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두 개의 건물은 한 때 창경궁(昌慶宮)을 창경원(昌慶苑)이란 동물원으로 만들고, 조선을 이조(李朝)란 멸시감을 섞은 이름으로 조롱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해체하여 궁밖으로 내 보냈다고 합니다. 일제는 1927년 경복궁 안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다음 해에 총독부 건물 앞에 광화문이 있어서 그게 총독부를 가려 재수 없다며(?) 광화문을 허물기도 했고, 창덕궁 후원의 대보단을 허물어 내고 그 자리에 선원전을 만들기도 했습니다.(정말 재수 없는 일제.-_-) 게다가 일제는 경복궁 강녕전 건물을 뜯어다 창덕궁 희정당을 만들었고, 경복궁의 교태전을 뜯어다가 창덕궁의 대조전을 만드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당시에 현재의 청와대 자리가 된 경무대 주변에 있던 이 두 개의 한옥, 융문당과 융무당이 해체되어 궁밖으로 내던져지고, 그게 일반인들에게 한옥 재료로 팔려버린 것입니다. 즉, 총독부 건물을 짓느라 이들 건물을 허물어서 일본인들에게 나눠주고, 일본인들이 이를 용산으로 옮겨가서 절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걸 다행히 원불교단에서 구입하여 오랫동안 용산 원불교당으로 사용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곳에 시니어 타워가 새로이 건립되는 바람에 이 한옥들을 해체 보관해 오고 있었는데, 그 두 개의 건물을 이번에 옥당박물관 개관과 함께 다시 복원한 것이라 합니다. 융문당은 원불교 영산 성지에 따로 복원되었는데, 이 두 개의 건물을 복원한 비용으로만 6억 원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이 두 건물은 현재 문화재로 등록 신청을 했고, 건물의 내력으로 인하여 문화재 등록이 확실시된다고 합니다.
한 때 고종이 앉아 문무과 시험을 주재하던 이런 유서 깊은 건물이 옥당박물관의 일부로 재건립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박물관의 문과적(?)인 성격 상으로 보면 융문당이 이곳에 복원되어야 했을 것이나, 융문당이 복원된 곳이 영산 성지의 선학대학원이라는 걸 고려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더 실질적인 이유는 융문당이 융무당보다 큰 건물이기 때문에 박물관과의 조화를 위해서는 융무당이 더 어울렸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에 융문당을 복원해 놨으면 그 두 건물의 비례가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지요.
융문당과 융무당의 모습은 나중에 자세한 사진을 통해서 다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융무당의 경우는 내부 사진도 몇 개 찍어놓았습니다. 융문당의 경우는 닫혀있어서 그 내부를 찍을 수 없었고요.
- 박물관과 융무당의 중간에 만약 이 아름다운 꽃이 없었다면...
융무당 역시 신성해 원불교역사박물관장의 주도 하에 면밀한 작업을 거쳐 복원된 것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 옥당박물관 본 건물을 기획, 설계하고 그 설계도까지 그린 것이 신 박물관장이라는 것입니다.-_- 놀라운 일이지요. 하지만 그 분의 집안 내력을 알고 보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분의 부친이 관련 분야에서 사계의 전문가로 통하는 분이니까요.^^ 어릴 적부터 부친의 일을 보고 자란 거의 선천적이랄 수 있는 디자인 감각과 신 관장님 특유의 뚝심으로 이뤄낸 작품인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대공사를 할 때 신 관장님이 공사판 십장 노릇까지 하셨다는 것.^^;(근데 이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곡리 구석기 유적, 암사동 선사 유적 등의 고고 유물 발굴을 할 때 이미 본인의 표현 그대로 "십장 노릇"을 하셨다는 것.^^)
- 배롱나무, 그리고 그 아름다운 꽃. 참 예쁜 꽃입니다.
이번 여름 여행 내내 저와 집사람은 남도(南道)를 붉게 물들인 수많은 배롱나무의 아름다운 자태에 반해 버렸습니다. 저희는 그 때 “왜 이렇게 멋진 배롱나무는 화분에 심어 팔지 않을까?”하는 얘기까지 했었는데, 그건 제가 모르는 소리였더군요.
- 우리 회사(DreamWiz) 부근의 메차쿠차(이게 일본어로 “엉망진창”이란 의미라던데...)란 돈까스집에 갔었는데, 그 식당 문 앞에 이런 배롱나무의 분재가 놓여있었지요.^^ 당장, 그런 분재를 하나 사서 우리 집 마루에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위에서 말했던 퍼스펙티브를 더욱 강조해서 찍은 사진.^^ 역시 배롱나무가 주연입니다.
- 이건 저녁 시간에 찍은 거라서 색상이 좀 이상하게 나온 것입니다. 앞서의 사진은 8월 2일 아침 나절의 햇살에서 찍은 것이고, 이 사진은 그 전전날 저녁 7시 경에 찍은 사진입니다.
옥당박물관의 조망아래는 이 박물관을 둘러보며 찍은 사진들입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거리에서 찍었습니다. 그래야 이 박물관에 대한 입체적인 조망이 가능하리라 믿기에...
- 박물관 현관 입구. 복층의 다락방(attic) 같은 부분은 일종의 수장고 형태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아래층만 전시실인 셈입니다.
- 박물관 오른쪽 끝 부분.
- 좌측면 사진.
- 오른쪽에서 본 두 건물의 사진.
- 융무당과 박물관
- 오른편 멀리서 본 두 건물. 넓은 앞뜰은 현재 잔디밭으로 조성 중입니다. 1년 후 정도면 이 뜰이 잔디로 뒤덮일 것이고, 2년 후면 완전한 잔디밭이 될 것이라 합니다.
- 마당 오른편으로 보이는 유물 수장고(守藏庫).(예전에 작은 교사로 사용되던 곳. 박물관에서는 미전시품을 보관할 에어컨디셔닝된 수장고가 필수적.) 수장고 앞의 나무들은 예전 백수북초등학교 교사 앞에 심겨져 있던 것.
- 박물관 오른편 구석의 바비큐 파티장과 관사. 저희는 이곳을 방문했던 3박4일간 이 관사에서 묵었습니다. 평소에는 관리인이 주거하는 곳이라 합니다.(마침 관리인이 휴가 중이어서 저희가 그곳에서 편히 쉬었습니다.)
- 박물관 마당의 큰 소나무들. 저 소나무들은 백수북초등학교의 개교 시(1939년)에 심은 것들이라 합니다. 그러니 거의 68년 정도나 자란 것.
- 박물관을 돌아보는 두 고고학자들.^^ 왠지 여성이 고고학을 전공하면 좀 팔자가 센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 분들이 많더군요. 아마도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1981)의 영향인 듯.^^
하지만 실제로 고고학은 레이더스의 해리슨 포드 같은 모험가가 아니라 나이가 들어 끝내 호메로스의 전설인 것만 같았던 트로이(Troy) 유적을 발견해 낸 쉴리이만의 어린 시절 꿈처럼 낭만적인 것이고, 그런 면에서 오히려 여성에게 더 알맞은 학문일 수도 있지요. 고고 유물 발굴 시에 흙을 부삽 같은 것(전문용어로는 "스크레이퍼"라고 함.)으로 긁어내고, 유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브러쉬로 그 흙을 털어내는 걸 보면 우리 같은 남자들은 열통 터집니다.-_-(답답해서... 그냥 포크레인 같은 걸로 확 파헤쳐야 할 것 같은데...^^;)
어쨌건 이 작고, 아담한 박물관이 이 고고학 전공 선후배 두 사람의 꿈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을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옥당박물관의 내부(현재 공사 중)아래는 박물관 내부의 모습입니다. 아직 개관이 되기 전으로서 9월 17일(월)의 개관에 대비한 준비가 한창입니다.
- 여기는 박물관의 현관 로비입니다. 두 사람이 나가고 있는데, 실은 그쪽이 입구입니다. 아직 로비 벽은 썰렁합니다. 개관이 되면, 이 벽도 여러 자료로 채워질 예정이라 합니다.
- 로비에 붙은 관리실입니다. 책장이 모두 비어있는데 이 역시 아직 정비가 안 된 상황이어서 그렇습니다. 모든 게 임시로 놓여진 것이지요.
- 그 한 편에 보이는 게 뭔가 했습니다.
- 방범용 모니터 화면입니다.
역시 박물관이어서 많은 귀중한 수장품을 가지게 되고, 이를 보호해야하므로 이런 장치가 되어 있군요. 상당히 많은 방범용 카메라(16개)가 설치되어 있고, 그 화면들이 수시로 변경됩니다.
- 그러고 보니 건물 안팎 곳곳에는 이런 눈들이...-_-
아직 공사가 한창인 전시실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래의 전시실은 건물 밖에서 보아 왼편에 있는 전시실입니다.
현재 전시대를 들여놓는 중이고, 벽에는 시대별로 구분한 유물의 모습이 실크 스크린으로 만들어져 부착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그 앞에 전시대가 놓이게 되겠지요.
- 중간에 놓인 전시대는 임시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나중에 여길 방문하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토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할 자료들을 넣어두었다고 합니다.
- 이것들도 전시대로 쓸 물건인 듯합니다.
- 구석엔 이런 걸 만들어 놓았군요. 오래 전 서민들의 생활상을 간단히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인 듯합니다.
- Dr. Kosa의 기념촬영.^^
- 이건 경복궁에서 나온 것이라 하는데, 한옥 지붕의 맨 위에 수평으로 이뤄진 지붕마루인 용마루에 놓였던 연(煙)을 먹인 토기 장식물입니다.
- 이런 교육장도 있군요. 위에 빔 프로젝터가 달려있고, 거기서 정면 벽에 영상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아래 마루에 놓인 것은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든 의자이지요.
다음에는 건물 밖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한 전시실에 가 보았습니다. 아직 전시물이나 벽장식조차 안 된 휑한 모습입니다.
왼편 벽에는 여러 개의 둥근 모양의 전시대가 만들어져 있군요. 마치 둥근 창이 많은 선실(船室)에 들어간 느낌입니다.^^
- 전시실 끝에는 이런 무대 비슷한 것도 뵈는데 이건 뭔지?
아래는 다음 날 같은 전시실에 들렀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전날보다 조금 달라졌더군요.
전날 본 무대 같은 곳에는 그 지역(법성포) 출신 인사인 춤꾼 공옥진 여사에 관한 물품을 전시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패러디되었군요.^^
- 한 켠엔 원불교 교조 박중빈 선생 관련한 유물들이 전시될 예정인가 봅니다.
이곳에는 역시 이 지역의 역사 인물로서 임진왜란 시 일본에 잡혀가 조선학자의 기개와 학식을 뽐낸 수은 강항(睡隱 姜沆) 선생(1567~1618)을 기리는 섹션이 자리할 것입니다. 강항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이자, 왜(倭) 열도(列島) 성리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분으로서 영광에는 이 분을 추모, 배향한 내산서원이 건립되어 있기도 합니다.
융무당과 융문당, 그리고 융무당의 내부이제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융무당과 융문당의 모습을 자세히 보여드릴 차례입니다. 우선 옥당박물관 내에 위치한 융무당을...
- 아주 멋드러진 한옥입니다.
- 실제로는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꽤 크고, 당당해 보이는 건물입니다.
- 다양한 각도에서 보시라고...
내부는 아래와 같습니다. 나중에 옥당박물관을 찾는 분들을 위한 휴게소의 역할, 다실(茶室)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합니다. 아직, 당호(堂號)도 안 걸려있습니다.
- 아직은 조명 시설도 안 되어 있습니다. 한지를 이용한 큰 샹들리에가 중앙에 걸리게 되고, 주변에도 다른 조명 시설이 설치될 예정이라 합니다.
- 정말 튼튼해 보이는 건물입니다. 우리 조상님들이 역시...
아래는 영산 성지의 선학대학원 앞에 건립된 융문당입니다.
- 두 건물은 언뜻 보아서는 같은 것 같은데, 그래도 뭔가 분위기는 다르게 느껴지더군요.(이 사진과 바로 아래 사진은 집사람이 자기 카메라로 찍은 걸 빌려온 것입니다.)
- 융문당 부근에는 배롱나무도 있었지만, 능소화가 많이 피어있었습니다.
- 그리고 한 여름이라 융문당 앞의 밭에는 깨꽃이 한창입니다.
- 융문당 앞뜰은 현재로는 좀 썰렁한 상태이고...(뒤로 멀리 선학대학원의 일부가 보입니다.)
- 한옥은 정말 이렇게 있다가 날개를 펴고 날아갈 것 같지요?^^ 디워(D-War)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듯이... (현재로서는 관객 동원 수 면에서...) 디워가 싸워야할(^^) 헐리웃 발 트랜스포머(Transformer)에서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듯이...
아래는 해안선을 따라 길게 나 있는 백수해안도로 쪽이 아닌, 백수해안도로의 열부순절지 부근에서 옥당박물관 쪽으로 내륙의 논밭을 가로 질러 직결된 길(소위 “호치민 루트”)을 따라 되돌아오면서 망원 렌즈로 찍은 옥당박물관의 모습입니다.
깨밭, 콩밭, 그리고 논을 건너 멀리 융무당과 옥당박물관의 일부, 그리고 박물관 수장고가 보이고 있습니다.
아래는 위의 사진을 찍은 곳에서 좀 더 다가와 역시 망원으로 잡은 융무당과 옥당박물관입니다.
이것으로 옥당박물관 기행을 마칩니다. 앞으로 옥당박물관은 백수해안도로를 드라이브하시는 분들이 잠시 시간을 내어 들러보시는 Tourists' Attraction 중 하나가 될 것이라 생각되며, 아울러 영광/법성포 지역의 꼭 한 번 찾아야 할 곳 중 하나로 성장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이번에 의미있는 여름여행을 하고 돌아온 한 여자입니다.^^
- Dr. Kosa, 옥당박물관을 배경으로...
저희는 9월 17일에 맞춰서 9월 15일(토)에 다시 이곳에 가게 될 것입니다. 2박3일의 또다른, 역시 의미있는 여름 여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여행에서의 저의 역할은 운전 기사.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을 때 그 옆에는 파리4대학인 소르본느 출신의 재클린 케네디를 대동했었지요. 케네디의 연설문 시작은 "저는 소르본느를 졸업한 재클린을 수행하고 온 미국의 존 F. 케네디입니다."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참, 멋진 말이라 생각하면서 살아온 얘깁니다. 전 Dr. Kosa를 수행하고 영광에 가는 운전기사 Spark입니다.^^;
어떤 작은 꿈을 가지고, 그걸 오랜 세월에 걸쳐서 어떤 형태로든 이뤄내면 그게 사는 보람이라고 하겠지요.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