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내
삶의 이야기 ⑩ 자서전 쓰기의 호흡법 - 소제목은 인덱스
라벨이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01호(2019. 12.15)
정대영 동문은 시니어 자서전 제작기업 ‘뭉클스토리’를 운영하며
일반인의 생애 이야기를 정리해 자서전을 써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글 정대영 (국어교육98-07, 40세) 뭉클스토리 공동대표
자서전을 쓰시는 분들의 초고를 받아보면 많은 분량의 원고가 아무 끊어짐 없이 긴 글 하나로만 되어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초고가 완성되기까지 의미단락들을 소제목으로 구분함 없이 줄글을 이어 쓴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시간 순서대로 글쓰기 자체에만 집중하느라 다른 것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자서전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제목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과 함께 공유하겠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의미단락마다 소제목을 짓고 이를 기반으로 대제목과 자서전 전체의 제목까지 구성하시는 것이 여러 모로 유리합니다.
이 글에선 ‘짧은 주기의 소제목 짓기’가 왜 필요한가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
첫째, 소제목 짓기는 글의 호흡을 가다듬어 줍니다. 소제목 짓기를 통해 멈춤의 시간을 갖습니다. 들숨과 날숨을 통해 강약을 조절하는 것이 문체라면 소제목으로 의미단락을 끊어가는 것은 큰 일을 앞두고 심호흡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자가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써내려 가는 것도 내용을 풍부하게 한다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지만 행여나 서술이 곁가지로 흘러버리면 노력의 허비는 차치하고 원래 서술하고자 했던 흐름으로 돌아오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글을 서술하는 중간중간에 소제목을 짓는다는 것은 글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지어지는 순간 서술된 사건이나 사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그 이름(=소제목)을 가지고 더 큰 의미를 사고할 수 있습니다.
둘째, 소제목을 지으면서 서술하는 습관을 들이면 글의 심도를 더 깊게 가져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글의 심도란 서술하고자 하는 대상을 얼마나 낱낱이 묘파해낼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 할지라도 마음 속 대상을 남김없이 한 번에 서술할 수 있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일단은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고 부족함이 있는지 살펴보고 내용을 보완해 나가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문제는 무엇이 부족한 부분인지를 스스로 발견해낼 수 있어야 하는데 고도로 명민한 감각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글을 어디서 어떻게 보완할지 많은 시간 고민해야 합니다. 이때 연관성 있는 단락들에 소제목을 달아 놓았다면 시간이 지났어도 고민의 시작점에 한 번에 다가설 수 있고 저자의 의도를 더 적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무엇이 부족하고 필요한지 더 빠르게 파악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셋째, 소제목은 캐비닛 안에 담긴 다양한 문서의 인덱스 라벨과 같습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에게는 라벨이 전혀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꼼꼼하게 라벨을 해 놓으면 원하는 때에 바로 원하는 문서를 꺼내어 읽어보거나 수정하고 다시 넣어둘 수 있습니다. 전문적인 자서전 편집자는 소제목의 이러한 라벨로서의 기능을 매우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쓰는 것이 어렵다면 소제목을 지어 글을 일일이 끊어놓은 다음, 가능한 자주 검토하면서 뼈대를 잡고 부족한 내용을 보완하는 것이 실용적 측면에서는 유용합니다.
넷째, 준비된 소제목은 최종 단계에서 목차 구성을 용이하게 합니다. 많은 경우 처음에 서술한 글이 그대로 자서전이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초안을 써 놓고 필요한 의미 단락들을 이리저리 옮겨보거나 삭제하면서 글의 완성도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때 이동이나 삭제의 단위가 소제목이 됩니다.
소제목은 의미의 거점입니다. 글을 다 쓴 뒤에야 소제목을 완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글을 써나가면서 미리 소제목을 짓고 자주 고치는 습관은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인간이 완벽할 수 없기에 틈나는 대로 곱씹어보고 의미를 완성하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