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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묵상글 (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시선 성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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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12 04:28
- 시선 성찰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요즘 조금 피곤하면 눈으로 피곤의 증세가 나타납니다.
오른쪽 눈 실핏줄이 종종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러 가면 같이 일하는 자매가 신부님 또 눈이 빨개졌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때야 알게 됩니다.
이는 제가 저를 잘 보지 않는다는 표시지요.
거울을 잘 안 보거나 거울을 보더라도 저를 잘 들여다보지 않거나
저를 보더라도 얼굴이나 머리가 흐트러졌나 보기는 해도
제 눈을 들여다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본다는 오늘 주님 말씀 덕분에
다시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서
곧 ‘내가 무엇을 보는지’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남은 잘 보고 자기는 잘 보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사실 우리 눈이란 게 상대를 보게 되어 있지 자기를 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면 자기를 보지 않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식 성찰이란 말이 있듯이 시선 성찰이랄까 관상 성찰을 해야 합니다.
내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주로 뭘 보고 있는지
나를 보는지 남을 보는지,
나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남을 보더라도 남의 단점만 보는지 장점도 보는지,
하늘을 보는지 땅을 보는지.
하늘을 보면 얼마나 자주 보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선의 또 다른 문제도 성찰해야 합니다.
곧 나의 잘못을 보지 않기 위해서 남의 잘못을 보고,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남도 잘못한다고 하며
나의 잘못은 작다고 하기 위해 남의 잘못을 크게 만드는 잘못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했던 요한복음 8장의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죄를 간음한 여인의 죄로 감추려는 인간의 집단심리를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하시면서
자기 죄들을 보게 만들자 그들은 늙은이부터 모두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남의 죄를 보지 말 것입니다.
나의 죄를 보지 않기 위해 남의 죄 보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죄를 보려고 애써야 하고,
없애기 위해서는 더 애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없애기 싫어서 보기 싫어하는 것이고,
없애기 싫어서 내 죄에 대해 눈 감는 것이며
없애기 싫어서 남의 죄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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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너 자신을 알라!
<회개의 여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주님,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이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하리이다.”(시편16,11)
남판단하는 것이 가장 쉽고 자기를 아는 일이 가장 힘들다 합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겸손과 함께 가는 지혜요, 참된 회개의 열매가 겸손과 지혜, 감사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이 참 중요합니다. 딸 넷에 아들 하나인데 아들 하나를 수도원의 하느님께 봉헌하고 혼자 사는 노모의 아들에 대한 자랑 셋을 잊지 못합니다.
1.남말하지 않는다.
2.변덕이 없다.
3.손재주가 많다.
정말 수도자에 맞는 자질이라 내심 만족했습니다. 무엇보다 남말하는 뒷담화가 없다니 타고난 덕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오늘 읽은 옛 현자의 언급도 정직하고 진실한 삶에 도움이 됩니다.
“나를 감추고자 휘감은 옷 때문에 나의 정체가 더 분명하게 드러나기도 한다.”<다산>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네가 아는데, 어찌 아는 자가 없단 말인가.”<후한서>
진실이 답입니다. 아무리 포장해도 진실은 드러나는 법이요,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참된 삶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읽은 레오 교황의 두 언급도 마음에 새깁니다.
“좋은 때든 나쁜 때든 하느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들어라.”
일일시호일(一日是好日)이라,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언제나 좋은 날들입니다.
“주교들은 겸손과 기도중에 그리스도의 섬김을 구현해야 한다. 섬김은 외적 성향이나 행동들의 셋트가 아니라, 오히려 ‘내적 자유, 영의 가난, 사랑에서 태어난 섬김을 위한 준비’에로 부르심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가난해 지신 예수님 자신의 선택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주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배워야 할 겸손과 기도의 삶이겠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복음 묵상중 문득 떠오른 말마디입니다. 참된 평생공부가 주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공부이니 우리의 삶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예수님 복음 말씀은 당대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무지한 제자들 모두에게 해당되겠습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복음 전문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눈먼 인도자가 되지 않기 위해 평소 겸손한 학인의 정신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부단히 참된 스승 예수님을 닮아가야 함을 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무지한 우리를 대상으로 하는 듯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대부분 이 범주내 어리석은 무지의 사람들 같습니다. 자기를 몰라 판단이요, 남을 교정하려 들지 정말 자기의 한계와 부족함을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는 오히려 침묵중에 기다릴 것이며 자기를 깊이 성찰할 것입니다. 제 눈 속에 있는 티를, 들보를 지닌 자가 섣불리 개입하다 보면, 십중팔구 “네가 뭔데?” 혹은 “너나 잘 해!”라는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알고 나를 아는 회개와 겸손의 공부가 참 중요합니다.
주님 탐구와 참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의 거울에 그대로 드러나는 참나의 얼굴입니다. 그러니 깨어 주변에 마음 활짝 열고 잘 보고 들으며 배우는 경청과 겸손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바로 이런 경청과 겸손, 감사의 전형적 인물이 제1독서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의 주인공, 바로 자기를 아는 참된 회개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나를 굳세게 해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 나에게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우리 주님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나는 첫째 가는 죄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진솔한 고백이 감동적이요,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한없이 기다렸을 주님의 인내를 배우고 싶습니다. 눈먼 무지의 어리석음에 답은 참된 회개뿐입니다. 주님과의 깊고도 친밀한 관계를 통해 자신을 알았던 겸손하고 지혜로운, 감사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주님과 나를 아는, 경청과 겸손, 지혜와 감사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바오로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티모1,17).
“언제나 제가 주님을 모시어,
당신이 제 오른쪽에 계시니, 저는 흔들리지 않으리이다.”(시편1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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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호의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호의로)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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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사야 예언서는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전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하느님 나라 선포를 깊이 이해하려면, 이사야서의 약속이 큰 도움이 됩니다. 아모스 예언서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아모스는 다섯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첫째, 하느님께 합당한 공경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느님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하느님의 징벌은 보편적입니다. 어떤 민족이든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면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셋째, 징벌은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면 언제든 용서하십니다. 넷째, 참된 회개는 겉치레 예배나 제물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물처럼,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다섯째, 주님의 날과 말씀이 생명입니다. “굶주림은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다.” 주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징벌의 날은 축복과 회복의 날로 바뀝니다. 아모스는 희망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날이 오면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흐르고 언덕마다 포도주가 넘치리라.” 서양의 이야기는 ‘영웅 서사’가 많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로마, 그리고 근대의 제국들은 정복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영화 속의 슈퍼맨, 아이언맨, 어벤져스도 모두 ‘영웅’을 중심에 둡니다.
반면 한국의 이야기는 ‘극복 서사’입니다. 영웅을 동경하기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귀신과 싸우기보다 달래고 먹이며 함께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따뜻한 정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정복과 지배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섬기고 나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친히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치고, 눈먼 이를 뜨게 하시고, 굶주린 이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안에는 따뜻한 정과 깊은 배려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듯, 바오로 사도의 삶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멈추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신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우리는 때로 성공, 출세, 권력만을 향해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라고 합니다. 사랑, 나눔, 봉사는 뒤로 미룹니다. 기도와 말씀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사다리가 정말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사다리인지, 자녀들에게 오르라고 권하는 사다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사다리인지 오늘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이 샘솟는 그 길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참된 길입니다.
“저희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성공과 권력의 사다리만 붙잡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나눔, 섬김과 정의의 사다리를 오르게 하소서.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처럼 공정이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고,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희를 다그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 안에서 회개와 회복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희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이웃의 눈을 열고 길을 밝히는 참된 인도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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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뱀의 지혜, 비둘기의 힘(권력)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11일 목요일- 서른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지배에서 친교로
비둘기의 권력은 믿음, 희망, 사랑에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신앙에 기초를 둔 조직 담당자(organizer)인 알렉시아 살바티에라 목사(Rev. Dr. Alexia Salvatierra)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권력 행사와 관련한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성찰합니다:
마태오 복음 10,16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고 요청하십니다. 뱀의 권력은 눈에 보이고 측정 가능한 힘입니다. - 이는 물리적 힘과, 부(富), 사회적 영향력, 그리고 숫자의 힘입니다. 통합된 정신으로 뱀의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절대 아닙니다. ... 하지만 만일 우리가 뱀의 권력에만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여하신 고유한 부르심과 역할, 즉 비둘기의 권력을 구현할 능력을 잃게 됩니다. ...
우리가 비둘기 권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사람들 안에 있는 최고의 선, 즉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하느님 모상의 현실과 성령의 변모해 주시는 활동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움이 아닌 존엄으로 대하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희망과 용기를 구현하게 되며,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 순간에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권력이 매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압니다. 지위와 물리적 힘, 돈, 숫자를 의미하는 뱀의 권력, 즉 세상에서 흔히 인정받는 권력 외에도, 우리는 기도의 힘, 영적인 권력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힘과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는 도덕적 권위가 참되고 실제로 존재하며 강력한 효과를 지니는 상황과 순간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살바티에라는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비둘기 같은" 힘을 드러내 주는 이야기 하나를 들려 줍니다: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정부로부터 인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설교를 하지 말라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어느 해 부활절 아침에 군인들이 그의 교회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총알이 장전된 소총을 들고 성전 벽쪽으로 둘러 섰습니다. 투투 주교가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군인들이 총을 쏠까봐 회중은 두려움에 쌓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투투 주교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지 않으면 정부가 실질적인 승리를 하게 될 거라는 사실 때문에도 두려움이 쌓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투투 주교가 발꿈치를 들고 깡총깡총 뛰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깔깔거리며 웃었습니다. 그의 웃음은 회중에게 전염되었고, 심지어 일부 군인들까지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투투 주교는 인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설교를 강행했지만, 총격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투투 주교는 물리적 힘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그는 부의 힘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 그는 숫자의 힘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 이 상황에서 투투 주교는 뱀의 권력을 지니지 않았었다는 말입니다; 그의 권력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기반을 둔 비둘기의 권력이었습니다. 투투의 신앙은 그에게 모든 상황에서 기쁨을 지닐 능력을 부여해 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단순히 미래에 올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설교를 듣고 있던 청중들을 위해 그 나라의 가치와 현실을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내게 했고 보여주게 했던 것입니다. 투투 주교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며 기다렸으며, 그의 청중들을 이 하느님 나라로 초대했던 것입니다. 투투 주교는 군인들이 성전을 둘러싸고 총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총을 든 군인들을 단순한 위협으로 보지 않았고, 총을 든 어린아이들을 보듯이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권력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
행동할 수 없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애물은 실제로 비둘기의 권력 앞에서 무력하게 됩니다. 믿음의 힘을 기억할 때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달리 말해, 두려움은 종종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오며, 억압과 위협,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위축되지만,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다시 인식하게 될 때, 그 두려움은 줄어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에 기대도록 초대받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제공해 주시는 모든 것, 즉 하느님의 지혜와 힘, 평화 등으로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묵상은 제 아침 수양의 중심점입니다. 저는 종종 흑백과 옳고 그림, 진보와 보수, 신앙과 세속과 같은 극단적인 두 가지 선택만을 강요하는 세상 안에서 희망과 평화를 주는 신비로운 "제삼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교회 친구들 대부분이 진리라고 여기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적 민족주의(그리스도 왕국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라는 그분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주권"과 지배 사이의 대조에 대한 묵상(The meditation)은 저에게 용기와 위안을 주었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방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의 본질을 정치적 이념과 분리하려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 - 사랑, 겸손, 정의 - 을 지키려는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Greg L.
References
Alexia Salvatierra, Faith-Rooted Organizing: Mobilizing the Church in Service to the World (InterVarsity Press, 2013), 74–7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al gao,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나"에서 "우리"로 - 움직여 간 우리는 서로의 선물을 존중해 주고,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의 기술을 나누며, 홀로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더 커다란 전체를 만들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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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한다니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는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내' 생각을 따르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 답이 후자라면, 즉 우리가 그분을 따른다고 하면서 그분에 대한 '내' 생각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는 실제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것이겠지요?!
저처럼 매일 이렇게 복음 나눔을 나누는 것도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저의 생각을 나누는 것인지 모릅니다. 만일 제가 나누는 것들이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는가 봅니다. "행동은 말보다 훨씬 큰 소리를 낸다!" 또 "그림 하나가 천 가지 말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말이 아닌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삶을 분석하거나 해석하기보다는 그분 가까이 머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들이 했던 일입니다. 그분 현존 앞에, 그분 현존 안에 단순하게 머무는 일!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단순히 그분의 현존과 함께 현존하고자 하는 것!
힌두교인들은 이것을 삿상(satsang)이라고 말합니다. 존재 자체를 듣는 것이지요. 어떤 소리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듣는 것을 삿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존재를 삿상한다고 하면, 그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단순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존재 전체를 움직여 주시도록 우리 존재 전체를 그분께 온전히 내어 맡기면서요....
명상이나 묵상은 사실 삿상이어야 합니다.
어떤 나무 아래 고요하고 차분하게 앉아 있는 것은 일종의 삿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나무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나무 가까이에서 조용하고 차분하게 앉아 있어 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나무는 위대한 침묵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나무들 가까이에 있을 때도 나무들은 침묵을 지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홀로 있음을 실천하면서 이르게 되는 우리 삶의 진정한 명상적 차원에 대해 어떤 글을 쓴다 해도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전해주는 침묵의 말보다 더 훌륭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를 참으로 듣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들어야 하지만, 그분이 하지 않으신 말씀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하나인 테와 프에블로족 언어에서 '귀'는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온전히 열고 상대의 마음을 깊이 듣기 위해 '내' 존재를 내어 주는 것이 참으로 듣는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니까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상대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고 상대의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 곁에, 또 그분 존재 안에 현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에 감싸여질 것입니다. 생각이나 이론을 저만큼 치워놓고 그냥 단순하게 예수님 현존 안에 현존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분에게서 깊은 영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잘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 현존 안에 함께 머물러 드린다면 우리는 그분께 우리 존재 안에 텅 빈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일하시게 될 것입니다. 당신 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을 당신의 영으로 변화시켜 주시겠지요?!!
요즘 세상이 이토록 시끄러운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잘 듣지 않으려 하고, 자기 소리만 내려고 하기 때문은 아닌지 차분하게 성찰해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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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루카 6,41-42)
제 눈 속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위선자들
앞서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남을 심판하면 최후의 심판 때 단죄를 받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단죄하지 마십시오. 단죄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우리를 설득하십니다. 그대의 큰 잘못들과 거역하는 욕정들에서 그대 자신부터 건져 내십시오. 그런 디음에야 그대는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셋째 오솔길】
돌파하여 자기 하느님을 낳기
설교 22 우리의 신성과 하느님의 신성
하느님이 된다는 것은 낳는다는 뜻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우리도 그분처럼 이 세상에 있으므로" 이 구절은 우리가 신성하며,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과 동등함을 일깨우는 의미심장한 진술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하느님을 흡족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사랑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 곧 성령은 아들 안에서 비롯되어 아들에게서” 아버지에게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러한 평등을 다른 식으로도 표현한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다." 평등한 사람들만이 벗이 될 수 있다. 하느님은 하느님하고만 동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의 동무가 되는가? 우리는 탄생과 돌파 속에서 동무가 된다. 거기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거기에서만 신성의 참된 뿌리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실로 이와 동일한 탄생 속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외아들을 낳으시고,뿌리와 자신의 온전한 신성과 자신의 온갖 복을 그에게 주시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와 동일한 탄생 속에서 우리를 벗이라고 부르십니다.(467)
금요일 성인의 날
영적 삶의 샘(디다케에서 아우구스티노까지), 요한 봐이스마이어 외 지음
아우구스티누스
프로바에게 보낸 편지 130
주님의 기도- 기도의 모범
XI. 우리가 무슨 기도를 드리는지 알기 위해‘그리고 우리 자신이 경각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기도할 때에 반드시 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말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으셔야 한다든지 , 부드러운 마음을 갖도록 위로받으셔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하느님의 이름이 언제나 거룩하게 공경을 받아 무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원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 도달하여 그분께 어떤 유익함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유익함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말하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 나라는 우리에게 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이 나라에 대한 우리의 동경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이 나라가 우리를 위해 오고 우리가 이 나라에서 함께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께 순종하듯이 땅에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게 되도록 청하는 것이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우리는 또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이때 “오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먹고살 만큼 주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빵이라는 이름으로 표현합니다. 빵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빵으로 믿는 자들의 성사인 성체성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성체성사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 이 세상 안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청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청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늘 하느님 곁에 있도록 우리 자신에게 말하고, 어떤 종류의 유혹에든 현혹되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우리 자신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악에도 시달리지 않는 그런 곳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이 마지막 부분은 매우 깊이가 있어. 그리스도인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자신의 깊은 곤궁에서 이 기도를 드리고 눈물을 흘림으로써.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 큰 위로와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생각으로 시작하여 이 안에서 거닐며 이 생각 안에서 마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일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이 기도의 내용과 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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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보게 되었습니다. 간디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의 자녀 삶을 추적한 연구였습니다. 결론은 그 자녀들의 대부분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식의 본능은 부모를 넘어서는 것인데,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부터 불행이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아이의 가장 불행은 비범한 아버지를 두는 것이 아닐까요?
자녀는 부모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가 잘났는지 못났는지를 판단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모는 일부러라도 자녀에게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도 있더군요. 따라서 자녀의 일에 감탄해 주고, 아이의 잘난 점을 키울 수 있도록 칭찬과 지지를 멈춰서는 안 됩니다.
자녀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부모는 계속해서 자녀를 이기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가르치려고만 하고, 자극이 필요하다면서 혼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잘되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녀에게 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굳이 이기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을 꾸짖고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가장 겸손한 모습을 우리에게 다가오시면서 기쁨과 희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모범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가족, 친구, 이웃들이 진정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겸손의 삶을 잃어버릴 때, 제대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6,39)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 없이 남을 이끌려 한다면, 자기도 또 자기를 따르는 사람 모두 멸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율법의 규정만을 내세우면서 꾸짖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보기보다, 하느님께 대한 무서운 공포심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티와 들보의 비유로, 남의 작은 허물(티)은 잘 보면서, 정작 자기의 큰 잘못(들보)은 외면한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남을 고치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위선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판단에 앞서서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은 자기 성찰이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정화해야 형제들을 도울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이의 ‘티’만을 집요하게 보는 우리는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 안의 ‘들보’는 무엇일까요? 주님의 겸손한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의 커다란 ‘들보’를 빼낼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마리아 에지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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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은총의 통로인 약점도 예수님 안에서는 자랑거리 /
탈무드 나오는 의미심장한 이야기이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하고 나왔는데,
한 아이의 얼굴은 시커멓고, 다른 이는 그을음 하나 없이 깨끗했네.
이 둘 중 누가 얼굴을 씻었겠나?” 라고 라삐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했다.
“물론 얼굴에 그을음이 가득한 이가 세수를 했겠지요.”
제자들의 이 답에 라삐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아이를 보고는 자기 얼굴도 깨끗한 줄 알고 씻지 않고,
깨끗한 아이는 더러워진 상대를 보고는 얼굴을 씻었다네.”
상대가 바로 자신의 거울과 같단다.
다른 이의 단점이 보이는 건 바로, 자신도 그 같은 단점이 있기 때문이라나.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이 있듯이 별로 상관이 없는 이도 싫게 되는 건,
내면에 있는 자신의 싫은 모습이 상대에서 보기 때문이란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면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가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의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 낼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기에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거나 심판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단다.
불평불만을 많이 가진 이가 자신의 결점도 많이 지니고 있을 게다.
따라서 자신이 깨끗해지면 상대의 결점도 사라지리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준엄한 꾸짖음이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돌보라는 거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게다.
불평과 불만이 언제나 앞서 나타나니까.
기분이 언짢거나 마음이 섭섭하면 더욱더 그렇다.
이는 달리 말해, 좋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쁜 모습만 눈에 뜨이니까.
그러니 평소의 상태가 매우 중요할 게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많은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에.
평화를 위해 애쓰면 불평하고 싶은 그 충동이 억제되리라.
눈먼 이가 눈먼 이의 길잡이가 될 수 없듯이,
알지 못한다면 가르칠 수 없다.
공자도 수신제가,
곧 먼저 덕을 쌓아서 자기 가정의 평화를 이룬 다음에 다른 사람 앞에 나서라나.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사실 그분께서 이르신 이 말씀은,
어쩌면 가장 선한 이에게도 적지 않은 결점이 있을 수 있다는 분명한 가르침일 게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기에,
형제적인 충고가 아닌 비난을 위한 비판을 해서는 결코 안 되리라.
그러기에 아무리 악한 이에게도 분명 좋은 점이 있기에,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하여 헐뜯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을 찾아내서 격려해 주어야만 할 게다.
그래서 남을 섣불리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경우는 자제해야만 한다.
그렇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더 큰 곤경에 빠질 게다.
우리는 먼저 자신이 가진 약점과 상대방이 가진 장점을 바라보는 훈련을 해야만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이는 자신의 불우한 환경을 탓하는 이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가난을 극복하려고 부지런해지고 각고의 노력을 할 수도.
자신이 가진 약점을 강점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는 각자의 마음먹기에 달렸다.
우리의 약점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은총의 통로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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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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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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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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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우리의 감각은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향해 있지
내 안에서 나오는 정보에 민감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시시각각 바뀌는 주위 상황에 반응하기 위해서
우리의 감각은 움직입니다.
그러다보니 나를 보기보다는
너를 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내 모습은 알지 못한 채
네 모습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때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안타까운 모습은
나를 보지 않을수록
말과 행동에 차이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해야한다고 말하면서
본인은 정작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자신이 말하는 것을 전부 지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차이가 심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
그 사람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눈은 나를 향하지 않고 밖을 향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합니다.
그 거울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해 주는 말로
나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거울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조언해 주는 사람의 마음 혹은 기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더 너그럽고
때로는 더 엄격하게
때로는 왜곡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나의 참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면
나는 나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 이유보다 더 큰 것은
변화의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바뀌고 싶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말은 비난이나 공격으로 들립니다.
부정적인 말을 듣고 싶지 않기에
다른 사람의 말에 강하게 반응하거나 무시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사람들은 거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거울을 하나 둘 잃게 됩니다.
말과 행동에 차이가 클수록
진실이 아닌 남을 속이는 삶을 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가장 힘든 것은 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자신을 보지 않다보니
남을 속이고 있다는 생각도
그래서 힘들다는 느낌도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어떠한 모습인지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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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12.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6,39-4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오늘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참된 믿음을 통해 새롭게 눈을 뜬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을 땐 단죄하고 뿌리 뽑아야 할 이단자로 보였기에 그리스도인을 박해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참된 믿음을 갖게 되면서 하느님께서 여러 모로 부족한 자신에게 얼마나 큰 자비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바오로 사도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회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한 바리사이로써 율법을 수호하는데에 앞장 섰던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으며 새로운 길을 걷는 이들을 적대시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이 야훼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고 훼손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 앞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고,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도록 잠시 육신의 눈을 멀게 하셨지요. 그 일을 통해 바오로는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잘 본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사실은 눈 먼 사람이었음을 깨닫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널리 선포하는 사도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채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여기는 독선에 빠져서는 함께 살아가는 다른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했던 겁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의로운 척 했지요. 예수님은 그들을 두고 ‘위선자’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이 뜨끔해질만큼 서늘한 일갈을 날리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적인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다른 이들과 달리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100%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자기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기존에 갖고 있던 체험과 선입견을 바탕으로 하여, 결국 자기가 보고 싶은대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하십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랑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그가 올바른 길을 걸어 잘되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호의와 자애로 그를 받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을 지닌 이들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 자체보다는, 그 티로 인해 괴로움과 불편을 겪는 그의 딱한 처지를 먼저 생각하며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면 ‘뭘 잘못했길래 눈 속에 티가 들어가게 만들었냐’고 그를 탓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최선을 다해서 그 형제가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할 뿐이지요. 그리고 그 형제는 나의 그런 모습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위로와 힘을 얻을 겁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맡겨진 중요한 소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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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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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4344
9월12일 [연중 제 2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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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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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서울대교구 왕원동 대건안드레아(목동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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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소멸된 공동체들의 약점들, 성전 지상주의, 과도한 성직주의!>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개별 그리스도인이 수행해야 할 아주 중요한 직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언직입니다.
예언직이라는 표현 앞에 큰 부담을 지닐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의구심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내게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지력이라 초능력도 없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예언을 하라는 말인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본질적인 직무는, 미래에 다가올 뭔가 대단한 일을 알아 맞추는 일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중,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메신저로서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중차대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백성들 앞에 모범이 되는 스승이요 교사, 안내자요 지도자로서의 역할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이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예언자들은 외침이나 멸망, 큰 환난이나 대기근이 다가왔을 때,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할 때, ‘여러분들, 바로 이 길이 정답입니다!’라고 외치며 길을 열어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언자라고 해서 다 제대로 된 예언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이비 예언자들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예언자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삯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직관은 확실했습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루카 6,39) 사이비 예언자들을 추종하고 따라갔던 사람들은 그 삯꾼들과 함께 우르르 집단적으로 심연의 구덩이, 멸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종교박람회장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만큼 다양한 종교가 들어와있는데, 자연스럽게 거짓 예언자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릇된 가르침과 감언이설로 선량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큰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더 큰 혼란 속으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소멸해갔던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했던 방향성이 있었습니다.
과도한 성전 지상주의, 지나친 성직주의, 극단적인 물질만능주의였습니다.
인류나 국가 공동체의 공동선이나 이웃과의 연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깊이 함몰되어, 다들 집단으로 멸망의 길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오늘날도 거짓 예언자들, 그릇된 목자들이 자신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교’라는지‘애국’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듣는 사람들 민망하게 만들면서, 나라 전체를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고통이나 아픔 앞에 고민하고 근심해야 마땅한데, 지금은 정반대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근심거리요 치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이름과 얼굴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 갈 길을 꿋꿋히 걸어가는 훌륭한 종교 지도자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다만 미꾸라지 몇 마리가 온 나라를 흙탕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충실하고 선량한 종교인들이 느끼고 있는 참담함과 부끄러움이 참으로 클 것입니다.
목회 중이던 예배당을 과감하게 처분해서 가난한 신자들에게 돌려주었으며, 주일이면 텅텅 비는 공간들을 이용해서 적극적으로 떠돌이, 순례 목회 활동을 해나가시는 한 목사님의 말씀, 귀담아 들어볼만 합니다.
“어디에서 예배하느냐보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예배당보다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집을 위해서 가족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죠. 지금은 콘크리트에 갇혀서 자기들만의 리그, 자기들만의 행복한 예배 공간, 예배 나눔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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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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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의 들보를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거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형제자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총을 든 강도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가 박혀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이끌겠다고 나서는 ‘눈먼 인도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들보(δοκός)’는 단순히 큰 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 원어의 의미를 깊이 들여다보면, 이 ‘들보’는 집의 구조를 떠받치는 거대한 ‘대들보’나 ‘기둥’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눈의 들보는, 나의 영혼이라는 집의 구조 자체를 뒤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 즉 하느님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다고 믿는 ‘옛사람’의 자아(에고) 시스템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 교만이라는 대들보가 나의 시야를 완전히 가리고 있기에, 나는 다른 사람은 물론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소경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이끌려 할 때, 가장 끔찍한 비극이 시작됩니다.
옛 사람인 ‘자아’의 시스템대로 살면서 타인을 이끌려다가, 그들 모두를 구덩이에 빠뜨린 비극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21세기 실리콘밸리가 낳은 최악의 사기꾼으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홈즈입니다.
그녀는 19살에, 피 한 방울로 200가지가 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테라노스’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검은 터틀넥을 입고 스티브 잡스를 흉내 냈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비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기술은 처음부터 거짓이었습니다. 기계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사기였습니다. 그녀의 ‘자아 시스템’, 즉 소유욕(수조 원의 투자금)과 지배욕(세상을 바꾸는 기술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망)은 그녀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자신의 들보를 비춰줄 거울이 없었을까요? 그녀의 부모는 딸의 ‘성취’에만 열광했고, 실패를 감추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훗날 거대한 사기극으로 무너진 엔론의 부사장이었습니다.
‘성공하는 나 = 사랑받는 나’라는 등식 속에서 자란 그녀에게,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곧 존재 가치를 잃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자기 눈의 거대한 들보를 보지 못한 채, 수많은 사람들을 ‘혁신’이라는 이름의 구덩이로 함께 끌고 들어간, 우리 시대의 가장 무서운 ‘눈먼 인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너무나 잘 보이지만, 정작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들보는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참모습을 비춰줄 깨끗한 ‘거울’이 필요합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 수도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새로 들어온 젊은 수사가, 성당 창문을 닦고 있는 늙은 수사에게 다가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수사님, 저 형제는 너무 게으르고, 저 자매는 너무 말이 많습니다. 이 수도원은 온통 고쳐야 할 것 투성이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늙은 수사는 말없이 젊은 수사를 데리고, 먼지가 뽀얗게 쌓인 낡은 거울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소매로 거울의 한가운데, 젊은 수사의 얼굴이 비치는 부분만을 깨끗하게 닦아주었습니다. 그러자 먼지투성이 거울 속에, 젊은 수사 자신의 얼굴만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늙은 수사는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형제여, 세상을 바꾸고 싶거든, 가장 먼저 이 거울부터 닦아야 한다네.”
우리 신앙인에게 이 거울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나는 네게 내 목숨까지 다 주었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기심이라는 들보를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비추시는 유일한 거울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바라바 역할을 맡았던 이탈리아 배우, 피에트로 사루비의 이야기는 이 진실을 생생하게 증명합니다. 그는 원래 베드로 역할을 맡고 싶었지만, 멜 깁슨 감독은 그의 험악한 인상을 보고 바라바 역을 맡겼습니다. 감독은 그에게 한 가지 이상한 요구를 했습니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 절대 예수님 역할을 맡은 배우의 눈을 쳐다보지 마시오.”
마침내 군중 앞에서 예수님과 나란히 서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 그는 처음으로 예수님 역할을 맡은 배우 짐 커비즐의 눈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의 충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마치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눈은 원망이나 증오가 아닌, 한없는 사랑과 자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눈빛은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피에트로, 왜 나를 박해하느냐?’ 그 눈빛 앞에서, 제 삶의 모든 교만과 폭력, 더러움이 한순간에 드러났습니다. 저는 제 영혼의 밑바닥을 보았습니다.”
그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고,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회개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우리의 들보를 보게 하시는 가장 맑은 거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들보는 이기심인데,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사랑 앞에서 자신의 추함을 보고도 견딜 수 있는 자아는 없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갈 위기 속에서, 그는 C.S. 루이스의 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내 삶의 모든 교만과 오물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었는지를 깨달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자비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는 자신의 ‘옛 자아’가 죽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덤에 들어갔다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다시 태어난 후에야 비로소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참된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럼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이 몸이 무력해져,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로마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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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사야 예언서는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전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하느님 나라 선포를 깊이 이해하려면, 이사야서의 약속이 큰 도움이 됩니다. 아모스 예언서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새로운 질서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아모스는 다섯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첫째, 하느님께 합당한 공경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하느님은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하느님의 징벌은 보편적입니다. 어떤 민족이든 불의와 폭력을 저지르면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셋째, 징벌은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오라는 초대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면 언제든 용서하십니다. 넷째, 참된 회개는 겉치레 예배나 제물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공정을 물처럼,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다섯째, 주님의 날과 말씀이 생명입니다. “굶주림은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다.” 주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징벌의 날은 축복과 회복의 날로 바뀝니다. 아모스는 희망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날이 오면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흐르고 언덕마다 포도주가 넘치리라.” 서양의 이야기는 ‘영웅 서사’가 많습니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로마, 그리고 근대의 제국들은 정복으로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영화 속의 슈퍼맨, 아이언맨, 어벤져스도 모두 ‘영웅’을 중심에 둡니다.
반면 한국의 이야기는 ‘극복 서사’입니다. 영웅을 동경하기보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귀신과 싸우기보다 달래고 먹이며 함께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따뜻한 정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정복과 지배의 나라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섬기고 나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시고, 친히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치고, 눈먼 이를 뜨게 하시고, 굶주린 이를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안에는 따뜻한 정과 깊은 배려가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가려면 계속 페달을 밟아야 하듯, 바오로 사도의 삶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멈추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신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우리는 때로 성공, 출세, 권력만을 향해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라고 합니다. 사랑, 나눔, 봉사는 뒤로 미룹니다. 기도와 말씀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전에 그분을 모독하고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이기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은총이 넘쳐흘렀습니다.”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사다리가 정말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사다리인지, 자녀들에게 오르라고 권하는 사다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사다리인지 오늘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것처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사랑이 샘솟는 그 길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참된 길입니다.
“저희가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성공과 권력의 사다리만 붙잡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나눔, 섬김과 정의의 사다리를 오르게 하소서.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처럼 공정이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고,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저희를 다그치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그 말씀 안에서 회개와 회복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희 삶이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이웃의 눈을 열고 길을 밝히는 참된 인도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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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우리는 저마다 지닌 신념과 판단 기준에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저마다 다를 수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뒷담화를 하거나, 지적하고 고쳐 주려는 상황에서 충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자기 판단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고집합니다. 실제로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형제의 잘못이나 분명한 허물과 흠집을 뜻하는 “티”(루카 6,41)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형제의 잘못보다 더 큰 우리의 잘못, 곧 “들보”(6,41)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 들보는 무엇일까요?
저는 형제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판단하는 우리의 기준 자체에는 문제가 없더라도, 형제를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그분을 닮은 이, 곧 사랑을 지닌 이만이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에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잘못하고 있는 형제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 올바른 시선을 제시합니다. 분명 사도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의 잘못을 바라보시기보다 그를 이해하시며(“내가 믿음이 없어서 모르고 한 일”[1티모 1,13]) 심지어 그에게서 선함을 발견하는 눈길(“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여기시어”[1,12])을 지니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은 사랑의 눈길로 우리 형제를 본다면, 그제야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고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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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9-42: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고 위험한 일인지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려는 마음조차 먹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우리의 잘못들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길에서 먼저 나 자신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 자격이 있다. 어느 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비판하며, 그 비판이 도를 지나서 냉혹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런 일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남보다 자신이 잘났다는 우월감과 색안경을 통해서 남을 쳐다보고 비판함으로써 남의 결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잡아내어 몰아세우는 일들이 있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으며, 상대방의 처지가 될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나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상대에게는 엄격한 위선적인 것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하고 상대에게는 관대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들은 모든 인류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개개인은 모두 사회 스승의 표양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표양은 예수께서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간음하다 들킨 여인(요한 8,1-11)을 용서하신 것, 또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마태 18,21-22) 하신 말씀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모범들은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역사 이래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우리가 사회에 표양을 보여야 할 본분이 있으므로 관대함으로써 모든 사람을 대하고 엄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다스리라고 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듯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이웃을 대함으로써 진정으로 형제적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삶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기쁘게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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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두 눈으로 보다>
루카 6,39-42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눈으로 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두 눈으로 보다
나를 보는 눈
너를 보는 눈
두 눈으로 보다
나를 보는 나를 보는 눈
너를 보는 너를 보는 눈
두 눈으로 보다
너를 보는 나를 보는 눈
나를 보는 너를 보는 눈
두 눈으로 보다
너를 보며 나를 보는 눈
나를 보며 너를 보는 눈
두 눈으로 보다
나를 보는 눈
너를 보는 눈
두 눈으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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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ㄴ-42)
1)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라는 말씀은,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다른 사람을 회개시킬 수는 없다.”, 또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둘 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만 따라서 그 길을 걸어가는 생활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그 길 하나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이 나왔습니다.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서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 자신의 ‘큰 죄’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작은 실수’를 비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1-3.7)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 ‘티’처럼 작은 실수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에 빠져서 자비를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의 죄는 ‘들보’입니다.
3)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누가 ‘티’이고, 누가 ‘들보’인지 따지고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는 ‘들보’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말씀은, “어찌하여 너는 형제를 죄인이라고 비난하면서, 너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은 왜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말씀은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9-32)
당시에 세리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는,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입니다. 이 말에는, “우리는 의인들이다.”라는 뜻과 “저런 죄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도 죄인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는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그래서 죄인들을 만나는 것이다.”라는 뜻이고, 동시에 “너희도 병든 이들이고, 너희도 죄인들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세리들이나 똑같이 회개해야 할 죄인들, 똑같이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한 ‘병든 이들’이었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4)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는, “너부터 회개하여라.”이고,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신의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형제의 티를 빼낼 자격이 생긴다는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너희는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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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콜로새 공동체의 그리스도인은 비록 세워진 역사는 짧아도 씨를 땅에 심으면 싹이 나고 새순이 저절로 자라듯이 성령께서 그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더욱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외적으로도 성장하겠지만 내적으로 선택된 신앙인의 삶으로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새서 3장 12절-13절)
공동체에서 이 보다 더 필요한 덕이 있겠어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에서 나올 수 있는 특징들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른 것은 주님을 따라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삶을 추구하며 서로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우리로서는 그리스도인의 덕행을 쌓으며 사랑의 삶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세례 때에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 앞에 완전한 사람으로 나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함께 머무르기를 기원하며 글을 씁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콜로새서 3장 16절)
이와같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 되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콜로새서 3장 17절)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루카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판단대로 살지 않고 바로 당신의 삶으로 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복음 6장 27절-28절)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좁아터진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까요?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쪽 뺨 마저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는 자에게 속옷까지 가져가게 내버려 두라 하십니다.
주님께서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이라며 우리에게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복음 6장 31절)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되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남에게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산다면 남을 판단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을 것이며 주님처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37절-38절)
주님께서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넉넉하게 베풀고 너그럽고 가난한 자임을 잊지 않는 겸손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신앙인으로 매일 실천하며 하느님 나라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오로도 콜로새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당부한 ‘겸손과 온유와 인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덕목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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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정녕 말이 제 혀에 오르기도 전에, 주님, 이미 당신께서는 모두 아십니다.”(시편 139장[138장] 1절-2절.4절)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거짓을 말할 수도 교만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위선자는 자기 자신도 모르고 교만하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사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그분께 머물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없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려면 예수님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못나고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무한히 열려 있는 삶을 사는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보십니다.
위선자와 같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을 보지 못하기에,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기에 많은 것을 이룬 듯 보일지 모르지만,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진실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얻지만, 교만한 사람은 거짓된 자신을 보고 하느님을 잃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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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 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 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호의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호의로)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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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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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시선 성찰>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요즘 조금 피곤하면 눈으로 피곤의 증세가 나타납니다. 오른쪽 눈 실핏줄이 종종 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하러 가면 같이 일하는 자매가 신부님 또 눈이 빨개졌다고 하는데 저는 그것을 보지 못했기에 그때야 알게 됩니다.
이는 제가 저를 잘 보지 않는다는 표시지요. 거울을 잘 안 보거나 거울을 보더라도 저를 잘 들여다보지 않거나 저를 보더라도 얼굴이나 머리가 흐트러졌나 보기는 해도 제 눈을 들여다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생각하곤 했는데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는 본다는 오늘 주님 말씀 덕분에 다시 제 눈을 보지 않는 저에 대해서 곧 ‘내가 무엇을 보는지’ 보지 않는 저에 대해 성찰했습니다.
남은 잘 보고 자기는 잘 보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만 사실 우리 눈이란 게 상대를 보게 되어 있지 자기를 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적으로 보지 않으면 자기를 보지 않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의식 성찰이란 말이 있듯이 시선 성찰이랄까 관상 성찰을 해야 합니다. 내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주로 뭘 보고 있는지 나를 보는지 남을 보는지, 나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남을 보더라도 남의 단점만 보는지 장점도 보는지, 하늘을 보는지 땅을 보는지. 하늘을 보면 얼마나 자주 보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시선의 또 다른 문제도 성찰해야 합니다. 곧 나의 잘못을 보지 않기 위해서 남의 잘못을 보고, 나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남도 잘못한다고 하며 나의 잘못은 작다고 하기 위해 남의 잘못을 크게 만드는 잘못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돌을 던져서 죽이려고 했던 요한복음 8장의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죄를 간음한 여인의 죄로 감추려는 인간의 집단심리를 꿰뚫어 보신 주님께서 죄 없는 사람이 돌을 던지라고 하시면서 자기 죄들을 보게 만들자 그들은 늙은이부터 모두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남의 죄를 보지 말 것입니다. 나의 죄를 보지 않기 위해 남의 죄 보는 것은 더더욱 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나의 죄를 보려고 애써야 하고, 없애기 위해서는 더 애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없애기 싫어서 보기 싫어하는 것이고, 없애기 싫어서 내 죄에 대해 눈 감는 것이며 없애기 싫어서 남의 죄 손가락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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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 복음 6장 39절)
<타인의 모습은 자신의 자화상!>
오늘 복음은 자신의 잘못을 바로 보고 고칠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고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허물만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자가 바로 '위선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는 '눈먼 이'는 율법의 세부규정은 강조하면서도 율법 안에 담겨져 있는 본질과 참뜻을 저버렸던 바리사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율법의 본질이요 참뜻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저버리고, 오직 율법의 형식만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했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위선자들이 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되어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타인의 모습은 자신의 자화상!' 이 말은, 너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지적하면서 남을 판단하거나 심판하는 사람들, 단죄하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곧, 내가 판단하고 단죄하는 너의 잘못과 부족한 모습은 바로 내가 지니고 있는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복음 6장 41절.42b절)
우리의 유일한 심판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모습을 다 알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의 부족함과 죄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가 먼저 그런 주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푸시어 나를 용서해 주십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너의 부족함을 바라보기에 앞서 먼저 나의 부족함을 바라봅시다! 나의 부족함에 대해 먼저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고, 이 자비와 용서에 힘입어 내가 먼저 깨끗해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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