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고요는 힘이 세다 ●지은이_양선규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5. 11. 7
●전체페이지_120쪽 ●ISBN 979-11-91914-95-5 03810/ ●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3,000원
시와 그림의 상상력으로 열어가는 화엄의 길
양선규 시인의 시집 『고요는 힘이 세다』가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시인이면서 화가이고, 서예가인 양선규 시인의 이번 시집 『고요는 힘이 세다』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비구상적(非具象的) 상상력과 균형적인 안목과 시각을 갖추기 위한 화엄의 진리가 근간을 이루고 있다.
새벽안개 거두며 어제도 갔다
너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나무마다 가지 끝 찬바람만 시릴 뿐
구름은 흩어져 진눈깨비 내렸다
비, 구름, 천둥소리 지나고
화엄의 경전을 보러 오늘도 갔다
은어 떼처럼 막 달려드는 햇살
가지마다 봉오리 맺은 자리가 붉다
―「화엄매」 부분
화엄사에 있는 오래된 홍매화는 일반 매화와 다르다. 화엄사 경내에 피는 홍매화를 시인은 ‘화엄의 경전’으로 읽고 있다. 불심을 전하는 ‘경전’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천수경』을 외고 삼천 배를 하면
몸과 마음 가벼워질 수 있을까
오체투지로 팔만대장경을 알현하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매화산은 묵묵히 햇살을 안고
바람은 부지런히 사람의 길을 내고
해인사 법보전 장경각 나무 경전은
욕심과 근심 걱정 내려놓으라 하네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길」 부분
“『천수경』”을 외우고 “삼천 배를 하면/몸과 마음 가벼워질 수 있을까/오체투지로 팔만대장경을 알현하면/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이에 대해 “매화산은 묵묵히 햇살을 안고/바람은 부지런히 사람의 길을 내고/해인사 법보전 장경각 나무 경전은/욕심과 근심 걱정 내려놓으라 하네”라고 노래한다.
물과 거울에 비치듯 바닥 훤히 들여다보이는 캔버스 보다 보면 볼수록 궁금증 더해주는 그림이 더 좋을 때 있다 정지된 화면 움직여, 보는 사람의 시각으로 배경을 질주하거나 내 멋대로 상상 나무를 타고 무한한 공간 여행하는 작품이 더 매력적일 때 있다
선의 흐름과 면의 이미지 색채의 냄새, 마음껏 들이마시고 취하면 되는 것, 내 마음대로 생각하라 해석하라 그리하면 혜안(慧眼)이, 오감(五感)의 문 활짝 열어 상상의 날개 펴고 화폭 속으로 들어가 가슴 뜨거워지는 화선(畵禪)의 진경을 맛볼 것이다
―「비구상화 감상법」 전문
비구상화의 매력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시를 통해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비구상화’의 진수를 엿볼 수 있다.
이 땅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죽어서 별이 된다고 생각한 적 있다
함께 바라볼수록 더욱더 빛이 나는 별
겸허해지거나 눈시울 뜨겁게 하는
―「별」 전문
별에 대한 단상을 보여주는 시이다. “이 땅의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죽어 별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 시인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이 죽어 별이 된다는 생각은 곧 모든 생명은 가치가 있고, 쓸모가 있고, 고유성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양선규 시인의 시에는 다양한 철학이 담겨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불교적 상상력과 사군자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는 선비 정신, 다양한 해석의 길을 마련한 비구상화적 상상력과 있는 그대로를 추구하는 무위자연의 철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철학이 배태된 그의 시는 온기가 있고, 담백하고, 말갛다. 그의 시가 ‘천태산 은행나무’처럼 “슬플 때나 힘들 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기댈 수 있는”(「하늘다람쥐와 별 품은 은행나무」), ‘가난한 아름다움’의 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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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제1부
홍시·11
해남에서 봄을·12
수선화·13
산막리·14
겨울 나비·15
봄날은 간다·16
별·17
우리가 걸어가는 길·18
새해 아침·20
목련 꽃그늘 쓰는 아침·21
은행나무 의자·22
추분·23
독버섯·24
고요는 힘이 세다·25
한 점 섬·26
물꽃·27
제2부
시(詩)·31
화엄매·32
비구상화 감상법·34
꽃·35
연화지의 봄·36
풀꽃들에게·38
종이를 보면 접고 싶을 때가 있다·39
간이역·40
세월·41
그 집 앞·42
하늘다람쥐와 별 품은 은행나무·43
여름 숲에 기대어·44
자작나무숲·45
고등어·46
그림 속에서 크는 나무·47
제3부
호젓하다·51
반야사 배롱나무·52
매화를 그리다·54
황금나무·55
해인삼매(海印三昧)의 길·56
코로나 시대에 산다·58
봄이 온다·59
다투어 피어나는 봄·60
동시상영·62
까마중·63
누가 나를 개망초라 부르는가·64
나비처럼·66
연대의 힘·67
다 그럴만한 연휴가 있다·68
제4부
파종·73
문살에 피어나는 꽃·74
내 귀에 가을이 왔다·76
마방의 별·78
동백꽃·79
거풍·80
학산 삼거리·81
그리운 것들·82
맨발로 오는 달빛 1·84
맨발로 오는 달빛 2·86
햇살 그림·87
그녀의 붓·88
어처구니없다·90
늦가을·91
별이 꽃이고 꽃이 별이다·92
당부·93
해설|김현정·95
시인의 말·119
■ 시집 속의 시 몇 편
이른 봄부터 피어나던 꽃의 행렬 바다에 닿았다 여름을 고조시키는 각양각색의 음표와 표정, 물 위에 떠 있다 꽃이 피었다 지고 몇 개의 풍경이 지나는 동안 고요의 힘으로 물결이 수천수만 번 밀려갔다 다시 오는 사이 억겁의 문양 천천히 바다를 달구고 있다
파도는 물러설 때를 알지만 아무때나 물러서지 않으며 고래 등처럼 부드럽지만 뚝심이 있다 활시위처럼 바람 휠 때마다 덥석, 내 손을 잡기도 하고 두 팔 벌려 부둥켜안기도 한다
―「고요는 힘이 세다」 전문
겨우내 매화만 그렸다
입동부터 동지 지나 우수 때까지
나무 밑동을 그리고
하늘로 향한 가지를 그렸다
매화 꽃봉오리 그리고
연분홍 꽃잎을 그려 넣었다
강물도 언다는 소한 대한을 넘어
설이 지나고 입춘이 지났다
아침에는 나뭇가지에 물오르고
탱탱한 꽃봉오리 맺히더니
꽃잎이 슬쩍 봄의 문을 열고
몽실몽실 하늘을 연다
겨우내 매화를 그리던 붓의 끝도
따스한 온기가 흐른다
―「매화를 그리다」 전문
몇억 광년 동안 달려온 태양을 닮았다
빛이 오래오래 머문 흔적이 역력하다
빨갛게 눈시울 뜨겁도록 달군 홍시 하나
늦가을 언저리에 달콤하게 빛나고 있다
옷깃을 스치며 허허로이 지나가는 바람
문득 생이란 어떤 색깔인지 궁금해진다
다 털고, 사리(舍利)처럼 남은 빈 가지
감 하나 몸에 들어와 덩그러니 매달린다
―「홍시」 전문
눈물과 이별 통증은 늦가을에 파종을 한다
찬 서리 내리고 낙엽 진 후에 씨앗을 심는다
겨울 흙 살 속에서 봄을 향한 그리움 있어야
따뜻한 성질이 배고 쓴맛의 향기를 지닌다
눈 맞으며 촉 틔우고 매서운 혹한 지나고서야
푸른 잎 바다를 이루는 튼실한 나무가 된다
견뎌야 얻어지는 저 무서운 하늘의 섭리
풍찬노숙의 대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파종」 전문
■ 시인의 말
시집을 펴내는 것은 진한 물감 풀어 기운 조각보처럼 그리움에 희망을 덧대는 것이다. 또다시 걸어가야 할 길 바라보며, 두레박으로 차가운 물 길어, 정수리에 퍼붓는 것이다.
깊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깨동무하며 걸어가는 시집의 문장들이 가을 햇살, 들꽃과 어울려 잘 놀았으면 좋겠다. 한 생애를 걷는 길이 ‘시’와 함께 울긋불긋 단풍처럼 곱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2025년 가을
양선규
■ 표4(약평)
시집 속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몸이 시(詩)”라고 언명한 양선규 시인은 인생에 대한 혜안이 깊고 빛나는 시인이다. “고요는 힘이 세다”는 인생과 사회와 우주의 원리를 발견한 역설의 시인이다. 홍매와 물을 경전으로 읽고, 홍시를 자신의 몸 안에 들이고, 수선화와 눈 맞추고, “달래, 냉이, 꽃다지에게 안부 편지를” 쓰는 체화된 친자연적 시인이다. 산빛 들빛 별빛을 닮은 몸을 가진 시인이 상상하는 “봄에는 연둣빛 선생이 자연을 가르치고/나뭇가지는 새들에게 둥지를 내준다” 언술 또한 아름답다. 특히 산막리 겨울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새들의 입술” 등 자연 사물을 보는 눈 밝은 그의 시를 읽어가다 보면, 무릎 치는 문장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무의 뿌리만큼 잎 피우고/향기로운 사람만이 꽃 피운다”거나 “슬픔도 오래되면 옹이가 되는 것”,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죽어서 별이 된다”는 등의 감각과 사유가 빛나는 문장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가 없다.
_공광규(시인)
■ 양선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튼튼한 옹이』, 『나비의 댓글은 향기롭다』가 있다. 2024년 한남문인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