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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
요 14:25-31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요 14:25-31 /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많은 것을 너희에게 당부하였다. 26) 이제 아버지께서 내 대신에 보내실 돕는 자이신 성령이 오시면 또다시 많은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또다시 일깨워 주실 것이다. 27)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 나는 너희 마음에 평안을 남기고 간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르다. 그러니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28)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라. 나는 떠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너희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지금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하신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다. 29) 내가 미리 너희에게 이렇게 일러두는 것은 이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30) 너희와 이야기할 시간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 세상의 악한 통치자가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지배할 능력이 없다. 31) 다만 나는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이룸으로써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라. 가자!
예수께서 떠나신 후 그 자리를 보혜사 성령이 대신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고,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이 갖는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보혜사 성령(25-27)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신 분이십니다. 성령의 역할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역할의 연장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가르치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대로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깃들게 하셔서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 평안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것은 갈등이나 고통, 두려운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하면서 예수 안에서 이것을 목격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갖는 신령한 평안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표지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8-29) 예수께서 잠시 떠나시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완성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예수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둘째, 예수께서는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신 예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승리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이 비밀을 알고 있다면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잠깐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그 이후에 있을 비밀을 알고 있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미리 말씀하신 것은 앞으로의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은 이 모든 일들을 경험할 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기를 떠나자(30-31)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제 그 길을 가십니다. 그 길을 가는데 이 세상의 임금이 예수께 관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께서 세상이 알길 원하시는 것은 이 모든 일들을 아버지를 사랑하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는데 있습니다. 이는 모든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신앙의 길로 사랑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의 길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현재의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잠시 잠깐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얻길 원하신다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인도하심이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 설 교 >
평안이라는 축복
요 14:25-28 / 최인근 목사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도 더욱 의미심장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입니다. 이 말씀 또한 위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환난을 당하는 줄 다 아시면서도 담대하라고 권면하시며 평안을 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분명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그 무엇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그리고 그 평안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오묘한 진리를 묵상하면서 짧은 인생 여정에 평안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비밀과 축복을 배워보려고 합니다.
평안이라는 축복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다 축복을 사모하고 또한 기대합니다. 하지만 삶의 현실에서 그와 같은 축복을 누리며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만나보기는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가시적으로 누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무슨 축복을 받아야 제대로 된 축복을 누린다고 할 수가 있을까요? 오랜 목회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보니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바로 “평안”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평안할 수만 있다면 그 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평안은 모든 축복을 다 합한 종합적인 축복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평안보다 더 큰 축복이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명예를 누리고 있다 해도 마음에 평안이 없다면 그것 또한 진정한 축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공동 창업자인 폴 앨런은 그 재산이 16조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재발 된 암과의 투쟁에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있습니다. 그에게 지금 최고로 필요로 하는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닐 것입니다. 오로지 암에서 해방 되고 건강을 회복 받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래저래 따져보면 최고 최대의 축복은 바로 평안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와 같은 소중한 축복 중의 축복인 평안에 대해 공부하면서 우리들의 삶에 이와 같은 평안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기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도 소중한 평안의 축복을 어떻게 해야 누릴 수가 있겠는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성경의 진리를 통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마음 귀를 기울이고 그 소중한 축복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그렇게도 소중한 평안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평안을 원하지만 평안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이 그만큼 살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살벌한 세상에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기가 마음이 아파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위로하고 또한 소망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요 14:1-3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며 곱씹어 보십시오. 참으로 위로가 되고 소망이 넘치는 그런 귀한 명언으로 가슴에 감동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보다 우리들의 형편을 더 잘 아는 분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을 그만큼 잘 아시기 때문에 이처럼 조용하면서도 강하고 간단하면서도 엄청난 위로가 되는 이런 말씀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주셨을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평생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살았던 모세도, 초대 이스라엘의 3대 족장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갔던 야곱도 인생을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 것으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시 90:10 /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창 47:9 /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어찌 이것이 모세와 야곱만의 인생이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이처럼 험악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평안이라는 축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평안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요? 참으로 다행하게도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제공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그 소중한 말씀을 우리 입으로 시인해 보고 보다 더 구체적인 진리의 말씀을 경청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14:27-28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여기에서 우리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이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안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나의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안은 우리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소중한 평안의 축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주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그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주고받는 사랑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화란의 코리텐붐 여사는 나치 수용소에서 생지옥을 사는 동안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체험을 하고 해방 후 그 주님을 따라 지구를 돌며 전도하는 분이십니다. 그가 성경을 두 트렁크에 잔뜩 담아 가지고 소련에 입국하는데, 세관에서 발견되면 몰수 되는 것은 물론이고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세관원들의 눈을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믿고 기도하며 통관 수속을 하고 있었습니다. 맨 뒷줄에서 기도만 하고 있는데 드디어 자기 차례가 다가 왔습니다. 그 트렁크들의 주위가 갑자가 눈이 부시게 빛이 나더니 세관원이, "이것이 할머니 짐이요 꽤 무겁군요. 내가 좀 들어다 드리지요."하면서 열어보지도 않고 택시 타는 데까지 들어다 주었습니다. 천사가 그 짐을 이렇게도 무사히 통관시켰던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간증거리가 조금도 이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은 평안의 영이요 그와 같은 주님의 영은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에게 임재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이와 같은 평안의 은총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지난 번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강도 7.5의 지진과 쓰나미로 확인 된 사망자만 2천 명이 넘고 실종된 사람들은 실제로는 얼마인지 집계조차 되지 못하고 한 마을에서만 5천 명 이상이 매몰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단 인도네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 필리핀, 일본 등에서 들려오는 각종 재난의 소식을 하루가 멀다 하고 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난의 현장들은 공통된 것이 하나 있는데 사신 우상을 섬기거나 하나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떠난 평안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心志(심지)가 견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심지가 견고한 사람에게는 평강으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심지가 견고하다는 말은 흔들림이나 변덕이 없는 덕을 말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 예수님을 의지하는 성도들은 이처럼 작은 일과 유익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심지가 견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 26:3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그렇습니다. 평안이라는 축복은 간사하고 촐랑대고 변화무상한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의지하고 바라는 그런 영적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별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군 다윗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시 37:4-6 /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9 /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백 번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엔간해서는 흔들림이 없는 그런 무게가 있고 믿음이 있는 성도들이 될 때 그와 같은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시고 평안으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조급하고 촐랑대며 변화가 무상한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십니다.
잠 14:29 /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잠 21:5 / 부지런한 자의 경영은 풍부함에 이를 것이나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
잠 29:20 / 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늘 말씀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께서 조급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묵직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리고 기대하는 그런 성도들을 좋아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하나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인생들처럼 작은 호수의 물결처럼 가볍게 촐랑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번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실 만큼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그의 나이가 늙어 100살이 되어 더 이상의 소망이 없을 때도 하나님은 기적으로 아들을 주셨고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시고 무려 600년이 지났을 때에도 또한 그 약속을 이루시고 예수님을 보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기도 한 번 하고 1년도 지나기 전에 응답이 안 된다고 포기하고 만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총은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도 하나를 하더라고 길이 참고 묵묵히 믿고 기다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약 1:5-8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조급하고 무게가 없는 사람들은 평안의 축복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며 인내하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평안으로 복을 주시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복을 받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을 늘 경험하게 됩니다. 도서관에서 제대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한 번 책상 앞에 앉으면 몇 시간이 지나도록 움직이지도 않고 묵묵히 앉아서 공부에 열중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성도들은 한 번 앉으면 움직이지도 않고 석고상처럼 그 자리에 앉아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합니다. 교회도 한 번 내 교회라고 정하면 거기에서 장례를 치를 때까지 묵묵히 섬깁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이 보아도 복스럽고 믿음직스럽고 뭔가 미래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가 갑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하나님께 복을 받고 평안을 누리며 땅에서도 천국을 맛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탠리 죤스 박사의 간증에 의하면 죤스는 이런 경험을 어렸을 때에 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배당에서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설교자가 갑자기 죤스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무릇 나를 따르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대적하는 자”라고 외쳤습니다. 죤스는 순간 가슴이 뜨끔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편은 아니었지만 예수님과 원수가 되기는 싫었기 때문에 곁에 앉았던 친구에게 “지금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자”고 하였습니다. 그 후 죤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그 세월이 3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몹시 기운이 없었습니다. 그는 죤스에게 “너는 길을 잘 택하였다. 나도 지금이라도 너와 같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죤스는 “물론 좋다. 그러나 30년 전에 그 결심을 하였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견고한 결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으로 행운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래서 죽음이 눈앞에 다가 올수록 그와 같은 결단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제발 흔들리지 마십시오. 제발 뒷걸음질 하지 마십시오. 더욱 더 자신을 채찍질 하여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이 아름다운 길을 굳굳하게 견지해 나가십시오. 마지막 날에 이 보다 더 귀한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가장 평안하고 행복한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들을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고전 15:58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믿음과 신념으로 하나님을 섬기되 끝까지 섬기는 심지가 견고한 심령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심지가 견고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끈기 있게 충성하는 성도들은 참으로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우리 교회의 성도님들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20-30년을 한결 같이 섬기는 귀한 종들은 감기라도 들지 않고 오랜 세월을 평안하게 살아가고들 있지 않습니까? 이렇듯 심지가 견고한 자는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평안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마침내 우리 모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그 어떤 환난과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극복하게 되니 결국은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평강의 축복을 주시고 그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담대하게 일어설 것을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믿음만이 목숨을 위협하는 악당들을 극복하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요 16: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20:19 /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어떻게 환난을 당하고 있는데 담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잡아 죽이려고 악한 자들이 두루 다니며 찾고 있는데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 믿음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무엇이 믿음입니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라는 것이 우리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굳굳하게 서서 이겨나갈 때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놀라운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눅 1:78-79 /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요 14:1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모두가 다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요 그렇게 믿음이 있으면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평강으로 인도해 주시겠다는 축복의 약속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1873년 필라델피아에서 국제회의가 열려 많은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 회의가 끝나자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뉴욕 항에서 출발하는 블란서 여객선 “바르 두 아베르”호를 타려고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1873년 11월 15일 예정대로 그 여객선은 뉴욕 항을 출발하여 블란서를 향하여 순항하고 있었습니다. 그 배에는 우리 찬송가 413장을 쓴 Horatio Gates Spafford의 부인과 네 딸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Spafford는 시카고에서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함께 동승하지 못했습니다. Spafford씨는 원래 시카고에서 살았는데 그 유명한 시카고 화재 때 모든 집과 재산을 다 잃고 블란서로 건너가 재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가 뉴욕 항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는 11월 22일 새벽 2시 영국의 철갑선 “록키안”호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30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226명의 소중한 생명을 실은 채 대서양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네 딸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는 끔찍한 충격 앞에서 Spafford의 부인은 그만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신하여 바다에 떨어진 덕분에 배와 함께 수장 되지 아니하고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실신하여 호흡을 멈춘 채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에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엄청난 충격은 Spafford에게도 마찬가지로 쓰나미처럼 밀어닥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소연하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시카고에서는 불이나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하시더니 이제는 대서양에서 그렇게도 사랑하는 네 딸을 다 잃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부르짖는 기도 속에서 그는 평소에 감히 느껴보지 못한 놀라운 평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평안 속에서 그는 호수처럼 잔잔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응답하신 우리 주님의 음성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413장의 찬송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지은 죄 주홍 빛 같더라도 주 예수께 다 아뢰면 그 십자가 피로써 다 씻으나 흰 눈보다 더 정하겠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실로 놀라운 은혜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화재로 집과 전 재산을 다 잃어버리고 또 다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네 딸들을 순간에 다 잃어버리고도 이처럼 고요한 평안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정녕 사람의 의지로는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에서 과연 무엇을 영원히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영원히 누리고 살아갈 진정한 축복은 저 하늘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고 기대하게 될 때 비록 땅에서는 너무나도 소중한 그것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더 귀한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와 같은 평안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또한 그와 같은 평강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맺겠습니다.
가을이 무르익고 있는 10월의 중순입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대사 없이 살아오게 하신 하늘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조금만 더 믿음으로 다가서서 주님을 바라본다면 진정 감사가 넘쳐나게 될 줄을 확신합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사 독생자 예수님까지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그 예수님으로 인해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축복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그렇게 평안의 축복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며 감사를 드리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쫓아가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심지가 견고하여 그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어야만 합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서 우리들도 변함이 없는 충성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우리들에게 믿음이라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당당하게 버티고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안과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소중한 10월 상달에 이와 같은 준비된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겨 예배드리고 충성하고 헌신하게 될 때 오늘 우리들도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는 평강의 축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모쪼록 아름다운 믿음으로 이처럼 고귀한 축복을 노래하며 예배에 올인 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요 14:25-27 / 이삼규 목사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어 령 교수가 쓴 「아들이여 이 산하를」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나옵니다. 옛날 어느 시골에 수염을 길게 가꾸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어떤 꼬마 아이 하나가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만나자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밤에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에 내 놓고 주무세요?" 그 할아버지는 질문을 받고 금방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본일이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얘야, 미안하다. 나도 미처 생각을 못한 일인데 오늘밤에 한번 자 보고 대답 해주마."하고는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날 밤에 수염하고 씨름을 했습니다. 이불 속에 넣고 자니 답답하고 내놓고 자니 이상 하고 밤새도록 수염을 가지고 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30년 동안 달고 다닌 수염이지만 그 수염이 잘 때 이불 속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미처 생각을 못했다가 이제 그것을 의식 하니까 그렇게 불편하더라는 이야기 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가끔 이런 할아버지와 비슷한 분들이 계십니다. 모든 분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내가 성령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지 밖에 계시는지 하고 질문을 하면 선뜻 자신 있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행태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보수와 정통을 자랑하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우리 자신에게는 잘못된 부분이 없습니까? 우리의 잘못은(죄) 성령의 교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지위를 부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공개적인 교리의 형태로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신조를 공표할 때는 성경적 입장을 굳게 고수합니다. 이처럼 공식적인 신앙고백은 건전하지만 실제적인 신앙고백은 무너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성령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든 안 계시든 사실상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송영을 부를 때나 축도할 때만 잠깐씩 언급할 뿐입니다. 더 심하게 말하면 성령이 안 계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완벽하게 성령을 무시하는데도 단지 관례상 삼위일체론 신봉자로 불립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가 동등하시며, 따라서 성령 또한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권리가 있다고 담대히 선포합니다. 그에 못 미치는 것은 삼위일체론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되신 제 3위에 대한 교리를 무시함으로써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고, 지금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 교리는 다이너마이트입니다. 그 위력이 나타나도록 터트려야 합니다. 터트리지 않으면 평생 우리 생각 뒤편에 조용히 파묻힌 채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성령 교리는 묻혀 있는 다이너마이트입니다. 교회가 그 능력을 발견해 사용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령론의 진리를 짐짓 점잖게 인정하는 자에게는 그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령은 자신에 대한 교리를 찬송가 뒷장 신앙고백에 포함시키느냐 아니냐에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가 자신에게 집중하길 기다리실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
요 14:16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보혜사라는 말은 참 어려운 단어입니다. ‘지킬 보(保), 은혜 은(惠), 스승 사(師)’, ‘지키시고 은혜를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희랍어 원문으로 보면 이 단어는 파라클레토스(παρακλητοσ)--‘곁에’라는 뜻의 ‘파라(παρα)’와 ‘부르다’를 뜻하는 ‘클레토스(κλητοσ)’ 가 합쳐져서 ‘곁에서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위로자’ ‘돕는 자’ ‘격려자’라는 뜻으로 번역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이름 속에 이미 성령의 역할을 담겨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도하시고 가르치시며 돕고 권면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항상 성령충만을 노래하듯 말합니다. 성경에는 성령충만에 대한 말씀이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나옵니다. 사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없이 나오는 성령은 누구신가? 한마디로 성령은 하나님의 영(靈)이십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감화력이나 능력이 아니고 성부, 성자와 함께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믿는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시고, 마음을 움직이시며, 믿음이 자라도록 힘을 주시고, 말씀으로 세상을 분별하도록 하시며, 모든 믿음의 일들, 헌신, 전도, 사랑, 기도 등을 잘 감당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요 14:26 /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를 여기에서는 ‘성령’이라고 합니다. ‘a{gio"(하기오스)’ ‘거룩한 holy’ ‘pneu'ma(프뉴마)’ ‘바람, 호흡, 생명, 영, 성령’이라는 의미입니다.
‘영(靈) / pneu'ma(프뉴마)’은 물질 너머의 차원에 있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질과 다른 방식으로 존속하는 생명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은 무게나 차원이나 크기나 차지하는 공간이 없는 실체입니다. 물질에 해당되는 특질들이 영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영은 참으로 존재하며 객관적으로 실재합니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 모두 ‘성령은 지, 정, 의 같은 인격의 특질’을 지니신 인격적인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성령님은 아시고, 뜻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애정과 거부감과 연민을 느끼십니다. 생각하시고,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십니다. 인격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하십니다.
성령의 한 가지 특질-성령을 구하는 모든 이에게 아주 흥미롭고도 중요한 특질-은 침투력입니다. 성령은 정신에 침투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 같은 다른 영에 침투하실 수 있습니다. 온전히 침투하여 실제로 섞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침입하여 자신의 자리를 만드시되, 그 사람의 본질은 하나도 몰아내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그의 인격을 손상 없이 온전하게 보전하십니다. 그가 몰아내시는 것은 도덕적 악뿐입니다.
대체 한 인격이 어떻게 다른 인격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솔직히 모른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러나 수백 년 전에 살았던 경건한 옛 사람들에게 간단한 유추를 빌립으로써 이해에 근접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쇳조각을 풀무에 넣고 풀무질을 합니다. 처음에는 쇠와 불이라는 별개의 물질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쇠를 불 속에 넣으면 쇠가 침투하면서 불 속에 쇠가 있고 쇠 속에 불이 있는 상태가 됩니다. 별개의 두 물질이 서로 섞이고 침투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도 어느 정도 그런 방식으로 우리 영에 침투하십니다. 성령이 침투하시는 동안에도 우리는 원래 모습대로 보전됩니다. 우리의 본질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전처럼 각 사람이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성령이 침투하여 그 인격을 채우고 계신다는 것, 경험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만 다를 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
소요리문답 제 6문에 보면 ‘하나님의 신격에 몇 위가 계신가요?’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답은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고, 같은 본질과 동등한 권능과 영광을 가지십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격(神格)’이란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 혹은 본질’을 말합니다. 그리고 ‘위(位)’란 ‘persons’이라고 하는데 ‘위, 위격, 지위(person)’이라는 단어는 ‘페르소나’라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의지와 이성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인격체를 뜻합니다.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며 답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이 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그렇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하려면 성경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신구약 성경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그것을 보니까 우리로서는 ‘삼위일체’로 이해할 수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마치 세 분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셋이 아니라 하나라고 합니다. 이것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이해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우리 언어의 한계와 시공간의 한계로 인하여 우리보다 더 크신 존재인 하나님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가지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만큼은 “아, 그렇구나!”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데까지는 알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원리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한계 가운데서 겸손하게, 가르쳐주신 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밖에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기저귀 차던 아기일 때, 부모님의 마음을 결코 다 알 수 없는 것처럼, 엄마가 지금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관심도 없고, 그저 내 배가 고프니까 젖 달라고 울고, 기저귀 축축하니까 빨리 갈아달라고 짜증을 부리는 것처럼, 우리가 막무가내일 수 있습니다. 그 수준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 머리와 언어로 최대한 그릴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모습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해 우리 머리로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만약 삼위일체가 우리 머리로 시원하게 이해가 되었다면 그것은 벌써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명쾌하게 이해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만큼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니 신경 끄고 살자는 ‘불가지론’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은 성령 또한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합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믿음의 신조’를 작성할 때마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담대히 포함시켰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는다고, 삼위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증언합니다. 니케아 신경을 작성한 교부들도 성령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매우 아름다운 문장에 담아 증언했습니다.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분,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 받으시고 영광 받으시는 분을 믿사옵니다.’
교회는 찬송을 통해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거리낌 없이 인정해 왔고, 영감 받은 노래를 통해 마음껏 기쁘게 그를 경배해 왔습니다.
영화로신 주 성령(186장)
영화로신 주 성령 나의 마음 비추사 어둠 몰아내시고 밝게 하여 주소서
전능하신 주 성령 성결하게 하시고 나의 맘을 살피사 죄를 멸해 주소서
회평하신 주 성령 슬픔 맘에 오셔서 온갖 괴롬 없애고 기쁜 맘을 주소서
거룩하신 주 성령 나의 맘에 계시사 망령된 일 없애고 홀로 주관 하소서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단순한 하나님의 전달자가 아닙니다.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과 교제하시며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 그들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성부도 성자도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하리라”(요 14:23) 특정 사역을 위하여 한 위격이 다른 위격보다 잠시 더 전면에 나서실 수는 있지만 그때도 혼자 일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일하십니다.
그리스도와 같으신 분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스도 같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본질이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느끼는 감정을 성부와 성자의 영이신 성령께도 느껴야 합니다.
성령은 생명과 빛과 사랑의 영이십니다. 창조되지 않은 본성을 지니신 끝없는 불의 바다,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고 일하면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불의 바다입니다. 그가 자연에 행하시는 일이 있고, 세상에 행하시는 일이 있으며, 교회에 수행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의 모든 행동은 삼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합니다. 그는 결코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성급하고 독단적인 결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그는 성부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부가 백성에게 느끼시는 감정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임재를 낯설게 느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처럼 언제나 죄인을 긍휼로 대하시고, 성도를 따뜻한 애정으로 대하시며, 인간의 고통을 지극히 온유한 연민과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지금은 복되신 제 3위이신 성령님을 너무나 자주, 많이 분노하시게 만든 우리의 허물을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만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친구가 되어야 할 집에서 오히려 그분을 심하게 냉대했습니다. 예루살렘 언덕에서 영원하신 성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성령의 전에서 그를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사용한 못은 쇠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더 세련되고 값지게 만들어 주는 재료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감정과 사고의 정련된 금속을 우리 마음속에서 취하여 의심과 반역과 무시의 못을 만들었습니다. 성령에 대한 합당치 못한 생각과 냉정한 태도로 끝없이 그를 근심시키고 소멸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무시한 죄를 가장 잘 회개하는 길은 더 이상 성령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예배하고 순종해야 할 분으로 생각합시다. 모든 문을 활짝 열고 성령님을 초청합시다. 마음의 성전에 있는 모든 방을 성령께 내어 드리고, 주님과 주인으로 오셔서 나를 거처로 삼아 달라고 강청합시다. 벌이 클로버 향기에 끌리듯, 성령은 예수의 감미로운 이름에 끌린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으시는 곳에서 성령님은 환대받는다고 느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곳에서 성령님은 자유롭고 편하게 행하십니다.
성령님을 보내 주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어떻게 보내주십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신 성령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요? 가르치는 일을 하십니다.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가르쳐주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평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여러분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시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동안 성령을 슬프게 했던 것, 근심하게 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서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평안을 누리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의 평안을 주노라
요 14:25-31 / 이동휘 목사
1. 예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고 말씀하셨을 때, 그 ‘평안’(에이레네,ε?ρ?νη)은 평화, 복지, 번영 등을 의미합니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 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로워졌지만 먹고 사는 일이 힘들고 어려워졌다면 그것은 참된 평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는 복지와 번영이 함께 하는 평화를 말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평안은 영적 평안이나 근심이나 염려가 없는 마음의 평안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 “나의 평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평안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지은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결코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끗게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인간은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서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음을 이렇게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엡2:12-17)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인간은 이렇게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최고의 번영과 복지를 누린다 해도, 제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해도 하나님과 원수되어 결국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당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영원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주님의 평안’을 가지게 될 때만이 참되고 영원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어지는 물질이나 지식, 권력 등으로 얻을 수 있기도 하는 평안은 극히 일시적이고, 오히려 그것들이 인생에 올무가 되거나 화가 되기도 합니다.
<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 <생쥐와 인간> 등으로 유명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존 스타인백(John Ernst Steinbeck. 1902-1968)의 <진주>라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키노>와 <쥬안나>는 가난하지만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착한 인디안 부부입니다. 그들은 한 아들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전갈에 물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경을 헤매는 아이를 업고 병원문을 두드려 대지만 어느 곳 하나 이 가난한 인디안 소년을 받아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절망과 분노 그리고 애원이 뒤섞인 마음을 쓸어안고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민간 요법으로 아들을 응급처치만 해주고 진주 잡이를 나갔습니다. “기필코 진주를 캐야 합니다. 우리 아들을 살리게 도와 주소서.” 이러한 그들의 간곡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마침내 그들은 갈매기 알만한 커다란 진주를 발견했습니다. 키노 부부가 진주를 캤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시는 온통 술렁거렸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료를 거부했던 의사들은 키노의 아이를 맡겠다고 하고 거지들까지 자선을 기대하며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부부의 기쁨도 잠시, 그날 밤 그들은 진주를 탐내는 괴한의 침입을 받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점차 진주를 복이 아니라 화근으로 느끼게 된 쥬안나는 어느 날 남편 몰래 진주를 바다에 던지려 나가다 뒤따라온 키노의 만류로 결국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키노는 또 괴한의 습격을 받고 격투 끝에 괴한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아! 이를 어떻게 해요? 우리가 사람을 죽이다니....” 결국 그들은 이곳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집은 불타고, 타고 가려던 배마저 구멍이 뚫려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할 수 없이 산으로 도망하는데 거기까지 진주를 탐내는 악당들이 쫓아와 다시 일대 격투가 벌어지고 그 와중에서 키노는 오발로 자기 아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럴 수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캐낸 진주가 오히려 아들을 죽이다니...” 예전의 초라한 오막살이로 돌아온 그들 부부는 한동안 넋을 놓고 손바닥의 진주만 쳐다 보았습니다. 어둠이 깔려갈 무렵 키노는 바다로 나가 힘껏 진주를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진주는 검푸른 물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곧 근심과 두려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아무런 근심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언10:22입니다.
(잠 10:22)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예레미야의 시대에 유다 땅 전역에는 심각한 문제가 닥쳐오고 있었습니다. 대규모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기 위하여 진격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과 선지자들, 소위 종교 지도자들은 멸망의 그림자가 그들 위에 드리워지고 있음에도, 참혹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위기상황을 직시하고 시급히 회개하라고 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평안하다, 평안하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라고 호도(糊塗)했습니다.
(렘6:14)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백성들의 상태,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숭배 죄악에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죄악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위험 수위를 넘어섰는데도, 지도자들은 악한 행위를 본질적으로 고치는 않으면서 거짓 평화만을 외친 것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그 와중에 평안을 외치며 자기 배들을 더 채우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나라 백성의 죄악이 위중함을 경고하고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길밖에 없음을 외치지 아니하고, 허황된 빈 말로 평안하다는 말로 땜질하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심각하게 위급한 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병든 곳을 제대로 진단하여 응급 수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환자에게 괜찮다며 치료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는 소위 나라의 영적 지도자들이 심각한 죄악에 대해 전혀 감각이 없이 죄악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흔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고를 두고 안전 불감증에 걸렸다고 하는 것처럼 도덕과 윤리 의식, 그리고 죄악에 대한 불감증, 아니 단순히 무감각한 정도가 아니라 악을 향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악행하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평안은 없는데도 평안을 이야기한 유다 백성들의 예는 세상의 평안이 거짓된 것임을 잘 말해 줍니다. 세상에는 참 평안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환상에 불과합니다. 세계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을 때마다 세계 평화를 약속했고 사람들은 이같은 약속이 실현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무솔리니는 로마의 영화(榮華)를 이탈리아 국민에게 회복시킨다면서 에디오피아를 침공하여 2차대전을 일으켰습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통치와 전 유럽 평화를 약속하면서 수많은 백성들의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레닌과 스탈린은 평화와 계급없는 사회, 공산세계를 약속했지만 음모, 배신, 폭행, 대학살, 예속, 세계정복이 시작되었을 뿐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타임>지에 레닌과 스탈린, 처칠, 루스벨트 등의 평화구상이 나왔으나 그들의 구상은 세계대전으로 발전했습니다. 참된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주시는 평안’으로 세상이 주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그 어떤 것들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슬픔이나 위기나 박해라도 평안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변화시키는 초자연적이고 영속적이고 적극적이며 부작용이 전혀 없는 실로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이러한 평안, 곧 “나의 평안”, 예수님의 평안, 하나님의 평안은 예수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아낌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주어지는 참된 평화를 누리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죽고 그 아들 이삭이 살던 당시, 아버지 아브라함 때처럼 그 땅에 심각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이삭은 먹고 살기 위해 할 수없이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창26:2-5)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3)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4)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5)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애굽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그 땅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백배의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농사짓는 땅이 아님에도, 그리고 농사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땅에 거하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입니다.
(창26:12-14) (12)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이렇게 흉년 중에 거부가 되자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몰려와 이삭을 추방했습니다. 이삭은 군말없이 그랄 지역으로 가 장막을 치고 거주하며 우물을 팠습니다. 사람과 가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데나 우물을 판다고 해서 물이 터져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삭이 우물을 파자 곧 물이 터져나와 사람과 가축을 먹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랄 사람들이 몰려와 그 땅에 자기네 땅이라며 이삭이 팠던 우물을 빼앗아갔습니다. 이삭은 그 일로 다투지 아니하고 다른 지역에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러자 이삭이 파는 우물마다 물이 터져나와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또 나타나셔서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창26:24-25)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행하며 산 이삭에게 평화의 축복, 번성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후 얼마되지 않아 그랄 지역의 왕들과 군대장관 등이 이삭을 찾아옵니다. 이삭이 “당신들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라고 묻자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창26:27-29)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그랄 지역 왕들과 군대 장관들이 그간 이삭이 농사짓는 일에서부터 우물을 파는 일까지 그 과정들을 통해, 아무리 이삭을 방해하고 우물들을 강탈하기도 했지만 이삭이 범사에 잘 되는 일들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는 것은 분명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가 당신과 계약을 맺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소. 이제 당신과 우리 사이에 계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해하지 않고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어 평안히 가게 한 것처럼 당신도 우리를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오.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오” 라며 화평조약을 맺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사람은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이삭과 평화조약을 맺고 지내는 것이 자신들의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고, 이어 그들이 요구한대로 평화조약을 맺고 그들을 평안히 떠나보냈습니다.(창26:26-31)
이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여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되면,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복을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주변까지도 평화롭게 섭리하시어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에게 약속하십니다. 로마서8:32입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평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에게는 본질적으로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물질과 지식과 권세, 부귀영화 등 최고의 번영과 복지가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과 불화 상태에 있는 사람은 평안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서만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롬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항상 하나님 말씀 가운데 거하는 삶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평화의 왕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두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서도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고 말씀하시며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하실 때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하신 것입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바로 눈 앞에 둔 초상집 같은 상황이며, 자신을 배신할 가룟 유다가 끼어 있는 사랑하는 제자들 가운데, 그야말로 어떤 면으로 보아도 기쁨과 평안을 얻을 일이 전혀 없는 처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최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가 “(요12:27)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였습니다. 제자 베드로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이렇게 제자들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마26:37-39)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십자가는 그 누구도 쉽게 마실 수 있는 잔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이 따르는 최악의 사형틀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평안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데에,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다 하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십자가에 죽어갈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기쁨과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진정한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거역하고서는 평안이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시므로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될 때 평안이 주어지는 것이지, 평안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가르치시고 또한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을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참된 평안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참된 평안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요14: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가셨다가 다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께 가시는 것을 기뻐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까지일지라도 두렵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신랑되시는 부활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확실한 약속과 믿음을 가진 신부된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평안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는 것인데, 진실로 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기뻐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으며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아브라함에 관한 영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가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하나님 앞에 바치려는 장면입니다. 생각하면, 얼마나 숨막히는 순간입니까? 작가는 성경에 없는 자기 상상으로 이 장면을 잘 처리하고 있기에 여기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삭아,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네, 압니다.” “얼마나 사랑하는 것 같으냐?” “아버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줄 압니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든지 이것 모두가 너를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느냐?” “네, 믿습니다.” “좋다. 여기 누워라.” 이삭은 순종하여 그대로 눕고, 아버지는 제물을 위해 아들을 향해서 칼을 높이 듭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 죽이는 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앎으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기 앞에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께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는 말씀은,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지라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후에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부활 후에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환경에서 기뻐하고 평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실패 가운데서도, 병든 가운데서도, 아니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소화하게 되고 평안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지고 믿어지면 평안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시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떠한 어려운 일을 당한다할지라도 평안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평안하셨던 예수님의 평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항상 평생동안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평안
요 14:25-27 / 노경모 목사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 되는가? 라는 사실에 대해서 된다. 안된다라는 많은 의학 논문들이 나왔습니다. 스트레스는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학자와 의사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한 논문들이 수없이 많이 나왔고요.
흔히 스트레스를 '만병의 근원'이라고 부릅니다. 오랫동안 스트레스를 받으면 심리적, 신체적 질환까지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적인 질환은 대체로 불안이나 우울 등 일시적인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으면 적응장애, 불안장애, 수면장애 등 각종 정신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에 이런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나왔습니다. ‘병의 원인은 머릿속에 있다’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경과 전문의이자 정신신체 장애 전문가인 수잔 오설리번 박사가 말하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병의 비밀. 느닷없이 찾아온 통증, 발작, 경련, 마비 등으로 고통 받으며 병원을 찾는 사람들. 치명적인 증상이나 장기화한 장애 때문에 삶이 파괴되지만, 이런저런 검사를 수없이 받아도 병의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 없다.
놀랍게도 이처럼 신체 기관에는 이상이 없으나 정신적 이유로 앓는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는 환자들은 무수히 많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각의 사연이 마치 한편의 드라마처럼 박진감 있게 펼쳐지는 환자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마음이 몸에 끼치는 영향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일반인뿐 아니라 동료 의사들에게도 정신신체 증상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올바른 이해를 위해 노력할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마음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고 질병의 통로가 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마음은 나쁜 것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무엇보다도 마음을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근심도, 걱정도 분노도, 두려움도, 질투도, 미움도, 불평과 원망도, 불안도, 짜증스럽고 신경질이 나는 것도 다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고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음란하고 불의하고 나쁜 생각도 마음을 통해서 들어오고 마귀의 유혹과 시험도 마음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에 들어오는 이런 안 좋은 것들을 막을 수가 있고, 혹시 이런 것들이 들어와도 이것을 다 내어 쫓을 수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도 연구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명상을 합니다. 수행을 합니다. 조용한 곳에 책을 읽습니다. 요즈음 독서 힐링이라는 말이 있지요. 운동과 음악과 미술 등 다른 것에 몰입해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일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장기적인 효과와 근본적이 효과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근본적인 방법을 없을까? 우리의 고민과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할 길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근본적인 방법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은 그 근본적인 방법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부르셔서 선택하신 예수님의 제자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들의 소망이시요, 그들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을 듣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옆에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보고 그것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구세주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십자기에 달려서 죽고 부활하시만, 그리고 곧 승천하십니다. 그들의 구세주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는 예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시고 혼자만 떠나신다면, 제자들은 엄청난 두려움과 혼란과 염려 속에 빠질 것을 내다 보셨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과 종교지도자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찾아내어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는 죽이기도 할텐데.. 앞으로 제자들은 공개적으로 이러한 위협과 위험을 무릎 쓰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담대하게 나셔야 하는데... 이들이 얼마나 큰 두려움 속에 떨게 될 것인가를 예수님은 미리 내다 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 가지 놀라운 장치를 하고 제자들을 떠나시려고 하십니다. 그 장치가 무엇입니까? 바로 ‘평안’입니다. 그냥 평안이 아니라 ‘주님의 평안’입니다. 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는 말은 ‘평안을 너희에게 남겨 준다’는 말입니다 마치 유산을 남겨 주듯이 말입니다. 이 말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확실하게 강조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고 말씀하신 후에 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주님의 평안을 남겨 주고, 준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어떤 댓가와 조건없이 그냥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씀은 그냥 ‘평안’이 아니라 ‘나의 평안’ 곧 ‘주님의 평안’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평안을 무엇을 말합니까?
세상에는 평안을 주는 요소들이 참 많습니다. 원했던 일들이 이루어지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부족했던 것이 채워지면 평안이 옵니다. 어려웠던 일들이 해결되면 평안이 찾아 옵니다. 일이 잘 풀리면 평안이 기분이 좋습니다 평안이 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를 행복하게 살려고 한다면, 머리를 깎아라. 이발하면 하루는 기분이 좋다는 것입니다. 일 주일 정도 행복하려면 옷을 사서 입으라. 그러면 새옷을 입으면 상당히 기분이 좋아져서 행복할 것입니다. 조금 지나면 또 그것도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면 3개월 정도 간다고 합니다. 집을 새로 사면 1년 동안 행복이 느껴진다고 합니다. 결혼하면 3년은 행복할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세상적인 평안들도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안들은 일시적입니다. 근본적이지 않습니다. 얼마 안가면 그 평안은 깨어지기고 하고 소멸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평안을 받아합니다. 주님의 평안은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안은 얕은 평안이 아닙니다. 주님의 평안은 근본적이요 깊은 평안입니다.
주님의 평안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다시 27절을 읽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남겨 주신 평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진정한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세상의 여러 조건들과 환경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주시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평안을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그러한 평안과는 다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은 평안과 같은 말입니다.
요한복음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고 평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밖에는 진정한 평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진정한 평안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주님 주시는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주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주님의 품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지미 핸드릭스는 미국의 유명한 록 음악의 기타 연주자이지 싱어송라이터 입니다. 많은 음악 팬들과 평론가들은 헨드릭스를 록과 블루스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 중 한 사람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마약 중독자가 되어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며 문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어느 공연에서는 공연의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의 기타를 부숴 버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지미 핸드릭스의 공연이 마치자 관중들은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열광하던 박수갈채가 갑자기 그쳤습니다. 지미 핸드릭스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던 것입니다. 이윽고 고요한 정적을 깨며 그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약물과용으로 죽었습니다.
누가 이 지미 핸드릭스에게 진정한 평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주님의 평안은 근심과 두려움을 능히 내어 쫓는 평안입니다.
27절,‘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람에게 근심과 두려움은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요인이 되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까지도 파괴하는 무서운 것들입니다. 자살의 대부분의 원인들은 근심과 두려움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딴지를 걸고 신앙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근심과 두려움입니다.
성경에는 근심이라는 말과 비슷한 걱정, 염려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 만큼은 성경은 인간의 근심에 관해 관심을 갖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근심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평강입니다. 주님의 평강을 소유하게 될 때 근심은 내 마음 속에 거할 수가 없습니다.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롱스피크(Longs Peak)라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 북부 로키 산맥의 높은 봉우리 중 하나인데 높이가 무려 4,348입니다. 이 봉우리에 있던 거대한 나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거대한 나무는 4백년이 된 나무인데 14번이나 벼락을 맞고 헤아릴 수 없는 폭풍우를 만났고, 남북 전쟁의 총과 대포의 공격도 극복해냈던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가 겉은 멀쩡한데 어느 날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손으로 문질러 버리고 죽일 수 있는 조그만 딱정벌레들이 나무의 속을 파 먹어버려서 속에서 무너졌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거목처럼 여러 가지 핍박이나 위협이나 유혹 같이 외부로부터 오는 강한 것들의 공격은 잘 견뎌 왔는데 내 마음속에 있는 아주 작은 벌레 같은 근심들에게 우리의 심장을 갉아 먹히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생각보아야 합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에 관련된 말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두려움이 성도들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경우들이 참 많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물론이기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자체도 포기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이세벨 때문에 두려워하며 도망하여 로뎀나무 밑에 와서 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움이라는 것은 성도들에게도 위협적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7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누가 주는 것일까요?
바로 마귀요 사탄인 것입니다. 두려움은 성도들을 무너뜨리는 마귀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아무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집인 냥 찾아오는 두려움을 강력하게 내어 쫓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내어 쫓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평안으로 내어 쫓아야 완전히 쫓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마비시킵니다.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마음과 육체의 질병들이 참 많습니다.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전진을 못하도록 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뺀 나머니 10명의 정탐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믿음의 전진을 못하도록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포기하도록 마귀는 만듭니다. 두려움 때문에 결국을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마귀와 타협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욥에게 다가온 두려움은 얼마나 컸을까요? 자식들이 사고 다 죽습니다. 자기의 재산이 다 없어집니다. 부인마저도 자기를 저주하고 떠납니다. 자기는 무서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려움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솔직하게 이것을 욥기서 3장 25절에서 고백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우리가 이 두려움에서 승리하지 못할 때, 우리가 이 두려움을 쫓아 내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무서운 것이 임한다고 셩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요한일서 4: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장 18절을 보면 지옥에 가는 첫째 조건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을 불신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은 고백할지는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감하게 이 두려움을 우리에게 내어 쫓아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바로 주님의 평안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이미 주셨습니다. 우리 이 사실을 믿고 이 평안이 내 마음을 사로 잡고 주관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평강이 내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평강이 내 마음을 사로잡을 때, 근심과 두려움은 쫓겨나가데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주시는, 아니 이미 주신 주님의 평강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로자 성령님
요한복음 14:25-31 / 노경모 목사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상처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만이 아니라 사회와 조직과 사회 현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힘이 되어야 할 가족으로부터, 내가 믿고 신뢰하던 사람으로부터 이런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으니 그 아픔이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무엇이 정말로 필요할까요? 바로 ‘위로’입니다.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나의 상처난 마음을 위로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나의 아픔을 보듬어줄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돈이 많다고, 권력이 있다고, 건강하다고 위로가 필요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내면 깊이에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고, 쓴뿌리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위로가 필요합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형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나는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야’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거나 교만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저도 많은 성도님을 심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모두에게 정말로 위로가 필요하구나. 그래서 저는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대로 심방가서 다른 어떤 것 보다 성도들을 위로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위로’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것을 말합니다. ‘격려’란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격려 전에 위로가 선행되어야 할 정도로 위로는 중요합니다. 위로가 격려의 토대가 됩니다. 위로가 치유를 가져옵니다. 위로가 회복을 가져옵니다.
아빠의 위로라는 간증이 있습니다. / 여행에서 돌아오다가 우리 가족은 큰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고로 나는 두 개의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보다는 덜했지만 아빠도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사춘기를 보내며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내가 밥도 먹지 않고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습니다. 아빠는 나와 꼭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아픔을 낱낱이 알고 있었습니다. 아빠의 사랑으로 나는 무사히 사춘기를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입학식 날, 아빠는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입학식을 끝내고 나올 때였습니다. 눈앞에 아주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차도로 한 어린 꼬마가 뛰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 눈 앞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보조다리도 없이 아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아빠가 그 아이를 안고 인도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빠?......" 나는 너무 놀라 소리쳤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보조다리를 양 팔에 끼고는 서둘러 가버렸습니다. "엄마? 엄마도 봤지? 아빠 걷는 거......" 하지만 엄마의 얼굴은 담담해 보였습니다.
“놀라지 말고 엄마 말 잘 들어.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보조다리가 필요 없는 정상인이야. 그 때 아빠는 팔만 다치셨어. 그런데 4년 동안 보조다리를 짚고 다니신 거야. 같은 아픔을 가져야만 아픈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말야.”
"왜 그랬어? 왜 아빠까지....."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울지 마. 아빠는 너를 위로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오늘은 그 어린 것이 교통사고로 너처럼 될까 봐서......"
앞서 걸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는 나의 분홍색 파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습니다. 마음이 아픈 날이면 나는 늘 아빠 품에 안겨서 울었습니다. 그때 마다 소리 내어 운 것은 나였지만 눈물은 아빠 가슴 속으로 더 많이 흘러내렸습니다.
아빠의 위로가 딸에게 얼마나 필요하며,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여 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반드시 필요하며 절대적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합니다. 부활하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고 또 두렵겠습니니까? 주님은 제자들의 이 마음의 상태를 미리 내다 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주인 잃은 양처럼 흩어질 제자들을 생각하면 주님의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까지 한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주님은 이것들을 미리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제자들은 문을 꼭 잠그고 유대인들이 혹시나 자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움으로 떨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을 볼까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렇게 될 제자들을 두고 떠난다는 것이 주님의 마음에 얼마나 아픔이 되겠습니까? 주님은 이들을 위해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시기로 하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이라는 말이 본문 26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요한복음 16:7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제자들에게 보내실 보혜사 성령님, 성령님 앞에서 ‘보혜사(保惠師)’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데, 성도들을 보호하고 돕는 스승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보혜사라는 말을 가장 전통적이고 권위가 있는 영어 성경인 King James Version 에서는 ‘Comforter, 위로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낙심하고 절망하고 두려하여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위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로자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위로자입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 곁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든, 느끼지 못하고 있든지 간에 우리를 항상 위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위로가 필요할 때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우리가 위로를 성령님께 요청하면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현대를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도 그 당시 제자들 못지않게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듣는 여러분들을 성령님께서 위로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인 저도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배신감을 느낄 때도 있고, 심한 상처를 받아 고통스러워할 때도 있습니다. 한 번은 너무나 힘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성령님 힘듭니다. 저를 위로해 주세요. 저를 만져 주세요.’ 마음으로 요청했습니다. 그 때 성령님의 위로가 너무나 풍성하고 감격적이었는지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눈물이 줄줄줄 흘렀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었습니다. 고통스러워서 우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억울해서 우는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위로의 손길 앞에 저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저는 소생함을 얻었고 회복이 되었고 평강을 얻었습니다. 크든 작든 저와 같은 경험들을 하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아니 이런 경험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성령님은 우리를 위로하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자이십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고린도전서 1장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성령님께 항상 위로를 요청해야 합니다. ‘성령님, 나는 성령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성령님, 나를 위로하여 주세요, 나의 심령을 만져 주세요.’ 우리가 달라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염려와 근심, 절망과 좌절, 불안과 초조, 짜증과 신경질, 아픔과 고통,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27절을 읽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세상은 평안은 우리의 육체와 마음에 잠깐 평안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영혼까지 평안하게 하는 평안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현실과 처지와 환경을 능히 극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평안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평안은 표면적이 평안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깊은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평안입니다. 주님 주시는 평안은 근심을 내어 쫓고 두려움을 내어 쫓는 평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이 평안은 위로자 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실 때에 이 평안이 우리에게 솟아나게 됩니다. 본문 26-27절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위로자 성령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고치시고, 우리의 쓴뿌리를 제거하시고,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위로하시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우리를 위로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받은 그 위로로써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까? 우리가 성령님의 위로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주변에 고통당하고 환란 중에 있고, 상처받은 지체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로했으니 너희도 서로 위로해라.’ 성령님의 뜻입니다.
내가 비록 힘들고 어렵고 상처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내가 힘을 내서 남을 위로한다면 우리에게 더욱 더 큰 놀라운 위로가 임한다는 이 비밀을 알고 계십니까?
고인 물은 썩습니다. 고여있는 물에는 악취가 납니다. 그러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듯이 흘려나가는 물에는 썩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흘러 보내야 합니다. 흘러 보낼 때 더 큰 위로가 나에게 채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는 누가복음 6장 38절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미국에 뷸라라는 한 성실한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갑자기 급성 관절염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몸은 손을 쓸 새도 없이 굳어졌습니다. 오른쪽 손가락의 신경만 왕성하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 하늘과 운명과 세상을 원망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전화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뷸라는 병실에 전화를 설치하고 병상의 환자들과 가족, 친구를 잃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변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전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육체의 장애가 오히려 봉사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너무 깊숙히 감추어 놓았을 뿐이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은 우리는 성령님의 위로가 절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우리는 위로의 성령님을 항상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자 성령님께 위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로자 성령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넘치는 위로를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야합니다. 주변 지체들을 위로합시다. 위로는 ‘힘내’가 아닙니다. ‘힘내’는 격려입니다. 위로는 ‘힘들지’하고 묻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그들에 먼저 이 한 마디 말부터 합시다. ‘힘들지?’
우리 모두 성령님의 위로를 받고 또 그 위로로써 서로 위로함으로 이 어려운 세상을 승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령으로 내 인생의 주인삼자
요 14:25-27 / 이정익 목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표적인 선물이 3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성경, 그리고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게 오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삶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왜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는지 또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세상에 보이지 않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보이지 않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 위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집을 지어도 외부 단장에만 열을 냅니다. 그 때문에 속이 빈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도 내면보다 외모단장에 열을 냅니다. 사실 내면이 더 중요한 것인데 내면을 가꾸는 데는 무관심합니다. 외모는 생명이 짧습니다. 그러나 내면은 평생을 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법입니다.
성령
성령은 보이지 않게 오셔서 보이지 않게 역사 하십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사역하셔서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 곡해하기 쉽습니다. 모두가 성령이 보이지 않게 사역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으로 소개합니다.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고 하고 신약성경에서는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호흡, 숨, 바람, 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프뉴마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함께 사역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이 프뉴마에 의해서 예수를 잉태하였습니다. 또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다고 했는데 그것도 이 하나님의 “루아흐” 즉 하나님의 “프뉴마”가 비둘기 같이 내려오셨다는 말입니다. 또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뜨겁게 기도할 때 임하셨던 성령님도 바로 이 “프뉴마”의 성령님이십니다.
사역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성령이 임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이제 당신은 곧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실 것”을 알리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 속에서 성령의 사역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성령은 진리를, 제자의 할일을, 또한 앞으로 될 일들을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가리켜 가르치는 영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들의 미래와 사명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해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성령은 가르치시는 영이십니다. 무지를 깨우치시고 진리를 알게 하시고 할 일을 알게 하시며 뜻을 깨우쳐 알게 하십니다. 처음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반드시 사도행전적인 기사와 이적이 일어납니다. 지금 중국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들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복음이 처음 들어간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가르치고 깨우치게 하시는 사역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그랬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셔서 깨우쳐 알게 하시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습니까? 바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가 귀국하는 길에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빌립을 내시에게로 보내셨습니다. 빌립이 그 내시에게 “네가 읽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내시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느냐”고 대답합니다.
진리는 아무나 알고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있다고 성경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무지하다고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일하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전 문화부 장관이었던 이어령씨가 딸이 고난 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딸이 암에 걸리고 시력이 상실되었으며 팔팔하던 손자 아이가 죽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 고난 속에 살아가는 딸을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딸이 점점 회복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씩 치유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어령씨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경우 예수님을 잘 믿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잡지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이어령씨는 지금도 솔직히 잘 안 믿어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쉽게 믿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말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렇게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성의 존재인 인간이 초자연적인 예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국을 믿는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못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도 불사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흔쾌하게 믿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이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제자들은 홀로 남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될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걱정하지 말라, 성령께서 가르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후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얼마나 신나게 돌아다니며 부활과 십자가를 전합니까? 원래 베드로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성령이 함께 하셨더니 베드로가 영감을 받아서 베드로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니 그가 가르침을 받고 할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생각나게 하시는 일”도 합니다. 우리의 기억력은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들어도 곧 잊어버립니다. 지난주일 설교내용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조차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목회자 입장에서 보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잊어버렸지만 걱정할 것 없는 것은 필요할 때가 되면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때로 고난의 자리에 처할 때가 올 것이지만 그때 “너희는 고난 받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걱정하지 말라, 성령이 대답을 주시리라” 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보완”하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은 무지하고 무능한 존재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 무능하고 무지합니다.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훈련받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제자들은 실패를 거듭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무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두려워 도망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런 제자들의 무지와 무능을 깨우치시고 보완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40장을 보면 보완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 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이사야40장28-31절) 이것이 성령이 보완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신앙생활이 가능해집니다. 우리 모두는 제자들처럼 믿는다 하면서도 날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무능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신앙생활을 원활하게 유지하고 수월해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목회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이 성령의 힘입음 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목회 자체가 불가능하고 감당이 안 됩니다. 교회 성장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도 성령이 목회자를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회자들이 이 성령이 하시는 것을 모르고 자신이 하려고 온갖 꾀를 쓰고 재주를 부리곤 합니다. 그러다가 한계에 부딪히고 의기소침하곤 합니다. 이는 목회가 뭔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목회에는 반드시 성령의 힘입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는 참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 부활하신 후 성령이 강림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일신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의 힘을 입음으로 제자들은 비로소 달라졌습니다. 그 후 제자들이 가는 길에 거침이 없었고 막힘이나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의 함께 하심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거룩하신 영이신 성령의 힘을 반드시 힘입어야 합니다. 그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알게 하시는 은혜를 입습니다. 또한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내 앞길을 안내하시고 내가 가는 길을 이끄십니다. 그것이 내 힘이 아니고 성령의 힘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난 후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성령이 내 인생을 인도하신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의 “사고의 변화”를 유도하십니다. 성령은 때로 힘의 성령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성령을 불로 바람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의 사고의 틀을 바꾸어 놓으시기도 합니다. 제자들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전과 후에 사고의 틀이 완전히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부활 이전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때로 혼돈하고 헤매기도 하고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을 받고 나서 제자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하게 인식하였고 진정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거기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옛말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알아야 힘이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진정으로 알게 된 후부터 주저함 없이 겁 없이 나아갔습니다. 정확하게 복음을 전달하고 전파하고 소개하고 알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증언을 듣고 3천 명, 5천 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만나고 알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는 예수를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보지도 않고 아는 소리를 합니다. 그때 하는 말은 모두 자기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곡해를 하고 잘못된 신학을 말하고 잘못된 신앙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잘못된 신앙이나 신학이나 이단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래 믿은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만나지 못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부분 이론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을 주장하고 잘못된 주장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론의 신앙은 제주도에 가 보지도 않고 제주도를 안내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사람이 또 더 우기고 고집을 부립니다. 성령은 체험해야 알 수 있습니다. 만남이 있어야 깊이 알게 되고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만나게 되면 그 성령은 내 판단, 내 생각, 내 주관, 내 이성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관이 달라지고 내 생각이 달라지고 내 주관과 내 이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내 사고의 틀을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내가 정확하게 신앙고백을 하게 되고 복음의 핵심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와 회심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평안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평안은 오늘 우리가 말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게 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 사후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핍박이 기다리고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자들의 앞날에는 결국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 사후 다락방에 숨은 것입니다. 다락방은 들어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제 갈 곳이 다락방 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두려웠고 그 두려움 속에서 제자들은 숨을 곳이 필요했는데 그곳이 다락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미래가 암담하고 앞날이 험난함을 알고 다급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금식기도 하였을 것이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은 수고 없이 쉽게 그냥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락방은 용광로와 같은 곳입니다. 용광로는 들어가면 다 녹습니다. 나의 형체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기대함과 같이 마침내 성령을 받습니다. 제자들은 그날 비로소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 안에서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주신 말씀이 “평안을 너희에게 주리니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평안은 안락한 환경이나 좋은 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이부자리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평안은 죽음의 자리에서도 느껴지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평안입니다. 환경과 처지에서 주어지는 평안이 아니고 하늘이 주는 담대함의 평안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입니다.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이 주어질까요? 그것은 바로 의존함 입니다. 전적인 의존입니다. 나의 삶 전체를 주께 맡기고 위탁하고 의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존이 없이는 성령의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이 그날 얼마나 자신들을 내어 놓았겠습니까. 너무 다급하였습니다. 전적 의존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비우는 일입니다. 내안의 인간적인 것들, 내가 세운 알량한 계획들, 내안의 더러운 죄 짐들을 다 내려놓고 비워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주실 은혜를 채우려면 내 내면을 비워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을 성령께 완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후에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여 얼마나 몸부림을 쳤습니까? 그 몸부림은 다 내려놓음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전적으로 위탁함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성령 받을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자기 비움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런 몸부림이 있을 때 성령이 내 인생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렇게 된 후에야 진정한 제자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이제 다 내려놓고 성령께 나를 위탁하십시다. 다 맡기고 다 내려놓고 전적으로 의지하십시다. 그러면 성령께서 내안에 내주하셔서 내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별세와 그 유익
요 14:25-31 / 김영규 목사
다가온 주님의 별세
주님의 별세가 본문의 주제입니다. 주님은 육신적으로 제자들 곁을 곧 떠나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25.28) 이 말씀을 하신 시점은 십자가에서 못 박하시기 전 날입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주님은 떠나십니다.
이별은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요, 가장 서글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입니다. 연인 사이의 이별, 친구 사이의 이별, 부부 간의 이별, 부모 자식, 혹은 형제들 사이의 이별 등등. 이별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때로는 이별 대신 죽음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별합니다. 세상에서의 이별은 不可抗力의 일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떠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떠나신다는 말씀이 12번 이상 나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고별사를 들으면서 근심에 빠졌습니다.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16:5-6) 무슨 대의명분 때문에 근심한 것은 아닙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전혀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가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둘째는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근심했습니다. 뭔가 얻을 줄 알고 주님을 따랐는데! 주님이 떠나신다면 우리는 닭 쫓던 개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아닌가?
오늘 죽음 앞에 선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이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삶의 변화가 두렵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예로 들어봅시다. 가정이란 매우 탄탄한 반석 같지만 한 사람만 빠져 나오면 쉽게 흔들립니다. 경제가 흔들리고, 자녀 교육이 흔들리고, 공동체의 안전이 흔들립니다. 갑자기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삶에 빠집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그러나 두려움이나 근심은 결코 유익이 없습니다. 근심의 결과는 오직 한 가지, 사망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제자들은 주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실상 주님의 별세는 근심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별세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따라서 큰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별세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유익을 보장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깨닫고, 큰 유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별세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별세가 하나님의 계획이란 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주님은 어떤 철저한 계획 아래 움직이고 계십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25)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28)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3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31) 아직 함께 있지만 곧 떠난다! 갔다가 너희에게 온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말한다! 곧 세상 임금이 온다! 그 세상 임금은 아무 권한이 없다! 나는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의 생애는 성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만 ‘아버지’란 말이 23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생애와 아버지는 불가분리적인 관계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곧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봉사, 고난, 죽음, 부활, 승천, 재림, 이 모든 것이 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입니다. 혹자는 생각하기를 예수님의 생애는 마귀 때문에 많은 벽에 부딪쳤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권력자들과 자신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 여기 “관계할 것이 없다”는 표현은 아무 권한이 없다는 뜻입니다. 유다의 반역, 로마 군병들의 체포, 빌라도의 심문, 사형선고, 십자가 죽음. 이 모두가 마귀의 권세 때문에 이루어진 일들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른 일정일 뿐입니다. 마귀는 예수 생애에 단 한 점의 영향도 주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에 터럭만큼도 방해하거나 막지 못했습니다. 마귀는 단 한 번도 예수님과 공동의 목표를 가진 적이 없고, 공동의 관심사를 나눈 적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이 주님의 행동을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는 단순히 가룟 유다의 배신이나 로마 총독이 일으킨 사건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패배도 아니며, 구원의 실패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포기하신 것도 아니며, 죄인들을 포기하심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직 아버지가 설계하신 구원의 드라마에 클라이막스입니다.(엡1:3-6,고전1:18)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의 방편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롬8:31-32,38-39)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십자가는 종점이 아니라 한 없이 높아지시는 출발점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8-11) 십자가는 제자들에게는 더 큰 축복의 시작이요, 주님에게는 가장 존귀한 자리로 복귀하시는 귀환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별세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들은 정말 주님의 십자가를 기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한 계획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외형상 고난의 상징이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은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나 번영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고난과 실패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모든 생애가 아버지의 뜻이듯이, 제자들의 생애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성취됩니다. 주님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우연이 아니며, 허술한 인간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의 생애도 마찬가집니다. 막연하고 우연한 삶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신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 뜻은 지금도 성취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극단적인 십자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오늘 우리의 생애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애를 설계하시고, 우리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오늘 내 자신의 생애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세요. 하나님은 지금 나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성공과 성취를 통해서도 일하시지만, 때로는 내 삶의 실패와 아픔, 고통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출생과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지만 때로는 죽음을 통해서도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깨닫고 믿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내 생애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행13:47) 주님이 별세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유익을 보장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주님이 떠나심으로 주신 첫 번째 유익은 성령이 오신 일입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앞서 말씀드린바 있습니다만, 본문26절에서 또 반복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26) 성령의 출처를 다시 한 번 밝히십니다. 아버지로부터 오시되 예수 이름으로 보내십니다. 15:26에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소개합니다. 성령은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며, 동시에 예수님께로서도 나오십니다. 성부와 성자가 다 성령의 출처가 되십니다.
성령의 최대 역할은 진리 교훈입니다. 신앙은 인간에게 가장 고차원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지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자기가 기왕에 가지고 있던 모든 철학과 율법과 사상과 신분과 지위를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신앙은 최고의 지식을 제공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주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인간 영생의 지혜를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 관한 신령한 지식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지식은 전혀 생소한 것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가르치신 사실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우리 마음에 깨닫게 하십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26)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사람의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14)
성령은 교회의 안내자입니다. 성도 개개인에게 신앙의 길을 제시하고 유지토록 하십니다. 성령은 교회의 설립자십니다.(행2:1) 성령은 복음의 증거자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5:32) 베드로와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외쳤습니다.(행4:8, 5:27) 성령은 예루살렘 성도들 무리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감격적인 체험을 주셨습니다.(4:31) 성령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교회의 악을 제거하셨습니다.(5:3,9) 성령이 집사를 세우시고,(6:3,5) 성령이 스데반을 순교케 하셨습니다.(행6:8,10,7:55) 성령이 빌립에게 구스 내시를 전도케 하시고(8:29,39) 성령이 베드로에게 고넬료를 찾아가라 하셨습니다.(11:12)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세우시고,(13:2,4) 성령이 바울에게 아시아 전도를 마치고 마게도니아로 건너가게 하셨습니다.(16:6,7)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
성령은 예수님이 떠나심으로 우리에게 오신 최대의 유익한 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만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을 아시고 성령께 순종하시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주님이 떠나심으로 주신 두 번째 유익은 평안, 혹은 평화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얻은 두 번째 선물입니다. 평안은 인류 최대의 주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평화를 찾는 방랑자들입니다. 이 세상에 평화가 어디 있는가, 찾아 헤맵니다.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미국에 있습니까, 스위스에 있습니까? 아니면 스웨덴이나 남태평양, 혹은 아마존 정글 속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가 없는 줄 알고 죽음으로 평화를 찾습니다. 죽으면 평화 세계가 내게 다가올까요?
어떻게 하면 평화가 이루어질까요? 사상가들은 새로운 사상의 진보가 평화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인이나 혁명가들은 새로운 제도나 혁명이 평화를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합니다. 병법가들은 군사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려 하고, 문명의 신봉자들은 문화가 발전하면 평화 세계가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법률가는 법으로, 사회학자들은 망가진 인간의 도덕과 양심에 호소하기도합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 평화는 없습니다. 성지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를 취재한 KBS 기자들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 땅에 종교는 있는데 평화는 없다! 오늘 이 땅에 평화가 어디 있습니까? 전쟁은 없는데 평화도 없습니다. 음식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만족은 없습니다.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첨단 과학은 우주를 향한다고 하는데도 평안은 없습니다. 병원에서 맹장, 위, 심장, 간, 신장, 뼈, 골수까지 수술할 수 있는데 인간의 마음은 수술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풍족해도 평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는 마당에 평화의 주제로 돌아오셨습니다. 인간 최대의 꿈인 평안이 어디에 있느냐? 주님이 오신 목적이 평화 문제의 해결이요, 인간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주님이 주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평화의 所在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평화의 능력이 없습니다. 평화가 인간 본성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평화의 능력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란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각 나라마다 평화와 관련된 인사말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 인사말에 “안녕하십니까?”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샬롬(평화)이란 인사말이 있습니다. 영어에 헤어질 때 인사말에 good by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God be with you란 말의 준말입니다. 사람마다 평화에 대한 기대를 하지만 평화는 원래 사람에게 없고 막연하지만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평안이 인간 자신에게 없음을 압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기대합니다.
주님은 오늘 확실히 말씀하십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나의 평안” 이란 말은 평안의 소유자가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주노니”란 말은 “divdwmi”(디도미)로써, gift 곧 선물을 준다는 뜻입니다. 평안은 예수님의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말을 환언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평안이 온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 조약을 천개 만개 맺을지라도 진정한 평안은 유지되지 못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당사자들이 모여서 국제연맹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서로 전쟁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어요. 이번에는 더 죽도록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국제연합이란 것을 만들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유엔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전쟁이 그쳤나요? 오히려 전 인류는 두 편으로 나뉘어 반세기 동안의 냉전을 치렀습니다. 그 냉전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우리가 겪은 6.25는 바로 동서 냉전의 산물입니다. 한미 방위조약이 평화의 수단이 아닙니다. 법이 나, 국가 권력이나, 군대와 경찰도 평화의 수단은 아닙니다. 인간 속에 평화의 능력이 없는 한 평화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화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우리는 평화를 얻기 위해서 인간적 노력을 기울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제가 어떤 곳에 갔더니 문마다 “이 집에 들어오는 이에게 평화”란 귀절이 붙어있습니다. 평화라는 글귀가 붙어있다고 그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다 평화로울까? 평화는 구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을 통해서만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평안과 다릅니다.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누가 손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영원합니다. 잠시 얻는 위안이 아닙니다. 한번 얻으면 영원히 지속됩니다. 셋째로, 절대적입니다. 상대적으로 느끼는 감정상의 상태가 아닙니다. 환경에 영향 받지 않습니다. 헬라인들은 소극적 의미에서 평화를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 합니다. 그러면 망우리 공동묘지도 평화인가요? 서로 사랑치 않고, 서로 돕지 않고, 서로 무관심해도 싸우지 않으면 평안인가요? 오늘 세상 사람들이 다 이렇게 잘못 생각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평화를 좀 더 적극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자체를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끝없는 교감이 있습니다. 사랑과 신뢰와 소망의 교제가 있습니다. 생동하는 기쁨과 생명의 교류가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평안이요 평화입니다. 즉, 구원의 확신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미래를 보장 받는 평안입니다. 축복의 확신 때문에 오는 신앙의 평안입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 던져졌어도 평안했습니다. 그는 파사 왕에게 오히려 문안합니다. “왕이여 만세수 하옵소서”(단6:21) 전도하다가 귀신들린 여자를 고쳐준 죄로 빌립보 감옥에 갇혔던 바울은 옥중에서 실라와 함께 찬송을 불렀습니다.(행16:25) 예루살렘의 지하 감옥에 갇혀서 내일이면 사형당할 운명에 있던 베드로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깊은 잠에 떨어져 천사가 와서 깨울 때까지 몰랐습니다.(행12:6-7)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던 사울 왕은 정신이 산란해서 잠을 못 이루었어도, 들판에서 양을 치던 다윗은 악령들이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단잠을 잤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긴 항해 중에 유라굴로라는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군인도 선장도 선주도 혼비백산해서 정신이 빠졌어도, 바울은 뱃전에 서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2-25)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에서 평화 찾지 마세요. 오직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신 직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0:19,21,26) 그리고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20:22) 주님의 평안은 별세하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이 평안을 얻으세요.
성령이 오셨네
요 14:25-27 / 이정익 목사
예수께서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곧 성령이 임하실 것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성령을 받으라(행 1:4-5).”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도행전의 약속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예수 탄생의 사건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입니다. 육신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 후 영으로 다시 오순절날을 기해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종횡무진으로 사역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가 오시면 너희를 가르치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알게 하고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칼 바르트라는 20세기의 대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 분은 평생 기독론 즉 예수에 대한 연구만 해 왔습니다. 그가 평생에 쓴 원고의 양이 약 3만 페이지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중 2만 페이지는 예수에 대해서 쓴 원고입니다. 그는 평생 기독론을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게 좀 더 시간이 있으면 성령론을 연구하고 싶다. 21세기 신학은 성령론이 중심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성령론은 신학계에서는 적용이 적습니다. 그런데 목회현장에서는 더 없이 필요합니다. 목회현장에서는 성령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회현장에서는 매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전 세계에 600백만 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매주 2천여 개 씩 교회가 개척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재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곳에 성령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데이비드 브라이언트는 미국교회는 매주일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만 그런데 그중에 50%는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중 95%의 신자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의 내용도 모르고 있다고 말하였고 또 미국 신자의 2%만 전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성령의 역사를 모르는 신자는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말이고 성령의 역사를 모르면 전도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성령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것을 모르듯이 성령의 역사도 눈으로는 보이지도 알지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령은 지금도 우리 곁에 오셔서 아주 강하게 그러나 아주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활동하고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게
본문을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3절을 보면 “성령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은 알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고 만나게 하고 믿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베드로가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이것은 네가 안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알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지식은 보잘 것이 없고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내가 안다는 것은 아주 보잘 것이 없는 차원의 앎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내가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은 성령이 나로 하여금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하나님을 연구하지만 하나님은 연구해서 만나고 알고 발견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연구해서 얻어지고 알고 발견되는 세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적인 세계이고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은혜를 입어야 알고 발견하고 느끼고 체험하게 되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가 너희에게 알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는 것이 변화입니다. 사람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일입니다. 내가 변화 받았다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은 내가 변화 받았다는 아주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파이퍼(David Piper)라는 분은 간증하기를 어머니로부터 훌륭한 믿음을 전수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은 지극히 개념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개념적인 믿음은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전달되지는 못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모태신앙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 차원입니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방탕한 삶을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 사람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몸부림 칠 정도가 되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진다는 지점이 복된 지점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한 달간 기도하는 동안 어느 순간에 성령이 임재하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그는 황홀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순간 하나님의 불이 뜨거운 액체처럼 내게 흘러 들어왔다. 그 액체가 목구멍과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흘러 들어가더니 내 속에서 다이너마이트처럼 폭발했다. 그 순간 나는 알코올중독에서 벗어났다. 그때 마약에 대한 기억이 내 오감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후 헌신해서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함께 할 때 받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성령의 임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이해하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말씀이해와 실천하게
성경은 영감의 책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사람이지만 원 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말씀을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을 읽을 때 성령이 임하시고 중생하게 하시고 영적성장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때로 성경을 읽어도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또 설교를 들어도 무슨 말인지 도대체 모를 때가 있습니다. 새신자들에게는 이 두 가지는 모두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읽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잠만 쏟아지는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성경은 수면제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령은 바로 그런 때 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말씀을 읽을 때 주어지는 은혜이고 능력입니다. 무슨 능력이냐 하면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나의 내면에서 힘이 솟아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을 끊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이 솟아납니다. 옛 생활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용기가 발생합니다. 봉사하게 하되 아주 기쁨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게 합니다. 또 나는 할 수 없는데 내 안에서 자꾸만 나누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하게 합니다. 이것은 모두 내 안에서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 성장시키심
마태복음16장18절을 보면 “내가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6-7절에서는 “나는 심었고 아불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목회현장에서 목회의 주체는 사람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고 성령이 나를 통해서 사역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 뿐 입니다. 때로 이 해석이 잘못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그때 교회가 잘못되는 것입니다. 때로 개중에는 내가 교회를 부흥시킨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성령이 나를 통해서 하신 것입니다.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 뿐 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 도구로 지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오늘도 교회를 부흥하게 하고 변화하게 하고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회개의 역사를 일으키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장의 영이시고 선교의 영이십니다. 사도행전은 선교의 주체는 사도들이 아니고 성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내 안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전도자로 나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선교하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장하는 교회는 모두 성령을 강조하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들입니다.
세상 변화 - 하나님 나라 이룸
성령은 교회 안에서 성도들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세상에서도 역사하여 세상도 변화시키십니다. 성령은 역사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십니다.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단순히 성도들만 회개시키고 전도하게 하는 것만 아니고 성령은 이 세상도 변화하게 하고 그 변혁을 주도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십니다. 그런 모습이 초대교회 때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 안에 성령이 충만하게 되니까 모두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살고 구제하고 그 나눔의 삶이 마침내 로마의 지배 하에서도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왕성하게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기원 165년에 로마전역에 전염병이 만연했습니다. 그 전염병이 15년 동안 로마제국의 인구 12분의 1을 죽게 하였습니다. 그 후 기원 251년에도 또 한 번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그때는 도시가 텅 비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이 서로 돌보고 교회 밖의 사람들까지 돌보았습니다. 그때 디오니소스 주교가 그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당시 크리스천 형제들이 자신을 아끼지 않고 서로를 생각하고 끝없이 사랑으로 돌보아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고 기쁘게 그들의 고통을 받아들이다가 병자들로부터 병을 옮겨 받아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성령은 2천 년 전에 다락방에 오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때 강림하신 성령은 오늘도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역사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말씀을 이해하게 하고 사역에 권능을 부여하십니다. 교회를 성장하게 하시고 또 세상을 변화하게도 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곁에 오셔서 각종 병을 치료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고 능력을 입하시고 성령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왜 충만하지 못하는가
그런데 왜 우리는 성령에 충만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내면이 너무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지금 각종 욕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 내안에는 온갖 욕망들로 충만해 있습니다. 거기다 불신앙이 또 가득합니다. 그리고 내안에 각종 우상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성령을 속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내가 매일같이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거기다 우리는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내 안에 들어있는 이 죄성들이 가득하고 목이 곧고 완고하고 완악하고 의심이 많고 죄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습니다. 이사를 가려면 집을 청소해야 사람이 들어올 수 있듯이 내안을 이렇게 청소하고 청결하게 해야 성령께서 내안에 임하실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들이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 영에 충만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이 나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에베소서 5장에서 술의 충만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술에 충만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술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현상입니다. 사람이 술에 충만하게 되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의지표현이나 발걸음이 모두 술이 시키는 대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술에 점령당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술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내가 술에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충만은 그 반대현상을 말합니다. 내가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내 의지가 성령에 의해서 전적으로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의지표현이나 발걸음이나 뜻이나 목적이 모두 성령이 주시는 대로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에 충만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술에 충만하게 되면 술이 내 의지를 주도하여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게하고 추태를 부리게 하고 싸우게 하고 주정하게 하듯이 내가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내안에 성령이 말을 많이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이 쓸데없는 말이 아니고 생산적인 말을 하고 전도의 말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힘을 주셔서 밤새워 기도해도 피곤이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간증을 하고 고백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는 능력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모습은 이런 모습입니다. 어느 가정에 탈옥 무장 강도가 침입하였습니다. 남편은 무서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침착하게 손님 대하듯이 “그 무거운 총 놔요, 서 있지 말고 앉아요, 맛있는 아침 식사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하고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그 행동이 너무나 태연하였습니다. 강도가 생각하니까 너무 이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리 지르며 “너는 내가 무섭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대답하기를 “나는 예수 믿어요. 나는 당신이 죽이면 천국에 가니 무서울 것 없어요. 당신도 나의 이 마음을 가질 수 있어요.”하고 의연하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새벽 3시에 침입한 이 강도와 아침 10시까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마침내 이 강도가 자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음과 생각과 용기와 결단력이 성령이 주시는 힘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힘입니다. 지금 이 죄수는 총을 가지고 그 집을 컨트롤하고 있습니다. 그 강도는 지금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다 죽일 수도 다 살릴 수도 힘을 과시할 수도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은 이 컨트롤이 지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나치나 일본이나 공산주의나 국수주의나 독재정권은 이 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도 가정에서, 국가에서, 회사에서, 직장에서 이 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힘으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는 이 컨트롤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또 다른 파워 때문입니다. 그 또 다른 파워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민주주의의 힘입니다. 이 민주주의의 힘이 공산주의나 독재 그리고 히틀러나 일본을 무너트렸습니다, 또 하는 햇빛입니다. 비바람이나 태풍은 다 뒤엎을 수 있지만 그때 사람들은 더 단단하게 붙들어 매게 됩니다. 더 두꺼운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햇빛은 다 벗게 합니다. 이것이 햇빛의 힘입니다. 그리고 제일 강한 힘은 성령의 힘입니다. 이 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대 로마제국의 독수리만 보아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 성령의 힘과 복음의 힘에 의하여 로마는 무너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힘은 컨트롤의 힘이 아니고 성령의 내적 파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1절에서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하고 외쳤습니다. 베드로는 비겁하고 용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을 받고 나서 나가 전도하니 3천 명씩 5천 명씩 회심하는 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성령이 너희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