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5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14,27-31ㄱ)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it to you.
Do not let your
hearts be troubled or
afraid
말씀의 초대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바오로를 박해하던 이들은 리스트라까지 찾아와 그에게 돌을 던진다. 바오로는 죽은 사람처럼 도시 밖에 버려졌으나,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의 힘을 북돋아 준다. 그 뒤 그는 선교 여행의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이루어 주신 일을
전한다(제1독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남겨 주시는데,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겪게 되신다 하더라도 평화를 선물로 받은 제자들은 이를 기억하면서 결코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아버지의 명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비 신자들의 입교
동기 일 순위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오늘 복음을 읽어 드리면 예비 신자 교리반 등록을 취소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평화는 긍정적인 가치입니다. 늘 “평화를 빕니다!”(‘샬롬’)라는 말로 서로 인사하던 성경의 인물들에게도, 예수님께도,
평화는 갈구하는 대상이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간다고 말씀하시지만,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신 분(마태 10,34 참조)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옳아
보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오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드시고 나서 하신 ‘고별사’(13―17장)에 속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잡혀가시겠지만(18장), 그래도 제자들은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가고 채찍질하고 죽일지라도 세상은 예수님께 결정적으로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세상이 예수님을 지배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아버지의 뜻대로 스스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원하여 아버지께 가시는
것을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스승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평화를 지닐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당신의 평화를 주고 가시며, 어제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보호자시며
우리에게 당신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실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그야말로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바오로 사도도 의식을 되찾고 데르베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을 거쳐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제자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박해를 받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삼던 사도들은 이렇게 죽을 위험을 넘기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 진정한 평화 덕분이었습니다.
일본의 미야기현
유리아게 마을의 주민 수는 5,600여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 대지진과 쓰나미로 자그마치 700여명이나 사망하는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의 일을 다시 되돌아보던 중에 지진과 쓰나미 사이에는 70여분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70분이면 충분히 대피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사실 지진을
대비하는데 있어서는 세계 최고라는 일본이 아닙니까? 그런데 70여분이라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마을의 주민들이 대피하지 못하고 그렇게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행동을 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대피하기보다는
지진으로 이해 부서진 텔레비전 다리를 고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이해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역시 주님께서 원하는
중요한 일을 하기보다는, 주님께서 보시기에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지난 달, 엄청난
사상자를 낸 네팔의 대지진을 보면서 자연 앞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문제들이 궁극적인 미래 안에서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사회에서 크게 이슈화되는 문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불경기, 왕따,
저출산, 노인문제 등등……. 죽음을 앞둔 이들에게는 이런 심각하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이 하찮은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죽음을
앞두고도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고 있다면 “이 한심한 사람아~~~”라면서 혀를 찰 수밖에 없겠지요.
우리에게 있어 가장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과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인 것일까요? 그것들이 과연 죽음 앞에서도 꽉 움켜잡아야 하는
것들일까요? 분명히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평화는
세속적인 것들에 쉽게 영향을 받게 됩니다. 순간의 만족만을 가져다 줄 뿐, 걱정과 의심으로 곧 괴로워하게 만드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마음의 평온 뿐 아니라, 영혼의 평화로움까지 가져다주는 참된 평화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평화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이 세상의 평화에 연연해서 참된 행복의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가장 궁극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면서
평화를 이루라는 주님께 철저히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이 평화를 가진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게 될 것이며, 이 사랑의 힘으로 이 세상을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열린다. 사랑과 두려움의 갈림길이. 두려움은 우리를 유혹하지만 사랑은 그저 기다릴 뿐이다(현병호).
어린이날에...
이달 초
방정환재단에서 OECD 행복지수 국제비교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이 연구는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총 7,53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더군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는 대한민국 청소년 5명 중에서 1명꼴로 자살충동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들까지도
14.3%나 자살충동을 느꼈답니다. 그러다보니 행복지수도 높아질 수가 없지요. OECD 23개 국가 평균 이하에 머물었습니다.
자살충동의
제1원인은 무엇일까요?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되는 왕따 문제, 학업 문제일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은 ‘부모와의
갈등’(44%)이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니, 부정적인 말과 마음이 일상생활 안에서 사라지지 않지요. 하긴 어느 방송을 보니 청소년들이 1분 24초마다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욕은 완전히 습관화되어 옆에 어른이 있어도 거리낌 없이 나오더군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공부 1등을 하고, 돈 많이 벌고, 좋은 직장을 다닌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일반 사람들보다
못하다고 해도, 낙천적이고 유쾌하게 살며 또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의 행복도는 아주 높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라고 말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 민주시민으로서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는 것을 고취하기 위해 만든
기념일이지요. 이 어린이날에 값비싼 선물 하나 주었다고, 또 어디로 하루 놀러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요?
마음먹기 나름의
평화이기에
-이기정신부-
7살 아이가
‘평화가 뭐예요?’라고 묻는데 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급한 대로 전쟁의 반대말로 싸움 안하고 나쁜 일 없는 거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평화를
어른들은 저마다 다르게 느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 있고 병 없고
주변이 다 나를 위해주면 평화롭다 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 평화로워야 나도 평화로울 수 있다는 지식인들도 있을 겁니다. 마음먹기 나름의
평화이기에 참 평화를 얻으려고 주님말씀 경청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환난을 당해야만
한다는 사실 >
-전삼용신부-
러시아
붉은 혁명이 일어나 직후 소련에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목숨을 건 모험일 만큼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적은 무리가 비밀리에 모여 조심스럽게 미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몇 십 명의 교인들이 지하에 숨어서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손에 기관총을 든 소련군인 몇 명이 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왔습니다.
“꼼짝하지
마라.
이
자리에서 너희를 즉결 처분하겠다.
그러나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이제라도
예수를 배반할 사람은 즉시 나오라.”
그러자
벌벌 떨던 몇 사람이 일어나 걸어 나왔습니다.
군인들이
그들의 등을 떠밀며 “어서
빨리 이곳을 나가라.
만일
여기에서 어물거리면 너희도 죽여 버리겠다.”라고
소리치자 그들은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더 살고 싶은 놈은 어서 나오라는 군인들의 소리에도 대다수의 교인들은 창백해진 채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은 지하의 문을 닫고 쇠고랑을 채운 후 모두 총을 내던지고 교인들을 얼싸안고 외쳤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혹여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가짜 교인이 있을까봐 일부로 총을 들고 행패를 부린 것입니다.
많이
놀라셨죠?
용서하십시오.
이제
그들은 모두 도망쳤고 들킬 염려가 없으니 어서 미사를 드립시다.”
고통은
단련하고 구별하는 역할을 합니다.
믿음
또한 이 시련 속에서 단련되고 정화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 또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시련 속에서 더욱 완전해 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에 시련은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온 유다인들이 군중을 설득하여 바오로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바오로는
두 번 돌에 맞아 죽을 뻔 했는데 이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바오로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돌아갔지만 바오로는 다시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도시로 다시 들어갑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가
중요합니다.
그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바오로의 이 말이 잘 설명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환난이
닥쳐오면 주님을 믿는데 왜 고통을 받아야하느냐고 원망을 쏟아냅니다.
주님을
믿으면 수난을 당해야 당연한 것인데도 그것은 그리스도만으로 끝난다고 여깁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이 세상의 안녕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야
바오로처럼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믿으려고 하는 이들에게 바오로가 한 말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이 세상의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와도 금방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교회를
다녀서 환난을 당한다고 믿고는 복을 주는 다른 종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환난을 많이 겪어야 한다고 말했고 자신도 얼마나 큰 환난을 당했는지 직접 쓰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상처가 유일하게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 됩니다.
환난을
각오하고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복음을
위해 싸우다 우리 몸에 상처를 지닐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를 지녀야겠습니다.
평화의
근원
-반영억신부-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전쟁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를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자기 국가의 안위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방비를 증가 시킵니다. 평화를 갈망하면서도 평화를 방해하는 물리적인 환경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먼저 마음의 평온가운데 머물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에게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주체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요한14,27). 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은 바로 평화가 ‘밖’으로부터 오는 평화가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평화입니다. “평화는
누가 거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력해서 만드는 것입니다." 아니 만들기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참으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평온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20).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시지만 제자들이나 우리가 곧장 평화를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먼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것입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만큼 내 자신이 맑아져야 하고 고요해져야 한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화를 누리지
못합니다”(아우구스티노).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황금
인생
-예수닮기,
예수살기-
-이수철신부-
우리
믿는 이들은 예외 없이 하느님의 자녀들이자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닮기'와
'예수 살기'에 충실할 때 비로소 황금 인생입니다.
한
지인이 보내준 카톡 내용에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황금인생을
만드는 다섯가지 부(富)'라는 제하에
'돈,
시간, 친구, 취미, 건강' 다섯가지 조건을 들고 있었습니다.
과연
돈, 시간, 친구, 취미, 건강이 전부일까요?
너무
육적이요 현세적이요 이기적입니다.
현대인들의
사고를 반영합니다.
자격증
시대입니다.
마침
어느 신자가 놓고 간 팜프렛의 내용도 흥미로웠습니다.
'당신도
웃음건강치료사와 건강박수치료사가 될 수 있습니다!!!'라는 제하에
2개
자격증을 동시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건강이 위협 받고 있는 세상인지 깨닫습니다.
단연
육신은 물론 정신의 '건강'이 화두가 된, 우상이 된 세상입니다.
가장
중요한 '하느님, 이웃, 기도, 눈' 넷이 빠졌습니다.
종교관,
인생관, 사생관, 가치관, 세상관 등 보는 눈이 빠졌고
무엇보다
우선 순위에 둬야 할 하느님과 이웃이,
그리고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통째로 빠졌습니다.
너무
협소하고 편협한 시야입니다.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과 이웃사랑의 이중계명이 빠졌습니다.
내
중심이, 돈 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 이웃 중심의 삶을 살라는 역설적 가르침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위의 '황금 인생을 만드는 부'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사상누각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주인공인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삶을 보면
얼마나
하느님 중심의 치열한 삶인지 드러납니다.
돈,
시간, 친구, 취미, 건강 같은 세속적 가치는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완전히
하느님의 도구가 된 삶입니다.
돌을
던져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내다 버렸는데
제자들이
둘러싸자 일어나 도시 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바오로입니다.
두
사도는 가는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합니다.
마침내
선교 여행의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해주신 모든 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님의
참 제자들인 바르나바와 바오로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황금인생을 만드는 단 하나의 조건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뿐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절대적 가치라면
'돈,
시간, 친구, 취미, 건강'은 세속의 상대적 가치들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세상을 떠나기에 앞선 고별사에서는 물론
부활하신후
제자들에게 주신 참 좋은 선물이 평화입니다.
두
사도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전력투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주님 주신 평화의 선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의 첫구절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중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의 처방전으로
이
구절(요한14,27)이 있는 공동번역 성경 페이지는 누렇게 바랬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행복하고 부요한 내적 삶임을 깨닫습니다.
정말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하다면 아쉬움도 부러움도 두려움도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평화를 선물하시어 행복한 황금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조재형신부-
오늘은 어린이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허락하셨고,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손자병법에 어떤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왕 싸웠으면
반드시 이기는 사람이 승리자라고 말을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자는 싸움에 이르지 않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논리와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상대방의 무장을 해제하는 길은 순수함과 사랑입니다.
솔직하게 모르는
것이 참 많습니다.
하늘의 별을 어떻게
다 셀 수 있을 까요?
바닷가의 모래알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 알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을까요?
어릴 때 부르던
성가를 기억합니다.
이만큼 무수히
성체를 찬송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성체의 신비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바다의
모래알만큼이나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날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은
계산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묻지도 말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이웃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어린
날,
가족들이 함께
찍었던 사진들을 봅니다.
형들과 함께
풀밭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마도 장마철인지
형들은 고무장화를 신었고,
저는 아직
어려서인지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여동생과 함께
찍었던 사진도 생각납니다.
둘이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집에서
기르던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참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성사론,
삼위일체론,
신론,
그리스도론,
마리아론,
윤리신학,
교회법,
인식론,
형이상학,
심리학,
동양철학,
신약,
구약,
교회사,
교리
교수법,
설교학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믹서에 넣고 갈아버리면 딱 한잔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 한잔의 이름은
‘사랑’이
아닐까요?
오늘은 저의 부친
조 바오로께서 하느님 품으로 가신 날입니다.
너무나 부족한
자식들이 혹시라도 아버님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셔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날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어린이
날’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도 자식들을 위해서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른 평화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랜 경험으로
익숙해진 편안함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자리가
보장되고,
수고의 열매를
받아먹는 안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비워내고,
하느님의 것을
채우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고 또 다시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것들을 비워내는 평화를 알았습니다.
친숙하고 편안한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곳을 향해 나가는 그런 평화를 알았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것이며
풍요로운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비우고,
겸손하며,
기꺼이 삶의 거름이
되는 것을 감수하는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오상선신부-
오늘은
어린이날입니다. 모든 아이들이
예외없이 사랑과 축하를
받는 기쁜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이 가장 큰
선물일까요? 아이들이
갖고싶어하는 모든 것을 해주면
좋아할테죠. 하지만 우리가
아이들에게 진정 물려주어야 할
것은 평화로운 세상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선물은 남겨두고
가십니다. 그게 돈도 아니고
장수도 아닙니다. 평화는 그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가치입니다.
우리도
어린이날에 우리 후손을 위해
물려 줄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평화임을
잊지맙시다.
오늘 내가 거쳐
지나간 곳엔 평화가 남겨지도록
합시다. 평화를 남겨두는
사람은
참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참된 평화
-기경호신부-
“모든 종교는
평화를 추구한다. 우리도 각자 평화를 갈망한다. 누구든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새로운 힘이 솟아남을 체험한다. 그러나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갖는 예루살렘이 평화와는 거리가 먼 전쟁의 긴장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은 인간의 실존 상황을 대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14,27)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남기고 가신 평화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그분 안에 머무는 삶을 항구하게 살아갈 때 체험되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세상은 예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알지도 가지지도 못한다. 평화란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께서 세우신 질서가 지켜질 때 거기서 생기는 평온함과 고요함, 그리고 조화이다. 반대로
하느님의 질서가 파괴될 때 불목과 불안,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하느님의 질서란 하느님의 뜻, 곧 사랑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사랑의 열매이다. 현세의 평화는 이웃에게 대한 사랑의 결과이며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상이며 결실이다. 형제들끼리
평화를 이루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랑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참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치하여 평화를 찾아 건설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 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한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이다.
평화는 또 사랑의
어머니, 화목의 유대, 그리고 원하는 것을 다 청할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의 확실한 증거이다. 평화와 화목은 사랑을 낳고 자라게 해 준다. 우리가
평화를 간직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협력해서 모든 이기심을 극복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가난한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우리는 소유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위해서 아무 것도 원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이나 희생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비방을 받아도, 마음의 상처를 받거나 질책을 받아도 평화를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온갖 이기심과 욕심을 버려야 할뿐만 아니라 가난과 겸손 속에서 모든 고통과 모욕을 감수,
인내하신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매일매일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만을 따라야 한다. 겸손한 사람은 결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오직
하느님과 자신을 비교할 뿐이다. 그는 열등감이나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 보다 가장 낮은 자라고 여기는 겸손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다. 자신이 평화 중에 있을 때 남에게도 평화를 줄 수가 있다.
평화 중에 머무는
이는 남을 의심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만족할 줄을 모르고 항상 불안한 사람은 수없이 의심이 일어나 번민하고, 결국에는 자신도 편치 않고, 남도
불편하게 한다. 평화 가운데 사는 이는 남의 잘못을 살피고 남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보다는 먼저 자신을 살피고 자신에 대에 하느님
앞에 두려워한다. 이런 이는 자기변명이나 핑계대기에 더디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이웃의 잘못을 덮어주고, 침묵 중에도 모든 것을
되돌려드리게 될 때 평화가 찾아옴을 안다.
자신을 먼저 책하는
사람은 어떤 불편이건, 손해건, 모욕이건, 어떤 괴로운 일이건 자기에게 닥칠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그런 것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 때문에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신의 평화를 깨뜨렸다고 말하는 이가 있으나, 사실은 다른 이의 말은 단지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던 격정을 드러나게 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체험하고 살아가는 이 모든 평화가 ‘평화’ 자체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예수님으로부터 참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세상에서 희망의 표징이 되어야 한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14,27)
-이영근수사-
주님!
오늘
하루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못
박히고
창에 찔리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해서가 아니라,
차지하고 채워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는
까닭에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한상우신부-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여전히 있는 그대로가 소중한
어린이들의 날입니다.
단순함과 순수함을 배우는
날입니다.
고요와 평화가 간절히 필요한 우리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평화는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드러났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력은 억압과
파괴로 거짓을 일삼지만 주님의 평화는 쓰러진 이를
다시 일으키는 사랑의 기쁨과 생명의 경이로움으로 넘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십자가와 직접 마주치는 피흘림의 평화입니다.
밀알이 되는 평화이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평화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평화는 우리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평화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평화는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우리를 빛으로 나오게
합니다.
분열을 일치로 이끄는 것은 평화를
통한 참된 존중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파괴되고 오염된 우리의 삶을 순수한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인간이라는 진정한
가치를 일깨워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게 고유성을
인정하는 십자가와 함께 평화로 오십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주님의 방식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화의
본질은 저마다의 십자가에서 평화를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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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