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스틸야드, 경기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소리가 경기장 가득히 울려 퍼지면 어디선가 조심스레 나타나 순식간에 상대의 날개를 흔들어 놓는 스마일 청년이 있다.
지난 17일 송라 클럽 하우스에서 스마일 청년 오범석, 그를 만났다. 수줍은 듯 머리에 매만지며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그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꾸벅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프로데뷔 4년차, 포항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더 나아가 국가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린 요즘. 그는 행복하다.
ⓒ2006 이솔희
프로데뷔 4년차
까까머리 소년 오범석이 프로에 데뷔한 해는 2003년. 포철공고를 갓 졸업하고 대학 입학이 아닌 프로행을 결정, 그는 포항에 입단했다. 데뷔 첫해 1경기 출전. 데뷔 경기로 만족해야하는 아쉬운 2003년이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다가올 기회를 잡기위한 노력의 한걸음을 옮겨갔다. 그러던 2004년 포항이 전기리그 우승을 거머쥐면서 자연스레 2군에서 훈련하던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항의 붙박이 수비수로 자리를 굳혀 나아갔다. 포지션은 달랐지만 그에게 포지션은 아무런 벽도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제가 원래 대학교 입학을 하려고 했어요. 저 고등학교 때 함께 계시던 김병수 선생님이 고려대로 가시게 된 거예요. 선생님 밑에서 운동하고 싶었기 때문에 입학 준비를 했죠. 그러던 중에 대학 입학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냥 일이 좀 꼬였어요. 그래서 대학이 아닌 프로행을 결정했죠. 포항으로 입단했고요. 그러던 와중에 또 어떻게 인연이 되었는지 김병수 선생님이 포항 2군 코치로 오신 거예요. 예정했던 장소와는 다른 만남이지만, 함께 하게 되어서 좋았어요. 제게 있어서 정말 큰 스승이시고, 한없이 좋은 분이시거든요.”
“(데뷔 경기에 대한 추억에 잠긴 오범석 선수) 아휴 참. 눈물납니다. 진짜. (웃음) 어차피 저도 처음 입단했을 때 바로 뛰겠다는 생각보단, 무조건 3년 안에는 주전이 되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었기 때문에 큰 욕심 부리지 않았어요. 조용히 이렇게 준비하다 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죠. 2군에서 배운다는 자세로 항상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데뷔 첫 경기를 치르게 됐죠. 아, 또 눈물나려고 하는데요? (웃음) 그때가 대구랑 경기였는데 한 10분 남았나? 잠깐 들어가서 뛰었죠. 그때 잠깐 뛰고 그 다음 쭈 ~ 욱 또 쉬고. (웃음)”
ⓒ2006 이솔희
“2004년에 운이 좋았어요. 팀이 전기리그 우승을 하게 되면서 기회가 왔죠. 제 원래 자리가 사이드 미드필더잖아요. 2004년에는 스리백에 스토퍼로 뛰었어요. 2004년에 출전한 경기 모두요. 모두들 지금의 제 모습이랑 함께 떠올려 보면 안 어울린다고들 하세요. (웃음)
전지훈련 가서도 계속 원래 포지션에서 뛰었어요. 스토퍼로 뛰게 된 계기가 컵대회를 2군 위주로 엔트리를 꾸린다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에 수비를 했던 선수들이 국가대표팀 차출이 되고 하다보니까 수비가 비었고, 자연스럽게 뛰게 된 거죠. 당시 같은 자리였던 민성이형이 참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때 이후로 수비력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수비를 처음해보니까 멋도 모르고 죽기 살기로 그냥 막 뛰었는데,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에 와서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선수들에게 있어 포지션 변동은 자칫 득이 되기보단 실이 되기가 쉽다. 자신과 맞지 않은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팀이 맞추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팀에 맞춰가는 자세. 오범석 그는, 스무살 풋풋함을 노련함으로 바꿔갔다.
2004년 오범석이라는 이름을 프로에 조금 더 알린 후, 그는 포항의 주전 선수로 발돋움했다.
2004년에는 자신의 포지션으로 출전하지 못했지만 2005년 중반부터, 그는 본인의 포지션에서 다시 한번 날아올랐다.
“사실 원래는 군대를 가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경기를 뛰게 되면서 군입대는 미뤄두게 됐어요. 팀에서도 원했고 저도 그랬으니까요. 계속 경기를 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주전이 되었어요. 제가 프로 입단하면서 저 스스로 약속한 게 있었거든요. 3년 안에 무조건 주전이 되자. 3년째 되던 해에 약속을 지키게 되서 너무 기뻤어요.”
포항의 측면 공격과 수비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그는 파괴력 있는 돌파와 돌파에 이어 팀 선수에게 찔러주는 날카로운 패스로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파괴력 있는 돌파가 매력 있다’며 말을 건넸다. 그런 그에게서 돌아오는 작고 수줍은 한마디.
“가끔씩. (웃음)”
사이드 미드필더 오범석
2005년부터 자신의 원래 자리에서 뛰게 된 그는 포항 공격의 물꼬를 틔어주는 중요한 해결사로 자리매김하며 팬들의 사랑의 눈길과 더불어 상대 선수의 날카로운 눈길을 받아야했다.
그렇게 한 해가 흘러 2006년이 된 지금, 그는 포항에서 절대적 마크가 필요한 1순위 선수로 이름나게 되었다.
“지난 대전과의 경기에서 정말 힘들었어요. 상대팀 수비수인 주승진형이 저를 밀착 마크 한거예요. 미드필드 지역인데도 좀 올라가려고 하면 다 파울로 끊고. 제가 생각을 못했어요. 저를 전담마크 할 사람은 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막아버리니까 답답하더라고요.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었으니까 전 그냥 ‘이분이 오늘 나에게 왜이러시는 걸까’ 이 정도였는데, 경기를 마치고 생각해보니 아니었던 거예요. 경기 마치고 아버지가 연락 하셔서 ‘이제는 상대방이 너를 밀착 마크한다. 방법을 찾아야한다.’며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이제 방법을 연구해야하나 싶고, ‘아, 이제 상대방이 나를 마크 하는구나’ 하면서 한편으로 기분 좋기도 했어요.”
“전담 마크한다는 사실을 바로 캐치했다면 방법을 찾았을 텐데. 90분 내내 ‘내가 하던 대로 하면 되겠다.’하고 생각하고 뛰었어요. 알았으면 플레이를 바로 바꿨을 텐데, 게임 끝나고 알았어요. 비책을 준비하고 있냐고요? 다른 건 없어요. 따라 붙는 선수들한테 할 수 있는 플레이는 다 똑같죠. 그리고 저만의 방법은 가르쳐 드리면 안 되죠. (웃음)”
포지션으로 보면 그는 굉장히 피곤한 자리이다. 수비와 공격모두 가볍게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나아가야 하기에 다른 선수들 보다 한 박자 더 빠르게 움직이는 그다. 공격의 시작, 수비의 시작에 항상 그가 있다. 벤치에서 전해지는 전달사항도 얼른 캐치해 내야하고, 상대의 전술을 금방금방 눈에 익혀야 한다. 매 경기 가지는 자신감만큼 부담감도 큰 그에게 절대 어두운 그늘은 찾을 수 없다.
“웃는 모습으로 뛰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요? 경기를 뛴다는 자체가 즐겁고 좋아요. 이 일이 저한테 가장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자리가 행복하고 즐거워요. 다른 제 또래 친구들이 취업은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잖아요. 저는 그렇게 보면 저와 잘 맞는 곳에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가장 즐기고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인정받으면서 그만큼 주어지는 것도 있고. 딱 맞는 것 같아요.”
귀여운 소년 오범석, 축구를 만나다
어느덧 청년의 패기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그에게도 지난 어린 시절 속 소년의 풋풋한 모습이 기억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다. 아버지가 선수 생활을 하셨고, 이어 감독생활을 하시면서 그는 자연스레 축구와 만났고, 또 인연을 맺었다.
꼬마 오범석이 소년 오범석으로 자라면서 그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났고, 그는 모르고 받은 상처를 스스로 노력이라는 연고로 치유해 나갔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했어요. 새벽에 아버지 운동나가실 때 가끔 따라 나가서 운동하고, 아버지가 감독이셨잖아요. 팀 전지훈련 가면 가서 합숙생활 함께 하고 그랬어요. 꼬마였어요. 초등학교 2 ~ 3학년 때니까 마냥 축구하면서 아버지가 가르치시는 형들하고 그렇게 지냈어요. 전지훈련 가면 연습경기 많이 하잖아요. 형들 경기하는 뒤에서 대기하는 형들이랑 공차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죠.”
“축구를 하면서 솔직히 그런 게 있었어요. 제가 학성중을 나왔거든요. 울산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함께 했던 친구들 모두 학성고에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저는 갈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학성고 감독이셨거든요. 다른 친구들처럼 학성고가면 좋죠. 그런데 만약에 제가 그 학교 입학해서 1학년 때부터 경기 뛰고 그러면 주위에서 말들이 많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포철공고에 입학하게 됐어요. 친구들이랑 떨어지게 되고, 집도 멀어지게 되서 섭섭하고 그립긴 했지만 입학하자마자 경기에 출전하게 되면서 제 능력에 대해 인식하고 자리 잡게 되어서 한편으로 좋았어요.”
“항상 주변의 시선이 ‘오세권 감독의 아들 오범석’이었어요. 그냥 ‘축구선수 오범석’으로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시선도 힘들었지만 아버지가 감독이셨기 때문에 보다 편하고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고 자랐다는 말들도 저한테는 힘든 일이었어요. 남들은 그런 세밀한 부분은 잘 모르잖아요. 아버지의 도움으로 제가 여기 이 자리에 섰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부분은 없거든요. 그런 시선들과 조금 어긋난 선입견들이 저한테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위축되게 하고 상처를 줬어요. 당시에 너무 힘들어서 그런 생각도 했어요. 아버지가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웃음)”
그에게 아버지가 가려주는 태양은 없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그냥 그렇게 비를 맞았고, 뜨거운 태양아래 그냥 그렇게 그 빛을 마음에 품었다. 어느덧 그 시절 아픔이었던 빛을, K-리그의 그라운드에 가득히 발산하는 그. 아픔의 시간은 이제 그만.
“지금은 힘들지 않아요. 이제는 어느 정도 제가 프로에서도 자리를 잡았고 대표팀도 다녀오고. 자만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보여 지는 것으로는 일단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제 진짜 모습을 보여주게 된 거잖아요. 힘들지 않아요. 스스로 만족하고 있고 이제는 오세권 감독의 아들이 아니라, ‘오범석의 아버지가 오세권 감독’이라고 단어들이 자리 교체를 했으니까요. 지나온 시간들에 감사해요. 그런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힘든 상황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은 듯 넘길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베어벡 감독의 부름을 받다
아버지를 통해 축구를 시작해 기쁜 일도 때론 힘든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에겐 노력에 상응하는 값진 결과가 함께했고, K-리그를 넘어 대표팀에 승선했다.
베어벡 감독의 부름을 받고 대표팀에 합류한 그. 본프레레 감독이 대표팀 감독이었던 지난해 LA전지훈련에서 첫 A매치 신고식을 치른 그는 이후 제대로 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며 잠시 주춤했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들에 항상 스스로를 비추어보는 그답게, 역시 담담히 대표팀에서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뽑힌 것은 좋은데, 아직 경기에 한번도 나가지를 못해서 아쉬워요. 꾸준하게 불러주시는데 뛰지를 못하니까, 저도 그 부분이 가장 아쉬워요. 못하니까, 못 뛰는 거겠죠? 잘하는 선수가 먼저 뛰는 것이 당연한 거잖아요. 주변에서는 포지션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도 하세요. 리그에서 제가 뛰고 있는 포지션에 워낙 네임밸류가 높은 분들이 많으셔서 기회가 오기 어렵죠. 뭐 그 선수들도 나이를 먹고 저도 나이를 먹으니까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요? (웃음) 자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지금 대표팀 가서는 수비를 맡고 있는데 어떠한 포지션도 좋아요. 어디든 뛰고 싶어요.”
ⓒ2006 이솔희
“겨울에 아시안 게임을 통해서 무언가 대표팀에서의 제 자리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어떻게 보면 그때가 가장 큰 찬스라고 볼 수 있겠죠. 얼마만큼 인정을 받고 눈도장을 받느냐에 따라서, 제가 잠깐이라도 출전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저는 아시안게임에서 딱 끝내고 싶어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따고, 쭈욱 국가대표팀으로 뛰고 싶어요. (웃음)”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성인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린 그. 청소년 대표팀에 처음 선발되어 대회를 준비했을 때 그는 주전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에게도 기회가 왔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나이답게, 그 기회를 절대 놓지 않았다.
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대표팀에서의 이러한 상황에도 조급해하지 않고, 다가올 기회를 기다리는 여유를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때도 정말 힘들었죠. (웃음) 진짜 그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이번에 대표팀 가서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행복한거죠. 기회가 오면 잡을 준비를 하면 되니까요. 미리 칼을 갈아놓아야죠. 빼기만 하면 되게.”
“청소년 대표팀 생활하면서 참 많이 느끼고 배웠던 것 같아요. 큰 대회도 출전해보고, 그 대회에서 실수를 해 주변의 질책도 많이 받아보고. (웃음) 왜 질책을 받았냐고요? 대회 나가서 한일전 경기를 하게 되었어요. 연장전까지 갔는데, 미끄러지면서 제가 수비 실수를 한거예요. 다들 다리에 경련이 나서 그런 줄 아시는데, 미끄러져서 실수를 했어요. (웃음) 그래서 한골 내어줬죠. 많이 속상했어요. 대표팀에서 돌아오니까 팀 선수들이 네가 한국축구 버려놨다느니 하면서 격려보단 질책을 아끼지 않던걸요? (웃음) 조금 의기소침 했었죠.”
이미지 쇄신, 해명의 기회를 갖다
대표팀에 선발되어 훈련을 하는 일주일 남짓의 시간 동안 그는 기자들 사이에서 입심 강한 선수로 불리며 연일 보도되는 기사마다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들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었다. 인터뷰 중에 잘못 전달되어 악성 리플에 고생했던 차두리 선수 사건과 근래에 방송되었던 모 프로그램에서 정돈되지 않은 방을 공개해 파장을 일으켰던 일에 대한 해명이 시작된다.
“대표팀 이야기하면 주위 모든 분들이 그러세요. 차두리 선수 이야기 뭐냐고. 정말 이 자리를 빌어서 해명하고 싶어요. 그날 제가 인터뷰 할 때 그렇게 말한 게 아니었어요. ‘그 형은 왜 온 거야’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형은 왜 그 자리로 옮겨 뛰게 된 건가’하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기사에 제 뜻과는 다르게 그렇게 났더라고요. 기사는 뭐 그렇게 넘길 수 있었는데 기사 밑에 달린 악플이. 아휴. ‘오범석 건방지다. 너 뭐냐’ 이렇게 달린 거예요. 조금 속상했어요.”
“아, 그리고 지난번에 제 방 공개 했었잖아요. 그것도 해명할게요. 아휴, 어쩌다 이미지가 정말. (웃음) 이거 정말 크게 써주세요. 제가 담낭염으로 일주일간 입원을 했었거든요. 퇴원해서 온 날 방송팀을 맞았어요. 그런데 제가 방 공개를 처음에 꺼려했어요. 왜냐하면 후배들이 제 방에 오락기가 있으니까 게임하러 오거든요. 저 없을 때도 와서 했나 봐요. 녀석들이 게임하고 그대로 두고, 와서 먹을 거 먹고 안 치운 거예요. 그런 상황에 어떻게 공개를 해요. 그래서 안 된다고 그랬는데 그냥 들어오신 거예요. 본의 아니게 방청소 안하고 사는 남자가 되어버렸어요. 저 깨끗하게 살아요. (웃음)”
정말 그는 깨끗이 방청소를 즐기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그럼 평소에 청소를 매일 꼬박꼬박 깨끗이 하느냐고. 그러나 그의 대답은 시원하지 못했다.
“음, 그게. 제가 놓여져 있는 물건은 건드리지 않아요. (웃음) 그냥 그 자리에 둬요. 내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제자리에 있잖아요. 먼지도 안 쌓여요. 청소도 꼬박꼬박하고, 빨래도 엄청 잘하죠. (웃음) 옷 정리도 잘하고, 가끔 이불도 빨아서 널고 그래요. (발로 꼭꼭 밟아서?) 세탁기 돌려야죠. (웃음)”
이 다음에 결혼하며 굉장히 사랑받는 남편이 될 것 같다는 말에 흐뭇해하던 그는 이어 결혼해서도 신부 많이 도와주라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귀여운 반론을 던졌다.
“아, 결혼해서는 안할 거예요. 아니 나 지금까지 만날 했는데 또 해요? 제가 한번 할 때도 있고, 신부도 할 때도 있고 그럼 되죠. (웃음)”
부상은 달나라 이야기
스포츠 신문 기사와 스포츠 방송에서 선수들의 부상 소식은 끊이지 않는 주 보도 내용이다.
그러나 오범석과 같은 선수만 있다면 아마도 선수들의 부상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프로로 데뷔해서 단 한번도 부상에 관한 이야기는 실린 적이 없다는 그.
장이 조금 좋지 않아 고생을 하지만 별다른 큰 부상은 한번도 없어 다른 선수들에 비해 튼튼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 대표팀 가기 전에 담낭염으로 일주일 동안 입원했었어요. 담낭염이 세균이 혈액을 타고 장이랑 쓸개에 들어와서 쓸개에 염증이 생기는 거래요. 그런데 어떻게 세균이 침투했는지는 모르겠고, 그래서 치료받기 위해 입원했죠. 제가 원래 장이 되게 안 좋아요. 그날도 아침에 밥을 먹고 난 뒤에 배가 갑자기 많이 아프더라고요. 자려고 누웠는데 잠도 안 오고, 너무 아파서 진짜 힘든 거예요. 저는 그냥 가스가 찬 줄 알고 탄산음료 먹고, 닥터선생님한테 가서 장 마사지 받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오후 훈련 나가서도 계속 아픈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들께 말씀드리고 병원 갔는데 입원해야 한데요. 그래서 입원했죠 뭐. 대표팀 가기 2주전이었죠. 퇴원해서 운동하고 인천 경기 뛰고 대표팀 갔죠. 또 재발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조심해야죠. 어떻게 조심해야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장도 괜찮고. (웃음)”
“저는 크게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니 없었어요. 그냥 축구선수니까 다리가 아픈 건 다들 똑같은 거고. 크게 다쳐서 경기를 쉬거나 그런 적은 없어요. 아, 청소년 대표팀 할 때 딱 한번 있구나. 병원 오진으로 대회에 출전하지 못한 적이 있어요. 굉장히 어이없었던 일. 아시아 대회 앞두고 있었을 때예요 그때가. 출국 전에 발목이 아파서 병원을 갔더니 뼈 조각이 신경을 누르고 있데요. 그래서 수술해야한다고 병원에서 그러는 거예요. 수술 결정을 하고 감독님하고 상의 끝에 팀에서 나왔어요. 수술하려고 서울 병원에 갔는데 뼈 조각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인대가 늘어난 건데 그걸 뼈 조각으로 본거예요. 지난 일이니까 웃으면서 이야기 하는 거지만 당시에 굉장히 속상했죠. 그냥 좀 쉬면 낫는 건데.”
어이없이 출전하지 못했던 대회가 아마도 그의 축구인생에 있어서 아쉬운 점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부상을 당하지 않는 것도 기술이라며 웃던 그의 모습. 앞으로도 부상 없이 행복한 축구인생을 펼쳐가길, 또한 그의 쓸개에 안녕을 빈다.
K-리그의 별이 되다
프로 데뷔 이후 팀의 큰 별들에 가려 K-리그 올스타전에 단 한번도 출전해보지 못했던 그.
그런 그가 데뷔 4년 만에 K-리그의 별이 되어 많은 팬들과 인천 문학에서 만남을 가졌었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레는 그 느낌 그대로, 그는 설렘과 기대감 속에 2006 K-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2006 이솔희
“굉장히 재밌었어요. 그런 자리에서 경기를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게 즐거웠고요, 세리머니 하는 것도 재밌었고. 일단 경기 자체에 부담이 크게 없으니까. 재밌었어요. 그날 원래는 전후반 모두 출전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또 장이 말썽을 부린 거예요. 배가 너무 아팠어요. 그날 아침에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들락날락 했는데, 전반전 내내 참고 뛰다 결국 후반에 교체를 부탁했죠.”
“(이)천수형, (정)경호형, (최)성국이형이 주축이 되어서 세리머니를 준비했어요. 저야 아직 이렇게 뭐 하자고 의견을 낼 수가 없는 레벨이기 때문에 (웃음) 처음인데 마냥 신기했어요. 4년 만에 처음 출전한 경기여서 더욱이 소감도 남달랐고, K-리그를 사랑해주시는 분들과 하나 될 수 있는 좋은 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승전보를 울려라
그에게 있어 축구란 뗄레야 떼어 낼 수 없는 존재이다. 축구를 시작한지도 어느새 10여년이 흘렀고 그 안에서 이만큼 자라났다. 수없이 경기를 치르고, 그것을 통해 삶을 배운 그.
그의 짧고 명확한 축구 철학을 들어보자.
“이기는 축구가 좋아요. 누가 지는 축구 좋아하겠어요. 이기는 축구가 가장 좋은 축구가 아닐까 해요. 경기 내용도 중요하지만 프로는 결과로 보답해야하는 것이니까요. 이기는 축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경기 내용도 좋아지지 않을까요? 이기기 위해서 더욱 전략적으로 연구해야하고 노력해야하니까요. 게임 지고 있을 때 어떤 생각 하냐고요? 1 : 0이나 2 : 0 정도면 ‘빨리 따라 잡아서 역전해야겠다.’ 싶은데 3 : 0 되면 ‘아, 짜증나’ 하죠. (웃음) 경기를 하다보면 되는 날이 있고, 안되는 날이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되면 답답하죠.”
올해는 득점이 많이 나는 게임을 두 번이나 했었다. 대구와 펼쳤던 4 : 4 스코어, 대전과 펼쳤던 5 : 4 스코어. 이기는 축구를 하는 그에게 이 스코어는 절대 낄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닐까?
“득점이 많이 나면 좋죠. 그런데 주고받는 건 너무 싫어요. 모든 선수들이 그럴 거예요. 관중들은 즐거울 것 같아요. 하지만 뛰는 선수 입장에선 답답하죠. 전 안전한 게 좋아요. 불안하잖아요. (웃음) 대구와 대전 경기 모두 전반전에 이기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반 끝나고 ‘이정도면 이기겠다.’ 했는데 그렇게 골을 먹을 줄이야. 방심이 화를 불렀죠.”
애교만점 막내아들이 아닌 든든한 막내아들
1남1녀 중 막내인 그는 위에 아리따운 미스코리아 누나가 있고, 날카로운 분석관인 어머니와 느티나무처럼 든든한 아버지가 계신다.
막내아들, 애교만점에 사랑스런 행동들로 가족들에게 귀염둥이로 불릴 것 같은 그이지만 사실은 다르다. 아버지가 계시지만 벌써부터 든든한 가족들의 쉼터가 되고 싶다는 그.
그는 이미 마음 속 따뜻한 자리에 가족들의 쉼터를 만들었다.
“애교가 전혀 없어요. 저희 부모님도 제가 예전부터 애교부리거나 그런 건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아요. 아버지가 계시지만 이만큼 키워주셨고 이젠 저도 성인이 되었잖아요. 아버지 말고는 남자가 저밖에 없으니까, 제가 이끌어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부모님한테 가끔 기대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지낼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구한테 힘들다고 기대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부모님한테도 쉽게 그렇게 기대지 않아요. 남들이 말하기를 저보고 대충대충 산다고 그래요. 너는 대충대충 사는데 왜 이렇게 잘하냐고 우스개 소리로 하시는데 나름 많이 노력하고 그래요.”
“어머니가 아버지랑 연애하실 때부터 축구를 보셨으니까 꽤 오랜 시간 축구를 보셨거든요. 경기 마치고 나면 항상 통화하는데 그날 경기 보시고 평가해주세요.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잘했는지 알려주세요. 이번 대전전에서도 수비에서 고생한 걸 보시고는 볼 처리 빨리빨리 못했다고 혼났어요. (웃음) 든든한 분석위원이세요. 아버지랑은 오히려 축구이야기는 많이 안하는 것 같아요. 터치하시지 않으세요. 가족만큼 행복한 말도 없잖아요. 너무 소중한 분들이세요.”
ⓒ2006 이솔희
“저 중˙고등학교 때 집에 가면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 많이 해주셨거든요. 누나가 그래서 만날 ‘왜 범석이만 오면 반찬이 좋아지는 거예요’하면서 볼멘소리도 했었어요. 아무래도 저를 중심으로 집이 돌아가는 편이라서 어떻게 보면 어릴 때 누나가 그랬던 게 충분히 이해가 가요. 누나가 결혼해서 이번에 아기 낳았거든요. 그런 모습 보면 시간이 참 많이 지났구나 해요. 저도 얼른 결혼하고 싶어요.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그죠? (웃음) 어느 정도 기반도 닦아야하고.(그래도 프로 4년차인데) 아직 멀었어요. 나중에 사업도 해야 하고, 아, 지금 투자를 어디다 해야 하나. 어디다 넣을까 싶어요. 주식은 안하는데, 음. (웃음) 돈 관리는 집에서 해요.(웃음)”
세계속의 한국 축구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해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국 선수들의 소식을 들으면 어느 누구 할것 없이 모두 어깨를 펴고 미소를 짓는다. K-리그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세계속의 오범석으로 자리 잡을 준비를 해야할 지금. 그는 어떠한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을까?
또한 고등학교 시절 브라질로 1년간 유학을 다녀온 이야기와 함께 한국 축구에 대해 짧은 이야기를 나눠보자.
“포르투갈어는 브라질에서 1년 동안 있었으니까 회화는 어느 정도 가능하고, 영어도 중학교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 까지 따로 배우고 공부했거든요. 주말에만 공부를 했어요. 저 나름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영표형이나 (설)기현이형 보면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요. 많이 부족하구나. 공부해야 하는데 독학은 힘들고, 그게 참 어렵더라고요.”
ⓒ2006 이솔희
“브라질 유학으로 처음 부모님하고 떨어져 지내게 됐어요. 처음 3개월은 마냥 신기하니까 좋았죠. 다음 6개월은 모든 게 적응되고 좋았고, 마지막 남은 3개월은 빨리 집에 가고 싶었죠. 가족들도 그립고 한국이 그리웠어요. 크게 한국과 다르지 않았어요. 가장 기본 적인 것들만 반복적으로 해요. 연습경기가 많다는 게 다르다면 다를까요? 한국의 학원축구는 아무래도 이겨야한다는 생각이 크기 때문에, 팀 적인 부분을 강조하게 되잖아요. 그런 부분이 개인적인 것을 만들어가는 그쪽과는 다르죠. 가르치는 부분은 한국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꼭 유학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며 축구보단 회화. (웃음) 한국도 요즘은 환경이 많이 좋아졌잖아요. 여기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축구의 발전방향이라 어려운데요? 사실 거기까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음, 많이들 일본축구와 한국축구를 비교하잖아요. 일본 축구가 관중들이 보기엔 굉장히 좋은 축구예요. 골도 많이 들어가고 오밀조밀한 플레이들이 많으니까 재밌고요. 그런데 일본 축구는 반대로 수비가 타이트한 맛이 없잖아요. 타이트하게 한국처럼 붙지 않기 때문에 공격수들에게 기회가 많아지고 골도 많이 터지게 되는 것 같아요. 일본축구 따라가기 위해 K-리그에서 수비를 느슨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웃음) 한국 축구도 많이 발전했다고 생각해요. 리그에서 골도 많이 나오고, 요즘 충분히 재미난 경기를 보여드리고 있지 않나 해요.”
앞으로의 포항, 그리고 오범석
이제 어느덧 2006 K-리그를 함께 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3월부터 달려온 리그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 마지막 마무리가 필요한 이 시점에 포항과 그 속의 그는 어떠한 꿈을 가지고 있을까?
“이제 7점정도 승점을 챙기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남은 경기가 4경기인데, 가까운 2경기가 경남과 대구거든요. 두 경기 이겨서 남은 두 경기 편하게 하고 싶어요. 말했듯이 안전한, 안전한 게 좋아요. (웃음) 무조건 플레이오프 진출할 거예요. 가야죠. 올라가서 좋은 경기 펼칠 수 있도록 준비할거예요.”
“제가 포항에서 우승해본 적이 없어요. 학창시절에도 우승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일단 플레이오프 진출해서 우승할 수 있도록 노력할거예요. 또 개인적으로는 아시안게임 나가서 꼭 금메달 딸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고, 대표팀에 선발되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터뷰 내내 오범석이라는 선수에게 받은 느낌은 솔직, 담백이었다. 숨기지 않는 솔직함에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까지 고루 갖춘 모습, 20대의 패기가 느껴졌다고 할까. 풋풋함을 넘어서 이제는 노련미를 물씬 풍겨낼 때가 왔다. 어떻게 보면 이 시간이 오범석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 될 것이다.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 주저할 것인가.
노력하겠다는 말엔 반문할 수 없다. 고로 항상 노력하는 오범석에게 반문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정한 것이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될 것이고, 그가 노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잡아야 할 무언가 이기에. 우리는 그에게 반문할 수 없다.
청년불패, 그에게 실패란 없다. 성공을 위한 자만도 없다. 다만 기회라는 참다운 순간에 당연한 듯 준비한 그의 능력만 보여줄 뿐이다. 놓치지 말라, 그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순간이 지금이다.
“노력하고 준비하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또 그럴 거라고 믿기 때문에 절대 주저하지 않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포항을 사랑해주시고, 저를 사랑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또 미안합니다. 더 나은 모습으로 항상 발전하는 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수줍어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경기장에서 함께 호흡해주세요. (웃음)”
K-리그 명예기자 이솔희
경기사진 출처 - 포항 스틸러스 홈페이지
첫댓글 명예기자분들이 하시는 인터뷰는 매번 재밌네요. ㅋ
미스코리아누나 ㅎㄷㄷ
개인적으로 오범석선수좋아하는데. ...... 파이팅!
오범석 화이팅!!
범짱 너무너무너무 좋아.........................................................................!!!!!!!!!!!!!!!!!!!!!!!!!!!!!!!!!!!!!!!!!!!!!
그래도 지금 방이 드러울꺼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재밌네요 인터뷰~ 오범석 선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선수기에 화이팅이지만 플옵우승은 말고 아시안게임 금메달만 따주셔요^^ㅎㅎ
오범석 아자!!!
주승진 ㅋㅋㅋ
하하 처남
닥터선생님이 모야 ㅋㅋㅋㅋㅋ
진짜 너무나 호감이네....................나랑 사귀자.................
귀여오증말
범석이 완전 멋있당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