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못 만났다면 은산철벽 향해 몸을 던져 보라”
서푼 어치도 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눈에 힘주지도 말고,
옛 선배들이 던진 영양가 없는 말들 앵무새처럼 읊지 말라.
찾고자 한다면 스스로가 그 경지에 이르는 수밖에 없다.
혹여 아직도 지금 세상에 도인도 선지식도 없다고 하는가?
우선 자신의 눈에 잔뜩 낀 눈곱부터 떼고 난 뒤 둘러보라!
➲ 강설
마음이 무언가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 대상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집착이다. 이미 집착한 것이니 괴로움의 나락에 떨어져 있는 셈이다. 마음이 어떤 틀에 갇힌 것은 아직 자유자재한 해탈의 경지가 아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고정된 관념인 상(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했다.
새로운 길을 제시할 힘이 없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다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자기 내면을 보라. 상황은 매순간 끝없이 변화고 있는데도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아 있는 언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자신의 지혜로 살아 있는 언어를 구사해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일깨울 수 있는 것이다.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종합하는 것이야 자신을 위해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사람들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선지식은 찰나에 눈앞의 사람이 해탈의 길에 있는지 속박의 길에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상대를 칭찬해서 지도할지 나무라서 인도할지를 가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면 천하의 그 누구도 그를 어쩔 수 없을 것이고, 그런 경지에 우뚝한 사람이라야 참다운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자, 이런 사람을 본적이 있는가?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면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향해 몸을 던져 보라.
연화봉암주(蓮花峰庵主) 송대(宋代) 초기 천태산(天台山) 연화봉(蓮花峰) 아래에 암자를 짓고 지낸 ‘상(祥)’이라는 선승(禪僧)을 가리킨다. 예전엔 스님의 법호 중 뒤의 한 글자를 지칭한 경우가 많아서 ‘상 선사(祥禪師)로만 알려져 있는데, 운문 문언 선사(雲門文偃禪師, 864~949)의 법제자인 금릉(金陵) 봉선사(奉先寺) 도심 선사(道深禪師)의 제자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공부하는 이들이 찾아오면 주장자를 잡고서 “옛사람은 여기 이르러 무엇 때문에 머물기를 즐겨하지 않았는가?”하고 묻기를 20년 동안을 계속했으나 그의 마음에 드는 답을 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 본칙 원문
擧 蓮花峰庵主 拈拄杖示衆云 古人到這裏 爲什麽不肯住 衆無語 自代云 爲他途路不得力 復云 畢竟如何 又自代云 楖栗橫擔不顧人 直入千峯萬峯去
주장(拄杖) 주장자. 선지식들이 법문할 때 즐겨 사용하는 지팡이. 본래면목(本來面目), 청정본성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함.
즐률(楖栗) 즐률나무는 주로 주장자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음. 여기서는 ‘주장자’라는 뜻임.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연화봉의 암주가 주장자를 집어 들어 대중에게 보이며 말했다.
“옛사람들은 여기에 이르러서 무엇 때문에 머물려고 하지 않았을까?”
대중이 답을 하지 않자, 자신이 후학들을 대신하여 말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지.”
다시 말했다.
“결국에는 어떻게 하는가?”
또 자신이 대중을 대신해 답했다.
“주장자를 둘러멘 채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천 봉 만 봉 그 속으로 들어간다네.”
➲ 강설
깨닫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목적지를 제시해 주어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마음을 낸다. 그래서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없는 자리를 제시했다. 그것을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하고, ‘청정한 본래의 성품’이라는 뜻으로 청정자성(淸淨自性)이라고도 하며, ‘본연의 모습인 변하지 않는 본성’이라는 뜻으로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도 한다.
옛 성현들이 객지에서 지친 모습으로 거지 노릇하는 사람에게 문전옥답이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라고 일깨워주는 것은, 고향집에 가서 낮잠이나 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러니 고향집에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모든 괴로움을 끝냈다는 생각을 하지는 말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고향집에 이른 사람은 타향살이의 괴로움도 훌훌 털어버려야 하지만, 그 ‘고향집’에도 연연하지 않는 법이다. 집이나 지키는 사람은 아직 ‘고향집’을 모르는 사람이다. 약간의 수행으로 조금 편안해졌다고 자만한다면, 늙어서 수행할 힘도 없을 때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포기도 하지 말고 자만도 하지 말라.
주장자 둘러메고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경허(鏡虛)선사께서는 <오도가(悟道歌)>의 처음과 끝에 ‘사고무인(四顧無人)이라 의발수전(衣鉢誰傳)고 의발수전(衣鉢誰傳)고 사고무인(四顧無人)이로다’ 즉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이니 법이니 하는 따위가 없는데 누가 가사와 발우를 전하고 전해 받는다는 헛소리를 하느냐!”고 일갈하셨다.
그럼 천 봉 만 봉 그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는 말은 무엇인가?
혹시 히말라야와 같은 첩첩 산중으로 숨는다고 생각했다면 그대는 지금 연화봉 암주를 오물 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이다.
연잎 위에서 노를 젓는 동자(성혈사 문). 이 친구 아직도 이러고 있구먼.
➲ 송 원문
眼裏塵沙耳裏土 千峯萬峯不肯住
落花流水太茫茫 剔起眉毛何處去
척기미모(剔起眉毛) 눈썹을 치켜뜸. 눈을 부릅뜨고 찾아봄.
➲ 송
눈 안엔 티끌모래, 귀 속엔 흙이여!
➲ 강설
설두 영감님은 연화봉 암주의 경지를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눈을 반짝이고 귀를 세우는 일이야 누구나 하지만, 눈과 귀에 티끌모래와 흙이 가득한 듯 바보와 같이 된 그 경지로 나아가기가 힘든 것이다. 서푼 어치도 되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눈에 힘주지도 말고, 옛 선배들이 던져 놓은 영양가 없는 말들 앵무새처럼 읊조리지도 말라.
➲ 송
천 봉 만 봉에도 머물길 즐겨 않네.
➲ 강설
암주의 마지막 말을 오해할까 염려하여 설두노인은 다시 한 번 뒤집어 보였다. 암주는 결코 천 봉 만 봉에 머물려 한 것이 아니다. 봉우리라는 말에 놀아나지 말라. 그럼 도대체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 송
지는 꽃 흐르는 물 너무나 아득해라
눈 부릅뜨고 찾아도 사라져 버렸네.
➲ 강설
연화봉 암주는 이미 분분하게 떨어지는 꽃잎이 되고 도도히 흘러가는 물이 되어 아득할 뿐이다. 그러니 설사 눈을 부릅뜨고 찾으려 해도 그는 더 이상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찾고자 한다면 스스로가 그 경지에 이르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혹여 아직도 지금 세상에는 도인도 선지식도 없다고 헛소리하고 있는가? 우선 자신의 눈에 잔뜩 낀 눈곱부터 떼고 난 뒤에 둘러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