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閔妃暗殺>⑩-1
反 閔妃, 反日의 쿠데타
이 해, 1882년 7월 23일(양력)의 아침을 맞이한 무위영(武衛營), 장어영(壯禦營)의 군병들은 평소와는 달리 밝은 표정으로, 서로 나누는 인사말 소리도 신바람이 났다. 현물로 주는 쌀을 13개월이나 배급받지 못했는데, 오늘은 1개월분을 준다고 한다. 기껏 한 달 치라는 불만은 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마누라 입도 일시 가라앉을 수 있겠지----.
그러나 병사들은 모두 <이 적은 쌀로 우리들이 납득한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지>라는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일본과 국교를 연 이래, 변변한 일이 없다. 구식군대인 우리들은 결배(欠配/배급을 주지않음)가 계속되는데, 일본계의 별기군(別技軍)만 잘난 체하고. 이도 저도 모두 민비 일족 때문이다. 우리들을 간보는 것도 적당히 해라!>
조선에 처음으로 신식 군대가 설치된 것은 이해 초였다. 개국정책을 취하는 왕과 민비 일족은, 1881년 말에 일본에서 군사고문을 초청하고, 명문 양반가의 우수한 자제 100명을 뽑아, 세검정(洗劍亭)의 외평창(外平倉)에서 교련을 받게 했다. 이것이 구군 병사들이 “눈엣가시”로 보는 별기군(別技軍)이다.
교련소장은 민비의 친정 조카뻘인 민영익(閔泳翊), 교관에는 일본에서 초청된 堀本 禮造(호리모토 레이조) 소위가 맡고, 그 조교로 우범선(禹範善)이 선발되었다. 이것이 우범선과 일본과의 비극적인 관계의 시작으로, 훗날 그는 민비 암살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급여도 각별히 좋은 별기군이 가지런한 복장으로 일본식 교련을 받는 모습은 항상 구군 병사들을 자극했다. 자기들은 어째서 이런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그들의 울분은 날마다 격화되고 있었다.
구군 병사들은 발자국마다 마른 흙먼지를 피워 올리면서, 녹봉미를 받기 위해 도봉소(都俸所) 군창으로 갔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이 벌써 몇 십일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발에 의한 농촌의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서울의 길가 잡초도 색을 잃고 땅에 엎드렸으며, 대중은 마실 물도 없어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었다. 내일은 대궐에서 기우제가 열린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비가 내려주면 좋으련만..... 하는 병사들은 기우제에 기대를 걸고, 갈증을 참아가면서 걸었다.
“이것 봐, 이게 1개월 분 인가!”
도봉소 창고 앞에서, 앞줄의 병사들 사이에서 격렬한 노성이 있었다. 저울에 달아볼 것도 없이, 주어진 쌀의 분량이 너무나도 적은 것이다.
“내 쌀에는 돌이 들어있네!”
“반쯤은 모래잖아!”
“이런 썩은 쌀을 먹을 수 있어!”
쌀 수령을 거부하는 병사들과 창고 담당자 사이에, 금세 난투가 일어났다. 쌀의 분량 부족이나, 이물의 혼입은, 병조판서 겸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인 민겸호를 비롯한 말단 창고담당 까지가 중간횡령을 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병사들의 분노가, 일거에 폭발했다.
소란을 단숨에 탄압하려고 하는 민겸호의 조치는 역효과를 냈다. 체포된 포수들을 죽일 것으로 아는 병사들은 격앙하여, “동료들을 구하자!”고 입을 모아 부르짖으면서 안국동에 있는 민겸호의 저택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 인원수가 급격히 팽창한 이면에는 체포된 병사들 가족의, 필사적인 호소가 있었다.
민겸호는 저택에 없었지만, 그의 부하와 병사들과의 승강이는 여기서도 홀연 난투가 되었다. 저택 안으로 몰려든 병사들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구, 세간을 두드려 부수고 사나운 기세로, 개가를 올리고 철수했다.
병사들은 이미 “앞으로는 기죽지 않을 형세”가 되어 있었다. 중신의 저택을 습격하여 난동을 일으킨 그들은, 벌써 죽을죄를 면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할 수밖에 없지만, 지금 가슴이 두근거리는 민씨 일족을 상대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가 먼저 말했다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운현궁으로 갔다. 병사들이 지금의 입장을 호소하고, 지시를 우러러 바랄 수 있는 상대는 대원군 밖에 없었다.
평소의 분노를 폭발시킨 군병들에, 이태원, 왕십리의 빈민층도 합류하여, 결국에는 국운을 좌우할 정도의 대 사건으로 발전하는 이 소란을 “임오군란(壬午軍亂)”이라고 한다. 민겸호의 저택을 습격한 병사들이 운현궁으로 서둘러 달려감으로써 처음으로 임오군란과 대원군이 연결되었으나, 평소부터 대원군의 복심들이 군병들의 불평불만을 부채질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원군은 권좌에 복귀할 것을 체념하지 않고, 민겸호를 비롯하여 민씨 일족에게 원한을 품은 병사들과 손을 잡을 날을 남모르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대원군은 이때 만 60세였다.
병사들이 달려온 운현궁 주변에는, 이미 빈민들의 무리가 대원군이 나서주기를 기대하고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전년 이재선의 모반사건을 잘 알고 있다. 아침부터 군병들의 소동을 “세상 바로잡기”의 호기로 받아들인 그들은, 대원군이 지휘를 하고, 서민들이 원한을 품은 민씨 일족을 몰락시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