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상나라)은 잉카나 아즈텍같이 대규모 인간사냥을 통한 인신공양을 하던 사회였다. 발견된 기록으로 추정한 상나라 말기 인신공양으로 바쳐진 인원만 14000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제사 기록에 적힌 희생재물만 기록된 것으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기록되지 않은 인원까지 합쳐야 하므로 사실 저 14000명은 최소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인신공양과 관련된 한자(정확히는 한자의 원형이 된 갑골문자)들이 많았고 그 외에 사냥해 온 노예들을 의미하는 한자들도 많았다. 그 중 상당수는 뜻이 변한 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자면
붉을 적
"붉을 적" 글자의 변화해온 모습
사람을 불태워 죽여 인신공양하던 모습을 본따 만들어진 글자다.
이런 식으로 문자의 원형과 현재 그리고 유래를 알아본다.
백성 민
눈을 뾰족한 뭔가로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상나라는 노예를 인신공양할때 눈을 찔러 멀게 한 후 인신공양을 했다.
다른 학설로는 포로가 된 적을 노예로 삼을때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위해 한쪽 눈을 찔러 멀게한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어쨋거나 눈을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거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잠길 침
사람을 물에 던져 죽여 강이나 연못등의 수신에게 인신공양하던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이다.
상나라 왕 무정의 왕비였던 부호의 무덤에서 발견된 갑골문에서도 전쟁 포로들을 연못의 수신에게 제물로 바쳐야한다고 부호가 주장한 기록이 나온다.
빠질 함
사람을 땅에 생매장해서 땅의 신에게 인신공양하던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이다.
피 혈
제기(皿)에 담긴 피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릇에 피를 담아 놓은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이다.
토끼 묘
원래는 인간 혹은 동물 제물을 반으로 갈라 죽이던 모습을 본따 만들어진 글자이다.
찰흙 시
인신공양된 사람의 시신을 나무 기둥에 메달아둔 모습을 본 딴 글자
흙에 글자를 새기는 모습을 형상화한 유사한 갑골문도 있으며 이후 두 글자가 합쳐져서 "찰흙 시"라는 의미만 남은 걸로 보인다.
구멍샘 궤
희생 제물의 피를 뽑아 제단에 뿌리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
칠 벌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창인 과(戈)로 사람의 몸을 관통하여 메달아둔 형상을 표현한 글자.
갑골문에서는 적군이나 인신공양에 바쳐지는 인간 제물을 죽였다는 뜻으로 사용했다.
아이 동
'백성 민'과 같은 유래를 가진 글자이다.
눈을 찔러 멀게해서노예로 삼거나 인신공양 제물로 바치는데서 유래했다.
현재는 아이들을 뜻하는 의미만 남았는데 원래는 어린 노예 혹은 재물을 의미했을지도 모르겠다.
매울 신
노예에게 문신을 새기거나 눈을 멀게하던 송곳을 형상화한 문자
갑골문에서 이 글자가 사람 관련 글자와 함깨 쓰이면 노예를 의미했다. 현재는 괴로운, 매운이라는 의미만 남았다.
고을 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의 머리의 모습에서 유래된 문자로 원래는 매달다는 의미였으나 현재는 고을이나 마을이라는 의미로 변화했다.
감출 장
눈을 찔린 사람이 수풀 속에 숨은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
노예가 도망쳐서 숨어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여기서 풀을 뜻하는 '艹'변을 제거하면 '착할 장(臧)'이 된다.
즉 '착할 장(臧)'은 주인에게 순종적인 노예에서 유래했음을 의미한다.
첩 첩
손이 묶인채 무릎 꿇은 여자 위에 송곳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자
저 송곳은 노예의 눈을 멀게 하거나 노예를 뜻하는 문신을 새기는 도구이므로 원초적인 의미는 여자 노예를 의미한다.
하지만 여자노예를 데리고 사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첩이라는 의미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각설)
끊임없이 인신 공양 제사를 지내는 상나라에 속국 주나라 또한 제사용 인간제물을 끊임없이 바쳐야 했다.
상나라는 직접 주변 국가들을 공격해서 포로로 잡아오던가 제후국들에게 스스로 바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상나라의 29대왕 주왕은 제후국인 주나라 문왕을 의심해서 그를 투옥했는데 문왕의 세 아들이 술과 음식을 들고 찾아와 아비를 풀어줄 것을 호소했다.
주왕은 문왕의 장남 백읍고를 죽여 제사의 음식으로 쓰고 문왕에게 하사했다. 상나라의 인신 공양에서 제물인 인육을 같이 먹는 의식은 신에게 축복받는 일이었다.
주왕의 관점에서 보면, 장남을 바친 문왕에게 불신을 거두는 일종의 신뢰 회복 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식의 삶은 고기를 먹어야만 했던 문왕은 결코 그 일을 잊지 못했다.
문왕은 죽으면서 둘째 아들 무왕에게 반드시 상나라를 멸망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왕 또한 형의 살점을 아버지와 함깨 피눈물을 흘리며 먹었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주나라 무왕이 훗날 상나라에 맞서서 일어나자 같은 처지였던 주변국들 역시 모두 그에 합세해 일어났다.
그렇게 무왕은 연합군을 이끌고 상나라를 멸망시켰고(BC 1046년) 상나라의 흔적을 철저히 파괴했다.
은허의 상나라 왕릉들도 모조리 파괴되었다유일하게 남아서 발견된 상나라 왕족의 무덤은 상나라의 21대 왕 무정의 둘째왕비 부호의 무덤뿐인데 그녀가 왕가의 묘지가 아닌 자신의 친가 묘지에 묻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중국사 최초의 국가는 주나라로 기록되었고 상나라의 역사는 갑골문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신화로 치부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