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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맥불변(菽麥不辨)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菽 : 콩 숙(艹/8)
麥 : 보리 맥(麥/0)
不 : 아닐 불(一/3)
辯 : 가릴 변(辛/9)
(준말)
숙맥(菽麥)
(유의어)
목불식정(目不識丁)
불변숙맥(不辨菽麥)
어로불변(魚魯不辨)
오곡불분(五穀不分)
일자무식(一字無識)
숙맥(菽麥)이란 콩과 보리를 뜻하는 명사이며, 숙맥불변(菽麥不辨)이란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에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말하면 ‘저런 숙맥 보았나’ 처럼 숙맥만을 쓰면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하지만 숙맥을 숙맥불변의 준말로 인정해 흔히 그렇게 쓰고 있다. 그것은 마치 ‘추책없다’를 ‘주책’으로 쓰는 것처럼 뒷부분의 부정소(否定素)를 생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어리석고 고지식한 사람을 가리켜 쑥맥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쑥맥은, 더 정확히 말해 숙맥불변의 잘못된 표현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숙맥을 강조하려는 뜻에서인지 흔히 쑥맥이라고 발음하고 표기한다. 그러나 이 말은 숙맥불변이라는 한자숙어에서 온 말이기 때문에 숙맥 또는 숙맥불변이라고 해야 옳다.
숙맥(菽麥)과 같은 뜻으로 ‘쑥’이라는 말도 쓰는데 이것은 숙맥(菽麥)을 더 줄여서 숙(菽)만 따고 그것을 강하게 발음한 데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 영 쑥이구먼’이라 쓰는 게 그 예(例)다.
요즘은 숙맥을 똑똑하지 못한 사람을 말한다기보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 또는 초연한 사람, 어떤 의미에서는 순진무구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 속담으로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와 같은 의미로 통한다.
콩인지 보리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팔자가 좋다는 뜻으로, 모르는 것이 마음 편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숙맥이 상팔자’라는 속담도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18년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의 도공(悼公)에게 형이 있었는데 우둔하여 아무 일도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관직이 없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콩과 보리도 구별못한다 하여 숙맥불면(菽麥不辨)이라 표현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에는 왕권 쟁취를 위한 분란이 일고 있었다. 그 당시, 진나라 왕 여공(여公)은 서동(胥童)만을 신임하였으므로, 나라의 대사는 모두 서동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렇다 보니 많은 대신들의 불만이 점차 커져갔는데, 결국 서동은 란서(欒書), 중행언(中行偃) 등의 대신들의 손에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들 대신들은 여공의 보복이 두려워, 여공 마저 죽여 버리고, 진나라 양공(襄公)의 증손자인 주(周)를 왕위에 앉히고자 하였다. 때는 기원전 573년, 그의 나이는 열 넷이었다.
주(周)는 대신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이런 일은 당초 제가 원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군주를 원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명령을 내리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주를 세우고 그의 명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군주가 어찌 필요하겠습니까? 몇몇 분들이 저를 군주로 세우고 세우지 않고 하는 것은 오늘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공손하게 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신의 복을 받을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 대부들이 말했다. “그것은 바로 저희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군주로 세워 놓고 어찌 명에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주자(周子)에게는 형이 있었지만 지혜가 없어서, 콩과 보리도 분간하지 못하였으므로 임금으로 세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周子有兄而無慧, 不能辨菽麥, 故不可立.
논어(論語) 미자편(微子편)에 5가지 기본적인 곡식조차도 분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쓰는 말로 오곡불분(五穀不分)이라는 성어가 나온다.
공자(孔子) 일행을 따르던 자로(子路)가 산길에서 일행을 놓치고 우연히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을 만나 나누는 대화이다.
자로(子路)가 물었다. “우리 선생님을 보지 못했는지요?”
노인이 답하기를 “손발을 부지런히 놀리지 않고, 오곡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이라 하겠는가.”라며 지팡이를 땅에 꽂고는 잡초를 뽑았다.
四體不勤, 五穀不分, 孰爲夫子.
자로가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자, 노인은 자로를 묵어가게 하고, 닭을 잡아 수수밥을 지어 먹인 뒤 두 아들까지 만나게 해주었다. 이튿날 자로가 일행을 따라잡아 공자에게 이 일을 아뢰니, 공자는 “그는 은자(隱者)로다”라고 말하였다.
세속을 떠나 숨어 사는 은자에 관해 말한 대목이다. 노인이 처음에는 손발도 놀리지 않고, 오곡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어찌 선생이라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음에도, 자로가 두 손을 모으고 묵묵히 서서 경의를 표하자 그 사람됨을 알아보고 마음에 끌려 자로를 묵어가게 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공자는 그 노인을 은인(隱人)이라 여겼던 것이다.
오곡은 이설(異說)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벼, 보리, 기장, 콩, 피를 가리킨다. 답답한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쑥맥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원래 쑥맥이란 말은 숙맥불변(菽麥不辨)이란 한자에서 나왔다. 숙맥이 쑥맥이 된 것은 강하게 발음하려는, 우리말의 경음화(硬音化) 현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숙(菽)은 콩숙(菽)이요, 맥(麥)은 보리맥(麥)이라, 즉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숙맥(菽麥)인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숙맥만 살아 남았으니 머리만 남은 꼴이 되었다. 하지만 숙맥이라 해도 여전히 그 의미가 통하는 것을 보면 여간 신통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콩과 보리를 구별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만큼 콩과 보리의 중요성을 언급한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에 이익(李瀷)이라는 실학자가 있었다. 그분은 실학자 가운데서도 특별하게 콩의 실용성을 언급하였다.
택리지(擇里志)를 지은 이중환(李重煥)이나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지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모두 성호(星湖)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만큼, 양반 중의 양반이었지만 직접 농사를 지었을 정도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그대로 실천하신 분이었다.
이익 선생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백성을 살리는 데는 콩의 힘이 가장 크다’라고 하였다.
조금 더 인용해 보면 ‘콩은 오곡 중 하나인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을 주로 한다면, 콩의 힘이 가장 크다. 후세 사람들 가운데 잘 사는 사람은 적고, 가난한 사람들은 많다. 가난한 백성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콩뿐이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는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지만 콩의 영양에 대한 언급은 그분의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실제 경험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콩은 만주와 한반도 일대가 원산지로 동남아가 원산지인 쌀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했던 곡식이다. 쌀은 조선 초기부터 오곡에 합류했지만 콩은 선사(先史) 이래 오곡이었던 식품이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콩, 보리, 기장, 피, 참깨가 오곡이었고, 쌀은 고려시대 부터 오곡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오곡이라면 쌀, 콩, 보리, 조, 기장을 말한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조나 기장 대신 수수, 팥이 들어가기도 한다.
사실 콩을 곡식이라 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 곡물의 주성분은 탄수화물이지만 콩의 주성분은 단백질이다. 현대 영양학에서는 콩은 두류로 따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두리뭉실하게 얘기할 때는 콩 역시 곡식이다. 일찍이 콩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일본, 중국, 인도 등에서도 항상 중요한 오곡이었다.
콩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현대의 숙맥(菽麥)이란 콩을 가까이 두고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특히 단백질의 부족으로 체력이 저하되어 있거나, 골밀도가 약해 약골로 불리는 사람들은 숙맥이란 말을 곱씹어 봐야 할 것이다. 또 고혈압이나 유방암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어떻게 얼마만큼 콩을 먹고 있는지 점검해 볼일이다.
콩은 이익 선생이 살았던 조선시대에서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서나 여전히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중요한 음식이다.
물은 언제나 낮아지려 하고 다투어 경쟁하지 않는다. 물은 땅에 떨어지면 스며들기 마련이며 자신의 모습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용기나 그릇으로 담아도, 어떠한 공간에 있어서 자신의 모습을 그것에 맞출 수 있는 것이다. 물은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간다.
장미꽃이 활짝 피었다. 그런데 그 장미를 피우게 한 것엔 물의 역할이 크다. 그 물은 장미에게 ‘내 도움이 있었기에 네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야. 왜 내게 고맙다고 안 하니?’라고 말하는 법이 없다.
물은 자신의 도움 그 자체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 물의 힘은 능히 인류를 멸망 시키고 남음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얘긴 나라마다 민족마다 얼마든지 있다.
러시아의 바보 이반은 톨스토이 덕분에 세계 제일의 유토피아 문학 주인공으로 이름을 날리는가 하면 중국 대륙의 큰 바보가 노신(魯迅)의 붓끝에서 아큐로 환생하여 변혁기에 제 몸 사리는 일로 눈치만 발달된 먹물 든 식자(識者)를 더욱 부끄럽게 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 숙맥불변(菽麥不辨)
흔히 바보를 숙맥(菽麥)이라 한다. 바보는 밥보의 준말로 밥만 축내는 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숙맥(菽麥)이라 함은 숙맥불변(菽麥不辨)의 준말로 콩과 보리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남들이 죄다 귀중하게 여기는 것을 우습게 보고 남들이 천하게 보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가리켜 바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무슨 사회의 지도자가 된다든가 종교의 시조가 된다는 말은 어림도 없는 밀일텐데 그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왕자의 영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자리를 버리고 노예들과 함께 사막에서 온갖 굶주림과 고통을 겪으며 방랑의 생애를 마감한 모세는 지금도 살아 있어 해방으로 가는 모든 길에서 민중을 이끌고 있고,
특권을 누리는 가문에서 태어나 많은 교육을 받고 존경받는 라삐가 되어 평안히 살아갈 수 있었던 사울은 죄없이 얻어맞고 옥에 갇히며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겨야 했으나,
그 모든 고난을 자랑스레 여기며 지난날 누렸던 온갖 혜택을 오히려 똥처럼 여겼다. 그러니 과연 어처구니없는 바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예수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바보였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 40~41절에 있는 말씀이다. “누가 오름 뺨을 치거든 왼 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
한말(韓末)의 승려(僧侶)로 용암(龍岩)의 법을 이은 후 범어사(梵魚寺)의 조실(祖室), 수선사(修禪社) 불사(佛寺)의 법주(法主)등을 지내시고,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의 증사(證師)가 되었다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그후 범인(凡人)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기행을 하신,
경허선사(鏡虛禪師)께서도 이르기를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 움직이지 않기를 산과 같이 하고 마음을 넓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지혜로 불법 생각하기를 날과 달같이 하여 남이 나를 옳다고 하든지 그르다고 하든지 마음에 두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 참견하지 말고, 좋은 일을 당하든지 좋지 못한 일을 당하든지 마음을 평안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남 봄에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소경같이 귀머거리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마음에 절로 망상이 절로 없어지느니라.”하였다.
또한 사도 바울도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 18~21절에서 “여러분 중에 혹시 자기가 세속적인 면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글들은 스스로 바보가 될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다.
옛날에 아랫목에서 밥 먹고 윗목에서 똥을 사는 바보 천치가 있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보다 못해 “남들은 화전(火田)도 일구고 밭에 나가 씨도 뿌리는데 너는 어째서 그렇게 빈둥거리고만 있느냐?”
야단치며 조를 한 되 얻어 주었다. 이 바보가 조 한 되를 밭에다가 심는데 구덩이를 크게 파고는 거기에다가 한 되를 모두 부어버렸다.
싹이 난 뒤 이웃 사람이 보니 콩나물 시루처럼 되었는지라, 모두 뽑아내고 하나만 남겨 두었더니 그놈이 크게 자라 팔뚝만한 이삭이 달렸다.
이삭을 메고 의기양양(意氣揚揚)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는 어머니가 한심해서, “엣다, 그놈 가지고 나가서 빌어먹든지 말든지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말아라.”
바보는 조 이삭을 어깨에 메고 어디만큼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었는데 주막 주인에게, “이 조 이삭은 임금님께 드릴 거니까 잘 맡아주시오.” 부탁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일어나 보니 조 이삭이 없구나 어찌 된 일인고, 알아보니 주막 집 쥐가 모두 먹어버렸다. “그럼 쥐라도 대신 내놓으시오.”
떼를 써서 주막 집 쥐를 가지고 또 어디만큼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었는데 이번에는 밤 사이에 그 집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어 버렸다. “당신네 고양이가 쥐를 잡아 먹었으니 대신 고양이를 내놓으시오.”
바보는 고양이를 가지고 어디만큼 가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고양이가 죽어 있는지라, 주인에게 물어내라고 닦달을 하니 고양이 죽인 개를 내놓았다.
개를 끌고 어디만큼 가다가 주막에 들었는데 그날 밤, 주인집 딸이 머리 감은 물을 먹고 개가 죽었구나. 바보가 개를 물어내라고 떼를 써서 마침내 개 대신 색시를 얻었는데 어떻게 가지고 갈까 궁리 끝에 뒤주에 넣어서 가기로 했다.
색시를 뒤주에 넣어 지고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날이 저물어 주막에 묵었더니 주막 주인이 뒤주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 몰래 들여다 보고는 색시가 있는지라 얼른 색시를 꺼내고 대신 비지를 가득 넣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가 색시 대신 비지를 지고 집으로 오는데 뒤주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니까 하는 말이, “오줌 싸더라도 똥일랑 싸지 마라. 남들이 보면 색시 지고 간다랴? 뒤주 지고 간다지. 색시 지고 간다랴? 뒤주 지고 간다지.”
어느덧 집에 온 바보가 어머니를 불러 큰 소리로, “뒷집 가서 차일얻고 앞집가서 젯상얻어 물 떠놓고 잔치합시다. 며느릿감을 구해왔소.”
어머니가 신이 나서 잔치 준비를 한 다음 뒤주를 열어보니 색시는 커녕 비지가 가득이라. 화가 나서 “색시가 어디 있냐?”소리를 지르니 바보가 의뭉을 떨며 대답하는 말이, “뒷집가서 된장얻고 앞집가서 간장얻어 비지 끓여먹자 했지, 내가 뭐랬소?”
바보는 조 이삭이 쥐가 되고 쥐가 고양이로 바뀌고 고양이가 개가되고 마침내 개가 색시로 바뀌어 조 이삭 하나가 색시로 교환되는 이 눈알이 나올 만큼 황홀한 상황에도 끝내 흥분하거나 거기서 더 큰 무엇을 얻고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평사원이 계장이 되고 계장이 과장으로 과장이 부장으로 부장이 처장으로 처장이 상무로 그냥 막 무풍지대를 치달리는데도 아무 감흥이 없다.
그러니 색시가 어느 결에 비지로 바뀌는 이 황당한 처지에도, 엄청난 몰락과 변전에도 바보는 태연자약이니 누가 그를 파멸시킬 수 있나. 있지도 않은 적을 무찌를 군사는 아무 데도 없는 법이다.
그렇다. 우리는 바보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곧 길이요 진리이며, 옛 성현들의 지혜인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때로는 정직함이, 그리고 순수함이 부적합한 모습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그보단 오히려 약삭빠름과 처세, 간교와 재주가 더 어울리는 모습인 듯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사느니 정직함을 버리는 게 낳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 때도 있을 것이다.
시험 볼 때 모두가 컨닝하는 속에서 F를 맞는 한이 있어도 정직하게 보는 것, 직장에서 모두가 뇌물을 받고 건성건성 일하는 가운데서 더 이상 유익할 것이 없어도 정직하게 일하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꾸준히 노력하며 정진해 나아가는 것,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길을 걷는 동반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못남의 잘남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성공, 명예, 영광, 갈채, 환영은 모두 가져가라. 우리는 뒤에 남은 실패, 좌절, 절망, 모욕, 배신을 끌어안고 그러나 여전히 웃으면서 “뒤주 지고 간다지, 색시 지고 간다랴?” 노래하리라.
어둠이 있어서 빛이 있듯이 제 밥도 못찾아 먹는 어수룩함의 어두운 허공이 이 시절의 모든 눈부신 기교를 받쳐주고 있음을 알아주는 자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지 안을까 생각해 본다.
⏹ 숙맥불변(菽麥不辨)
확실히 아는 것이 없으면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무식하다고 비웃는다. 흙을 고르는 고무래를 옆에 두고도 같은 모양의 丁(정)자를 모른다고 목불식정(目不識丁)이라 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과 같다.
고기 어(魚)자와 노나라 로(魯)자를 혼동했다고 어로불변(魚魯不辨)이라 놀리기도 한다. 어중간하게 아는 것은 잘 한 일인가.
장마당에서 굿판을 구경하는데 뒤에서 난쟁이는 볼 수가 없어 앞사람이 전해주는 대로 덩달아 이야기한다. 이런 왜자간희(矮者看戱)도 욕을 먹는다. 차라리 ‘모르면 약이요 아는 게 병’이란 말을 새기면 맘 편하다.
글자를 모른다고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겠지만 주식으로 매일 대하는 콩과 보리(菽麥)를 구분하지 못한다(不辨)면 문제겠다. 밭에다 심을 때는 같지만 자랄 때나 낟알 모양은 전혀 다르므로 이것을 구분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무식의 정도가 아니라 사리 분별을 못 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고지식하거나 우둔한 사람을 뜻했다. 줄여서 숙맥(菽麥), 또는 센 말로 쑥맥이라 사용하기도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처음 등장하니 역사도 오래 됐다. 진(晉)나라의 여공(厲公)은 국력이 강성해지자 교만과 사치를 일삼고 미소년 서동(胥童)만을 총애했다.
대신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난서(欒書) 등이 일을 꾸며 서동과 여공을 독살했다. 이후 맞아들인 왕이 도공(悼公)인데 왕위에 오를 때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라며 복종하도록 다짐을 받았다. 대신들은 명을 따르겠다며 답한다.
사실 주자에게는 형이 있었지만 지혜가 없어서 콩과 보리도 분간하지 못했으므로 임금으로 세울 수 없었습니다.
周子有兄而無慧, 不能辨菽麥, 故不可立.
주자는 도공의 부친이 周(주)나라 망명 때 낳아 그렇게 불렀다. 도공은 왕권을 강화하고 현명하고 바른 정치를 펼쳐 다시 강국을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다 잘난 세상에서 이처럼 우둔한 사람은 없다.
또 이런 사람은 지도층에 오르지도 못한다. 다만 너무 알아서 자기가 아는 것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더 문제다.
잘 알아도 주위의 의견을 듣고 잘 판단해야 할 일이라도 온갖 자료를 갖다 대면서 합리화시킨다. 이런 유식자보다 경청하는 무식자가 더 나을 수가 있다.
▶️ 菽(콩 숙)은 형성문자로 叔(숙), 尗(숙)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초두머리(艹=艸; 풀, 풀의 싹)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叔(숙)이 합(合)하여 콩을 뜻한다. 그래서 菽(숙)은 ①콩(콩과의 한해살이풀) ②대두(大豆) ③콩잎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콩 두(荳), 콩 두(豆)이다. 용례로는 콩깍지를 숙기(菽萁), 콩나물을 숙아(菽芽), 콩과 물로 변변하지 못한 검소한 음식을 숙수(菽水), 콩과 보리를 숙맥(菽麥), 콩과 조라는 뜻으로 매일 먹는 느끼하지 않고 산뜻한 음식을 숙속(菽粟), 순두부를 숙유수(菽乳收), 콩나물을 숙아채(菽芽菜), 빛이 푸른 콩을 벽숙(碧菽), 세금으로 바치는 콩을 세숙(稅菽), 시아주버니로 남편의 형제를 시숙(媤菽), 콩인지 보리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숙맥불변(菽麥不辨), 콩을 먹고 물을 마시는 가난한 처지에서도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을 숙수지환(菽水之歡), 일반 사람들이 두루 알 수 있는 쉬운 글을 숙속지문(菽粟之文), 콩과 물로 드리는 공이라는 뜻으로 가난 속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부모를 잘 섬기는 일을 숙수지공(菽水之供), 콩을 먹고 물을 마신다는 뜻으로 집은 가난하여도 부모에게 효도를 극진히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철숙음수(啜菽飮水) 등에 쓰인다.
▶️ 麥(보리 맥)은 회의문자로 麦(맥)은 통자(通字), 麦(맥)은 간자(簡字)이다. 來(래; 보리)과 뒤져올치(夂; 머뭇거림, 뒤져 옴)部의 발로 밟는 일의 합자(合字)이다. 麥(맥)은 보리 밟기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본디 來(래)가 보리를 뜻하는 글자였으나 온다는 뜻으로 쓰게 되어 보리의 뜻으론 麥(맥)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麥(맥)은 ①보리(볏과의 두해살이풀) ②귀리(볏과의 한해 또는 두해살이풀) ③메밀(여뀟과의 한해살이풀) ④작은 매미(매밋과의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⑤묻다, 매장(埋葬)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보리 모(牟)이다. 용례로는 여물지 못하고 까맣게 병 든 보리 이삭을 맥노(麥奴), 보리를 심었거나 베어 낸 논을 맥답(麥畓), 이삭이 팬 보리나 밀이 바람을 받아서 물결처럼 보이는 모양을 맥랑(麥浪), 보리나 밀이 익을 무렵의 약간 서늘한 날씨를 맥량(麥涼), 보릿 고개를 맥령(麥嶺), 보리 농사를 맥작(麥作), 보리를 심은 밭을 맥전(麥田), 보리쌀로 빚어 담근 막걸리를 맥탁(麥濁), 볶은 보리를 끓여서 만든 숭늉을 맥탕(麥湯), 밀을 빻아서 체로 가루를 내고 남은 무거리를 맥피(麥皮), 보리 흉년을 맥흉(麥凶), 익은 보리를 거두어 들이는 일을 맥추(麥秋), 밀과 보리를 모맥(牟麥), 쌀과 보리를 미맥(米麥), 보리를 거두어 타작함을 타맥(打麥), 보리를 세로 2등분 한 뒤 다듬어 정제한 보리쌀을 할맥(割麥), 외국산의 밀이나 보리를 외맥(外麥), 밀가루 제조의 원료로 하는 밀을 원맥(原麥), 깨끗이 쓿은 보리쌀을 정맥(精麥), 가을 보리를 추맥(秋麥), 봄보리를 춘맥(春麥), 껍질을 벗기지 아니한 보리를 피맥(皮麥), 보리의 이삭과 기장의 윤기라는 뜻으로 고국의 멸망을 탄식함을 맥수서유(麥秀黍油), 보리만 무성하게 자란 것을 탄식함이라는 뜻으로 고국의 멸망을 탄식함을 맥수지탄(麥秀之嘆)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辯(분별할 변, 갖출 판, 두루 편, 깎아내릴 폄)은 형성문자로 弁(변)은 통자(通字), 釆(변)은 본자(本字)이다.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辛+辛(변; 재판하는 일)으로 이루어졌다. 말다툼하여 옳은지 그른지를 정하다, 나누다, 명백(明白)히 하다의 뜻이다. 그래서 辯(변)은 한문학(漢文學)에서의 문체(文體)의 한 가지. 분별(分別)한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 또는 참되고 거짓됨을 가리기 위하여 씌어진 글에 붙임의 뜻으로 먼저 분별할 변의 경우는 ①분별(分別)하다, 구분(區分)하다 ②나누다 ③밝히다, 명백(明白)하다 ④따지다, 쟁론(爭論)하다 ⑤변론(辯論)하다 ⑥총명(聰明)하다, 지혜(智慧)롭다 ⑦다스리다 ⑧바로잡다 ⑨쓰다, 부리다 ⑩근심하다(속을 태우거나 우울해하다), 걱정하다 ⑪준비하다 ⑫변하다, 바꾸다 ⑬고깔(머리에 쓰는, 위 끝이 뾰족하게 생긴 모자) ⑭구별(區別) ⑮분별(分別) ⑯변화(變化) 그리고 갖출 판의 경우는 ⓐ갖추다, 구비하다(판) 그리고 두루 편의 경우는 ㉠두루, 널리(편) 그리고 깎아내릴 폄의 경우는 ㊀깎아내리다(폄) ㊁폄하(貶下)하다(폄)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사리를 밝혀 알림을 변고(辨告), 판단하고 생각함을 변교(辨校), 묻는 말에 옳고 그름을 가리어 대답함을 변대(辨對), 일을 맡아 처리함을 변리(辨理), 어떤 잘못에 대하여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밝힘을 변명(辨明), 사물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가리어 앎을 변별(辨別), 손해본 것을 갚아 줌을 변상(辨償), 빚을 갚는 것을 변제(辨濟), 시비를 분별하여 논란함을 변론(辯論), 옳고 그름을 가리어 사리를 밝힘을 변백(辨白), 잘잘못을 가림을 변색(辨色), 옳고 그름을 가려서 설명함을 변설(辨說), 말로 풀어서 밝힘을 변해(辨解), 사물의 이치를 똑똑히 밝힘을 변석(辨析), 같고 다름을 가림을 분변(分辨), 생각으로써 도리를 가려 냄을 사변(思辨), 서로 다름을 가려내지 못함을 불변(不辨), 남을 대신하여 변상함을 대변(代辨), 지혜가 있어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음을 지변(知辨), 사실을 낱낱이 말하여 밝힘을 신변(伸辨), 제삼자 앞에서 서로 상대하여 시비를 논난함을 대변(對辨), 일을 맡아서 능란하게 처리함을 간변(幹辨), 콩인지 보리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숙맥불변(菽麥不辨), 모양과 거동으로 그 마음속을 분별할 수 있음을 감모변색(鑑貌辨色), 허실을 판별하기 어려움을 허실난변(虛實難辨), 아직 동서의 방위도 분간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도리를 통하지 못함을 미변동서(未辨東西), 변명할 길이 없다는 변명무로(辨明無路)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