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특집
졸혼을 꿈꾸는 남자
김연종
P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 그와 함께한 세월에서 의리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다. 의리 빼면 시체라는 말처럼 일상에서 의리를 빼면 딱히 남아 있는 게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사정이 어려운 친구들을 배려했고 괴롭힘당하는 친구를 보살폈다. 뛰어난 언변에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주위를 압도했다. 훤칠한 외모로 또래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다. 요즘 말로 ‘인싸’지만 여자들에게는 나쁜 남자 스타일이기도 했다.
물론 어릴 때의 의리라면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는 법. P는 내게 처음으로 배신을 가르쳐준 친구이기도 했다. 또래보다 성숙했던 그는 나에게 도색 잡지와 야동의 신비함을 동시에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른바 청춘의 고민 상담사였다. 그는 가장 먼저 사회에 진출했고 가장 먼저 결혼하여 가장 먼저 아이들을 키웠다. 성공한 사업가이자 인생 모델이었던 P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그를 만나고 싶어 하진 않았다.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했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하는 한낱 시인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그래서 대화는 끊어지고 그는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곧 중요한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고 할 때.”
- 안톤 슈낙,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P와 조우했다. 옛 추억을 안주 삼아 거푸 술잔을 기울이던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졸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다고 했다. 깊은 속내가 있는데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대로 구체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졸혼卒婚은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가 『졸혼을 권함』이라는 책을 내면서 사용했고, 우리나라 유명 배우가 자신이 졸혼했다고 선언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결혼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도 자유롭게 생활한다는 점에서 중년 부부들의 관심을 끌었다. 결혼을 졸업한 후 자신에게만 투자하려는 이기적인 심정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대화는 자꾸 어긋났다. 삶을 마주하는 방식이 달랐던 그와 나는 졸혼을 대하는 태도도 확연히 달랐다.
“졸혼이란 결혼 생활에서 희생당한 여자가 남은 삶을 보상받기 위해 택한 방편이지, 남자가 선택할 일은 아니잖아?”
조목조목 심각하게 따지는 나에 반해 그의 대답은 싱거웠다.
“인생은 짧아, 그리고 너무 허무하잖아.”
“혹시 아내가 먼저 요구한 건 아니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단지 삶에 대한 무력감이 들고 지금 결단하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할 것 같다는 것이다. 사랑은 고사하고 그동안 부부 사이를 지탱해 온 의리는 어디로 가버렸는지 다그쳐도 마찬가지였다. 대화는 계속 겉돌았다. 학창 시절 청춘의 고민 상담사였고 의리의 대명사였던 그와 범생이면서 소심한 의사의 삶을 살아가는 나와 견해 차이를 메우기는 힘들어 보였다. 결국 그는 졸혼의 길을 택했다.
그렇게 P는 우리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동창 모임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졸혼 후 주위의 시선을 피해 자발적 은둔을 택한 것일까. 그러던 P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내 호프집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동안 알음알음으로 이혼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터였다. 말갰던 얼굴이었는데 갑자기 폭삭 늙고 피곤에 절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가 손으로 메마른 얼굴을 문질렀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 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후회막심이라고, 졸혼은 이혼의 지름길일 뿐이라고 P는 목소리를 높였다. 언제나 선구안이 뛰어났고 의리의 대명사였고 청춘 고민 상담사였던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의리와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흔들리는 눈빛만 맥주잔에 일렁거렸다. 그동안 살아온 내막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함께 살아온 날과 함께 살아갈 날이 팽팽하게 맞설 때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는지, 아니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한때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의리도, 정의도, 졸혼도 술에 취한 내 모습처럼 흔들거릴 뿐이었다.
그때 하필 24시 편의점 앞을 서성이는 노인이 눈에 띄었다. 구부정한 어깨,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을 되뇌는 초췌한 몰골, 가끔 허공을 향해 짓는 헛웃음, 게다가 코를 다 가리지 못한 헐렁한 마스크까지.
언뜻 봐도 노숙자였다. 구걸을 하는 건지 그냥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는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간에 깊게 파인 주름과 무연한 눈동자는 고뇌하는 철학자의 모습 같기도 하다. 일부러 그를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저리 비키라고 소리쳤던 거지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떠올랐다. 고뇌하는 디오게네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는 수컷으로 태어나지 말아야지’하며 갈기를 내리는 수사자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어쩌면 저 노인도 졸혼을 선택했거나 황혼 이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수컷의 비애가 느껴지는 행색을 보며 우리는 말없이 잔을 비웠다.
의리를 목숨처럼 떠받들고 사는 중년 남자, 실력 없는 전문직, 혼을 담아내지 못하는 예술가, 착해 빠진 사기꾼, 퇴기의 추한 욕망, 그리고 여전히 졸혼을 꿈꾸는 남자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를 술 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