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에 입당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김대중은「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한 재야의 유력인사들과 접촉을 강화하면서 신당 창당을 모색했다. 김대중은 국민연합의 규약을 개정, 종전의 3인 공동 의장단 중심으로 운영하던 것을 중앙상임위원회 중심제로 바꾸고 중앙상임위원회 위원장에 문익환 목사, 부위원장에 고은 씨와 함세웅 신부를 선임토록 했다. 이제 국민연합은 김대중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집권을 대비한 자체조직으로 ‘한국 민주제도 연구소’를 4월 16일 발족하는 등 4월 중순부터 선전․조직․정책 분야를 망라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민주제도 연구소란 기존의 김대중 방계조직인 한국 정치문화연구소․민주헌정동지회․민주연합 청년동지회 등을 통합하여 인맥을 보강하되 정책개발에 치중한 집권전략 지휘본부 역할을 담당할 조직이었다. 신민당의 김대중 계 의원들도 신민당사 근처의 가든 호텔에서 거의 매일 모임을 가졌다.
김대중은 1988년 11월 18일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하여 이들 조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명보 위원 : 증인께서는 80년 2월 29일 복권이후부터 증인이 정치적 소신인 민주회복민권운동을 위하여 민주세력규합이라는 명분으로 첫째 民主憲政同志會 둘째 韓國政治文化硏究所 셋째 民主聯合靑年同志會 넷째 知識人協議會 다섯째 韓國民主制度硏究所 여섯째 韓國政治犯同志會 그리고 國民聯合 등 많은 조직을 결성 개편 확대해 온 것이 사실입니까?
김대중 : 그 중에는 저하고 관계있는 조직이 상당수 있습니다. 아닌 것도 한두개 있고요.
심명보 위원 : 알겠습니다. 80년 5월 사회적 혼란이 極했던 상황에서 이와 같은 많은 조직들이 증인의 집권을 포함한 정치목적 달성을 위한 전위조직이라 보았던 당시 세간의 인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대중 : 저는 80년에 혼란이 극한 것은 일부 정치군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계엄령 해제하지 않고 민주화를 촉진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런 불안이 있었지 저와 같은 그런 평화적인 조직활동이 불안을 가져왔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심명보 위원 : 80년 4월 16일 증인의 발상과 지시로 각 분야에 걸쳐 특히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을 망라하여 고도의 정치를 연구하게 하는 韓國民主制度硏究所를 설립 운영한 사실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연구소를 증인의 장차 집권에 대비해서 정책산실로 사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김대중 : 정책연구를 위해서 그런 조직을 만들었지요.
심명보 위원 : 집권에 대비한 것입니까?
김대중 : 물론 집권에 대비할 수 있지요.
심명보 위원 : 이 韓國民主制度硏究所의 구성인원을 보면… 조사된 자료에 따라서 보면 이사장에 예춘호… 경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소장 李文永 상임이사에 증인 등 16명으로서 분과별로는 민족사상 金觀錫 朴炯圭 역사 문화 白樂晴 종교교육 徐南同 현영학 언론 사회 宋建鎬 여성문제 李孝再 민주정치 張乙炳 노동문제 탁희준 농업정책 유인호 경제 任在慶 안보외교 梁好民 통일문제 문익환 도의정치 안병무 행정 李文永 교육 韓完相 등 제씨로 되어 있는데 틀림없으신지요? 그리고 이 연구소 임원은 소위 예비내각역할을 담당할 쇄도우 캐비넷(shadow cabinet) 성격으로 본다면 잘못된 시각입니까?
김대중 :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단순한 연구목적입니다.
4월 11일 김대중은 한국 카톨릭 농민회 주최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농어민 대회에 참석, 「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란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다음은 중앙일보 보도 내용이다.
安保를 執權者가 逆用하면 國民 不滿 터진다 金大中씨 大田 연설
【大田=韓南圭기자】金大中전신민당 대통령후보는 11일『安保가 집권자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으로 전락할 때 국민들의 불만이 촉발되어 제2 越南, 제2「캄보디아」가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金씨는 復權후 처음으로 지방강연에 나서 이날 하오 2시 농민회가 大田「가톨릭」문화회관에서 주최한「민주農政실현을 위한 전국농민대회」에 참석,「민주주의와 농민의 권리」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이같이 말했다. 김씨는 이날 신민당 入黨포기선언등 정당차원의 문제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民主化문제를 거론 ▲대통령중심제와 국회의원 소선거구제를 위해 계속 투쟁할 것이며 ▲정치범의 석방 및 復權을 실현시키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金씨는『美지상군이 한반도에 남아있는 한 金日成의 南侵은 없을 것으로 단언할 수 있다』고 말하고『농민들이 잘살고 인간답게 생활하고 싶으면 모든 일에 앞서 민주政府를 수립하는데 제1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장내에 1천명, 장외에 약 3천명의 청중이 모인 이날 대회에는 국민연합공동의장인 咸錫憲씨와 金哲 統社黨 고문, 신민당의 芮春浩․李龍熙․申相佑․韓英洙, 統一黨의 金顯秀의원등도 참석했으며 초청을 받은 金泳三총재는 不參했다. (1980년 4월 12일자 중앙일보)
4월 11일을 시발로, 김대중은 본격적으로 대중연설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신학대학 개교 40주년 기념 강연회(4월 16일), 동국대학교 학생회 주최 초청 강연회(4월 18일), 안양성당 강연(4월 20일), 관훈클럽 초청강연(4월 25일),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의거 48주년 기념 강연(4월 29일), 정읍의 동학제 강연(5월 11일) 등에 참석하여 수천, 또는 수만 명의 청중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했다.
한국 카톨릭 농민회 주최 연설에서 드러나듯이 김대중은 ‘군부 출현의 불가능’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대중의 전위조직이었던 민주헌정 동지회의 金鍾完 이사장(나중에 14대 국회의원을 지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당시 우리 모임은 주로 외신을 들여와 이를 번역해서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소장 장성 그룹의 신군부가 한국의 실권을 장악해 나가고 있으며 그들이 재집권할지 모른다”는 요지의 외신 보도가 자주 들어왔다. 그때마다 東橋洞을 방문해서 우려를 얘기했다.
東橋洞측의 대답은 그러나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국이 갖고 있으니 군부의 재집권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며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12․12사태마저도 “미국측의 묵인이 없이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특히 “9사단 전투병력을 움직인 것은 여러 곳에서 합의된 사안일 것”이라며 12․12사태 자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東橋洞측은 미국을 단단히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증언에서 김대중이 계엄령아래서도 초청 강연을 빙자한 정치활동을 활발히 한 이유가 드러난다. 그러한 활동은 군의 정치 개입구실이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다. 위의 증언에 대해 김대중은 상반된 말을 한다.(너무 짧았던 80년 서울의 봄 참조)
사회 혼란을 집권의 빌미로 노리고 있는 전두환 일당에게 김대중의 장외연설 행각은 바라던 바였다. 80년 봄 학내시위로 출발한 대학생시위는 언제 가두로 진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4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대학은 병영집체훈련 거부를 이슈로 내걸었다.
학내시위로 국한시키며 자제하던 대학생들은 4월 10일부터 산발적으로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은「최근의 내외정세에 관한 대통령 담화문」을 통해『내외정세가 어려운 때에 사회일부에서 국민단합을 저해하는 언동을 하는가 하면 학원가에서 군사교육을 거부하는 등 사회질서가 소란해지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勉學 해치는 學園소란은 유감” 崔大統領 최근 內外정세에 관한 談話발표 “自制와 和合으로 단결, 당면한試鍊 극복해야”
『작금의 세계정세는 蘇聯의「아프가니스탄」침공사태를 비롯, 인질문제 長期化로 인 한 美國의 對「이란」斷交와 경제적 制裁조치,「이란」과 인접한「이라크」간의 武力충돌등격동과 혼미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와같은 사태의 발전은 우리나라의 안전보장과 경제운영에 대하여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고있어 우리는 매우 어렵고 중대한 국면에 처하여 있습니다.
정부는 이같은 국제정세의 추이가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을 면밀히 분석하여 국제정치․외교 및 경제면에서의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간 계속 군사력을 증강해온 北韓공산집단은 南北예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중에도 무장간첩의 南派등 각종 도발책동을 거듭해오는 한편 우리나라에 대한 비방과 중상등 모략선전을 격화하고 있습니다.
나는 작년 12월 21일 대통령 就任辭를 비롯하여 기회있을 때마다「10․26」사태후 우리나라가 국내외적으로 비상시국에 처해있음을 지적하고 국민모두가 상호이해와 자제로 합심협력하여 사회안정을 유지하면서 내외의 도전과 시련을 극복해나갈 것을 되풀이 강조해온바 있습니다.
그간 국민여러분이 우리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인식하여 자제와 근검절약으로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위해 협조해온 것을 마음든든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저는 최근 사회일부에서 時局의 중대성을 깊이 생각함이 없이 국민적 단합을 저해하는 言動을 하는가 하면 勉學분위기 조성을 위한 정부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원에서 대화와 협조가 아닌 배척과 대결로 인한 소란이 계속되어 질서가 문란해지고 있음은 매우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이 스승의 인격을 욕되게 하는 등의 지나친 행동은 우리의 道義와 美風良俗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겠으며 더구나 우리의 국가적 현실에 비추어 매우 긴요한 소정의 군사교육훈련을 거부하여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학교운영에 있어 개선을 요하는 사항이 있다면 이는 상호이해의 바탕위에서 격의없는 대화를 통하여 順理的으로 해결하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정부는 앞으로도 勉學풍토의 정착을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인바 학교당국에서도 학원정상화를 위해 성의있는 노력을 계속 경주해야 할 것이며 학생들은 학원도 우리사회의 일부임을 명심하여 法과 秩序를 지키는 가운데 시간을 아껴 학업에 정진하여야할 것입니다. 이미 천명한대로 정부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하고 사회안정과 공공질서의 유지, 그리고 국민생활의 안정과 경제성장을 기해나가면서 질서정연하고 착실한 정치발전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공공질서의 유지와 사회안정이 절실히 요청되는 이때 우리 국민모두가 대국적 견지에서 自制와 和合으로 大同團結하여 당면한 국가적 시련을 극복해 나갈 것을 다시 한번 간곡히 당부하는 바입니다.』 (1980년 4월 14일자 중앙일보)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80년이 되자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막대한 정보부 예산을 정권창출에 쓰기 위해서였다. 신현확 국무총리는 최규하에게 전의 요구를 거부하도록 여러 차례 권했으나 임명권자인 대통령 최규하는 전두환이 자신을 미는 줄로 알고 그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았다. 최규하는 전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해 보안사령관직과 겸임하게 하였다. 현역 군인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서리(署理)’라는 꼬리를 달았다. 전두환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정치에 관심이 없다’라고 하였다.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함으로서 공직 서열상 부총리급으로 격상되어 국방부장관보다 서열이 올라갔다.
情報部長署理에 全斗煥中將 政府발령 國軍 保安사령관職도 兼任
崔圭夏대통령은 14일 全斗煥육군중장을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임명, 이날하오 靑瓦臺에서 임명장을 주었다. 全斗煥 신임중앙정보부장서리는 현역 육군中將으로서 현재 맡고 있는 국군보안사령관직도 계속 겸하게 된다. 靑瓦臺 고위 당국자는『앞으로 중앙정보부는 中央情報部法에 의거하여 국가安保면에서 본연의 업무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그러나 과거에 일부 폐단이 있었다면 시정토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국자는「10․26」사태후 중앙정보부장을 임시로 잠깐 두었을뿐 정식 임명치 않고 보류했던 것은 고 朴正熙대통령 시해범이 중앙정보부장이었기 때문에 도의적 측면에서 중앙정보부가 반성을 하고 책임을 져야한다고 판단했고 또 비상계엄령하에서 계엄군이 保安․搜査․情報조정기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국자는『그러나 최근 北傀의 對南도발과 격동하는 국제정세등 內外정세가 매우 어려운 국면에 들어감으로써 국가안보적 견지에서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정상화시킬 필요를 느끼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현역군인인 보안사령관이 中情部長서리를 겸임케된 것은 戒嚴令하에서 군인이 保安등 업무를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中情의 기능에 비추어 군인이 겸무토록 하는 것이 업무의 調整이란 면에서 효율을 기할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국자는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部長이 他職을 겸임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부장서리로 임명되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10․26 이후 10월 30일 李熺性당시 육군참모차장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됐다가「12․12」사건 다음날인 12월 13일 육군참모총장으로 轉任된 이래 중앙정보부장은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全정보부장서리 略歷 ▲慶北大邱출신(49세)▲55년 陸士 11期 졸업▲58년 25사단 72연대 중대장등 각급 부대지휘관▲64년 陸軍大學졸업▲67년 首都경비사 30대대장▲69년 참모총장수석부관▲70년 駐越白馬사단 29연대장▲72년 공수특전여단장▲78년 보병 제1사단장▲79년 國軍보안사령관▲80년 3월1일 中將승진
戒嚴令 해제위한 對備策 日紙들, 全部長서리任命 크게보도 【東京15일合同】日本의「요미우리」(讀賣)「아사히」(朝日)「마이니찌」(每日)등 전 주요일간지들은 全斗煥보안사령관이 中央情報部長서리에 임명된 사실을 모두 외신면「톱」또는 중「톱」으로 크게 보도하면서 全장군이 軍전반을 비롯 국내외정보․치안 등 민간부문에 관해서도 실권을 장악한 것 같다고 보도했다.
日本신문들은 全장군이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직한 것은 최근의「아프가니스탄」및「이란」사건, 北韓의「스파이」침투 등 대외적인 상황과 잇따른 學園街소요사태등으로 중앙정보부의 기능을 재건,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全장군이 崔대통령 체제를 유지하는 1인자로 정식 표면에 등장함으로써 앞으로 그가 어떠한 진로를 택할지 특히 주목된다고 보도했다.
日本신문들은 또 全장군의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은 韓國정부당국이 戒嚴令을 곧 해제하려는데 대한 대비책이라고도 분석했다. (1980년 4월 15일자 중앙일보)
1979년 12월의 쿠데타직후부터 한국의 실질적 권력자는 전두환이라고 해외언론들은 보도해왔다. 전두환이 80년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으로 부임하자 국내 언론도 외신을 인용해 전두환의 위상을 보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전두환이 원하는 짓만 하고 돌아 다녔다. 야당 분열, 장외 유세 등. 김대중은 또한 軍部와 접촉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다. 4월에 들어 박종규를 통해 접촉하려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신민당과 결별한 김대중의 다음 전략은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었으며, 5월에 들어 가시화되었다.
김대중이 이 시점에서 강행한 위험한 모험은 대학을 강연 장소로 택한 점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자제를 당부한다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대학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가짐으로서 계엄령으로 유지되던 불안한 정국의 뇌관을 건드렸다. 이것은 전두환을 두목으로 하는 신군부에게는 좋은 명분을 주었다. 연설의 예를 들어본다.
민주 민권세력의 구심점은 유신 7년 동안 온갖 박해를 받고도 굴하지 않고 싸워온 재야인사들로, 한국신학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이나, 여러 대학에서 싸운 이러한 동지들이라고 나는 이 자리에서 단언할 수 있습니다. (80년 4월 16일 한신대에서「하나가 되자-도덕정치의 구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國會 빨리열어 當面문제 解決을 어떠한 民主逆行도 분쇄 金大中씨 연설
金大中씨는 16일 中央情報部長서리 임명 등 일련의 사태발전을 보이고 있는 政局推移와 관련,『昨今의 상황은 매우 미묘하며 민주발전 전망은 더욱 불투명하므로 우리는 주권자로서의 경각심과 책임감을 견지하여 어떠한 민주逆行의 企圖도 이를 분쇄해야 한다』고 말했다.
金씨는 이날 상오 서울 水踰里에 있는 韓國神學大學에서『하나가 되자-道德정치의 구현』이란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이같이 말하고『그러나 우리는 혼란이 조성됨으로써 安保를 위태롭게 하고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자들에게 구실을 주지않기 위해 최대로 자제하고 질서를 지켜야하며 學園의 부조리는 반드시 시정해야 하나 그 방법은 평화적인 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령의 해제를 결의하고 ▲二元政府制헌법과 中選擧區制등 국민여망에 배치된 정부계획을 추궁하고 ▲物價苦․저임금․失業․농축산업의 파멸 등에 대한 정부조치의 추구 등을 위해 즉각 國會를 소집해야한다고 주장했다. 新民黨입당 포기선언후 국민과의 직접대화방법으로 강연행사에 나서고 있는 金씨는『민주세력의 구심점은 在野민주․민족세력이므로 앞으로 수립될 민주정부는 그들이 主體勢力이 돼야한다』고 말해 그의 장래 정치進路를 시사했다. (1980년 4월 16일자 중앙일보)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 과격하다고 하는 게 신문에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과격합니다. 악에 대해서 나는 과격합니다. 국민을 괴롭힌 자에 대해서 과격합니다. 자유를 짓밟고 정의를 유린한 자에 대해서 과격합니다. 이 나라를 반통일로 끌고 가는 자에 대해서 철저히 과격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고, 국민을 위하고, 자유와 정의와 통일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 나는 그 앞에서는 양보다 순하고 온순하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80년 4월 18일 동국대에서「4․19 혁명과 민족통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
“學園사태 惡用말라” 金大中씨 過渡政府 빨리終熄돼야 東國大學서 演說
金大中씨는 18일 최근 학원사태 등에 언급,『어떤 다른 의도를 가지고 학원문제를 악용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하고『不安定한 과도정부는 하루 빨리 종식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金씨는 이날오후 東國大 학생회가 4․19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동교 강당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참석『민주주의 없이는 自由 正義 統一이 없으므로 국민의 힘으로 목전의 장애를 뚫고 민주회복을 성취하자』고 말하고『혼란을 일으켜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민주주의를 원치 않는 자에게 구실을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金씨는 지난 16일 韓國神學大연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날 연설에서도『在野勢力이야말로 민주세력의 구심점이며 이를 부인한다면 그것은 역사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해 新民黨이 民主勢力의 求心點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金泳三 신민당총재와 다른 견해를 보였다.
金씨는『4․19정신은 억압과 不義와 싸워온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의 발로였으며 질서와 관용의 정신이었고 또 自由 正義 統一의 실현을 갈망하는 국민의지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金씨는『요즈음 학원사태는 최소한의 진통이며 혼란으로 보지 않으나 어디가지나 평화적인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야할 것』이라고 말하고『平和시장의 경우 분규해결을 위해 노동자 뿐 아니라 어려운 여건속의 영세기업인들이 성의있는 노력을 한데 대해 감사한다』고 밝혔다.
그는『南北대화를 열어놓고 게릴라를 계속 南派하는 공산당의 만행을 규탄해야한다』고 말했다.
金씨는 자신의 新民黨입당포기선언과 관련,『신민당은 겸허한 자세로 在野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으며 이것이 汎野單一化가 실패한 근본원인』이라고 말했다. 金씨는『어떤 일이 있어도 정치보복은 나의 대로서 끝이 나야하며 어떠한 소급立法도 반대한다』면서『공무원은 새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長次官을 제외하고는 전원 그대로 신분보장이 돼야하며 양심적인 기업이나 반성한 기업인은 모두 새로운 民主정부의 경제발전에 참여, 국민을 위한 기업인으로 새로이 출발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4월 18일 전 고려대 총장이며 신민당 총재였던 유진오 박사가 신민당과 재야가 힘을 합쳐야만 민주주의가 올 수 있다고 말하였다.
「民主」아직 손에 안잡혀 高大「4․18」 기념 리셉션
전 고려대 총장 兪鎭午 박사는 18일 저녁 고려대 4․18세대 20주년 기념 리셉션에 참석, 최근의 정국에 관해 언급,『4․19가 난지 불과 1년만에 5․16혁명을 맞았는데 그 누구도 그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듯이 오늘 우리도 또 어떤 상태가 닫칠지 모르니 민주주의는 아직 우리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兪박사는『이번에 민주화 작업이 성공하면 이 강토에 뿌리를 내릴 것이나 실패하면 민주주의의 앞날은 다시 멀어질 것』이라고 말하고『신민당과 재야가 하나로 힘을 합쳐야 진정한 민주승리를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1980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이런 보도도 있었다.
사무실 解約에 法的 투쟁
金大中씨는 25일 저녁「코리아나․호텔」에서 열린 寬勳「클럽」초청으로 열리는 연설과 토론을 위한 원고를 작성하느라 23日엔 自宅에 들어오지 않고「호텔」에서 숙박.
金씨는 東國大 연설이 演題밖의 정치발언이라는 일부 학생들의 항의를 받고 측근을 보내 해명을 하면서 청중들에 의해 입은 학교기물과 나무등의 피해를 보상키로 했다.
한편 중도금까지 지불한 사무실계약이 건물주인 南光土建에 의해 뚜렸한 이유없이 해약통고된 데 대해 김씨측은 李宅敦의원을 통해 법정투쟁까지 하기로 했다. (1980년 4월 24일자 중앙일보)
4월 21일 발생한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탄광사태는 민주화보다는 안정이라는 명분을 전 두환에 제공해 주었다. 사북 탄광 광원 3천5백 명이 蜂起하여 이 지역을 4일간 장악하였다. 이 와중에 진압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광부와 경찰관을 합쳐 70여명이 부상했다. 정부는 11공수여단을 투입하여 공권력을 회복시키려 하였으나 4일 만에 사태가 수습되어 실제로 투입하지는 않았다. 곧이어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궐기했다.
4월 25일 김대중은 관훈클럽 초청연설에서「80년대의 좌표」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10․26 사태는 결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10․26 사태는 민중이 주체였던 동학농민혁명, 민족이 주체였던 3․1독립운동, 민주학생이 주최였던 4․19 혁명을 총괄적으로 계승한 민중․민족․민주의 국민적 의지의 집약적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유․정의․통일을 거부해온 반민중․반민족․반민주 세력에 대한 국민적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관훈 클럽 초청 연설을 마친 다음에 관훈 클럽 토론회에서 김대중은 “개헌과 정치발전 일정이 분명해지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하겠다” 고 말한 다음 그 시기에 대해서는 “나는 정치를 20~30년 한 프로이기 때문에 정치일정이 잡혀진 뒤 신당을 해도 충분하다”고 말해 ‘신당’ 창당 의지를 드러냈다.
“나도 大統領 한번 해볼생각있다” 그러나 지금은 選擧있게 하는데만 注力 “나는 프로 政治人… 選擧대비組織 금방할수 있다”
金大中씨 寬勳클럽 1問 1答 ▲出生이후 政治활동시작까지의 身上明細를 말해달라=全南新安郡荷衣面이라는 한 섬의 中農집안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가 木浦로 이사했다. 5년제 商業학교를 졸업한 후 군대에 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가 解放을 맞았다. 선박회사를 경영하면서 建準에 참여했고 돈 좀 벌었기 때문에 韓民黨 木浦시 지구당 간부도 지냈다. 그러던 중 서울에 출장을 올라왔다가「6․25」를 만났다.
서울에 있다가는 의용군에 끌려갈까봐 친구들과 함께 걸어서 고향에 내려가는데 群山에 이르렀을 때 이미 공산군이 침입했다. 木浦에 도착하니 집은 逆産으로 빼앗겼고 집사람은 방공호에 피신하여 둘째아들이 거기서 태어났다. 이틀 후 잡혀가서 2개월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해 9월 28일 2백명이 처형되었는데 그때 80명이 탈옥했다. 나도 그때 함께 나왔다. 그후 木浦日報사장을 지내고 海上방위대 全南지구副隊長을 맡았는데 공비토벌과 치안담당이었다.
▲이번 연설엔「하나님」이란 말이 없는데 그것은『예수동생「가십」』이 다시 나올까봐 두려워서 그런게 아닌가. 그리고 부인은 新敎인데 당신은 舊敎이니 기독교가정에선 비정상이 아닌가=국민 중 非기독교신자가 많아서 하나님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 말을 쓰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으로「하나님」이란 말을 오늘도 했다. 내가「예수형님」때문에 유명해 졌는데 敎理上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다. 大田「크루실」寮에 들어갔을때도 선생이『예수형님』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서 그대로하다가 야단맞은 셈이다.
56년 長勉씨가 나의 代父가 되어「카톨릭」신자가 됐다. 집사람이 新敎이지만 요새는「이큐메니컬」(통합)운동이 일어나 新舊양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도 대화하고 있으니 결혼 20년이 되는 우리 부부는「이큐메니컬」의 先驅者인 셈이다. 세 자식 중 둘은「가톨릭」, 한명은 新敎라도 집에선 전연 문제가 안되고 있다.
▲大學의 정치연설에 雜音이 있는데 대학연설을 계속하겠는가=초청하면 응할 것이며 학생을 상대로 정치연설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이다. 東國大에 謝過한 일도 할 일도 없다.
▲與件이 분명해지면 출마여부를 생각한다고 했는데 大權도전을 포기하든가 여론조성․동지규합 등 적극행동을 벌이든가 해야하지 않는가= 내 태도가 불분명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총각이라면 누구나 장가 갈 생각은 갖겠지만 高校生이 대학졸업후 자리가 잡히면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색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선거있게 하는데만 注力할 것이다. 나도 대통령 한번 해볼 생각있다. 또 한다면 힘껏 할 것이다. 그러나 밥상도 안차렸는데 숟가락 들고 먹겠다고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共和黨의 18년간 통치의 功過와 신민당 입당포기 선언의 입장은 계속되는가=과거 자신없고 고립됐던 국민들이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고 일어서서 가능성과 능력을 발견해 국내외에서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18년 통치의 功이다. 신민당에 대해서는 공개적 또는 私的으로「10․26」후의 時局을 낙관해서는 안되고 정국을 主導해야 한다는 내 의견을 밝혀왔다. 그들은 지나치게 낙관해왔다.
新民黨은「10․26」의 주역도 자기이고 민주세력의 구심점도 자기라고 한다. 이들과 뭉쳐 하나가 되려고 했으나 欲巧反拙로 후보싸움같이 돼 진짜 할 일도 못하게 될 것 같아졌다. 내가 몸을 빼야 서로 제정신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하니 잘한 것 같다.
▲정국을 이끌어나가야 할 인물이면 改憲등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구미에 맞는 밥상」을 스스로 차려야 하지 않는가= 대통령면담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며 만나면 정부형태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二元執政制가 나오면 이에 대해 물론 투쟁을 벌일 것이다. 요즘 하고 있는 연설, 聲明발표등이 그런 노력의 일환이며 폭력을 쓸 수 없으니 輿論에 호소하는 것 아닌가.
▲改憲案이 획정된 후에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겠다고 했는데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대통령선거 날짜만 잡힌다면 20, 30년간 정치를 해온「프로」정치인이기 때문에 선거에 대비한 조직을 금방 할 수 있다. 申총리가 출마를 안한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키도록 만들어야한다. 집체훈련은 학생과 軍이 대화를 통해 해결했으면 좋겠고 선거권 인하문제는 답변할 지식이 없다.
▲앞으로 정치를 하려면 在野를 중심으로 급조新黨을 만들어야 하는데 나라를 이끌고 갈 집행능력이 모자라는 재야의 취약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정치의 요체는 정통성과 효율성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있다고 책에서 보았다. 과거에는 효율성에만 치중해 행정독재가 되었다. 재야가 차기정권의 중추가 된다면 민주 정통성은 확립될 것이다. 새정부가 들어서도 次官이하의 공무원은 그대로 있어야하고 長官이라도 유능하면서 반성을 하면 함께 일할 수도 있을 것이다.
▲獄中에서 읽은 책은 몇 권이나 되나=「토인비」의「歷史의 연구」전질을 비롯해 李基白․千寬宇씨의 역사책, 문학․철학․군사학등의 책을 6백~7백권 읽었다.「라인․홀트․니버」의『도덕적 人間과 비도덕적 社會』,「하비․콕스」의『世俗都市』등을 감명깊게 읽었다.
▲본래 성함은「金大仲」인데 언제「金大中」으로 고쳤는가=祖父가 金大仲이라고 지었으나 시골이라서 호적사무가 제대로 안돼「仲」자가「中」자로 기재됐다. 잘못된 것을 알고서 54년에 내가「仲」자로 호적정정을 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선거에 떨어지고 사업도 망했다. 그런데 누가 그것은「仲」자 때문이라고 했다. 큰大자에 적중한다는 中자가 얼마나 좋은 것인데 왜 적중하는 것을 스스로 막느냐는 것이었다. 마음이 약하다보니 그 소리에 솔깃해져서 다시「中」자로 고쳤다. 그래서 국회의원이 됐으나 5․16이 났다. 항렬은 헌법위원회위원장 金顯哲씨와 같은「顯」자이다. 金首露王의 70대손이다.
▲대통령을 지망하는 세金씨가 정치일정 등에 관해 美國이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속마음으로 바라면서도 事大主義者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그러지 못한다고들 하는데 韓國의 정치발전「스케줄」에 대한 美國의 역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美國이나 日本등 우방의 역할은 2차적인 것이며 1차적 역할은 우리 국민 스스로다. 美國이 우리 민주주의 발전을 지지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 질서와 안정을 지킬 수 있는 정도로 성장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美國人들에게 韓國民의 다수가 원하는 방향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할 뿐이다.
▲개인사무실계약이 해약되는 등 박해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정치문제와 관련돼 내가 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日本납치의 주모자라는 李厚洛씨와「10․26」이후에 만나 서로 양해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李씨로부터 수억을 받았다는 소문까지 듣고 있다. 그러나 만난 적도 연락한 적도 없다.
▲日本에 있을 때 朝總聯 주최강연에 참석했다는 소문이 있고 강연당시 金日成사진이 벽에 걸려있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내 정치경력에 있어서 해방직후 半년동안 建準에 참여한 것밖에는 사상적으로나 경력적으로 비난받을 바가 없다. 세간에 돌아다니는 소문은 다 거짓이다. 反정부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大韓民國을 해친 적은 없다. (1980년 4월 26일자 중앙일보)
김대중은 3월 26일 서울 YWCA 연설에서 예수를 “예수형님”이라 지칭했는데 두고두고 말이 많았다. 4월 25일 관훈 클럽 토론회에서도 이에 대한 질의가 있었다.
▲이번 연설엔「하나님」이란 말이 없는데 그것은『예수동생「가십」』이 다시 나올까봐 두려워서 그런게 아닌가. 그리고 부인은 新敎인데 당신은 舊敎이니 기독교가정에선 비정상이 아닌가=국민 중 非기독교신자가 많아서 하나님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말을 쓰지 않았지만 내 마음속으로「하나님」이란 말을 오늘도 했다. 내가「예수형님」때문에 유명해 졌는데 敎理上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다. 大田「크루실」寮에 들어갔을 때도 선생이『예수형님』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서 그대로하다가 야단맞은 셈이다.
56년 長勉씨가 나의 代父가 되어「카톨릭」신자가 됐다. 집사람이 新敎이지만 요새는「이큐메니컬」(통합)운동이 일어나 新舊양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와도 대화하고 있으니 결혼 20년이 되는 우리 부부는「이큐메니컬」의 先驅者인 셈이다. 세 자식중 둘은「가톨릭」, 한명은 新敎라도 집에선 전연 문제가 안되고 있다.
김대중은 1997년 가을 한국논단 초청 토론회에서는 카톨릭 교도들이 관용적으로 하는 표현이라고 답변했다.
백상창 : 김총재님이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 실패를 하시고, 정계를 떠나서 다시는 대통령 출마를 안하시겠다고 스스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71년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의 선거 유세에서, 김총재님 자신을 나는 예수의 동생이다, 이런 말씀을 직접 하시는 걸 저는 들었습니다. 그래서 김총재님의 일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변화무쌍하고, 나쁜 시각에서 보는 사람은 거짓말만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가 김총재님은 정신 방어기재로 否認과 投射, 昇華, 이렇게 세가지를 주로 사용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간관계로 설명은 못 드리는데, 그렇다면 제가 김총재께 묻고 싶은 것은 본인이 생각할 때, 과연 김총재님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정체성을 본인 스스로 생각하시는대로 간단히 답변해 주십시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이 전언하는 바에 의하면, 김총재님이 공산주의하고도 타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차제에 공산주의자와는 어떤 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중 : 예수 동생까지 나왔는데, 제가 71년에 말한 일은 없고, 저는 80년에 서울의 봄 때 명동 YWCA에서 얘기하면서 그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저기 박홍 신부님이 와 계신데, 성경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카톨릭 입장에서도 예수는 우리 형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트교인데, 거기 가면 형님하고 기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교회에서 배운대로 하고, 또 저는 교리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계은퇴하면서 변화무쌍, 거짓말,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일생에 거짓말한 일이 없습니다.(청중들 폭소) 저는 거짓말한 일이 없어요. 국민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헌신한다 해 가지고 사형선고받고, 감옥살이 하고, 연금당하면서도 그 지조를 지켰어요. 80년대 신군부가 손잡으면 살려주고, 안 잡으면 죽인다고 할 때도 살고 싶었지만 국민을 속일 수 없어서 안했어요. 저는 납치당하고 별 고초를 겪었지만 변신하지 않았고, 또 89년에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을 추진하는 도중에 저를 만나 가지고 자기하고 같이 하자, 같이 하면 다음 정권을 저한테 줄 수 있다고 해도 저는 이것을 일축하고 거절했어요.
이 해명들이 납득할만한 것인지는 각자 생각해 볼 일이다. 역사적으로 비슷한 예를 들면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이 야훼를 자신의 아버지(天父), 예수를 형(天兄)이라 하고 자신이 야훼의 둘째아들(天王)이라 하는 기묘한 삼위일체론을 편 적이 있다.
관훈클럽 토론에서 한 “申총리가 출마를 안 한다고 했으니 약속을 지키도록 만들어야한다”는 발언은 김대중의 사고체계를 잘 드러낸 말이다. 이 발언은 논리적으로 몇 가지 객관적 사실과 김대중의 가치판단을 함축하고 있다.
1)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객관적 사실) 2) 이것은 공인으로서의 약속이다. (김대중의 판단) 3) 신현확 총리가 약속을 어기고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 (김대중의 판단) 4) 신현확 총리의 출마는 김대중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김대중의 판단) 5) 그러기 때문에 신현확 총리의 출마는 막아야 한다. (김대중의 의지)
사회 통념상 약속은 지켜야 한다. 법률에도 신의․성실의 원칙이 있다. 특히 사회 지도자의 언행은 세밀한 관찰의 대상이 된다. 말이 지켜지는 데는 주변상황보다는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김대중은 무슨 근거인지는 몰라도 신현확씨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있다. 자신의 도덕 수준을 정상적인 사람에게 투영해서 그럴까. 말을 지키지 않으면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는 한 비난받지만 안 지켰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강제하거나 법적인 제재조치를 내릴 수는 없다. 오직 도덕적인 차원의 비난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자신의 표현대로 어떠한 비난도 각오하면서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한 자가 남의 약속 불이행은 도덕적 비난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묘한 의식 구조다.
4월 25일 노동청은 1980년에 들어서 노사분규가 79년의 7배인 719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4월 29일 김대중은 충남 예산의 윤봉길 의사 의거 48주 강연에서「國民聯合」이 民主化촉진 全國民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過政길면 安定해친다” 金新民총재 “民主化 國民운동 추진” 金 大 中씨
[儒城=韓南圭 기자] 金永三 신민당총재는 29일『누적된 모순의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政治안정문제와 경제․사회적 문제들은 過渡정부로서는 감당해갈 수 없으므로 過渡기간이 길면 국민의 고통이 연장되고 새 政府의 과제가 어려워진다』고 말하고『과도정부는 새정부 수립을 앞당기기 위한 政治日程을 지체없이 구체적으로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金총재는 忠武公․尹奉吉의사․고 柳珍山씨 등의 祠堂과 묘소를 참배한후 儒城숙소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통해『이미 否定당한 세력이 二元執政府制나 中選擧區制로 정치적 명맥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 망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공화당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5월초에 국회가 개회되도록 협조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金총재는 최근 金大中씨가 신민당의 時局觀을 비판하고 在野新黨의 창당가능성을 시사한데 대해『그의 발언에 대해 거론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德山=文晶克기자] 金大中씨는 29일『政局이 불투명하고 民主化에 역행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앞으로 민주화추진 全國民운동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국민연합」을 중심으로 중앙과 각 地方에 조직을 결성하며 서명운동 및 집회․강연 등을 통해 국민의 輿論과 힘을 집결시켜 나아가겠다고 말했다. 金씨는 禮山郡 德山에서 거행된 梅軒 尹奉吉의사 義擧 45주년 기념식 참석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민주화 추진운동의 당명목표가 ▲ 二元執政府制와 中選擧區制 등을 통해 維新잔존세력이 계속 執權을 획책하고 있는 것 등 민주화에 逆行하는 일체의 기도를 분쇄하고 ▲戒嚴令 해제, 罪名이 어떻든 모든 정치범의 석방․復權․복직 및 언론자유보장과 ▲ 과도정부의 엄정中立과 명확한 憲政「스케줄」을 밝히도록 촉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80년 4월 29일자 중앙일보)
이 당시 계엄당국은 김대중의 활동에 대해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단속하려 했으나 법 적용이 애매한 면이 있어 포기했다.
4월 29일 전두환은 기자회견을 했다.
情報部 機能-機構 축소
▲인사말=본인이 합동수사본부장직과 中央情報部長職을 겸임하게된데 대하여 항간에서는 구구한 억측과 낭설이 나돌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靑瓦臺 대변인이 충분하고 명확한 설명을 한바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인이 中央情報部長서리라는 중책을 맡아 中情의 기능을 분석해볼 때 중앙정보부는 국가안보를 위한 차원높은 방법과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하고 헌신적인 기구로서 발전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바, 본인이 확신하건데 과거와 같은 中情의 월권적 업무수행과 근무자세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본인이 양대 정보기구를 장악함으로써 정치발전에 차질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억측은 지나친 기우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러한 기우와는 반대로 내외난관을 극복하는데 긍정적 기여를 함으로써 정치발전을 촉진하게 될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보장이라는 사명을 띠고 창설된 후 지난 19년 동안 조국근대화 과정을 통하여 국가에 기여한 공로는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현재 部 전체가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되 우리를 향한 비판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면서 안으로는 모순된 법체제 제도를 바로잡으며 조직과 운영면에 걸쳐서 과감한 정비를 단행하고 밖으로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안위를 뒷바라지 할 수 있는 기구가 되어 국민의 신뢰를 획득할 수 있도록 온갖 지혜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全보안사령관의 中情部長 취임으로 軍部가 정치에 개입할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특히 정치발전 일정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를 갖는 일부의 견해를 어떻게 보는지. -본인이 비록 中情부장직을 겸직하더라도 현재는 비상계엄하이기 때문에 합동수사본부가 수행하는 업무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시점에 있어서 법이나 포고령을 위반했을 때에는 정치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든 간에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法에 따라 다스리게 되어있다. 따라서 布告令이나 법에 위반되는 자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관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정치관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답변해야 될지 모르겠다. 또 본인의 겸직이 정치발전일정에 차질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혀 근거없는 기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본인은 본인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차질을 초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직을 언제까지 겸임하게 되겠는지. -人事權이 대통령에게 있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지 않느냐.
▲최근 전개되고 있는 國內정세, 특히 學園문제와 정치인들의 언동을 어떻게 보는지. -본인에게도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기 때문에 자식을 갖고있는 모든 평범한 부모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다를바 없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동안 너무 억눌려 있었다는 느낌을 가진 일부 학생들이 소란을 피우는 심정이나 기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대다수 학생들은 면학에 열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본인은 학원의 민주화, 학원의 자율화를 찬성하나 이와 같은 물결이 법의 테두리 내에서 흘러가야지 일부 몰지각한 학생들에 의해서 대다수 선량한 학생들이 피해를 보고 면학분위기가 혼탁해지거나 정부의 정당한 방침과 법지시 사항을 어긴다면 국민들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양식을 발휘하여 내일에 있어서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사명감을 가져주기를 바란다. 우리 국민 모두가 진정으로 학생들을 아껴주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줘야 된다고 생각하며, 또 그들이 일부 몰지각한 정치세력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도록 보살펴 줘야한다. 본인은 정치경험이 없으므로 잘 모르겠으나 정치인이라면 자기의 소신이나 철학이나 정책을 국민 앞에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난국을 직시하지 못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며 국민을 선동하는 언동을 하는 것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하나의 국민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國內外정세에 대해서 軍部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최근「이란」및「아프가니스탄」가 미묘하기 때문에 군부는 긴장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국내적으로는 가장 취약한 시점에 처해 있음을 중시해야 되리라 믿는다. 북괴가 적화통일이라는 기본전략을 줄기차게 추구해 오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따라서 안보제일이라는 우리의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10․26사태로 인하여 내외로 과거보다 국가안보가 더욱 절실해진 것이 엄연한 사실이건만 이를 외면하려는 경향이 농후한 실정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안보를 강조해온 나머지 이제는 면역이 생긴 탓으로 별로 중요치 않은 일로 생각할는지 모른다. 또 국가통치를 위한 하나의 구실이라고 매도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통일이 되거나 북괴가 적화야욕을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는 安保야말로 국가생존상 제일의 要件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것이 몇십년, 몇백년이 흘러가도 변함없는 현실일 것이다. 따라서 安保는 권력유지를 위한 道具가 되어도 안될 것이며 反政府의 구실이 되어서도 안될 불가침의 명제다.
▲10․26 事態이후 政治發展에 따라 일부 豫編將星들이 政黨가입 또는 정치참여를 하고 있는데 국가안보상 영향은 없겠는지. -軍人출신이라도 예편한 이상 정치참여․정당가입 등 활동은 각자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예비역장성 8백여명 중 정당가입자는 극소수인 20~30여명에 불과하며 군출신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참여를 한다해도 안보적인 측면에서 국가안보에 크게 기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2․12事件으로 물러난 軍高位將星과 尹必鏞장군의 近況은. - 12․12사건과 직접 관련된 예편장성은 5명뿐이다. 이들은 모두 가정에서 조용히 근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尹必鏞씨는 지난 2월29일 복권된 이래 가사에 전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最近의 北傀 동향은. -北傀는 대내적으로 오는 10월의 6차 당대회를 앞두고 주민들의 정치사상적 단결을 강조함과 동시, 금년 경제계획목표의 10월 이전 달성을 위해 각종 노력조직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으며 金正日에게 점차 권력을 이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어 이번 당대회에서는 후계자로서의 그의 지위가 공식표면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군사면에서도 군당전원 확대회의(79․12)를 개최,「내외정세 발전에 군사적으로 대처할 것」을 결의하고 전투태세 견지를 재삼 강조하는 가운데 금년 연초부터는 육․해․공군에 의한 전례없는 대규모 공격훈련 및 민간차량․선박을 이용한 이른바「동원훈련」을 잇달아 실시하고 있다.
▲ 12․12사건으로 야기된 韓美관계는 완전히 해결되었다는데 사실인지. -12․12사건을 계기로 전략 지휘권 문제상 다소의 오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쌍방의 노력에 의해 완전히 해소되었고 韓美공동의 방위태세를 굳건히 다져 나가고 있다. 지난 3월에서 4월초에 걸쳐 있었던「팀․스피리트」합동훈련은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全將軍을 中情部長職에 겸임시킨데 대하여 미국측에서 불만을 표시했다는 설이 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우리의 최대우호국인 미국이 大統領의 인사권에 불만을 표시함으로써 내정 간섭을 저지르고 韓美 신뢰관계를 파괴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불순한 동기를 지닌 인사들의 韓美 이간책동에 불과하다고 본다.
▲金載圭의 대법원 재판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현재 대법원에서 심리가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내 절차에 따라 종결되라라 믿는다.
▲ 이 사건 抗訴審에서 金載圭 등 6명 전원이 死刑선고를 받은 바 있는데 그 刑量이 大法院에서 변동될 전망은 없는지. -대법원 판결을 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나 刑量변동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故 朴正熙 대통령의 追慕事業과 그 遺家族에 대한 對策은. -보고받기로는 고 朴대통령의 묘소에 요즈음도 하루 3만여명의 참배객이 모여들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이들에 의해서 추모사업이 이뤄질 것으로 믿고 있다. 국가원수의 유고에 의한 가족에 대한 원호책은 군경 및 독립유공자에 대한 원호대책처럼제도적으로 강구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금번 東原炭鑛 鑛夫난동사건과 관련, 勞使問題를 어떻게 보는지. -불행한 사고다. 물론 低賃金下에서 고생하는 광부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나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해결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70년대 고도성장은 누가 뭐라고 해도 국제적으로 상대적 저임금 하에서 땀흘린 노동자들의 공로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勞使분규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조정되어야 할 것이며 이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국가이익이라는 차원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행정당국, 고용주 및 노조간부 모두가 각자의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믿는다.
▲非常戒嚴해제시기는. -나도 非常戒嚴이 하루 속히 해제되기를 희망하나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계엄이 언제 해제되느냐는 내 권한을 벗어난 것이므로 내가 언제라고 시기를 전망할 수 없다. 나자신도 대단히 답답하게 생각한다. (1980년 4월 30일자 중앙일보)
4월 29일에는 全軍 주요지휘관 회의도 열렸다. 회의 후 과격한 학원소요와 노사분쟁에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5월 1일 서울대 총학생회는 2일부터 유신잔당 퇴진, 계엄해제, 정부주도개헌 중단,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는 정치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신민당에서는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대중 계보의원들이 당의 공식행사를 기피하고 신민당 입당 포기를 선언한 김대중의 여러 가지 행사 나들이에 계속 따라갔다. 이에 김영삼 총재를 중심으로 한 주류는 징계를 하려 했다.
5월 1일 신민당 당기 위원회는 박영록 부총재, 노승환 훈련원장, 정대철 정책심의위 부위원장, 김영배 부총무 등 4명의 ‘김대중 수행의원’을 해당행위자로 고발했다. 또한 13명에게 경고서한을 보냈다. 芮春浩 千命基 李龍熙 高在淸 李必善 崔成石 趙世衡 金元基 李震淵 朴炳涍 許京萬 金承穆 의원과 趙淵夏 정무위원이었다. 경고 내용은 ‘공개 사과를 하지 않을 경우 당에서 추방’이었다.
이들은 즉각 반발하여 5월 2일 국회에서 별도의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당권파가 징계문제를 강행할 경우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겠다”고 말했다. 즉 징계하면 탈당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5월 2일 윤보선 전 대통령은 4월 29일의 김대중 발언을 비판했다.
「國民聯合」은 政治활동 할수없다 尹潽善씨, 金大中씨를 비난
「民主主義와 民族統一을 위한 國民聯合」공동의장의 한사람인 尹潽善 전 대통령은 2일『金大中씨가 지난 29일「國民聯合」이 民主化촉진 全國民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 의사를 표명했으나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尹씨는『金大中씨가 대통령에 입후보하려는 것은 三尺童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가 民主化운동을 한다고 돌아다니는 것을 누가 국민운동이라고 보겠느냐』고 비난하고『國民聯合은 순수한 국민운동이지 政治活動을 할 수는 없으며 과거에도 國民聯合에 참석했던 정치인은 政黨을 탈당했었다』고 말했다.
尹씨는 이어 民主化촉진운동이 시기에도 적절치 못하다고 말하고『운동이 지나치게 되면 계엄연장의 구실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80년 5월 3일자 서울신문)
5월 3일 국민연합은 학원사태의 해결을 위해 계엄령을 조속히 해제하고 개헌과 총선실시를 촉구했다.
學園사태 解決위해 民主化日程 밝혀야 國民聯合 주장
「民主主義와 民族統一을 위한 國民聯合」(共同議長 尹潽善 金大中 咸錫憲)은 3일 상오 성명을 발표,『최근의 學園사태는 舊體制를 청산하기 위한 불가피한 현상이며 維新殘滓세력의 집권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학생들의 정당한 抗拒』라 주장하고『학원사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過渡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즉각 해제하고 改憲과 總選이 조속히 실시되도록 民主化日程을 분명히 밝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또 이밖의 해결책으로▲정부주도의 二元執政制나 中選擧區制改憲구상을 포기하고▲政治犯의 석방 復權▲言論의 자유가 보장되고 부당한 검열과 보도관제는 철폐되어야하고▲학생군사훈련과 병영집체훈련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아울러 주장했다. (1980년 5월 3일자 서울신문)
이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 헌법개정 특별위원회에 출석하여, 이원집정부제는 제의도 없다고 언명했다.
5월 6일 김대중 계 신민당 의원 25명은 동교동 김대중 집에 모여 이른바 ‘시국에 관한 신민당의원 간담회’ 결성을 발표했다. 이는 본격적으로 김대중 신당을 창당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사실상의 野圈 兩分 新民議員 24명의 時局간담회 結成의 波長 金大中씨, 院內優位 확보면 入黨꾀할듯 黨權派선 “新民黨 포위작전” 이라 경계
新民黨원내 金大中씨 세력이 會議體로나마 결국 명칭․소집책을 갖추어 黨의 二元化가 현실화한 느낌이다. 金씨측은 6일「時局에 관한 신민당의원 간담회」를 결성하면서『시국협의를 위한 당내「서클」』로 성격을 규정하고 新黨이나 별도 교섭단체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非黨權派의원들의 金씨 행사참석 수행에 대해 징계문제까지 거론하고 있는 金永三총재측으로서는 간담회를「組織化」로 간주하고 있어 兩派간의 聲討戰은 組織戰으로 擴戰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德山회견을 통해「민주화를 위한 全國民운동」을 천명하면서 신민당의 참여를 督勵했던 金씨로서는 自派의원「시국 간담회」를 결성시킴으로써 일단 德山선언을 구체화한 셈이다. 신민당訣別선언후 汎國民운동의 길을 택하겠다고 밝힌 金씨로서는 學園이 이미 오래전부터 時局문제로 진통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헌작업 등 몇가지 시국의 變數를 둘러싼 잡음이 예상되고 있어 더 이상 시국관찰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입장이다.
이와 관련해 李宅敦의원은『학생들에게 불행이 닥치기 전에 우리가 문제를 맡아 院內투쟁등을 벌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金씨에게는『危機感이 도는 時局의 적극적 대처』이외에도 간담회구성이 불가피한 몇 가지 당면한 다른 속사정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金씨 수행원들에게 黨權派가 懲戒위협을 가하는데 대해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는 비당권파의 士氣를 높이고 金총재측에 대해서도「實力대항」의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간담회」로 이를 과시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6일 東橋洞의 24人 회의에서도 韓建洙의원등은 이같은 非黨權派의 분위기를 발전시켜『필요하다면 分黨이라도 해야한다』고 말했다가 金씨로부터『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내 時局觀과 여러분의 의견을 교환하자는 것』이라고 제지를 당했다는 것. 이밖에 金씨측은 이번 행동으로 金총재의 시국관과 지도노선에 대한 비판과 이에 따른 상대적인 鮮明性의 과시를 크게 의식하고 있는 것 같다. 李龍熙의원은『학원소요와 勞使문제에도 불구하고 金총재측이 民主化에 지장이 없다고 낙관하는데 대해 정신차리라는 경고적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의 움직임을 설명한다.
이러한 복합적 효과를 겨냥해서인지 金씨측은 6일 모임의 참석자 숫자에 크게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金씨가 직접 전화를 걸어 간곡하게 초청하는가 하면 주변에서는 반대파의 참석저지를 막기위해 當日아침까지 모임자체를 참석자이외에게는 철저하게 對外秘에 붙였다.
실제로 24명이란 숫자는 지금까지 있었던 金씨 세력의 규합으로는 가장 큰 것이다. 이중 朴永祿 宋元英 韓建洙 芮春浩 盧承煥 李宅敦 千命基 李龍熙 高在淸 李必善 崔成石 鄭大哲 趙世衡 金元基 金令培의원은 당초부터 참모․측근으로 행동해온 사람들. 金胤德 李震淵 林鍾基 朴炳涍의원도 출신지역 관계등으로 보조를 같이해왔다.
특히 中道를 자처해온 韓英洙 金濟萬의원이『아침이나 먹으며 시국얘기를 나누자는 얘기를 듣고 갔더니 그런 모임이더라』는 말을 했듯이 東橋洞사람들 회의에 처음 참석했고, 金총재가 梁海焌 전의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구당위원장을 배려한 孫周恒의원이 참석해 주목을 끌었다.
참석이 예상되어 회의를 통고해준 사람으로 鄭海永 金俊燮 吳世應 嚴永達 金承穆의원등 5명이 또 있다는 것. 金씨측 한 의원은 이들 말고도 4, 5 명이 더 확보케 되어있어 굳이 同調의원을 따지자면 35명선에 이른다고 주장했다(新民의석 66명).
그러나 회의 후 韓英洙의원은『新民黨을 떠나서 김씨를 지지할 생각은 없다』며『다음 회의참석은 확실치 않다』고 했고, 金濟萬의원은『黨外「서클」엔 참여치 않겠다』고 밝혔다. 金守漢의원은『新黨하면 그 숫자가 된다고도 장담할 수 없으니 모임규모를 놓고 숫자풀이를 할 것도 없고 신경질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도움이 안된다』고 했다. 그래도 國民聯合을 비롯해 憲政同志會․韓國政治文化硏究所등 관여단체나 외곽단체를 확보해놓은 金씨는 이번 간담회로 院內조직도 겸비한 셈이다. 黨權派의 鄭在原 임시대변인 같은 이는 이러한 金씨의 조직을 가리켜『統一黨까지 엮어 新民黨에 대해 포위작전을 펴고 있다』고 경계했다.
金씨측은 단기적으로 金총재쪽 당집행부에 대해 籠城․時局선언 등을 통한 국회소집貫徹을 요구, 黨內정치主導를 계획하는데 반해 金총재측은「간담회」결성에 대해선 주시하면서 노선비판의 봉쇄를 위해 총재회견․상대방 전략 폭로 등을 구상중이어서 時局對處를 내세운 攻防戰은 격화될 것이다.
장기적으로 金씨측은 金총재측에 대한 적극적 공세와 동조의원 확보노력을 계속해 院內優位를 확보한다면 新民黨에 入城할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新黨 또는 在野의 길을 가게될 공산이 비교적 크다. 그러나 어느 경우가 되건 兩金씨가 스스로의 名分과 術策만을 고집할 때 지도자로서의 狹量만 노출되고 야당에 대한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남길 것으로 우려된다. 〈韓南圭 기자〉 (1980년 5월 7일자 중앙일보)
5․17 계엄선포로 인한 헌정중단으로 김대중 신당은 생기지 못했지만 87년 6․29선언 이후 김대중의 평민당이 창당되는 과정은 80년 김대중의 행태를 그대로 복사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