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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이집트의 주요역사와 투탄카멘 왕
투탕카멘(Tutankhamun) BC1370∼1352년)
고대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2대 왕(BC 1361년∼BC 1352년)테베 출생. 투탕카톤으로 불렸다. 수도 아마르나의 이크나톤왕가에 왕비 네페르티티 밑에서 왕녀들과 함께 양육되었으며 이크나톤이 죽은 후 후계 왕으로서 왕녀 안케센바톤과 결혼하였다. 이때에 왕은 10세, 왕비는 12세였다. 그는 아켄타텐에서 다신교를 부정하고 아텐신 만을 믿는 아멘호텝프4세와 키야(Kiya)사이에서 투탕카텐(아텐이 생명을 줌이라는 뜻)으로 태어났고 그 유명한 네페르티티 여왕의 의붓아들이기도 한 그는 부친이 죽은 후 8살에 왕위에 올라 수도를 멤피스로 옮기고 이름도 투탕카멘으로 바꾸었다. 투탕카멘은 쇠퇴하던 제18왕조말의 보잘 것 없는 왕으로서 9년을 통치하고 17살의 나이로 죽었지만, 1922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그의 무덤의 화려한 부장품들로 인해 오늘날 이집트의 대표적인 파라오로 인정받고 있다.
투탕카멘 무덤의 발굴
1922년 테베 왕가의 골짜기에서 영국 고고학자 H. 카터가 투탕카멘왕 묘를 발견, 10년에 걸쳐 발굴하여 발견 물 모두를 카이로박물관에 소장시켰다. 묘는 계단부터 시작되어 널길[羨道]을 거쳐 앞방[前室]에 들어간다. 앞방은 사자모양의 침대를 비롯한 가구, 세간으로 가득 차 있고, 서쪽에는 부실(副室)이 있으며 북쪽이 널방[玄室]으로 연결되어 있다. 널방에는 왕의 미라가 8겹으로 된 장치 안에 안치되어 있다. 왕의 신장은 168㎝이다. 널방 동쪽에 보물 실이 있는데, 아누비스(개모양의 死者의 神)의 형상을 비롯 부장품[副葬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왕의 아들인 태아 2구의 미이라도 있다. 다른 왕묘와 달리 투탕카멘 왕묘에 벽화가 있는 것은 널방뿐이다. 카터가 카이로박물관에 소장시킨 발굴품은 1703점에 이르며,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종교·예술·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하는 풍부한 유물이 되었다.
메네스(Menes)
B.C 3200년경부터 3000년에 이르는 불과 수세기 사이에 나일 강 연안에 흩어져 생활하는 부족민을 통합하여 정부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성립한 파라오로서 상 이집트 부족의 지도자로 전설에는 메네스로 되어 있으나 아마도 이집트 초대 왕 나르메르(Narmer)와 동일인물인 것 이다. 그는 세력을 북으로 뻗쳐 국토를 통합하고 30대에 이르는 첫 왕조를 수립한 것이다. 메네스는 델타의 요충지로부터 남으로 약32km, 상. 하 이집트가 접하는 지점 가까이에 멤피스마을 건설하고 그것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 후 멤피스는 고대 이집트 제일의 도시가 되었다.
람세스2세(Ramses II)
람세스2세는 왕중의 왕다운 인물이었고, 67년 걸친 찬란한 통치를 했다. 그는 히타이트인과 외교교섭을 시작하여 기록으로서 남은 역사상 첫 조약에 서명을 했다. 그는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 원정했고 남부를 습격했다. 그의 용감한 훈공과 개인적인 용기에 얽힌 이야기를 당시의 신전 벽에 새겨져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카르나크에 있는 유명한 제례용 신전인 대다주실, 그 자신과 아몬신의 영광을 찬양하기위하여 테베의 나일 서안에 건립한 대장제전 라벳세움, 오시리스 신에게 바친 아비도스의 대 신전, 후에 약탈의 화를 입은 몇 개인가의 멤피스신전, 강을 마주보며 4개의 람세스거상이 늘어선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신전 등이 있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그리스 시대 왕비들의 전통적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의 마지막 군주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 여왕의 이름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BC 51-30)은 이집트의 그리스시대(기원전 332-30) 마지막 통치자로서 로마 제국과의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 속에서 파란만장한 정치생활을 이끌었다. 기원전 51년 그녀의 부친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죽자 로마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클레오파트라의 정치적 후견인이 되었고, 그가 케사르에게 쫒겨나 알렉산드리아에서 암살당한 뒤 정식으로 이집트 왕위에 올랐다. 케사르가 죽은 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관계를 맺었고, 로마는 이에 대항하여 기원전 32년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기원전 31년 벌어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의 해군이 주축이 된 안토니우스 측은 경쟁세력인 옥타비우스에게 패했고 클레로파트라는 BC 30년 8월 10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하였다.
역사
이슬람 이전
구석기시대 이집트인은 유목생활을 하였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가 건조화 되기 시작한 이후는 강가에 모여 살았다. 신석기시대는 하(下)이집트 파이윰분지에서 BC 5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는데 이 문화를 파이윰A라고 한다. BC 4500년 무렵에는 상(上)이집트에 구리를 이용하는 바다리 문화가 발생했다. BC 4000년 무렵에는 보다 진보된 나카다 제1기 문화가 출현하여 초보적인 이집트문자가 발생했으며, 이어 BC 3500년 무렵 나카다 제2기 문화로 발전했다.
나일 강을 중심으로 마을이 연합하고 상 이집트와 하 이집트에 국가가 생긴 것은 이 무렵이다. 하 이집트는 파이윰으로부터 북쪽지역에, 상 이집트는 파이윰에서 아스완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⑴ 초기왕조시대:
BC 3000년 무렵 상 이집트의 왕 메네스가 이집트를 통일한 뒤 제1왕조가 시작되었다. 수도는 피닉스에 있었다. 왕권이 신격화되어 왕관의 형상도 왕권의 상징인 매와 뱀으로 정해졌다. 호루스 신을 섬겼으며, 대형 왕묘 구축기술을 갖추었다. 제2왕조 초기의 왕은 수도를 멤피스 근처로 옮기고 왕묘를 세웠으며, 다음 왕 페리브센은 수도를 상 이집트의 아비도스로 옮기고, 호루스신의 적(敵)인 세트 신을 섬겨 종교상의 변혁을 가져왔다. 제 2 왕조는 BC 2700년 무렵의 카세케무이 왕 시대에 몰락했다. 이 제 1∼2왕조시대를 피닉스 시대·고졸시대(古拙時代)·초기왕조시대라 한다.
⑵ 고왕국시대:
BC 2700년 무렵 제3왕조는 멤피스에 수도를 두었다. 조세르 왕 시대에 국력이 신장되어 최초의 석조피라미드를 사카라에 구축했다. 그 규모는 동서 121m, 남북 109m, 높이 60m였다. 그 뒤의 왕은 이것을 모방하여 피라미드로 왕묘를 만들었다. 제 4 왕조는 BC 2600년 무렵 스네프루 왕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왕조는 남쪽으로 누비아, 동쪽으로 아시아, 서쪽으로는 리비아로 진출했다. 스네프루왕은 마이둠피라미드·굴절피라미드와 그 뒤 다슈르의 저경사(低傾斜) 피라미드를 건축했고, 아들 쿠푸왕은 기자에 대형피라미드를 세웠다. 카프레· 멘카우레 등의 왕들도 각각 피라미드를 구축했으며, 제 4 왕조에서 라(Ra;太陽神) 신앙은 왕가의 신앙인 동시에 국가의 신앙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이때 미이라를 만드는 기술도 생겼다. 제5왕조는 BC 2450년 무렵 우세르카프 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나스왕의 피라미드에는 사후 왕의 안녕과 영생을 기원하는 피라미드 교서가 내부에 새겨져 있다. 제 6 왕조 페피 2세시대는 왕권이 쇠약해져 지방호족과 고관이 권력을 장악하다가 BC 2263년 무렵 몰락했다. 제3∼6왕조에 이르는 이 시대를 피라미드시대라고도 한다.
⑶제1 중간기:
고 왕국시대 뒤 제 1 중간기는 혼란기였다. 이 혼란기는 제7∼10왕조까지 이어지는데 왕조들은 전국토를 통치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지 못한 지역적 존재에 불과했다.
⑷ 중 왕국시대:
제11왕조의 안데프 1세는 BC 2160년 무렵 상 이집트 테베를 중심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재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멘투헤테프 2세가 재통일을 완성하고, 상부를 피라미드형으로 만든 대형 장제전(葬祭殿)을 디르알바리에 세웠다. 멘투헤테프 3세는 누비아의 일부를 이집트 지배하에 두었다. BC 2000년 무렵 아메넴하트 1세에 의해 시작된 제12왕조는 수도를 하 이집트의 이타우이(지금의 다슈르)로 옮겼다. 그리고 테베지역의 아멘신을 왕가의 신으로 섬겼다. 아메넴하트 1세는 수에즈 지협에 성채를 구축했고, 말년에는 아들 세누세르트 1세와 공동통치를 하였다. 세누세르트 1세는 나일 강 지류를 개발, 홍해에 연결하였으며, 아메넴하트 3세는 농업을 진흥시키고 하 이집트에 댐을 구축했다. 한편, 세누세르트 1세에 의해 식민지가 된 누비아에서는 금이 산출되어 이집트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제12왕조는 행정 및 군사제도를 정비했으며 문화적으로 번영했는데, BC 1785년 무렵 몰락하고 제13왕조가 이를 계승했다. 우카프·소베리호테프·아메넴하트·세켐레스·켄지엘 등의 왕들이 알려져 있으나 통치력은 극히 미약했다. 이 시대는 BC 1750년 무렵에 몰락하였다.
⑸ 제 2 중간기:
중 왕국시대가 끝난 뒤 혼란기인 제2중간기가 시작되었다. 제2 중간기 초에는 이집트인을 왕으로 세운 제14왕조가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침입한 힉소스는 BC 1730년 무렵 아바리시(지금의 타니스)를 수도로 제15왕조를 세웠고, 그 뒤 제16왕조까지 이어갔다. 그러나 힉소스는 하 이집트만 직접 통치했을 뿐 상 이집트는 지방호족을 통해 간접 통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테베에 기반을 둔 영주가 BC 1680년 무렵 제17왕조를 세웠다. 초기에는 힉소스왕조와 공존했으나 5대 세케넨레왕에 이어 그의 아들 카메스왕이 힉소스를 몰아냈다.
⑹ 신왕국시대:
힉소스를 완전히 몰아낸 것은 다음 왕 아메스 1세시대 BC 1580년 무렵이다. 그로부터 제18왕조가 시작되어 수세평화주의(守勢平和主義) 국가에서 공격적인 군사국가로 변했다. 전쟁에서는 힉소스가 들여온 말과 전차를 중요시했다. 그리고 아멘 신(神)의 세력이 팽창하여 힉소스를 몰아내고 최고의 국가신이 된 동시에 태양신 라를 흡수하여 아멘라라고도 했다. 또한 아멘 신을 위한 카르나크신전·룩소르신전, 핫셉수트 여왕이 장제전(葬祭殿) 등을 세웠다. 6대왕 투트모세 3세는 영토를 가장 크게 넓혔는데, 남쪽으로는 누비아의 나일 강 제4 급류까지,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 일대까지 지배했다.
제10대 이크나톤왕은 종교개혁을 실시하여 아멘신의 영향력을 일시적으로 축소시켰다. 한편 이 시대의 아마르나양식은 후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제18왕조 이후에 람세스 1세가 삼각주지대에 제19왕조를 세웠으며, 3대 람세스 2세는 정복 왕 또는 건축 왕으로 유명하다. 히타이트와 맺은 평화조약은 인류가 맺은 최초의 성문화된 평화조약이다. 건축은 이집트 및 누비아·아시아 각지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아부심벨의 대 암굴 신전이 대표적이다. 제20왕조는 BC 1200년 무렵 세트나크트가 세웠다. 그러나 아들 람세스 3세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BC 1080년 무렵 몰락했다.
⑺ 후기왕조시대:
스멘데스왕이 타니스에 세운 제21왕조에 이어 BC 960년 무렵 리비아인이 제22왕조를 열었다. 힉소스 이래 2번째 외국인 왕조이다. BC 817년 무렵에도 리비아인이 제23왕조를 세웠으나 사이스에 기반을 둔 이집트인 지도자가 일어나 BC 780년 무렵 제24왕조를 세웠다. 21∼24왕조시대를 말기왕조시대 또는 제3중간기라 한다. 제 3 중간기 뒤에는 누비아인이 제25왕조를 열었다. BC 663년에는 이집트인이 제26왕조를 세웠고, BC 525년에는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페르시아 령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제27왕조이다. BC 404년 이집트인 아미르타이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제28왕조를 세운 이후 이집트인이 제29·30왕조를 세웠다. 이 세 왕조가 파라오시대의 마지막 이집트 왕조이다.
⑻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
BC 341년에는 페르시아의 아르탁세륵세스 3세가, BC 332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부장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리아에 프톨레마이오스왕조를 세웠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이집트 고유의 문화를 존중했으며, 왕들은 이집트 식 신전을 세우고 이집트 식 상형문자를 새겼다. 왕가의 공용어는 그리스어였으며, 왕명은 상형문자·민중문자·그리스문자 3가지로 발표했다.
⑼ 로마 제국령시대:
BC 30년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자살하자, 로마는 이집트를 속주로 삼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곡물을 가져갔다. 395년 로마제국이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으로 분열된 이후는 비잔틴 제국령으로 편입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대제가 신전폐쇄를 명한 이후 파라오시대의 문화전통이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비잔틴 제국령이 되기 이전부터 이집트에 들어와 있었으며, 콥트어에 그리스문자 및 음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콥트문자체계를 만들었다. 비잔틴제국시대의 이집트는 물질적인 착취와 종교적인 박해를 받았다.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
고대이집트에서 왕을 제사지내던 곳. 고·중 왕국시대(BC 2686∼BC 2160 무렵, BC 2040∼BC 1786 무렵)에는 피라미드에 접해 있었고 지성소(至聖所), 저장실, 열주회랑(列柱回廊)이 딸린 중앙뜰, 제사용 탁자가 있는 예배소, 왕의 조상(彫像)을 둔 방, 내장(內臟)과 관(冠)이 있는 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피라미드
돌이나 벽돌로 만들어진 사각뿔모양의 건조물. 고대이집트를 대표하는 건축 양식이며, 이집트·수단·에티오피아·멕시코 등 세계 각 지역에서 건조되었다. 사각뿔모양의 석조건조물로서 왕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스핑크스
이집트 기제 근처 모래 속에 앉아있는 스핑크스는 사자의 몸과 인간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크기는 길이가 약 73m, 높이 약 20m, 머리 폭이 4m 이상이나 된다. 이집트인은 스핑크스를 태양신 하르 마키스의 화신이라고 생각했고, 인간의 얼굴은 상이 만들어진 당시의 왕 카프레를 본 뜬 것 이라고 생각된다. 스핑크스에 대해서는 그것이 지나온 놀라운 세월에 비해 자세한 사실 알수 없지만 고대 기록에 따르면 어떤 젊은 왕자가 뜨거운 사막을 지나가다가 스핑크스의 그늘에서 쉬게 되었다.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스핑크스가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만일 내 둘레에 높인 쌓인 모래를 제거해 주면 이집트의 왕위를 주겠다고. 꿈에서 깬 왕자는 바로 모래를 제거해 주었다. 이것이 3400년 전의 이집트 왕 투트모스4세(Thutmes 4)이고 스핑크스는 1100세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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