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가면 정말 존경스러운 작품도 만날 수 있지만, 때론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싶은 작품도 있을 거예요. 어떤 것은 작품인지 물건인지 언뜻 구별하기조차 힘들지요. 과연 어떤 기준에서 이것은 예술작품이라 부르고, 저것은 그냥 물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프랑스 작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전시회를 보면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뒤샹은 예술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놓은 현대미술의 거장이니까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금 그의 작품 150여점을 소개하고 있으니, 답을 확인해 볼 좋은 기회입니다. '마르셀 뒤샹' 전시는 4월 7일까지 열립니다.
뒤샹은 남자용 소변기〈작품1〉를 미술전시장에 가져다 놓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어요. 공장에서 이미 만들어진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바꾸어 내놓는 작업을 그는 시도하고 있었는데요, 그중에서도 소변기는 좀 더 과감하고 배짱 있는 작품이었어요. 왜냐면 누가 봐도 소변기는 화장실에나 어울리는 물건이었고, 품격 높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물건일 테니까요.
'샘'이라는 제목으로 전시장에 놓인 소변기는 '이것은 샘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것은 예술일까?'하고 묻는 것 같아요. 예술가가 작품으로 알쏭달쏭한 문제를 내면, 감상자는 퀴즈를 풀 듯 답을 생각해보는 게임인가 봅니다.
이렇듯 뒤샹이 예술을 게임처럼 여기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작품2〉를 보세요. 스물세 살 무렵의 뒤샹은 당시의 다른 화가들처럼 이런 그림을 그렸어요. 여기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여자들은 차를 마시며 쉬고 있고 두 남자는 체스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뒤샹은 체스에 흠뻑 빠져 있었어요. 평생을 두고 체스를 좋아해서, 훗날 체스 대회에도 출전하여 마스터의 지위를 받았고 프로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답니다. 그는 늘 체스보드 앞에 누군가와 마주 앉아 게임하는 기분으로 작품을 구상했어요.
체스 못지않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기계였습니다. 〈작품3〉은 초콜릿 덩어리를 가루로 만드는 분쇄기인데요. 세 개의 원기둥이 맞물려 빙글빙글 돌아가며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아주 단순한 기계입니다. 뒤샹은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여겼어요. 그리고 기계도 사람처럼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는 기계들이 물건을 만드는 세상에서 예술작품은 반드시 예술가의 손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뒤샹 이전에는 천재적인 예술가가 고민을 거듭하고 열정을 쏟아내어 창조한 것만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았어요. 그러나 뒤샹 이후에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술작품이 되는 새로운 조건 세 가지를 내놓은 셈이죠. 이미 만들어진 물건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 자기 이름을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전시장에 들여놓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는 사람들이 옷을 직접 만들어 입었지만, 요즘에는 상점에서 파는 수많은 옷 중에서 하나를 골라 사는 것과 같아요. 일단 선택하여 내가 입고 다니고, 내 옷장에 넣어두면 그게 내 옷이 되는 것처럼 예술작품에서도 선택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 작품4 - ‘파리의 공기 50cc’, 1919, 유리 앰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그러면 〈작품4〉에서 뒤샹은 무얼 선택했는지 볼까요? 이것은 약국에서 파는 둥근 유리병인데, 주사액이 들어 있던 상품이었어요. 뒤샹은 파리와 뉴욕을 오가며 활동을 했는데, 어느 날 미국인 친구에게 파리의 기념품을 사다 주고 싶었어요. 무엇이 좋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그는 약국에 들어가서 유리병을 고른 후, 약사에게 액체를 비우고 다시 봉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뉴욕으로 가져가 친구에게 선물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 파리의 공기가 50㏄ 들어 있다네." 평범하던 빈 유리병이 재치 넘치는 기념품으로 탈바꿈한 것은 바로 아이디어 덕분이지요.
▲ 작품5 - ‘마르셀 뒤샹으로부터 혹은 마르셀 뒤샹에 의한, 또는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여행가방 속 상자)’, 196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르셀 뒤샹’展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디어라고 믿었던 뒤샹은 자기 작품이 깨지거나 전쟁 중에 분실되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뒤늦게 자기 평생의 작품들을 한곳에 넣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5〉를 보세요. 그동안의 결실들이 축소판으로 차곡차곡 들어 있는 상자예요. 상자를 열어 양옆으로 펼치면 아주 작은 이동식 미술관으로 변해요. 이 상자는 오랜 기간에 걸쳐 300여 점 제작됐는데, 하나하나 예술가의 지시와 손을 거쳐 만들어졌답니다. 이번엔 공장에서 찍은 이미 있던 물건이 아니라 예술가의 정성이 실린 원본을 남긴 셈이지요.
뒤샹의 예술적 삶을 압축해놓은 이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또다시 의문을 갖게 됩니다. 정말로 예술은 오직 아이디어일 뿐일까요, 아니면 그래도 결국 예술은 예술가의 흔적이 깃든 원본에 살아 있다는 뜻일까요? 그는 1968년에 생을 마감하면서, 50년 후의 감상자들과도 계속해서 예술로 게임을 하길 바랐습니다.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습니다. 작품이 물음표를 던지면 우리 역시 또다시 물음표로 응해야 하는, 쉽사리 끝나지 않는 게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