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박정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하원 길. 차 안에서 누군가 지독한 방귀를 꿨다. '누구?' 잠깐의 침묵끝에 다섯살 손녀가 웃으며 하는 말.
'오빠 생일이니까 선물로 내가 꿨다고 할께요.' 얼굴 붉어진 손주가 '툭' 하고 동생 어깨를 치는 모습이 빽밀러로 보였다.
'어쩜,이쁘기도 해라!' 이래서 또 웃는다. 줘서 기쁘고 받아서 민망한 방귀선물.
어렸을땐 다들 먹고 살기 바빠 그랬는지 생일은 어른들에게만 있는줄 알았다. 집안의 어른이신 아버지 생일날 위,아랫 동네 어른들을 모셔와 식사대접을 하는 게 년중 행사였다.
이 날 몇몇 어른들 손엔 하얀 메리야쓰나 사이다, 짚으로 엮은 다섯알 달걀 꾸러미 ᆢ등 소박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그래도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양조장 할머니는 하얀 설탕이 든 봉지를 들고 오셔서 우리를 기쁘게 해주셨다. 둥근 쟁반에 붉은 토마토를 썰어 담고 그 위에 눈처럼 뿌려지던 하얀 설탕. 아버지가 약주를 많이 하신 날 냉수에 타서 마시던 그 달콤했던 기억들.
선물 이라는 표현보다는 마음을 나누었다는 말이 더 어울리던 정경이었다.
어느 해 부터인가 슬그머니 없어진 추석빔과 설빔도 그 중의 일부다.
설이나 추석 아침 우리 남매들의 머리 맡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옷가지들. 양말,속옷,운동화, 운 좋으면 옷 한 벌씩이 놓여 있었다.
양말 한 컬레만 놓여 있을 땐 다들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2남6녀중 여섯째 딸인 나는 늘 넷째나 다섯째 언니가 입다 작아진 옷을 물려 입었다. 목은 늘어나고 옷단에 실밥이 터져 소매가 헤진 언니옷을 '이제 네차레다 ' 하듯 물려 줄때면 딸이 하나라 계절마다 새옷을 입고 자랑하던 내 친구가 부러워 그집 딸이 되고 싶다는 어린 생각을 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해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품목이 달라졌던것같다.
요즘 아이들은 길을 가다가도 예쁘다면 사주는 어른들 덕에 새옷에 대한 감사와 감동을 그닥 느끼지 못하는것 같다. 새옷이 주는 그 빳빳한 느낌과 냄새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I.M.F와 광우병 파동으로 운영해 오던 가게 문을 닫고 김밥 집에서 육개월간 일을 한 적이 있다.
오전 열 시에 출근해 저녁 열 시에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은 늘 피곤에 절어 발걸음을 떼는것도 힘에 겨웠다, 퇴근을 하려고 가게 문을 나서려는데 대학1학년을 휴학하고 집에 있던 딸이 웃으며 마중을 와 있었다. 여고 담벼락을 끼고 경사진 골목길을 딸이 앞서 겅중겅중 뛰어가며 기다란 폭죽을 '펑!펑!' 터트렸다. 삼월 초 엿새 달도 없는 어두운 밤이 딸의 마음처럼 ' 반짝!' 하고 빛나다 사라졌다 . 내 삶에도 저렇게 반짝이는 순간이 다시 올 수 있을까? 이 선물을 준비하며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마음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듯 아파왔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돈이 없어서 선물을 못 샀어. 미안해." 딸과 내 눈에서 누가 먼저라 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미 니가 준 마음으로 세상을 모두 받은것같아 ᆢ!'
우리는 어느새 손을 잡고 웃으며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 유리 문앞에 happy birthday 라는 글자가 색종이로 써 붙여있었다.
내 생에 가장 기쁘고 그래서 더 슬픈 선물이었다.
아들을 장가 보내자 사돈은 해마다 모양이 다른 금반지를 생일선물로 보내왔다.
살아생전 생일 선물로 반지를 해준다는 말과 함께 ᆢ
사돈 선물은 자로 재서 받는다는 말도 있듯이 나도 똑같은 선물을 보낼 수 없어 머풀러를 보냈다가, 화장품도 보내고 돈케익에 이어 지난 해는 금반지를 보냈다. 이런경우 어쩐지 선물이 기쁘면서도 부담스럽긴하다. 어쩐지 마음보다 예의와 형식이 앞선것 같아 사돈도 좀 그러실것 같다. 내년부터는 며느리를 통해 서로 생략하자고 해야겠다.
마음에 꼭 드는 선물은 주기도 어렵고 콕 찝어 말하지 않는 한 받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어른들중 현찰이 최고라는 말을 하는 분들도 많다 .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진주 반지를 선물 한 적이 있다. 둘이 홈쇼핑을 보고 있을 때 엄마가 '예쁘다' 하셔서 별생각없이 사드린 반지였다. 돌아가시기 십여년 전까지 막내딸이 사줬다며 왼쪽 네째 손가락엔 내가 사준 반지가 늘 끼어져 있었다. 금반지같았음 형편 어려울때 벌써 팔았을거라는 말씀이 내 마음을 콕 찔렀다.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 화장대에서 발견한 그 반지가 내 손으로 돌아 왔을 땐 너무나 보잘것 없이 값싼 진주티를 내려는 듯 흠집나고 벗겨져 있어 제대로 쳐다 볼 수 가 없었다. 그동안 엄마의 힘듬과 어려움이 반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듯 했다.
늘 선물은 마음이라고 했던 내 마음을 들킨 것만같았다.
그 당시 형편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는데 왜 더좋은 반지를 사드리지 못했을까? 약지에 끼워져 헐렁해 맞지않는 반지를 버리려다 서둘러 서랍을 닫았다. 반지를 버리는 것이 어머니를 버리는것만 같았다.
화장대 서랍을 열 때마다 '나 여기 있어' 하듯 반지가 소리내어 굴러온다. 손가락에 끼워 본다. 외관으로는 반지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린 조악한 반지였다. 그러나 엄마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은 엄마를 느낄 수 있는 반지였다.
감사하게도 나는 참 많은 선물을 받고 살아온것 같다. 받기 보다 주는 삶이 더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손녀의 방귀 선물에 이런 저런 참 생각이 많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