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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책 소개
『불안의 책』은 페소아가 생전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사후 연구가들이 유고 더미에서 찾아낸 미완성 원고를 엮은 책이다. 작품을 구성하는 481개의 텍스트 속에는 페소아가 일평생 추구했던 내면의 성찰과 감각적 사유가 깊이 배어 있다.
출판사 서평
포르투갈 최고 시인, 리스본의 영혼
페르난두 페소아의 기념비적 고백록
20세기 유럽 문학을 대표하는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의 『불안의 책』이 포르투갈어 원전 완역본으로 출간되었다. 페소아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불안의 책』은 이미 두 차례나 출간되긴 했으나 이탈리아어 판본과 독일어 판본을 중역한 것으로, 포르투갈어 원전을 완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페소아의 산문을 편역한 『페소아와 페소아들』(김한민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과 『불안의 책』(문학동네)을 통해 비로소 페소아의 포르투갈어 원전 번역이 시작되었다. 이제 물꼬가 터졌으니 페소아의 더 많은 작품을 원전 번역으로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불안의 책』은 페소아가 생전에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사후 연구가들이 유고 더미에서 찾아낸 미완성 원고를 엮은 책이다. 그 때문에 편집본마다 수록된 텍스트의 수와 배열 순서가 다른데, 문학동네에서는 페소아 연구가로 유명한 리처드 제니스(Richard Zenith)의 포르투갈어 편집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페소아는 수많은 이명(異名)을 통해 ‘하나’의 나가 아니라 동시에 여러 공간에서 실재하는 ‘복수’의 존재를 구현한 모더니스트다. 『불안의 책』 또한 이명 인물의 작품으로 작가와 가장 흡사한 반(半)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고백적 단상들로 이루어졌다. 작품을 구성하는 481개의 텍스트 속에는 페소아가 일평생 추구했던 내면의 성찰과 감각적 사유가 깊이 배어 있다.
20세기 유럽 문학의 대표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의 ‘수많은 페소아들’
20세기 유럽 문학의 대표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가 세상을 뜨기 전에 남긴 책은 영어 시집 몇 권과 포르투갈어 시집 한 권에 지나지 않았다. 짧은 생애를 글쓰기로 불태웠지만 출간에는 소극적이었던 그였기에, 생전에는 소수의 문학인들에게만 인정받았을 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질 수 없었다. 하지만 사후 2만 7500장이 넘는 원고가 담긴 트렁크가 발견되어 연구자들이 그의 글을 출간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유럽 모더니즘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평가와 함께 포르투갈의 국민 작가, 더 나아가 유럽 문학의 선두 주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모더니즘 작가로 페소아를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복수성’의 창조 때문이다. 그는 단일한 나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고유한 이름과 전기(傳記)를 지닌 수많은 인격체로 분화시켜 그들에게 글을 쓰는 임무를 부여했다. 시골에 사는 목동 시인 알베르투 카에이루, 현대문명을 좇는 선박기술자 알바루 드 캄푸스, 사라마구의 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의사이자 시인인 히카르두 헤이스를 비롯해 그가 사용했던 이명은 어림잡아도 70개가 넘는다. 페소아의 이명은 작가의 분신 혹은 일부가 아닌 완전한 독립체이자 타자였고, 페소아는 ‘하나’의 나가 아닌 ‘복수’의 나가 되는 타자화 방식을 통해 자신 안에 잠재된 수많은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었다.
페소아가 사망한 지 47년 만에 포르투갈에서 출간된 『불안의 책』 또한 페소아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명이 쓴 작품이다. 하지만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수많은 이명 중 페소아를 가장 많이 닮은 반(半)이명으로, 리스본 시내를 거닐며 사색에 잠기고 글을 끄적이는 그의 모습은 페소아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페소아는 ‘나 아닌 나’인 소아르스를 통해 좀더 다층적이고 다각화된 자신의 모습을 끄집어냈고, 현실의 나를 허구의 세계에 투영시킴으로써 현실에서 느끼는 것을 넘어 감각의 폭을 넓히고 더 깊이 사유했다.
리스본의 몽상가가 남긴 영혼의 기록
비현실적 일상과 현실적 허구를 넘나드는 기억의 조각들
“아무 연관성이 없고 연관성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는 단상들 속에 나의 사실 없는 자서전, 삶이 없는 인생 이야기를 무심히 털어놓는다.” (텍스트 12)
『불안의 책』은 페소아가 1913년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약 20년의 세월 동안 틈틈이 공책이나 쪽지에 기록한 단상들을 모은 고백록이다.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작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불안의 책』은 페소아가 자신이 창조한 소아르스를 묘사하고 소개하는 짧은 머리말과, 소아르스가 ‘사실 없는 자서전’이라는 표제 아래 써내려간 481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짧게는 한 줄에서부터 길게는 한 장을 넘어가는 481개의 고백적 단상들은,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과 감정에서부터 삶에 대한 사유, 작가로서의 존재 의식에 대한 성찰, 감정 묘사 등에 이르기까지 한 평범한 회계사무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면모를 모두 아우른다.
페소아가 자신을 해체시켜 창조해낸 이명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지닌 글들 사이에 일관된 흐름이나 기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잘 지어진 벽돌집 같은 정제된 글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쏟아질 때마다 그것을 손끝으로 받아 휘갈긴 작가의 필체가 그대로 느껴지는 살아 있는 명상록이다. 겉모습은 한 권의 반듯한 책이지만 눈물자국 있는 빛바랜 일기장 혹은 종잇조각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책 아닌 책이다.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는 평범한 회계사무원이다. 리스본 도라도레스 거리에 있는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 그의 일상은 겉으로 보기에 단조롭고 평화롭다. 하지만 그는 회계장부 너머로 끝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나는 지금 회계장부 위에 고개를 숙이고 어느 이름 없는 회사의 의미 없는 출납 기록을 열심히 작성하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나의 생각은 실재하지 않는 동양의 어느 풍경 안을 지나는, 존재하지 않는 배의 항로를 똑같은 집중력으로 따라가는 중이다.” (텍스트 302)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이 똑같은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회계사무원이기 때문에 꿈꿀 수 있다고,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더 많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아르스는 리스본의 도라도레스 거리에서 줄곧 맴돌지만 광대한 내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그에게 그러한 공간적 한계, 현실적 상황이 주는 한계는 무의미하다. 물리적이고 외부적인 것들보다 자신의 꿈과 영혼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현실인 것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 사이의 경계 또한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다. “별안간, 내 운명이나 다름없는 줄 쳐진 커다란 장부 사이로, 나이든 친척 아주머니 소유인 세상과 접촉이 없는 오래된 집과, 거기서 열시에 졸며 마시던 차와, 리넨을 씌운 식탁 위를 밝히던 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석유램프가 다가와 빛을 내자, 옆자리 모레이라 관리장의 모습은 검은 전깃불 속으로 무한히 멀리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텍스트 33) 같은 부분을 보면 그의 사고 속에 시간의 경계가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느끼려는 섬세한 감각의 촉수는 현실과 허구, 현재와 과거, 미래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그 사이를 유영한다.
결국 『불안의 책』은 감각을 통해 모든 경계를 허무는 책이다. 허구와 현실의 경계도 없고, 시간의 경계도 없고 사실과 비사실의 경계도 없다. ‘사실 없는 자서전’이 실로 사실 없는 자서전인지, 사실적인 자서전인지, 그 안에 무엇을 내포하고 있는지는 읽는 이가 판단할 문제다. 모든 것이 혼재해 있고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한 것이 이 책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감각으로 포착한 섬세한 감정,
불안을 정의하는 여러 감정들
‘사실 없는 자서전’에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은 세밀한 관찰력과 섬세한 감정, 날을 세운 감각이다. 밀도 있게 촘촘히 박힌 소아르스의 감정돌기들은 지나가는 바람결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의 스치는 몸짓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사무실에서 동료의 굽은 등을 보면서 눈물 어릴 정도의 따뜻한 친밀함을 느끼고, 거리에서 앞서 걷는 남자의 굽은 등을 보면서 그의 전(全) 존재를 상상하고 인생에 대해 고민한다. 비틀거리며 거리를 지나는 노인을 보고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꿈을 꾸는 중이라고 묘사하고, 사무실 사환 아이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날 자신의 인생 일부가 떠나갔다고 아쉬워한다.
소아르스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것은 나의 감각들, 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상태, 귀기울일 때 받는 느낌, 그리고 세상의 소박한 것들이 과거의 일들을 상기시키며 내게 말 걸어오는 방식인 향기 등이다”(텍스트 208)라고 말할 정도로 느끼는 일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긴다. 그에게 살아간다는 것은 곧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섬세한 감각의 촉수는 ‘불안(desassossego)’의 정서 또한 깊이 감지한다. 회계사무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사무실과 월세방, 리스본의 거리를 오가며 깊은 사색에 잠겨 적어내려간 조각난 글에는 그의 불안이 알알이 드러나 있다. 481개의 텍스트에서 불안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다양할 것이다.
외로움이나 고통일 수도 있고(“나는 외로움과 인생 때문에 울고, 바퀴 없는 마차처럼 쓸모없는 내 고통은 버려진 거름더미 사이에 놓인 현실의 가장자리에 눕는다”(텍스트 436)), 권태 혹은 두려움일 수도 있고(“나의 권태에 공포가 더해진다. 나의 지루함은 곧 두려움이다. 내가 흘리는 땀은 차갑지 않은데 내 땀을 감지하는 나의 의식은 차갑다. 몸이 아프진 않지만, 극심하게 불안한 영혼이 육체의 땀구멍으로 흘러넘쳐 온몸으로 퍼진다”(텍스트 184)), 무기력함 혹은 공허감일 수도 있다(“정말로 내 것이라고 느끼는 건 거대한 무능, 커다란 공허, 인생의 모든 것에 대한 무기력뿐이다”(텍스트 215)).
결국 불안은 다양한 감정에 동요하는 존재의 흔들림을 표현한 단어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다양한 심리 상태를 포괄하는 불안은 순간적으로 가슴에 꽂히는 느낌과 스치는 생각을 일기 쓰듯 써내려간 흩어진 단상들 속에서, 때때로 시적으로 전개되는 섬세한 문장들 속에서 더욱 솔직하고 뚜렷하게 드러난다.
작품을 집필한 20여 년의 세월 동안 페소아의 내면에 감돌았던 감각적 사유의 총체라 할 수 있는 『불안의 책』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유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깊은 곳의 흔들림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그 흔들림에 대해 깊이 사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에 휘말려 피상적으로 사유하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없고 시간성마저 존재하지 않는, 오직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인 내면세계를 펼쳐 보이는 『불안의 책』은 곧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뻗어 있는 무뎌진 감각의 날을 자극하고 좀더 깊은 것에 대해, 본질적인 것에 대해 돌이켜보게 하는 영혼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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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나의 확신에 찬 행동 가장 분명한 생각, 가장 논리적인 의도들은 결국 타고난 술 주정, 기질적인 광기, 거대한 무지일 뿐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형이상학적 정탄과 함께 깨닫는다. 나는 스스로 행동한 게 아니라 시키는 대로 행동했 을 뿐이다. 나는 배우가 아니라 배우의 동작에 불과 하였다.
2) 내게는 거대한 욕망과 꿈이 있었다 사환에게도 재봉사에게도 꿈이 있었는데 모든 사 람은 꿈을 꾸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꿈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아니면 운명에게 그것을 맡길 수 있느냐, 혹은 없느 냐이다. 꿈을 꿀 때, 나는 재봉사와 사환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그들과 다른 점은 단지 글을 쓴다는 것뿐이다 물론 글쓰기는 하나의 행위이며,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나의 현실이다
그러나 나의 영혼과 그들의 영혼은 동일하다
"몸을 씻듯 운명도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듯 삶도 갈
아줘야 한다." -59쪽.
"나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농원의 나무 아래에 누운
모든 거지들의 모든 낮잠이다." -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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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면 나 자신 안으로 경건하게 들어간다. 내 상상 속 틈새에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기억하는 특별한 방이 있다. 나는 그 방안에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분석하며 즐거위하고, 어두운 구석에 걸린 그림을 보듯이 나를 관찰한다 p.425
지성이라는 외피를 두른 삶의 본능적 지속성은 내가 끊임없이 탐구하는 깊은 사색의 주제다. 의식이 인위적인 가면을 쓴다 한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속일 수 없는 무의식을 드러내는 짓일 뿐이다. p.197
우리가 감상을 밖으로 표현하는 까닭은 정말 그렇
게느꼈기 때문이 아니라그렇게느낀다고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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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14p.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는 우리가 만든 개념이므로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152p.
"내가 만일 부잣집에 태어나 운명의 바람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서 나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 삼촌의 손에 이끌려 리스본의 한 사무실에 취직하지 않았더라면, (중략)
나는 오늘날 이 글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172쪽
우리는 죽음이다. 우리가 삶이라고 여기는 것은 실제 삶의 잠이고, 진정으로 우리인 것의 죽음이다. 죽은 자들은 태어나는 것이지 죽는 게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 사실 우리는 죽은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 삶이 시작된다.
232p
나는 포르투갈어로 쓰지 않는다. 나 자신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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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은 책과 함께] 불안의 책
"나는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면서 나의 인생을 걸레질한다. 도시의 정지한 시계처럼 부조리한 나의 인생을. 연약하지만 확고한 감성이, 길지만 자의식 강한 꿈이 모호한 나의 특권 전반을 창조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문장들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다.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그는 생전 70개가 넘는 이명(異名)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불안의 책'은 페르난두 페소아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라는 이름으로 약 20년간 쓴 일기를 묶은 것으로, 그가 남긴 유일한 산문 작품이다.
페소아는 리스본의 선술집과 레스토랑,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예리하게 살펴보고, 그들에 대한 관찰 일지를 토막글로 적어 놓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어리석음 속에 지혜가 있다는 것이다" 레스토랑의 요리사를 주의 깊게 관찰하던 페소아는 그가 일상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인생의 단조로움을 극복할 방법을 깨닫는다.
40년 넘게 주방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리사는 잠을 매우 적게 잔다. 그는 매번 고향에 갔다가, 망설임 없이 다시 돌아온다. 조금씩 돈을 모아두지만, 쓸 생각도 없다. 광장도, 극장에도 가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인생의 외떨어진 발자취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광대 짓이다. 페소아는 조리대 반대편으로 몸을 숙이면서 그가 짓는 미소는 위대하고, 엄숙하며, 흡족한 행복을 말해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꾸미지 않으며, 그럴 이유도 없기에 그가 이런 행복을 느낀다면 정말 그 행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페소아는 단언한다.
페소아는 "인생이 본질적으로 단조롭다면, 그 사내가 나보다 더 많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며 "행복은 확실히 그의 것이다. 존재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그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사소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낀다"고 밝힌다.
단조로움, 지루하게 비슷한 똑같은 일상, 차이가 없는 오늘과 어제를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페소아는 존재의 변화가 없을 때까지 존재를 단조롭게 만들라고 조언한다. 가장 사소한 것이 흥미로운 일이 될 때까지 하루하루 감정을 이완하다 보면, 오직 감각만으로 영혼은 슬픔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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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Pessoa)는 포르투갈어로 '사람' 이다. 휴머니틱한 이름을 가긴 작가 페소아는 리스본을 사랑했다. 태어나고 잠시 떠났다가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 도시를 지켰다. 인간의 지독한 고독과 허무를 찾아 날마다 카페와 골목을 해매였다. 사는 것은 무엇이고 나라는 존재는 어떤 실체인가. 인생이 과연 어디로 가면서 어떻게 마무리 짓는 것인지를 탐구했다. 결론은 없었다. 해답이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수많은 질문을 던져주고 생을 마감했다.
페르난두 페소아, 정확하게는 페루난두 안토니오 노게이라 페소아(1888-1935)다. 시인으로 작가로 문학평론가로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에 리스본에서 생을 끝냈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명작 '불안의 서(書)'는 죽고 나서 한참 후에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의 애독서가 되기까지 적지 않은 세월이 걸렸다.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이는 우리가 만든 이미지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몇 줄의 묘사가 나를 리스본으로 데려갔다.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그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카페 '마르티노' 는 아직도 문을 열고 있었다. 15세기 대항해 시절의 포르투갈 전성기를 회한하듯 만들어진 너른 광장에는 이베리아 반도 서쪽의 강렬한 태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생전의 페소아는 자주 커피를 마셨다. 이웃 동네의 또 다른 카페 '브라질레이라' 에도 자주 들리곤 했다. 이제는 리스본을 찾는 여행객들의 순례코스가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루틴에서 벗어나는 일탈을 꿈꾼다. 내가 있어야 하는 무대에서 내려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결정해야 할 무엇도 없는 상태 속에 나를 집어넣고 싶어 한다.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피곤해 나로 존재하지 않고 싶어 한다. 나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로 살아보고 싶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누군가 내 삶으로 나를 때리는 듯한 느낌과 강박은 내가 계속 고민해오던 일상의 문제다. 페르소아는 그 문제에 대해 나의 고뇌를 이미 오랜 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리스본 시내 언덕으로 올라가는 낡은 전차는 오래 전 이도시가 흥청거렸을 때의 추억을 간직하는 풍경이다. 철길과 아스팔트가 뒤 섞인 길을 따라 세계에서 가장 오래(最古) 된 서점 '베르트랑' 에 들렀다. 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에서 페소아의 작품들을 보고 싶었다. 별도 코너에 진열된 작가의 시집과 평론, 일기 등 이 가지런히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제국으로 전진하던 시기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던 베르트랑은 아직도 활기가 넘쳤다. 세상 사람들이 리스본 서쪽에 절벽 같은 지구의 끝이 있다고 믿었던 불안한 시절 미지의 세계로 나가도록 지혜를 주던 곳이었다. 엔리케 왕자의 꿈을 실현시킨 탐험대들은 리스본 항구 '디스커버리 타워' 에 남아있었다. 바닷가 '밸렝' 지구에는 제국의 기상이 아직도 생생했다.
페소아의 작품 세계는 남아공에서 자란 청소년 시절의 세계관이 바탕이었다. 2살 때 아버지가 죽고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간 남아공 더반에서 10년을 보냈다. 양아버지는 포르투갈의 남아공 주재 영사였다. 에드가 앨런 포우나 워즈워드, 키이츠 등의 문학에 빠져 살던 아프리카 남단의 시간은 고독했다. 잘 어울리지 못해 어디에도 속하기 힘든 내성적인 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이방인이자 경계인이었다.
"인생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는 마차를 기다리며 머물러야 하는 여인숙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나는 나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고 그 중간쯤에 있는 무언가 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지녔는지 나도 모른다. 나는 매순간마다 변했다. 끓임 없이 내가 낯설다. 난 나를 본적도 찾은 적도 없다. 그토록 많은 것이 되다보니 가진 것은 영혼뿐이다. 영혼이 있는 사람에겐 안정이 없다. 무언가 보는 사람은 바로 그가 보는 그것, 무언가 느끼는 사람은 더 이상 그가 아니다"
압생트 한잔을 털어 넣고 늦은 밤 타자기를 두들겨 쓴 글들은 가슴을 후비며 내안으로 들어왔다. 1900년대 초의 리스본 모습이 중첩되어 희미하게 깔리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지속적으로 개성을 창조 한다. 그때마다 스스로의 인간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를 위해 인간은 모두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존재다.
헤밍웨이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부분적으로 부서져 있다. 그사이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있다".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살면서 적당히 파괴되어 간다. 나도 언제나 부분적인 파괴를 경험해왔다. 그것을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살아서 보다 죽어서 인정받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또렷해지는 작가. "명성과 성공, 무지와 편리함, 요란함을 우선시 하는 시대에 여기 완벽한 해독제가 있다. 어둠, 실패, 지성, 곤경, 침묵을 찬송하는 노래가 있다"(존 란체스터). "비현실적인 일상과 현실적인 허구 사이에 그의 이야기가 있다"(옥타비오 파스)
페소아는 무려 75개의 다른 이름으로 짧은 생을 살았다. 남아공 더반에서의 학창시절부터 필명이나 익명으로 기고하고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베르투 카에이루, 히카루도 헤이스, 알바르 드 캄푸스. 이 세 이름은 그가 가장 즐겨 쓴 필명들이다. 자신을 여러 개의 인격으로 분화시켰다고 말한다. 아직 남아있는 일기와 비망록, 2만 페이지 이상의 원고들은 처리방법을 찾고 있다.
마치 과거의 꿈에서 깨어나 이뤄질 수 없는 꿈에 빠져든 것처럼 포르투갈의 환생을 꿈꿨다. 전성기 역사시대의 세바스티앙 왕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한때 그는 리스본 관광안내서를 영어로 만들기도 했다. 이 도시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골목을 서성이며 리스본의 불안과 고독, 결핍을 관찰했다. 페소아는 리스본을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카프카의 프라하 같은 곳으로 만들었다.
에릭사티의 느린 피아노 연주 '짐노페디(스파르타 청년들의 알몸축제)' 가 귓전에서 맴돌았다. 4차원의 프랑스 작곡가가 만들어낸 피아노곡은 페소아의 세계에 정확히 연결되었다. 너무 늙은 시대에 너무 젊게 와서 힘들다던 피아니스트의 느린 건반 소리로 나는 잠깐씩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한다. 어떤 때 들으면 더 우울해진다. 짐노페디 선율사이에 걸쳐진 페소아의 자아진단과 고독한 정신세계는 묘한 교집합을 형성한다. 소리는 가끔 나에게 고독과 향수를 달래주는 아편이다.
"엉망진창인 이 세상에서 온전한 이해를 포기할 권리, 삶의 숭고함에 나를 헌납하여 삶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하여 체념을 선택할 권리, 그러니까 한없이 나약해질 권리, 끝없이 불안할 권리, 권태로울 권리와 공허할 권리, 그리하여 질 나쁜 인간의 세상과 거리를 두고 질 좋은 고독을 향유할 권리를 얻어낸 쾌락, 보통의 짐작과 아주 다른 종류의 해방을 맛보는 쾌락" 그 시대에는 통하기 어려웠던 페르소아의 생각에 나는 기꺼이 동의한다.
햇살은 나를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못하게 할 것 같았다. 리스본의 유혹적인 햇빛. 코메르시우 광장을 가로지르며 이 곳에서 방황했던 페르소아의 시대를 상상했다. 건조한 계절의 서울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페소아가 묻혀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 건물은 리스본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덤이라면 바위 절벽 뒷자리나 언덕 꼭대기, 산골짜기를 연상했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자동차와 사람들이 붐비는 시가지의 수도원은 뜻밖이었다. 페소아는 15세기 대항해 시대 희망봉을 돌아 인도항로를 발견한 이 나라의 탐험가이자 국민적 영웅 '바스코 다 가마' 와 나란히 제로니무스 수도원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커다란 꿈을 품고 살아가 그 꿈을 잃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꿈 없이 살다가 그 꿈을 잃어버린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길을 잃는다는 뜻이다. "너 자신을 알라" 는 신탁의 언어는 인간에게 참으로 어려운 과제다. 가족도 아는 사람도 하나도 갖지 않은 쾌적함, 그 기분 좋은 추방의 느낌은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희미한 불편함을 덮고도 남는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네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번, 단 한번 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 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 중에서)
나에 대한 폭력은 익숙한 곳으로부터 멀어져보는 것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고, 반드시 떠나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는 곳으로 때가 되면 떠나고 싶은 것은 내면에 뭉쳐져 있는 나 자신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가능하면 내 영혼의 울림을 쫓아가고자 했다.
나는 페소아의 일기장을 들고 리스본을 걸었다. 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작가, 그의 도시를 찾아 사람들로 가득한 텅 빈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결국 나의 내면에서 우연과 시간은 다른 단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완벽한 불안과 고독 속에서 건져진 언어는 역시 희망이었다. 페소아를 따라 지나오는 동안 경험한 잔잔한 변화다. 적어도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불안의 치유방법으로 마지막 희망을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인생사 모든 것은 결국 내 안의 문제다.
상처 받으면 비극이고 상처를 안으면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