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문열은 소위 빨갱이 자식이었다. 경북 영양의 천석꾼 집안의 자제였고 당시 최고 엘리트 교육을 받았던 이문열의 부친. 그는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였다. 그때 이문열은 두 살 무렵이었다.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보수 세력의 원산지 경북에서 겪었던 빨갱이 자식이라는 눈초리는 이문열의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그 자신이 빨갱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 동시에, 반공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하는 것이 해방되는 길이었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과거 남로당 가입 혐의로 군 수사 당국에 체포된 전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공산주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공주의를 외쳐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과정과 흡사하다. 남로당은 남조선노동당의 약칭이며 1946년 11월, 서울에서 창당된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이문열 지난 2일 조선일보에 칼럼을 썼다. 박근혜 즉각 퇴진 제6차 촛불집회를 하루 앞둔 글이었다. 칼럼의 내용은 평소 그의 정치적 신념과 전혀 다름없었으나, 집회 참가자들을 가리켜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유하는 글은 이문열의 레드컴플렉스가 얼마나 깊은지 다시 한 번 입증하였다.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과 같은 거대한 집단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라고 썼다.
이문열은 자타공인 보수이다. 보수 중에서도 극우 보수이며, 극우 작가이다. 그렇다고 그의 사상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뭐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빨갱이 트라우마를, 민중의 박근혜 정부에 대한 격노와 민의의 표출을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교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난 인식이다. 그의 조선일보 칼럼 어디에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헌정사상 최악의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모든 원인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드는 민중들로 인해 국가가 혼란에 빠진 탓으로 돌린다. 과거에도 여러 차례 집회 참가 민중을 가리켜 홍위병이니 촛불장난이니 폄훼하는 이문열의 사고는 그가 속속들이 엘리트정치의 우월의식에 젖어있는, 그래서 민중은 우매하며, 광장에 집결하는 그자체로도 불순하여 용납이 안 되는 '중우정치'로 재단하였다.
시대가 변하고 민주주의 형태도 변화하고 있건만 플라톤이 아테네의 몰락을 중우정치의 병폐로 여겼던 국가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이끄는 엘리트들의 부정부패와 타락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약화시키고 위기를 가져오는 행태는 외면하고, 이에 격분한 민중들의 정당한 항거를 무지몽매함으로 돌린다.
천재적인 서화가 고죽은 스승 석담과의 예술관의 차이로 갈등한다. 도와 기품을 추구하는 스승 석담은 높은 경지에 도달한 글씨를 써서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그러한 경지를 얻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데 비해, 아름다움의 가치에 집착하는 고죽은 스승에 반발한다. 고죽은 스승에게 보복이라도 하듯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는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서화를 세상에 뿌리며 명성을 얻는다. 세월이 흘러 스승이 죽은 후 늙어버린 고죽은 화랑가를 돌며 자신의 작품을 모조리 거두어들인다. 죽음이 임박한 고죽, 자신의 글과 그림을 한데 모아 냉정한 평가를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왼편으로 제쳐 놓도록 하였다. 하지만 오른편으로 옮긴 서화는 한 점도 없었다. 고죽은 자신의 작품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며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금시조가 비상하는 환상을 보며 숨을 거둔다.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의 줄거리이다. 이제 칠순에 접어든 이문열은 과연 자신이 썼던 모든 작품들과 기고한 숱한 글들에 대해 <금시조>의 고죽처럼 준엄하고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이 믿어온 이데올로기가 최고의 가치임에 추호도 의심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