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싼 종이에 향내 나고 생선 싼 종이에 비린내 나는 법>이다 내가 어째 까마귀 싸우는 골을 찾아가 몸에 비린 내 나도록 청강(淸江)에 됴히 씻은 몸을 더럽히겠는가? 네티즌 들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하에서 “이승만 전직”이라 한다)을 거부, 비난 하는 이유는 주로 “독재”, “독립 자금 횡령”과 “친일파 경력” 인 것으로 주장 하고 있다. “횡령”이란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편취한 것”을 말 한다. 네티즌 들이 “이승만 전직”을 근거 없이 비난 만 하지 말고, 과연 “이승만 전직”이 보관한 재물은 타인이 되는 누구의 재물 이었는데 그것을 언제 횡령한 것인지, 그 누구의 고유 명칭을 석명 해 주시고, 그 횡령 금액과 장소, 횡령 방법 등, 구체적 근거를 명시 하여, 합리적, 사실 증명을 해 주시기 바란다. 아니면 독립 운동가를 매국노 인양 아무 근거 없이 늑대 처럼 물어 뜯기 만 한다는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승만 전직”은 1910년 프리스턴 대학에서 조선인 최초의 박사학위(국제정치학)를 취득 하였고 당시는 미국인 이라 하더라도 그런 학위는 드믈었다, 그러한 사람을 독립 자금 횡령 이나 하는 파렴치한이라고 폄하 하는 것은 다만 지어낸 역사 왜곡으로 이해 될 수 밖에 없다, “이승만 전직”이 친일파” 란 주장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반박, 부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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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전직”이 친일파 인지를 알기 위해., 그의 행적을 처음부터 일괄 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이승만 전직”은 1875년 3월 태어나 어린 유년 시절 부터 “낙동 서당”, “도동 서당”에서 공부 하였고 1895년 배재 학당에 입학 하였다.. 2, “이승만 전직”은1896년 11월 30일 국민을 계몽 하고, 일본 등 외세 배척을 주장 하는 “협성회”를 조직하고, 이후 서기, 회장 등에 선출 되어 활동하면서.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 회보”를 창간하여 주필을 맡았다. 3, “이승만 전직”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4, “이승만 전직”은 1897년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 5, “이승만 전직”은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대한 민국 최초로 영한사전, 독립정신 집필 6, 이승만 전직”은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7, “이승만 전직”은 1904년 말 도미(渡美) 하여 1905년 부터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 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이라는 논문으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ㅡ조선 최초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위 대학 입학 후 5년 만에 학사, 석사. 박사 학위 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학 총장에게 독립 운동을 위해 학위 수여를 수학 기간과 상관 없이 “수학 능력-졸업 논문”으로 판단 해 달라고 진정-설득 하는 등으로 노력 하였기 때문이다. 8, 이승만 전직”은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에는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9,.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 받았다. 10,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11,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12, 1919. 5월에 와싱톤에 집정관 총재부를 설치 6. 14에 미, 영, 불, 이 등 국가와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 정부 탄생통보 하고, 1919. 6. 18 일본 천황에게 국서를 보내 한국에 적법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니 일본군대와 관리 및 일본인들의 한국에서 철수를 요구 13,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14, 1919년.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15,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처져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공산주의자), 경호국장: 김구 선생 으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6,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 17,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 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18, “이승만 전직”은 1933. 제네바 국제회의에 참석, 호텔식당에서 프란 체스카 모녀를 처음으로 만났다,1934.10.8 프란 체스카 여사와 결혼 19, 1941. 5. Japan Inside Out (일본, 그 가면의 실체) 영문책자를 출간 하고 “일본이 가까운 장래에 미국 침공 할 것”을 예언 하였으나, 동양의 정신 이상자로 혹평 당하고, 책이 안 팔렸다, 그러나 동년 12월 8일 진주만이 폭격 당하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 1942. 6 미국의 소리방송 (VOA) 통해 2,300만 동포들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고 대일항쟁 촉구 21, 1945.10.16 맥아더장군이 제공한 특별 군용기 편으로 여의도 군용 비행장에 도착, 수일 간 조선호텔을 거쳐, 돈암장 에서 1년, 마포장 에서 1년 기거 22, 1945. 12~ 1946년. 경 이승만박사와 김구 선생의 주도로 모스크바 3상회의 에서 의결 된 신탁통치 저지 성공 23, 1946.12.2 - 1947.4월까지 다시 도미하여 탁월한 외교력으로 남북동시 자유선거 UN결의를 이끌어 내셨음 24, 1948.5.10 최초의 자유선거를 하고. 1948. 5. 31 제헌 국회 개원. “이승만 전직”은 초대 국회의장 당선 25. 1948. 7. 24 대통령 취임, 1948. 8. 15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26, 1948. 12. 12. UN총회가 대한민국 정부를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27, 1952. 1. 18 이승만 평화선 선포: 200 해리 ※ 일 어선 350척 어부 4,000여명 나포 28, 1953. 6. 18 새벽 2만7천 여명 정도의 반공포로 석방 29, 1954. 11. 18 한미방위조약 발효 30, 1960. 4. 19 혁명 후 하야. 동년 5월 29일 하와이 망명 (내용이 너무 많아 모두 열거 할 수 없으므로 일부만 적시(摘示) 하였음)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성경연구,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 글쓴이 : 알거지
이승만 초대 내각과 김일성이 등용한 친일인사들 실태는 다음과 같다. <이승만 초대 내각 중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 이승만 -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이시영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신익희 -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법원장 김병로 - 항일변호사 국무총리(국방장관 겸임) 이범석 - 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장택상 -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 내무장관 윤치영 - 일제시대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김도연 -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 법부장관 이 인 - 항일변호사 농림장관 조봉암 - 공산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전향 사회장관 전진한 - 일제시대에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 체신장관 윤석구 - 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장관 이청천 - 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장관 이윤영 - 북한에서 항일 기독교 목사로 일했고 조만식 선생의 제자 국회부의장 김동원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일성 정권에 등용된 북한의 친일 인사들>
김일성 - 소련군 장교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 헌병 보조원)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조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최승희 -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김달삼 - 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 소위) 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 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하 검찰총장) 정준택 -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 -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완전 친일파는 김일성이다.
[도월스님 칼럼] 친일청산이냐! 친북청산이냐!
- 과거형의 친일보다 현재 진행형의 종북좌파 척결이 우선이다- - 종북좌파 활동의 정당성을 얻고자 친일청산 주장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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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사회 가장 핵심적인 이념 논쟁의 중심 화두가 바로 “친일청산이냐 아니면 친북청산이냐” 하는 것이다.
과거부터 이런 논쟁이 있었으나 최근 들어 국정화 교과서 출판에 관련해서 야당과 재야 그리고 친북좌파들이 일제히 국정화 교과서가 친일을 두둔할 것이라며 나오지도 않은 책을 두고 과거형인 친일청산 문제로 우리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이들은 현재 진행형과 과거형을 구분 못하고 있어 안타까움이 앞선다. 우리는 과거형보다는 현재 진행형이 더 우리에게 실질적인 영향을 준다는 데서 깊이 생각해야 한다.
과거 조상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특히 지금처럼 어처구니없는 명분싸움과 당파싸움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을 대응하지 못하고 방치하다 일본에 강제 합병이 되어 민족의 자존을 빼앗기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유린당하면서 나라 잃은 뼈아픈 과거를 겪었다.
미국이 일본에 승전함으로써 우리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되었지만 북한의 기습침략으로 인하여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겪은 후 많은 시련 속에서 지금의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만들어 세계인이 부러워 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지만 아직도 북한을 찬양하는 세력들이 우리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혼란으로 내몰고 있다.
과거 우리는 일제치하에서 일본의 통제를 받고, 교육을 받고, 경제활동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와서 따진다면 당시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물론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에 와서 친일청산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일부는 친일 활동을 하면서 민족의 용서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중에는 해방 후 새로운 자유 대한민국에서 경제발전에 기여를 하거나 사회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지금에 와서 과거 친일문제를 거론하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민족을 다시 두 동강을 내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친일 했던 사람을 용서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 문제로 다시 민족이 분열되고 갈등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반드시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는 이 땅을 빼앗기고 민족자존을 빼앗기는 아픔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과거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 친일 활동을 했지만 해방 후 우리사회발전을 위해서 노력하고 헌신했다면 우린 이들을 과거를 덮고 보듬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우리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종북세력과 급진적 좌파세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민들 대다수는 과거 친일 문제보다 지금 북한의 남침야욕과 남한이 이념대립으로 분열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은 남한을 적화 통일시키기 위해서 도발을 자행하고 군사력을 증대시키면서 한반도를 전쟁의 위기상황으로 내몰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땅에서 자본주의의 온갖 혜택을 받고 살면서 북을 찬양하는 종북좌파와 좌익사상에 치우친 골수좌파들은 자신들의 정부수립을 위해서 과거형인 친일청산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반정부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민주화운동으로 미화시키고 있어 문제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금에 와서 친일청산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들의 종북활동과 반정부 활동을 은폐하기 위해서 유독 국민감정을 쉽게 자극할 수가 있는 친일청산 문제를 거론하여 마치 자신들이 민족의 자존을 지키는 민족투사 또는 민주화 투사로 위장하여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형의 친일문제보다 지금의 종북좌파 척결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형인 종북좌파의 반정부활동으로 인하여 우리사회는 국론이 분열하고 사회가 갈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진보좌파들이 친일청산에 앞서 과거 남로당과 빨치산의 만행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난 공산좌파들의 활동에 대해서 냉철한 비판을 먼저 해야 지금 그대들이 주장하는 친일청산도 명분을 얻을 것이다.
지금도 북한은 과거 친일청산에 국가적인 사활을 걸고 많은 사람들을 숙청 했고 지금도 김일성의 북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과거 김일성의 항일독립운동을 왜곡하여 북조선 건국의 기반으로 삼듯이 우리사회의 종북좌파들도 친일 청산을 핑계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자신들이 신봉하는 정부를 수립해야 남한의 민주주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도 시위 현장 곳곳에 어린 학생들을 동원하여 국정화교과서가 친일을 미화시키기 위해서 추진하는 것이라는 문구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교육계로 침투한 종북좌파들의 청산 없이는 우리사회가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며 앞으로 남남갈등으로 인하여 내전의 양상으로 까지 갈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할 정도이다.
그대들의 희망대로 우리사회가 공산주의 체제로 간다 해도 우선 그대들 먼저 그 체계로는 살 수 없을 것이다. 80년대 운동권적인 사고방식의 투쟁보다 하루빨리 전향하여 국론분열을 수습하고 미래지향적인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때 우리사회가 진정으로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국민들이 정신 바짝 차려서 국가의 미래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라도 사회부적응자들인 종북좌파와 좌경사상에 빠진 골수좌파들을 반드시 척결해야만 진정으로 자유 민주 대한민국을 만들어 갈 수가 있을 것이다.(끝) ----- ---- ----- ------ ----- 해방 후 남북에는 초기에는 행정에 밝은 인재가 드물었다. 김일성이는 친일부역자들을 기용하는 것이 선배 공산주의자를 모시는 것보다 나았다. 그래서 그는 친일부역자들을 요직에 골고루 않혀 정적을 제거해 나갔다. 이승만 전직은 개국 후 시급한 것이 빨갱이들의 준도을 막는 일이 시급하였다. 이자들이 곳곳에서 소란을 피우니 공산주의자들을 솎아내는 일이 시급하였다. 실무에 밝은 경찰에 친일부역자였지만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민특위를 해체한 것도 친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빨갱이 잡아내는데 방해가 되어서였다. 친일파를 잡아낸다는 일은 그 당시 거의 모든 다 부역자로 몰릴 형편이었다. 나라 건국되자 무수한 백성이 희생될 형편이었다. 이것이 반민특의 해체한 이유다. 무식한 자들의 무식한 주장이 일리있게 느껴지는 것은 종북친북자들의 이간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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