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⑨-3
주일 영국공사 파크스(Parkes, Sir Harry Smith)는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에 「강화조약과 1858년의 일영조약과는 매우 비슷하다」고 쓰고, 구체적으로 이 두 조약의 공통점을 들고 있다. 「일영수호통상조약」 제6조에는 「일영 양국인민의 분규는 일체 영국영사관에서」라고, 여기에도 치외볍권 적용이 규정되어 있다.
영,미,불 등 나라들은 “평화적”으로 「강화조약」을 맺은 일본의 성공을 축하하고, 이를 돌파구로 구미제국도 조선과의 국교를 개설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국제문제의 무지에 발목이 잡혀, 일본에 강압적으로 굴복당한 것과 같은 불평등한 조약체결을 “평화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윽고 「강화조약」비판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일본과 조선과의 외교관계는 원활하게 진척되지 않았으나, 그것과는 별도로, 일본인은 누구든지 세금 없는 특권을 누리고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강화조약」 이듬해, 1877년(명치10년)에 먼저 부산이 개항하고, “시기상조”라고 미적거리는 조선 측을 설득하여 1879년(명치12년)에 원산, 이듬해 1880년에 인천이 개항했다. 조약체결 전에는 대마(對馬) 중심의 자질구레한 무역이었으나, 지금은 일본 각지의 넉넉한 자본을 가진 상인들이 진출하여 수출입 다 같이 비약적인 신장을 보였다.
부산개항 후 바로, 조선정부는 세금 없는 불리를 시정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일본 측은 듣지 않고, 부득이 조선이 취한 고식적인 수단 때문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군함을 파견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조선정부에 항의했다. 군함파견은 이때뿐 만이 아니다.
강화조약 조인 직후, 일본 전권은 조선 대표의 일본방문을 권고했다. 고종도 일본의 국정시찰에 관심을 가져, 일본전권단의 내방에 대한 답례라는 명분으로 수신사를 파견했다. 일행의 일본 도착은 1876년 5월(양력)이었다. 그들의 일본체재는 1개월이 체 되지 않아, 그간에 아카사카(赤坂) 별궁에서 메이지천황(明治天皇)을 회견하는 등 공식행사가 많았으며, 귀국 후 보고서는 왕 부처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1880년 7월, 김홍집(金弘集/金宏集이라고도 쓴다)을 단장으로 하는 제2회 시찰단이 일본으로 갔다. 체일 중 일행은 도쿄(東京)의 청국 공사관을 방문하고, 하여장(何如璋) 공사라든가 참찬관 황준헌(黃遵憲) 등 관원들과 열심히 외교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시찰단이 귀국할 때, 황준헌은 그가 쓴 『조선책략』을 주었고, 김홍집은 이것을 왕에게 헌상하였으며, 또 일반에게도 공개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 청국인의 입장에서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이에 조선은 어떻게 대처해야 될 것인가를 말한 것으로, 조선과 청국과 일본은 단결하여, 강적 제정 러시아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주지(主旨)다. 더욱이 미국에 대하여 <나라는 강성하며 항상 약소국을 돕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으며, 공의(公儀)의 유지를 생각하고 있다. 청국은 미국과의 조약체결 이래, 일찍이 불상사가 일어난 선례가 없다.> 등으로 “신사의 나라”라는 것을 말하고, 조선도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그 지지를 의뢰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고종과 민비는 시찰단의 보고로 일본의 근대화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또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아 한층 더 문호개방에 기울어졌다.
그러나 『조선책략』은, 전국의 유생들 사이에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발단은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로, 「영남」이란 경상남북도를 가리키며, 「만인소」란, 다수 유생들의 상소를 말한다. 강화조약 체결 때부터, 이에 반대하고, 위정척사론을 주창해온 그들은, 『조선책략』을, 「민족을 멸망시키고, 국란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평했다. 유생들은, 조선이 청, 일, 미와 연합하여 러시아에 맞서는 것의 불합리성을 말하고, 또 서양문명의 이입에 반대했다. 그들은 시찰단에 의해서 일본사회의 “문명개화”가 널리 전해짐에 따라 한층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졌다.
유생들의 상소가 이어지고, 사회불안이 가중되었던 1881년(명치14년) 8월, 다시 큰 사건이 일어나 민심을 동요케 했다. 왕위를 노린 음모가 발각된 것이다. 위정척사론이 비등한 사회정세를 배경으로 대원군이 기획했던 쿠데타였으나, 국왕의 아버지인 그의 이름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안기영(安驥永)의 옥”이라 불리는 그대로, 주범으로 체포되고, 부하들과 함께 모반대역죄로 처형된 것은 안기영이었다. 그는 대원군의 첩의 몸에서 난 아들 이재선(李載先)의 심복이었다. 한때는 “날조된 사건”이라고도 했으나, 취조결과, 그들은 군자금을 모아 봉기하였으며, 민비를 포함하여 몇 사람을 죽이고, 대원군을 부활시켜, 고종을 폐위하고 이재선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등으로 계획한 것이 판명되었다. 체포(일설에는 자수)된 이재선은, 왕의 배다른 형이기 때문에 한때는 유배로 결정되었으나, 강경하게 반대하는 대신들에 의해 마침내 “사약(賜藥)의 형벌”에 처했다.
이 음모는 밀고로 발각되었다. 누가 밀고한 것일까---이에는 3가지 설이 있으며, 먼저 광주(廣州) 장교인 이풍래(李豊來), 다음에 대원군의 장자로 민비 파인 이재면(李載冕), 게다가 대원군 자신이 쿠데타의 실패를 예측한 시점에서 계획을 폭로하고, 이재선에게 “자수하고 자결하라”고 명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밀고한 것이 누구든지 간에, 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자기 아들을 죽이고 말았다. 계획이 실패하면, 임금의 형이라고 하나 이재선의 목숨도 위험하다는 것을 대원군은 처음부터 알았겠지만, 그래도 그는 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 나라의 운명을 내 손으로 좌우하는 만족감, 도취감...... “권력”이라는 미주(美酒)를 한번 맛본 자는, 한평생 그 마력에서 해방되기 어려운 것 같다. 대원군 같은 정치적 인간은 다시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언제나 생각하고, 이윽고 그것이 사명감이 되어 자기 자신을 지배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대원군에게는 「민비를 죽이겠다」는 또 하나의 욕망이 있었다. 그 계획까지가 들어나 버리고 말아, 이미 대원군과 민비와는 구적(仇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재선의 모반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대원군이 사는 운현궁에 엄중한 감시를 하게 되었고, 그는 죄수로 다루는 굴욕감을 견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비는 이 사건을 이용해서, 위정척사론을 주창하는 유생들을 탄압하고, 유리한 입장을 쌓았다. 왕 부처는 점점 개화파로 기울어져 갔다.
모반사건의 여파도 일단 수습된 1882년(명치15년) 1월, 세는 나이로 9살이 된 왕세자 척(坧)의 관례식(冠禮式)이 있었다. 이어서, 유력한 고위관직에 있는 민태호(閔台鎬)의 11살 된 딸이, 훗날 왕비가 되는 세자빈(世子嬪)으로 뽑혀, 2월에 책빈(冊嬪)의 예식을 거행했다. 민씨세도정치의 영속화를 꾀하는 민비의 포석이다.
책빈예식에 이어서 왕궁에서는 문무백관의 향연이 며칠간에 걸쳐서 이어졌고, 그간에 궁중축의의 다과에 따라서 대소 관리의 취임이 정해지고, 회뢰(賄賂/뇌물)의 대죄가 감면되었다. 전국에서 들어오는 축하 물품들은 구중궁궐에 산처럼 쌓이고, 일본 정부에서도 경축 국서와 함께 산포(山砲) 2문과 작은 증기선 1척을 선물로 보냈다.
그 후에도 왕 부처는 매일 밤마다 연회를 열었으며, 밤을 새워 환락을 즐겼다. 모반사건으로 대원군을 유폐와 같은 지경으로 몰아넣고, 유생들의 탄압에도 성공한 민비는 득의가 양양했다. 가슴 가득히 감추지 못하는 승리의 기쁨은, 왕을 종용하여 밤마다의 연회가 되고, 자기의 강한 힘과 운에 취해서, 그녀의 교만은 더해질 뿐이었다.
궁문은 닫히지 않았고, 왕궁은 불야성이 되었다. 많은 무당들과 연예인이 불려왔고, 노래와 춤에 뛰어난 가신들은 우대받아 왕 부처의 지근에서 섬기고, 점 1번 치는데, 노래 한곡에 막대한 돈이나 값비싼 물건들이 주어졌다. 고종과 민비는 날이 셀 무렵 침소에 들고, 오후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무라든지 알현은 저녁 무렵 가까울 때 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귀족이나 고관들의 생활도 이 시간대에 맞추어서 영위되었다.
이해는 한발에 따른 흉작으로 농촌은 피폐하였고, 또 콜레라의 유행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배가 고파 고통 받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치고, 각지에 도적이 횡행했다. 그러나 국고는 탕진되고, 공미(貢米)창고는 텅텅 비어서, 정부의 구제사업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를 배경으로 민씨 일족의 영화는 한층 사람들의 눈을 끌었고, 원망과 한탄의 소리를 모았으나, 그 과녁은 세도정치의 중심에 자리잡고, 불야성으로 변한 왕궁에서 환락을 즐기는 민비를 조이고 있었다.
사회불안이 높아지는 가운데, 조선정부는 1882년 양력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규를 체결했다. 일본과의 수호조규체결로부터 6년 후의 일이다. 나아가 조선정부는 영국, 독일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구미에 대한 문호개방에 따라서, 국내의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심각하게 되고, 또한 이재선의 모반사건 후유증인 정계의 암투도 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