가 평소에 점쟁이나 무녀를 신변에 가까이 한 것을 생각하면, 당연할 것이다. 민비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사람을 이용하는 재간이 정교하다고 해도, 여자다운 의뢰심으로 보다 기댈 줄 모르는 여성은, 인간 이외의 “존재”를 상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무녀에게 “군(君)”의 위계를 주어 “신령군(神靈君)”으로 부르고, 주위에서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우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무녀는, 민비와 산신과를 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