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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산 이야기
필봉 최해량
나는 278미터의 낮은 산이다. 그래도 그저 그런 동네 앞산쯤으로 여기고 얕보면 큰코다친다. 나는 대구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앞 기슭에는 조야동과 노곡동 주민들을 품고 있는데 이들이 옹기종기 살아가는 모습이 정겹다. 서쪽 평야에는 제법 큰 마을을 이루며 바삐 살아가는 이들을 볼 수 있다. 북쪽으로는 팔공산이 나래를 펴고 산맥을 이루고 있다. 나를 만나려면 대구 도시철도 3호선을 타고 금호강을 가로질러 첫 번째 역에 내려 한 시간 남짓 올라오거나 운암지 공원에 오면 된다. 동리 사람들은 나를 반티산이라 불렀다. 통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 그릇, 함지박을 엎어둔 모양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 붙였다.
요즘 나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문화재청이 서쪽 세 개 구릉에 위치한 360개의 고분군을 국가 사적지로 지정할 것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그 많은 고분은 누가 만들었으며 정상에는 성이 왜 축조되었는지 내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도 한때 잘 나가던 때가 있었다. 4세기 무렵, 불로동 고분군, 달구벌 세력과 함께 칠곡이 신라에 병합되기 전까지 서쪽 평야에는 강력한 부족 세력이 존재했다. 지도자들은 함지고, 구암초교 부근에 주거지를 정하고 주민들은 평야에 촌락을 이루며 살았다. 팔거천 물은 칠곡 평야를 적셔주었고 그 소출은 부족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내 꼭대기에는 성을 만들어 팔거산성이라 이름 하였다. 전투 시 여러 날 견딜 수 있는 물이 있고 달구벌을 내려다볼 수 있어 외침을 경계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금호강을 오가는 배들도 경계할 수 있어 가야의 침략도 대비할 수 있었다. 특이하게 나는 죽은 자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대개의 부족 국가들이 그러했듯 지도자들이 사망하면 매장을 했다. 후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내 서쪽 다섯 개 능선을 따라 무덤을 만들었다. 제1 능선에는 왕릉급 무덤이 7기나 만들어졌다. 대형고분도 34기나 된다. 이렇게 조성된 크고 작은 고분이 총 379기이니 우리나라 현존 고분군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신라 사람들은 무덤을 만들 때 나무곽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바로 적석 목곽분이다. 가야인들은 석곽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하고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를 석곽 봉토분이라 한다. 특이하게도 산 아래 사람들은 석곽을 만들어 시신을 누이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뒤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적석 석곽분이다. 신라 것도 아닌 가야 것도 아닌 독특한 형태를 만들었다. 이런 특수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구암동고분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고분들이 만들어지던 시기, 나는 가히 신성불가침 지역의 대우를 받았다. 성으로 오르는 길이라 일반인은 출입이 금지되었고 지도자들의 무덤이 있어 누구나 신성시 여겼다. 이때가 내게는 가장 영광스러운 시기였다.
그러던 나는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지도층은 신라에 복속되며 점차 세력을 잃기 시작했다. 가야를 경계할 필요도 없어졌다. 불교가 성행하여 화장이 대세가 되니 무덤을 쓸 이유도 사라졌다.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았다. 어쩌면 저곳은 신성한 곳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때가 그래도 내게는 비교적 속 편한 시기였다. 앞 내에서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속에 고기가 많아 왜가리, 해오라기들이 내 기슭에 둥지를 틀었다. 아침마다 새가 합창할 때면 나는 마냥 행복했다. 토끼, 고라니들은 풀을 뜯으며 마음껏 뛰어다녔다. 이렇게 1,000여 년이 넘는 긴 시간이 내게는 안식기이고 휴면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 못된 사람들이 나를 마구 훼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로 기억된다. 주민들의 낯을 피한 도굴꾼들이 서쪽 구릉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손에는 꼬질대와 괭이를 들고 구릉지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제1 능선에 있는 큰 무덤부터 손을 댔다. 왕릉 같은 무덤, 돌무더기를 쌓아 아무도 훼손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1,500여 년의 세월을 이기지 못해 뼈는 다 삭아 없어졌지만 그래도 남의 무덤을 파헤친다니! 그들에게는 죽은 사람의 물건을 훔친다는 죄책감도, 범죄의 두려움도 없었는가 보다. 잠자던 옛 지도자들이 이놈, 하며 벌떡 일어날까 봐 겁이 나지도 않았나 보다. 주민들도 위법 행위임을 알지 못했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들은 시신이 묻힌 주곽 속의 유물들을 속속들이 챙겨 갔다. 신라 왕실로부터 선물 받은 금제 허리띠며 머리를 장식했던 은으로 만든 관식도 있었다. 허리에 찼던 커다란 칼도 손에 낀 금반지도 주워 담았다. 그 이후에는 바로 옆의 11자형으로 조성한 부장 곽을 팠다.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고배 등 온갖 그릇들이 곡식과 함께 나왔다. 깨어진 그릇도 많았다. 그것도 모자라 지배자를 모시던 사람을 순장한 배장 곽까지 뒤졌다. 이런 유물들은 도굴된 뒤 정식 발굴에서 나온 것이다. 2개의 고분에서 이삭줍기로 찾은 것이 이 정도이니 얼마나 많은 문화재가 있었는지는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어두운 밤, 몰래 은밀한 시각에 이루어진 일이라 내가 자세히 볼 수 없어 다 증언할 수 없어 참 유감이다. 이렇게 그들은 내 아랫도리 기슭을 다 헤쳐 가며 379개의 무덤들을 파헤쳤다. 슬프고 암담한 시기였다.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내게도 거짓말과 같이 행복이 찾아왔다. 아랫마을 1지구에 이어 개발이 속속 이루어졌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숲을 이루며 들어섰다. 조그만 촌락에 인구 25만 명이 모여 들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푼다, 걸어야 산다고 하며 나를 찾았다. 밤낮없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중턱에는 체육기구를 가져다 놓고 밤에 오는 사람을 위해 가로등까지 설치했다. 아래쪽 연못에는 연꽃을 심고 길도 새롭게 정비했다. 봄이 오는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제는 기뻐해야 할지 조금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청량제 같은 소식이 들렸다. 파헤쳐진 고분군을 사적지로 지정한단다.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 극적으로 큰일을 일궈냈다. 이미 파괴된 고분을 사적지로 지정해봤자 큰 빛이 나진 않겠지만 더 이상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 울창한 산림 속의 고분을 보며 역사를 되뇌며 걷다 보면 힐링이 되고 새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몇 기를 발굴하여 고분의 원형을 볼 수 있게 만든다니 아이들 공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숲과 어우러진 둘레길, 피톤치드가 펑펑 쏟아지는 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이 길이 지친 주민들의 쉼터로, 건강의 오솔길로, 사색의 길로, 연인들의 로망 로드가 될 것이라니 한껏 마음이 들뜬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새들의 노래 소리와 어우러질 그 날을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들썩여 진다.
첫댓글 함지산의 내력을 적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산 중의 한 곳이며 며칠 후에 한 번 가려고 합니다.
보배로운 함지산이 이제사 제 이름 값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랜 역사속에 묻힌 함지산과 고분의 독백을 리얼하게 잘 표현해 주셨습니다. 많은 것을 새롭게 공부하게 되었으며 함지산의 정취를 한번 느껴보고 싶어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함지산 구암동 고분군에 대한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앞으로 진실이 밝혀지고 그 실체가 바르게 드러나기를 기원해 봅니다.
함지산을 가끔 오르내린 적은 있는데 이렇게 오래되고 거대한 고분군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문화재에 대한 애정과 해박한 지식으로 일인칭 시점의 글을 써 주셨습니다. 유익하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래전에 등산한 함지산은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좋은 산이며 천연요새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2017년 가을에 운암지공원을 지나 함지산을 다녀온 적은 있어도 고분군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습니다. 중요한 고분군 정보 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말로만 들어온 함지산과 운암지 오랜 역사가 숨쉬는 곳임을 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한번 시간을 내어 가보고싶습니다. 좋은 내용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불로동 고분군은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지만 또 다른 고분군이 우리 도시에 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함지산 고분군이 화자가 되어 우리 도시, 달구벌의 고대 장의 풍습과 역사를 조곤조곤 친절히 풀어내어 훨씬 더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고분에 대한 식견이 탁월 합니다. 고분군 발굴지를 다니며 들은 풍월이 있습니다만 이처럼 체계적으로 설명하니 이해하기 쉽습니다. 부족국가시대 있었던 고분군이 함지산에도 있었군요. 한번 꼭 방문해 봐야겠습니다. 잘 읽고 많이 배웠습니다.
함지산 구암동 고분군이 궁금했는데 일인칭 시점글로 부연설명을 곁들여진 글을 읽으니 훨씬 재미있고 많은 도움이 됩니다
언제 한번 가봐야겠습니다.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의 보물들이 도굴꾼의 의해 파해쳐 사라졌다니 그것도 1960 년대 금세기에 그런 보물들이 외국에 나가 있기도 하다니
참 분통터집니다.1,000 여년을 지켜온 고분의 도굴 고분안에는 어떤 문화제급 보물이 있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합니다. 늦게나마 사적지로 지정됨은 참 다행입니다. 구암동 고분에 대해 늦게나마 알게해 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식물들을 관찰하기 위하여 3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운암지에 체험학습을 간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존 고분군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고본군이 형성되어 있는 줄은 처음으로 알았습니다.몇 기를 발굴하여 고분의 원형을 볼 수 있게 만든다니 기대가 됩니다. 고분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