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5년 대북파의 무고로 능창군 전(綾昌君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된 신경희(申景禧)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1618년 이이첨(李爾瞻) 등의 폐모론에 따라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시켰다.
이와같은 실정은 대북파의 당론에 의한 책동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었으나, 한편 그는 전란으로 인한 전화(戰禍)를 복구하는 데 과단성 있는 정책을 펴기도 하였다.
1608년 선혜청(宣惠廳)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고, 1611년 양전(量田)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넓혀 재원(財源)을 확보하였으며, 선조말에 시역한 창덕궁을 그 원년에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慶德宮 - 慶熙宮), 1621년에 인경궁(仁慶宮)을 중건하였다.
4. 외교정책
이 무렵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마침내 1616년 후금(後金)을 건국하자 그 강성에 대비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평안감사에 박엽(朴燁), 만포첨사에 정충신(鄭忠臣)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명나라의 원병요청에 따라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여명을 주어 명나라와 연합하였으나, 부차(富車)싸움에서 패한 뒤 후금에 투항하게 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능란한 양면외교 솜씨를 보였다.
또한, 1609년에는 일본과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己酉約條)를 체결하고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하였으며, 1617년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또, 병화로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 노력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東國新續三綱行實》 등을 다시 간행하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하였으며, 적상산성(赤裳山城) 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다.
한편, 허균(許筠)의 [홍길동전], 허준(許浚)의 《동의보감》 등의 저술도 이때 나왔다. 외래문물로는 담배가 1616년에 류큐(琉球)로부터 들어와 크게 보급되었다.
5. 인조반정
그의 재위 15년간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서인 김류(金●유)·이귀(李貴)·김자점(金自點) 등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광해군으로 강등되고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되었다.
세자로 있을 무렵부터 폐위될 때까지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했지만,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대북파의 장막에 의하여 판단이 흐려졌고, 인재를 기용함에 있어 파당성이 두드러져 반대파의 질시와 보복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뒷날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책략과 명분에 의하여 패륜적인 혼군(昏君)으로 규정되었지만, 실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같은 반정에 의하여 희생된 연산군과는 성격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묘는 경기도 양주군 진건면 사능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