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⑨-2
1875년(명치8년) 12월, 일본정부는 강화도 사건의 배상과 수호조약 체결 교섭을 위해, 조선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육군중장 겸 참의(參議) 黑田 淸隆(쿠로다 키요타카)가 특명전권변리대신에, 원로원 의관 官井 上馨(칸이 카미카오루)가 특명부 전권변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태정대신 三條 實美(산조 사네토미)가 黑田(쿠로다)에게 준 「훈조(訓條)」중에는 「우리나라 국기가 받은 오욕에 대한 배상은 요구하지만, 일본의 주목적은 수호조약 체결에 있기 때문에, 조선정부가 이 요구에 응한다면, 그것을 운양호 배상으로 간주하여 승낙할 것」이라는 일문이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산조로부터 쿠로다에게 내린 「내유(內諭)」에는, 「만일 조선정부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이미 양국 간 우호의 가망은 없어졌으므로, 우리 정부는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결렬의 문서를 던지고, 사절의 체면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한 조항이 있다. <별도의 처분이 있을 것>이란, 무력대결을 말한다. 일본은 이미 그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준비란 따로, 10월 말부터 군함 춘일(春日)과 제2정묘(第二丁卯)가 부산에 입항해 있었다. 조선 측의 자료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이 2척 함정의 병사들은 부산과 그 주변에 여러 차례에 걸쳐 폭력사건을 일으키고 있다.
훈도 현석운이 왜관에 항의했으나, “일본 병사는 해군성 관할이며, 외무에 관한 일을 하는 우리에게는 그들의 행동을 중지시킬 권한이 없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 일본군의 폭거는, 머지않아 개시될 일본 사절단과 조선정부와의 교섭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위협이었다고 해석된다.
일본 사절단---전권 黑田(쿠로다), 부 전권 井上(이노우에), 수행원으로 외무권대승 森山 茂(모리야마 시게루)를 비롯한 문관, 육군 소장 種田政明(타네타세이메이) 이하 무관 등 30명 일행이, 6척의 함선으로 강화도 가까이에 도착한 것은 1876년(명치9년) 1월말이었다.
이 사절단 일행 리스트의 끝장에서, 나는 뜻밖의 이름을 발견했다.
포병 대위 岡本 柳之助 (오카모토 유우노스케)
사절단을 파견한 해는, 오카모토가 「탈관하고, 생애 관직에 취임하는 것은 금한다」는 선고를 받은 竹橋事件(다케바시 사건)의 2년 전이다. 그때까지 나는, 오카모토가 조선과 결부된 것은 다케바시 사건으로 “낭인(浪人)”이 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1878년(명치11년)이후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어떻게 그는 사절단에 참여하여 조선으로 건너갔을까---
솔직히 해석하면, 우연히 그 임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민비 암살사건의 중요 인물이 되는 오카모토가, 11명밖에 안 되는 육군 장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1878년(명치9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조선 땅을 밟은 것이, 과연 단순한 우연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사절단 가운데 오카모토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陸奧 宗光(무쓰 무네미쓰)의 폐결핵환자 같이 수척하고, 안광이 예리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 후의 생애를 조선문제에 깊이 관계한 무쓰는, 일찍부터 이 나라에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오카모토를 사절단의 말석에 넣고, 공식적인 보고 이외의 조선정보를 얻자>는 무쓰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무쓰의 연보(年譜)를 보면, 이 해의 그는 원로원(元老院)간사였다. 무쓰가 오카모토의 또 한사람의 후원자였던 육군소장 津田 出(츠다 데)에게 말하면, 오카모토를 사절단에 참가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수년 후에, “낭인”이 돼 오카모토를 쓸 길을 생각한 무쓰가, 일찍이 지형 지리를 잘 아는 조선과 오카모트와를 다시 연결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이 내 속에서 싹텄다.
어떻든, 사절단에 참여한 군인의 임무는 「조선의 군사제도와 군비의 조사, 병요지지(兵要地誌)의 작성」 등이며, 오카모트는 일조수호조약 체결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일본과 조선과의 회담은 강화부(江華府)에서 2월11일부터 3일간 일정으로 열렸다. 조선 측 대표는 접견대관 신헌(申櫶), 접견부관 윤자승(尹滋承), 종사관 홍대중(洪大重)이었다.
회담 전부터 일본은 무력을 과시하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전권 일행은 7척의 배에 800명 병력을 태우고 조선으로 건너갔으나, 예비교섭 자리에서 모리야마 시게루는 “4.000명의 호위병이 동행하고 있다”고 5배나 부풀려서 말하고 있다. 또 회담 제1일째는 일본의 기원절(紀元節) 날이라면서, 각 함에서 끝없이 축포를 쏘았으며, 일본 대표는 마치 전쟁터에 온 것처럼 굉음 속에서 착석했다.
3일간에 걸쳐 양국 대표 간에, 운양호사건의 책임추궁과 일조통상조약 체결이 논의되었다. 일본 측은 “만일 응하지 않으면 본국은 바로 출병할 용의가 있다” 와 같은 말로 위협하고, 일방적으로 작성한 조약문을 제시했다. 조선 측도 극력 자국의 입장을 주장하고, 운양호사건에 있어서 일본의 잘못을 힐책하였으나, 결국 10일간의 기한이 지나 정부에 훈령을 요청하게 되었다. 조선정부내의 의견통일은 극도로 어려웠다. 김병학 등 보수파는 척화론을 주장하고, 국제지식을 가진 박규수 등은 이미 개국은 피할 수 없다고 보고 내부조건을 정비하려 주도적으로 개국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이최응이나 민규호 등 민비 일파는 확실한 의견을 가지지 못한 체 반 대원군의 입장에서 개국론에 가담하고 있었다. 한편, 대원군이나 최익현 등 많은 유생들은 강화회담에 강하게 반대하였으며, 주전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양국의 군사력 차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과의 약속된 10일간의 기한은, 순식간에 다 되 가려고 했다. 마침내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에 응하여 국교를 여는 것이 좋겠다」는 청국의 권고에 따라서, 개국을 단행하기로 결의했다.
당시의 청국은 남방 안남(安南/역자 주:지금의 베트남)지방에서 프랑스와의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북방으로부터는 러시아의 압력이 강해져 분규가 계속되는 등, 대외문제는 다사다난하였고, 그 위에 조선 문제에 개입하여 일본과 일을 꾸미는 일은 피하고자 하는 태도가 확실했다. 따라서 조선은 일본을 향해, 「외교문제는, 먼저 종주국인 청국의 의향을 확인하고」라고 대답하여 모면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특명전권변리대신 黑田 淸隆(쿠로다 키요타카)와 조선정부의 대표 접견대관 신헌(申櫶)과의 사이에, 「대 일본국 대 조선국 수호조규」가 조인된 것은 1876년(명치9년) 2월27일이었다. 이것이 정식 조약 이름이고, 약칭은 「일조수호조규」, 또 조인한 곳의 이름을 취한 일반적 약칭은 「강화조약(江華條約)」이다. 이것은 조선의 쇄국을 깨트린 최초의 조약이며, 또한 일본이 우위의 입장에서 외국과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었다.
일본에게만 유리한 「강화조약」의 내용이나, 조인에 이르기까지 위협적인 교섭태도는, 일본이 안정조약(安政條約)을 맺을 때 패리제독에게 “당한”그대로를, 조선에 대해
“되돌려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寺島(데라지마)외무경은 주일 미국공사 핀검에게, 일본이 전권단을 보내는 목적은 「페리제독의 옛날 지략을 모방한 조선의 평화적 개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핀검이 부 전권 井上 馨(이노우에 가오루)에게, 『페리의 일본원정소사』 (페리의 수행원 테일러의 저서)를 선물했다---는 기록도 있다. 국제무대의 선배가 후배에게 “이대로 하면 좋을 것이야”라고 격려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강화조약」은 12개 조로 되어 있다. 그 第1款 첫머리에 「조선은 자주의 나라로서 일본국과 평등의 권리를 보유한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함에 따라서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부정하고, 청국의 발언을 봉쇄하며, 직접교섭으로 일본의 권력을 이 나라에 펼치기 위한 포석이었다.
제2관에는,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수시 사신을 파출한다」로 되어 있다. 공사교환은 15개월 후로 정함으로써, 조약조인 후 바로 외교관계가 개설하게 되어 있지 않다. 그 후의 교섭에서 조선 측은 여러 가지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실제로 花房 義質(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공사로서 조선국왕에게 국서를 올리는 것은, 4년 후인 1880년(명치13년)이다.
제4, 제5관에는, 부산항 이외에 2개항을 일본 상인들에게 열 것, 그리고 제10관에는, 조선의 일본거류민 범죄에는 치외법권(영사재판권)을 적용할 것으로 쓰여 있다. 이 무렵 일본은 구미제국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고자 고심하고 있었는데, 그 초점이 “치외법권”이었다. 일본은 자국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치외법권”을 「강화조약」 중에서 조선에 강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뒷날 민비 암살사건에 관여한 일본인을 부당하게 비호하게 된다.
「강화조약」조인으로부터 약 반년 후에, 「수호조규부록」과 「일본국인민무역규」가 매듭 지워졌다. 이에 따라, 선세(船稅)이외에 수출입세는 당분간 부과하지 않을 것, 일본 화폐를 조선 개항지에서 통용하고, 조선동화(朝鮮銅貨)를 일본으로 반출할 수 있게 할 것, 부산에서 일본인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지역을, 부두에서 사방으로, 조선 이수로 십리 이내로 할 것, 등이 규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