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문학의 정수가 드러나는 중·단편 10편을 수록했다. 50종이 넘는 '아Q정전' 역서 가운데 루쉰 문학 전문가들이 가장 신뢰하는 번역본이다.
중국 사회에 드리운 암흑의 근원을 파헤치고 몽매한 민중을 일깨우는 데 혼신을 바친 루쉰이다. 신해혁명 전후 무기력하고 비굴한 중국 민중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풍자와 해학적인 필치로 가감없이 보여준다. 봉건의 극복과 근대의 실현을 위해 치열하게 고투한 루쉰의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적인 빛을 발하고 있다.
루쉰(魯迅·1881~1936)은 1918년 '신청년'에 처녀작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 필명 '루쉰'을 처음 썼다. 이후 소설과 산문을 넘나드는 활발한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소설은 중편 1편과 단편 32편을 남겼다. 역자 전형준 교수(서울대 중문학)가 10편을 가려 뽑았다.
루쉰의 첫 소설 겸 중국 현대소설의 첫 작품인 '광인일기'는 피해망상증을 앓는 인물을 통해 사람을 잡아 먹는 봉건 유교사회의 폐해를 심층적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문학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아Q정전'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야비한 인물 '아Q'를 통해 중국 봉건사회의 내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형상화한 루쉰 유일의 중편이다.
자신이 1인칭 화자로 등장,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의 상실감을 묘사한 단편 '고향'의 마지막 대목에서 루쉰은 이렇게 희망을 말한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260쪽, 8000원, 창비./
내 마음은 유난히 쓸쓸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편안하다. 애증도 없고, 애락도 없고, 색(色)도 음(音)도 없다.
아마 나는 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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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에는 내 마음도 피비린내나는 노랫소리로 가득 찼던 때가 있었다.
피와 쇠, 화염과 독, 회복과 복수로 가득 찼던 때가.
그러다가 갑자기 이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때론 덧없는 자기 기만의 희망으로써 짐짓 이것을 메워 보려고 시도하는 일도 있었다.
희망, 희망, 이 희망의 창으로써공허 속의 어두운 밤의 음악을 막으려 했다.
비록 창의 배후가 여전한 공허 속의 밤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그 때문에 차례차례 내 청춘은 소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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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나는 이 공허 속의 어둠으로 접근해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희망의 창을 놓고 페퇴피 상도르의 <희망>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부.
아무에게나 아양을 떨어서 모든 것을 바치게 하고
네가 많은 보물—너의 청춘을 잃었을 때
그녀는 너를 버린다.
-루쉰 <야초野草> ‘희망’ 중에서
L'etreinte
(포옹)< b>
<납함>
자서
나도 젊었을 때는 많은 꿈을 가졌었다. 나중에는 대개 잊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별로 애석하게 생각한 적은 없다.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적막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음속의 실 한 가닥으로, 지나가 버린 쓸쓸한 시간을 매어둔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못한 데에서 나는 오히려 고통을 느낀다. 그 완전히 잊혀질 수 없는 일부분이 지금 <납함>을 쓰게 된 원인이 되었다.
나는 일찍이 4년 남짓한 동안 거의 매일같이 전당포와 약방을 출입했던 적이 있다. 몇 살 때인가는 잊었지만, 아무튼 약방 계산대가 내 키만큼 높았으며, 전당포의 계산대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었다. 나는 내 키의 갑절이나 되는 계산대 위에 옷이며 장신구 따위를 놓고, 경멸 어린 눈초리 아래 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시 내 키만큼 높은 한약방의 계산대로 가서 오랜 병으로 앓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약을 짓고는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일로 바쁘기만 했다. 왜냐하면 약을 처방한 의원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거기에 소용되는 보조약 또한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한겨울의 갈대 뿌리, 3년간 서리맞은 사탕수수, 교미중인 귀뚜라미, 열매 맺힌 평지목 등,.... 모두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은 날로 더해서 끝내는 돌아가시고 말았다.
나는 누구든 안락한 환경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그 반대의 생활로 떨어져 버렸다면, 그 떨어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의 참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N시로 가서 K학당에 입학하려 한 것도 아마 다른 길, 다른 지방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과 사귀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8원의 여비를 마련해 주시며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우셨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은 경서를 배워서 과거를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길이었고, 사회통념상 소위 양학을 배운다는 것은, 갈 곳 없는 사람이 서양 오랑캐에게 영혼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간주되어, 몇 배의 수모와 배척을 당해야만 하는 데다가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을 만나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결국 N시로 가서 K학당에 입학했다. 이 학당에서 나는 비로소, 세상에는 물리라든가 수학, 지리, 역사, 미술 및 체육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생리학은 별로 배우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목판본의 <전체신론>이니 <화학위생론>이니 하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때까지 기억하고 있던 옛날 의원들의 이론이나 처방을 새로이 알게 된 것과 비교해 보고는, 한방의가 결국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일종의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에게 속은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에게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번역된 역사책에 의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대부분 서양의학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유치한 지식 덕분에, 나는 일본 어느 시골의 의학전문학교에 학적을 두게 되었다. 내 꿈은 부풀어 있었다.
졸업하고 귀국하면 나의 아버지처럼 잘못된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리라. 또 전쟁이 일어나면 군의관을 지원하리라,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유신 신앙을 촉진시켜 주리라, 이런 등등이었다.
나는 미생물학을 가르치는 방법이 지금은 어느 만큼 진보하였는지 잘 모르지만, 어떻든 그 당시에는 환등을 사용해서 미생물의 형태를 비춰 보여주었다. 가끔씩 강의가 끝나고 나서도 시간이 남을 때면 교수님은 풍경이나 시사에 관계되는 필름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어 그것으로 남은 시간을 때우곤 하였다. 그 때가 마침 일,러 전쟁 중이어서 자연히 전쟁에 관한 필름이 비교적 많았다. 나는 그 강당에서 항상 동급생들의 박수갈채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한 번은 나는 마침 화면에서, 오래 전에 헤어졌던 많은 중국인들을 갑자기 보게 되었다. 가운데에 한 사람이 묶여있고,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 있는 장면이었다. 모두 건장한 체격이긴 했지만 넋이 빠진 듯 멍청한 표정들이었다. 해설에 의하면, 묶여 있는 중국사람은 러시아를 위해 군사상의 기밀을 정탐했기 때문에, 본보기로 일본군이 목을 자르러 한다는 것이었다. 둘러선 사람들은 이 본보기가 되는 큰 일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2학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동경으로 나와버렸다. 그 필름을 한 번 본 뒤로는 의학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이기의 재료나 관객밖에는 될 수 없었다. 병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런 일은 불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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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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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의 출판날짜가 가까이 다가왔으나, 맨 먼저 원고를 담당한 몇 사람이 자취를 감추었다. 뒤이어 자본을 댈 사람마저도 도망가버려서, 결과적으로 일 전 한 푼 없는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시작할 때부터 이미 세태에 맞지 않는 일이었으므로 실패했을 때도 물론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나중에 남은 세 사람도 서로 자신의 운명에 쫓겨 한자리에 모여 장래의 꿈을 마음놓고 이야기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탄생시키지도 못했던 <신생>의 결말이다.
내가 난생 처음 무료함을 느끼게 된 것은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였다. 나는 당초에 왜 그런지 까닭을 몰랐다. 얼마 뒤에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즉, 한 사람의 주장이 남의 찬성을 얻으면 전진하게 되고, 반대를 얻게 되면 분발하게 된다고. 그러나 낯선 사람들 속에서 홀로 외쳤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즉 찬성도 반대도 없다면, 마치 끝없는 벌판에 홀로 버려진 듯 자신을 어찌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비애인가! 나는 내가 느꼈던 것을 적막이라고 생각한다.
이 적막감은 하루하루 자라기 시작하여, 마치 커다란 독사처럼 나의 영혼에 칭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비록 끝없는 비애 속에 빠져 있었지만, 결코 그로 인해 분노를 터뜨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런 경험은 나를 반성하게 하고 나 자산을 돌아볼 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즉 나는, 내가 한 손을 높이 쳐들고 외치면 나에게 호응하여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그런 영웅이 절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 스스로의 적막감만은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나 자신의 영혼을 마취시키고, 나를 민중 속에 몰입시켜 옛날로 돌아가게 하려고 했다. 그 뒤에도 더욱 적막하고 비애스러운 일을 몇번 직접 경험하고 방관도 해보았지만, 모두 돌이켜 생각해 보기조차 싫고, 그것들과 나의 머리를 한꺼번에 진흙 속에라도 파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마취법이 효과가 있었던지, 청년시절의 비분강개하던 생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S회관에는 세 칸짜리 방이 하나 있다. 마당에 있는 홰나무에서 옛날에 한 여자가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그 홰나무는 사람이 올라갈 수 없을 만큼 높이 자라 있지만, 그 방에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몇 년 동안 나는 그 방에 틀어박혀 고비를 베끼고 있었다. 손님들의 내왕도 없었고, 옛 비문 중에서 무슨 문젯거리나 주의()를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면서 나의 생명은 점점 깜깜한 어둠 속으로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이 또한 나의 유일한 바람이기도 했다. 모기가 한창 극성이던 여름밤, 부들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홰나무 아래에 앉아 무성한 잎 사이로 반짝이는 저녁 푸른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늦게 깨인 홰나무 벌레가 섬뜩하게 목 위에 떨어지기도 했다.
그 때 가끔 놀러 와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옛 친구인 김심이(金心異) 였다. 그는 손에 든 가죽가방을 낡은 책상 위에 놓고 웃옷을 벗어 던지고는 마주 보며 앉는다. 개를 무서워하므로 그 때까지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모양이었다.
자네 이런 걸 베껴서 무엇에 쓰려고 하나?
어느 날 밤, 그는 내가 베낀 옛 비문의 초본을 펼쳐보며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무 소용도 없어.
그러면 무엇 때문에 베끼고 있나?
아무 이유 없네.
내 생각엔 자네가 글을 좀 썼으면 해....
나는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 <신청년>이라는 잡지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엔 특별히 찬성하는 사람도, 그렇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았다. 필시 그들도 아마 적막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말했다.
가령 말일세. 창문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쇠로 된 방이 하나 있다고 하세.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네. 오래지 않아서 모두 숨이 막혀 죽을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사멸되어 가고 있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 따위는 느끼지 못할 걸세.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비교적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켜서, 그 소수의 불행한 이들에게 구제될 수 없는 임종의 고초를 겪게 한다면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겠나?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일어난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잇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이것이 처녀작인 <광인일기>이다. 그 때부터 이왕 한 발 내디딘 이상 되돌릴 수 없고 해서, 친구들의 부탁이 있을 때마다 소설 비슷한 글을 쓰고, 그렇게 쌓이게 된 것이 십여편이 이르렀다.
나 자신은 현재 이미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음에도 결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쩌면 아직 그 때 나 자신이 가졌던 적막한 비애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몇 마디 고함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적막 속에서 치닫는 용사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되고 그들이 앞장서서 달려가는 데 거리낌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함성이 용맹스러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증오스러운 것인지, 가소로운 것인지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 그러나 함성인 이상에는 당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들어야 하므로, 가끔 곡필을 놀려 <약> 속에 나오는 유아의 무덤에 이유 없이 꽃다발을 놓거나, <명일>에도 <선사수자>가 끝내 하들을 만나는 꿈을 꾸지 못했다고 쓰지 않았던 것은 그 당시의 대장이 소극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으로서도 내가 겪기에 고통스러웠던 적막감을, 내 젊은 시절과 같이 꿈에 부풀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결코 다시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면, 나의 소설이 예술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게다가 한 권의 책으로 낼 기회까지 얻고 보니 어쨌든 요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행이라는 점이 나를 불안하게 하지만, 잠시 동안이라도 사람들 사이에 읽어줄 이가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떻든 그나마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단편소설들을 모아 인쇄에 붙이고, 또 앞에서 말한 연유로 해서 <납함>이라 이름 붙이기로 했다.
한때 루쇤과 그가 살던 시대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인간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느껴보았다. 어떤 작가가 마음에 들면 대체로 그의 전작을 다찾아 읽곤 했었는데 루쉰만은 중도에 포기. 훗날 인류학 논문에서 식인사를 집필한 연구자가 루쉰의 아큐정전이 실제상황이라는 가설에 전율. 중국인이 즐기는 만두의어원이 산사람을 제사지내고 강을 건너야 할곳에서 떡으로 머리를만들어 그속에 짐승의 고기를 채워 귀신을 속인 유래에서 시작된 것과 맞물리고. 어쨌던 그의 작품전반에 흐르는 비애는 서구쪽의 신.정의. 연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루쇤의 초상만 보아도 가슴이 아픈것은 꼭 내심장이 약한 탓만은 아니리라.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아큐정전 꼭 사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때 루쇤과 그가 살던 시대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인간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느껴보았다. 어떤 작가가 마음에 들면 대체로 그의 전작을 다찾아 읽곤 했었는데 루쉰만은 중도에 포기. 훗날 인류학 논문에서 식인사를 집필한 연구자가 루쉰의 아큐정전이 실제상황이라는 가설에 전율. 중국인이 즐기는 만두의어원이 산사람을 제사지내고 강을 건너야 할곳에서 떡으로 머리를만들어 그속에 짐승의 고기를 채워 귀신을 속인 유래에서 시작된 것과 맞물리고. 어쨌던 그의 작품전반에 흐르는 비애는 서구쪽의 신.정의. 연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루쇤의 초상만 보아도 가슴이 아픈것은 꼭 내심장이 약한 탓만은 아니리라.
루쉰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내리지 마시길...
저도 좋아합니다. 다시 한번 읽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네 저두요~ 웬만한 소설은 삼중당으로 다 읽었음. 루쉰을 보다보면 어딘지 모르게 카프카적 요소를 느끼곤 했죠, 오늘에사 그 원인을 찾을수 있으려나?
누군가 작가의 영상적 기법의 문제성을 제기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뒤적거려 봐야겠군.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을 먼저 읽고나서 판단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