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071102b창세기24장
20071102b 울산강의-창세기 24장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보통 죽음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모든 것이 별 볼 일없는 게 되는데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도리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중요한 사건을 죽음으로 봤다 이 말입니다. 비록 죽더라도 그 죽음에 담겨있는 약속의 힘은 여전히 이 땅에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죽음과 무관하게 인간이 죽어 없어져도 하나님의 약속은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통해서 더욱더 발현되는 그런 개념입니다.
거기 비해서 이방민족들은 우리가 있는 보통 무덤과 같이 동급으로 생각해서 좋은 것 땅 해서 무덤하세요. 아, 그런 식으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당신 죽음과 다릅니다. 독특한 죽음입니다. 죽음이 일을 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막벨라 땅을 사서 사라를 거기다 묻고, 나중에 보면 아브라함 본인도 그 속에 묻힙니다. 물론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요셉은 그거지만 야곱까지 그렇게 하고, 나중에 그 땅이 확대 되서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조상이 약속을 품고 죽었던 조상이 약속대로 값을 주고 산 이 무덤 있는 이 곳 전체가 약속대로 하나님의 땅이 되었구나. 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로 나중에 확산이 되는 겁니다.
24장에 넘어가게 되면, 무덤이라 하는 것이 사람은 죽어도 약속은 죽지 않는다. 그런 뜻이죠. 24장에 넘어오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배필을 생각해서 4절에 보면,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이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걸 그림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이게 지중해고 이게 현재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터어키, 이태리 이런데. 이게 지금 이라크 아닙니까? 이라크 전쟁.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가 여기 있는데. 여기 이라크 근처 여기에 갈대아 우르 본래 아브라함 고향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렇게 와서 현재 약속의 땅 여기까지 들어왔거든요. 지중해 여기 있고, 아프리카 이집트 여기 있는데.
다시 자기 종을 본토 아비 집에 보냅니다. 보내는데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 지시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보면 9절에 보면, “종이 이에 주인 아브라함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환도뼈에 손을 넣는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환도뼈라 하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입니다. 이것은 바로 신성한 핏줄. 하나님이 아브라함 핏줄을 하나님께서 선택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했다. 그러니까 약속이 살아있고 약속이 작용하는 그러한 핏줄이기에 그 핏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는 뜻에서 하는 겁니다.
종이나 아브라함이나 전부다 어디다 몰두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만 되게 하옵소서. 쉽게 말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내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말입니다. 나의 핏줄은 포기하고 주님께서 약속의 핏줄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런 식으로 기도하는 거죠.
기도란 것은 간단해요. 하늘의 뜻이 기도하는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럼 그런 기도하려면 누구 뜻이 날아가 버려야 돼요? 내 뜻은 밟고 지나가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절대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러면 목사님, 그럴 것 같으면 기도 안 해도 되는 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도를 안 하게 되면 마지못해 주어진 현실을 마지못해 아이고, 주의 뜻이니 어쩌나? 할 수 없이 견뎌야지. 이래 된다니까. 마지못해. 감사가 안 되지요. 오늘 하루도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진정으로 주의 뜻이라면, 하루 온 종일 다 감사, 감사가 되지요. 왜? 내 뜻이 아니기 때문에. 주의 뜻인데.
아이 참 뭐, 주의 뜻대로 하려면 하세요. 내가 뭐 하나님도 아니고, 우짜겠노? 뭐, 하나님이 하겠다는데 싫어도 따라가 줘야지. 축 쳐져서 삐져있는 거예요. 감사와 고마움 이런 게 없어지고 마지못해 예, 믿습니다. 주의 은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니 뭐, 뭔가 싫나? 싫은 건 아니고 하나님이, 하나님이 알아서 해버리는데 제가 반발해도 안 되잖아. 어떻겠습니까? 그럼 내 하는 게 못마땅하다 이 말이지? 못마땅해도 어쩌겠습니까? 하나님인데.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지요.
그런데 아침에 주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하면 저녁에도 오늘 하루도 주의 뜻대로 이렇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것은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우리 사이가 남남이 아니고, 한 가족이니까 아버지 하는 일에 동조를 하고 자발적으로 참여를 하는 것이 좋지, 질질 마지못해 끌려가는 식은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제 강의 하고 난 뒤에 그럼 목사님, 기도할 게 없네요. 맨 날 끝에 그런 소리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관심사가 자아한테 관심 있어요. 내 기쁜 거, 내가 기뻐야 하나님답다. 이러면 이건 내가 만든 하나님이에요. 내가 만든 하나님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 뜻도 내가 만들어요. 내가 하나님 뜻을 내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놓고 그대로 해주면 하나님이 하신 거고, 안 하면 나쁜 하나님 돼버려요.
제가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 뭐라고 했습니까? 맨 날 돈 줘, 돈 줘.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냉정하게 이야기했어요. 내게 돈 없다. 나는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 네게 줄게. 니 달라는 것 내 안 준다. 금과 은은 내 없다. 맨 날 거지가 자기는 앉은뱅이 밖에 없으니까 앉은뱅이를 부각시켜서 그걸 장점으로 삼아서 돈 뜯을 밑천으로 삼는 거예요. 앉은뱅이잖아. 돈 줘. 이 말이에요. 베드로는 돈 없다. 돈 없으면 왜 오노? 네게는 없고, 내게 있는 것 줄게. 그게 뭔데? 나사렛 이름으로 걸어라.
예수 이름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이름이 자기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도 나처럼 주님한테 소유돼봐라. 제발 니가 돈 소유하려 하지 말고 누구로부터 소유함 당해 봐라. 니도. 주님께서 너를 사용하도록 해봐라. 이 말이죠. 그리고 그걸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도록. 마지못해가 아니라.
아브라함은 신성한 핏줄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뜻에서 종하고 기도해서 나뿐만 아니고, 내 자식도 하나님 주신 약속의 핏줄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고향처녀를 원한다는 말은 우리 집안은 차이 나는 집안, 보통 집안이 아니고, 약속이 작용하는 집안이라는 뜻입니다. 이걸 우리는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남겨야 돼요.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파하는 것이 우리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식들에게 이야기할 겁니다. 우리 집안은 보통 집안이 아니다. 주의 약속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집안이다. 그렇게 해야 되죠.
그런데 이런 문제 가지고 그러면 목사님, 신자 아니면 남잔데 아들이 교회 나가는데 예수 안 믿는 여자하고 그러면 결혼하면 안 됩니까? 하는데 교회 다니는 것이 천당 가는 것입니까? 종교를 하나 갖는 것이지, 그게 천당, 지옥하고 관계없잖아요.
어떤 남자를 어떤 여자를 사랑할 때에 종교를 뛰어넘어서 왠지 저 여자는 사랑하고 싶어라. 왠지. 이거는 인력이 아니고, 진짜 사랑이 오면 주체를 못해요. 사람이. 주체를 자기가 못해요. 상사병은 진짜 큰 병입니다. 어떻게? 밥 맛 떨어지지요. 잠 못 자지요. 잠자도 그녀 얼굴 보이지요. 손에 일 안 잡히지요. 그녀를 만나기 전에 100미터 전에 가면 가슴이 두근거리지요.
이래 돼버리면 종교고 신학이고 나발이고 그 모든 것도 국경과 나이, 열두 살 차이 난다? 그것도 문제 아니에요. [아현동 마님] 괜히 싫어서 그렇지 열두 살 차이 뭔데. 사랑하는데. 지났구나. 아현동 마님 할 시간. 아무것도 아니라. 전부다. 사랑한다는데.
이것은 인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 뜻은 뭐냐? 신자든 불신자든 사랑하는 여자가 불신자라 해서 죽을 때까지 불신자로 남아도 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주의 뜻일 수가 있어요. 뭐냐 하면, 불신자 한번 당해봐라 이 말이죠. 당해보는 가운데서 신앙에 하나님 주신 선물이 얼마나 고귀한 걸 알고, 깨닫는 방법이 있고.
또는 성경에 나오는 대로 안 믿는 여자와 믿는 남자 해서 안 믿는 여자까지 용서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도 있고. 그 결과는 하나님이 알지 우린 몰라요. 어쨌든 결혼할 때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해야 된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교회 다니니까 유리하겠지. 그런 통박 굴리는 것은 안 돼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겁니다.
맡길 때 12절에 보니까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순적히. 아주 일이 잘 풀려서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찍어놓은 그 배우자 원합니다. 라고 하고 있는데 마침 어떤 아가씨들이 물 길러 나왔지요. 그래서 종이 가서 하죠. 내 물 좀 마시게 해 달라. 물주니까 이번엔 나귀에게 물 줘라. 물주거든요.
그러니까 슬슬 그때부터 작업에 들어갑니다. 실은 내가 이까지 온 게 우리 주인의 아들에게 배우자 했는데 그 사람은 자기 친척만 원하더라. 내가 바로 아까 이야기한 누구 딸이냐 하면, 브두엘. 삼촌의 딸을 만나죠. 이삭의 삼촌의 딸을 만나죠. 오빠가 누구냐 하면, 라반이죠. 우연히 그렇게 만났어요. 만나서 집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오게 되서 그때 내력을 죽 이야기하죠. 이야기하니까 한 십일만 있다 가라하니까 성질이 급해서 너무 좋아서 지금 당장 가겠다 해서 보따리 싸서 보냅니다. 집에 갑니다. 60절에 보세요.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 될지어다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자,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신성한 핏줄이냐, 아니냐는 뭐가 주도권 쥐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주도권을 쥡니다. 우리는 그 약속대로 배치될 뿐입니다. 자리 배치하지요. 우리는 그 약속이 배치되는데 그 배치된 그걸 통해서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이런 약속의 내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윤곽이 드러나는 하나의 도구로써 활용되죠.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의 거대한 우산이라면 아브라함, 리브가, 이삭 이거는 뭐냐? 우산대에 해당되는 겁니다. 우산 구조물에 해당되죠. 전체가 하나의 약속이라면. 우리는 하나하나가 이루어서 전체 약속을 다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누가 아느냐? 라반 오빠가 알고 내 동생아, 니가 가는 것은 그냥 시집가고 애 낳고 그냥 보통 가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해야 될 그러한 막중한 의무감을 가진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이 되는 신성한 핏줄에 니가 합류하는 것이다. 이게.
참, 이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결혼이라는 그 방식을 통해서라도 그 약속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한다. 결혼이라는 것은 약속을 드러내는. 결혼이라는 것은 누구 위주의 결혼이 아니다? 결혼하는 신랑, 신부 위주가 아니에요. 결혼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구현하는 하나의 배치가 되고, 방편이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선 사용합니다. 주의 뜻대로 하는 약속이 결혼이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불신 여자하고 결혼하더라도 그 여자는 알 수가 없지. 그 여자는 남자 하나 만나서 행복하게 애 낳고 행복하게 살려고 하겠지만, 남편이란 사람은 내가 당신과 결혼한 것은 이거는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함이다.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이거는 하나의 운명이다. 그럼 그 여자가 당신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결혼 못하겠다. 하면 파혼도 운명이지 뭐. 할 수 없지 뭐. 그러나 파혼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확실하다. 이런 식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고, 그런 것도 되고.
하여튼 결과는 어쨌든 간에 성도는 결혼을 하던 안 하던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루신다는 겁니다. 구슬 다루듯이 하나님이 알아서 다 다뤄요. 그것 때문에 결혼 했니, 안 했니 인생 낙오자다, 실패다 그렇게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리브가가 평소에 기도한 게 아니에요. 주여, 주의 뜻대로 좋은 남편 만나게 해주소서. 남편감은 아브라함 자손, 아들 되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한 적 없어요. 그냥 물 줬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할 것은, 물을 안 줬으면 안 됐잖아. 해서 자꾸 물주는 걸 좋아하는데. 여기 물 준 사람이 여자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뒤에 나오면서 다음에 결혼할 때 서서히 인간적인 면이 가미가 돼요. 뭐냐 하면, 야곱이 라헬을 좋아할 때는 약속이 뭐고, 얼굴 예쁜 것 보고 했습니다. 근데 더불어 끼워 준 게 뭐냐? 못 생긴 언니가 더불어 끼워 들어가죠. 그래서 라반이 하는 말이 우리 동네 풍습에 의해서는 정품에다 유사품 하나 끼워 주는 게 우리 동네 결혼법이다 해서 정품을 위해서 유사품까지 끼어드는 거예요.
그래서 대판으로 싸우고 둘이 자매간에 한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싸우고 이렇게 하지요. 남자가 두 여자 거느려 보면 아마 골치 아플 거예요. 윗방, 아랫방 있으면 저쪽에서 안 오나? 하면 가야 되고. 온나? 하면 가야 되고. 집안 꼴이 말이 아닐 겁니다. 다 능력 돼야 되는 거지, 능력 없는 사람은 되지도 않은 문제.
자,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열게 할지어다. 라는 이런 이야기를 왜 했느냐? 네 씨로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라는 말을 왜 했느냐? 그거는 모르지요. 왜냐하면 시집 간 여동생한테 그저 시어머니 잘 모시고, 남편 잘 모셔서 사랑받은 며느리 되어라. 이 정도 해야 덕담이고, 그게 축복이고, 시부모 잘 섬기고, 아 순풍순풍 잘 낳아라. 그러면 될 텐데 이건 여전사도 아니고 말이죠. 천만인의 싸움하러 갑니까? 대조영도 아니고.
너의 원수의 성문을 열지어다. 열어서 뭐 하는데? 열어서 거기서 군밤 팔까. 왜 원수의 성문을 열지어다. 왜 이런 소리를 하느냐? 그거는 몰라요. 이런 소리 할 때는 하나님의 담긴 글 약속이, 약속은 항상 완료형태 거든요. 완료된 것이 왔을 때는 완료의 넓은 역량을 우린 다 모릅니다.
사람은 환란 중에 즐거워하라. 말은 좋지.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우린 다 몰라요. 소망 중에 환란 중에 기뻐하라. 환란이 뭐 기뻐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뭐, 돈이 일만 악의 뿌립니까? 일만 악의 뿌리라도 일단 벌고 싶다. 우린 그런 생각이라니까요. 항상 우린 말씀을 우리가 이해를 다 못해요. 하지만 가다보면 이게 이해가 될 순간이 옵니다. 아, 그게 그 말이구나. 그때 그 말씀이 그 말이구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안에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고” 이게 뭔 뜻인지 모르거든요. 혼자 사는 여자여, 괜히 결혼하지 말고, 그냥 혼자 살아라. 괜히 남편하고 결혼해서 남자 어떻게 기쁘게 할까 하다가 주님을 소홀하게 된다. 소홀할 값이라도 지금은 남편 서로 당겨서 서로 시집오라고 했으면 좋겠어요. 한쪽에는 검사고, 한쪽은 의산데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하고, 좀 그랬으면 좋겠어. 날 좋아한다는 키 180에다가 꽃 미남들. 와. 장동건하고 이병헌이 와서 서로 모셔 가겠다고. 그랬으면 좋겠어. 주의 말씀이 어떻든 관계없이.
그래서 우리는 주의 말씀과 상관없이 그냥 살아가요. 살다보면 주의 말씀이 이게 그 뜻이 그 뜻이다. 알려줘요. 그 소관은 그 전담반은 누가 해요? 우리가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해줍니다. 그때는 빼도 박도 못하고 결혼 무를 수도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냥 살면서 느끼게 하죠.
사람이 20년 정도 살다가 헤어졌다. 충분히 이해되죠. 왜냐하면 남자든, 여자든 뭔가 새로운 것이 자꾸 새록새록 나와야 그게 부부가 사는 재민데 이건 뭐, 벌써 밑천 떨어져버리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 그럴 바에야 서로 편하게 하자, 헤어지자. 그래서 헤어진 거 아닙니까.
만나서 이익 되는 게 있어야 되는데, 만나도 같이 살아도 이익 되는 게 없으면 헤어지는 게 오히려 편하지 않을까요? 서로가 합의하에. 서로를 자유케 한다. 멋진, 그걸 윈윈 작전이라. 서로가 승리자가 되는, 이익이 되는. 억지로 얽매이는 것보다 편하게 헤어지자. 앞으로 그런 상황들이 많이 오지 않겠나 이래 생각합니다.
어쨌든 간에 약속이 두 사람은 빼도 박도 못하도록 묶어준다 말이죠. 이 약속의 내용이 뭐냐? 그것은 나중에 나타납니다. 그건 뭐냐? 애를 낳을 때 애를 못 낳는다는 겁니다. 리브가는 몰랐어요. 몰랐었어요. 지금 이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 그러니까 리브가는 정상적인 사라처럼 아기 낳을 때 아기 낳고, 결혼하고 난 뒤에 일년 내지 이년 뒤에 아기 낳고, 아기 잘 키워서 그 아기가 주몽처럼 되어서 고구려가 승리자가 되서 한나라의 성문을 열어젖혀라. 우리 시나리오는 그 시나리오에요. 우리가 아는 시나리오는.
그런데 하나님의 시나리오는 엉뚱해요. 애기 낳고 뭘 하겠다는 게 아니라 애기가 없어요. 아기가 왜 없어야 되느냐? 우리가 생각한 애기, 아들은 성문을 못 열어요. 원수의 성문을 못 연다고.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손톱만큼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낙타가 바늘구멍만큼 힘들다. 그 말씀 우리 힘으로 못 이룹니다. 제자들이 말합니다. 주여, 이 말을 누가 이룹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아무도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다.
그 하나님이 하신다 할 때 우리가 느끼는 거는 뭐냐? 하나님의 약속은 책임자가 담당자가 하나님뿐이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지킨 담당자가 내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내가 아니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열심히 우리 나름대로 다하는, 우리 한계점을 다 드러내는 그런 기회를 충분하게 우릴 통해서 갖게 만들어요.
주의 말씀대로 지켜봐서 병나면 주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을 용서하소서. 해서 열심히 하는 척 하다가 사업이 좀 안 되면 내가 교회를 안 다녀서, 교회 다녀보다가. 인간들이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종교적인 것, 다 끄집어내요. 다 아니에요. 결국은 나중에 다 실패하고 끝나고 보면 아는 건 뭐냐? 아하, 이건 주님께서 약속대로 자기 약속 자기가 알아서 우릴 영생 주시는구먼. 괜히 우린 자기 의를 내세우고 내 잘난 척 했잖아. 그게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흔히 목사들이 그게 많아요. 주여, 어떻게 반듯하게 살면 교인 하나 들어오겠습니까? 열심히 반듯하게 산다고 사는 거예요. 소용없어요.
지금 한국교회 부흥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먹고 썩어질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그럼 교인들 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십자가 전하면 온 교인도 나가 떨어져요.
왜 목사 되었느냐? 목사 될 자격도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목사된 거예요. 왜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었느냐? 제가 늘 자주 이야기하지만 우리교회 오후예배 기도순서하면 빠져요. 기도하기 무섭다고. 심지어 우리교회에 다른 교회 다녔던 사람 많거든요. 큰 교회에. 그 교회에서 유창하게 잘했던 사람들, 우리교회 오후 기도시키면 안 합니다. 해봐야 목사한테 욕 얻어먹을 건데 뭐 하러 미쳤다고.
그런데 기도를 이렇게 한번 해보게 되면, 자기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구원되는 걸 알아요. 그런 숨어있는 기쁨을 압니다. 사람이 일을 저질러 봐야 내가 미처 몰랐던 행복이 있어요. 그 행복이 어떤 행복이냐 하면, 하나님은 내 계획과 목적과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다 이루신다는 거기서 아는 고 기쁨이 있어요. 내가 애씀과 상관없이 모든 축복은 다 줬다는 것, 그걸 눈치 채는 기쁨, 그거 돈 주고 못삽니다. 정말 좋습니다.
내가 애쓰고 힘들어했던 그거와 상관없이 공짜로 준다는 그 약속을 진짜 온 몸으로 체험하면, 새 신을 신고 펄쩍 뛰고 싶어. 이층에서 합기도도장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너무 좋아서. 다리 부러져도 좋고. 너무 좋아서. 내 행함과 상관없이 다 복을 받았다는 이 기쁨은 가다가 차에 받혀서 병원에 누워있어도 기뻐요. 그 정도로 좋아요.
리브가에게 준 이 약속은 창세기 22장 한번 봅시다. 창세기 22장 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 모래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대적의 문, 원수의 성문이죠. 열리리라. 이 약속을 위하여 남자 되는 이삭, 여자 되는 리브가 양쪽 다 필히 똑같은 약속이 주어집니다.
놀랍게도 저의 오빠가 이야기했지만 오빠가 이야기하고, 이삭한텐 누가 이야기해요? 아버지가. 아버지를 통해서 이 약속이 왔던 오빠를 통해서 약속이 왔던 이삭과 리브가는 그때부터 원수의 성문을 열어젖혀야 될 도구로 사용됩니다. 근데 원수의 성문은 이 두 사람이 생산하는 자식이 못 열어요. 자식 낳아야 없습니다. 자식 없어요. 무자식이에요. 애기 못 낳습니다.
아브라함하고 똑같아요. 니 하늘의 별 같이 자식 해놓고, 세상에 사라가 애기 낳을 수 있는 힘을 있을 동안에서 애기 없어요. 나중에 사라의 태가 죽어요. 죽고 난 뒤에 태어난 자식이 이삭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방식의 원칙이 오늘날 우리까지 이어져요.
이 말은 뭐냐? 주여, 내 힘으로 말씀을 지키겠나이다. 이거요, 죽어야 됩니다. 어디까지? 주여, 내 말씀 지킨 것, 성경 전체 몇 페이지입니까? 수천 페이지 가운데 한 군데도 내 지킨 것이 없고, 오히려 우리는 이 말씀에 반대되는 짓만 했습니다를 알 때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밀어붙입니다. 아하, 나는 무능력자다.
여기서 좀더 어려운 이야기해볼까요? 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무능자가 될 때까지 그냥 곱게 무능자 안 됩니다. 가만있어서 무능자 되는 게 아니고, 계속 뭘 하느냐? 질문을 해대요. 질문을 해대면서 뭐 되냐? 무능자 된다. 이거 한번 적어놓으세요. 중요합니다. 사람은 아침 눈만 뜨면 묻습니다. 신에게 묻든지, 자연에게 묻든지, 사람에게 묻든지, 나한테 묻든지 계속 물어요.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오늘 아침에 일찍 버스가 오겠나? 오늘 사장님이 인상은 좀 좋겠나? 오늘은 영업하는데 오는 손님들 좀 많이. 만약에 차 영업한다면 내 차 많이 사주겠나? 보험 하는 것 같으면 오늘 몇 구찌 하겠나? 사람은 자꾸 물어요. 사람은 묻는 겁니다.
왜 묻느냐? 해답을 몰라서 물어요. 해답을 모르기 때문에 묻는 걸로 나는 답을 모릅니다. 하는 걸로 대체해요. 자꾸 물어요. 이거 솔직한 거 네 살 박이 아이들 잘해요. 엄마, 엄마. 어떤 애가 가는데 내가 속리산에 가는데 속리산에 교회 단체로 놀러갔어요. 놀러갔는데 산책을 이렇게 하는데 어떤 애가 아주 특이한 속리산 입구의 계곡에 절 있는데 입구에 물이 졸졸 앉아서 이런 얘기해요. 엄마, 엄마. 여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하면 왜 결혼 안 하는데?
지금 왜 묻습니까? 무능자기 때문에 물어요. 유능할 것 같으면 묻질 않습니다. 그 묻는 순간 나는 무능자다. 그 분야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는 뜻이에요. 여자하고, 여자하고 하는데 왜 엄마는 여자고, 아빠는 남자여서 결혼했는데 여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하면 왜 안 되는데? 엄마, 아빠의 대답은 없었습니다. 왜? 못 들은 척하고 딴 짓하고 있어요. 답변을 못하기 때문에 딴 짓하고 있다고. 애가 더 이상 묻지를 않아요.
그래서 산책하면서 그걸 듣고 여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하면 안 되는데, 남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해야 된다는 게 있기 때문에 그게 마치 진리처럼 여겨져요. 보세요. 참 어려운데. 남자하고 여자하고 결혼해야 옳다고 한다면, 이 남자, 여자 옳음이 전부를 다 차지해야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남자-여자, 남자-남자, 여자-여자 이런 관계있잖아요. 세 가지 방법 중에서 한 가지를 골라서 이걸 진리라고 하는 때문에 남자-남자, 여자-여자는 이거는 아예 없는 이것은 안 해야 된다는 쪽으로 미루어놓은 거예요. 미루어놓은 것을 그 애는 다시 창고 집어넣은 것을 끄집어내온 거예요. 해서 그 남자, 여자만 되는 그 갈라짐, 갈라짐의 기준을 제시하라 이 말입니다.
결국 인간의 무능력은 질문인데 인간의 질문이란 뭐냐 하면, 우리가 들어왔던 것, 바깥에 변두리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방법입니다. 자꾸 끄집어내어서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자기를 세우는 게 아니고, 진리가 아닌 비진리라고 여기는 것을 전부다 끌어 모아서 그 위에서 다시 자기를 재정립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왜 그런 짓 하는가? 인간이라 하는 것은 진리 위에 서기에는 뭔가 허전함이 있기 때문에.
교회 열한 시에 와야 된다. 엄마, 왜 열한 시에 예밴데? 왜 열두 시 하면 안 되고, 열시 반에 하면 왜 안 되는데? 또 어떤 애는 왜 목사님께서 전부다 서서 설교해? 어느 교회 가면 앉아서 하던데. 앉아서 하면 안돼? 이걸 기존교회 같으면 미처 생각 못했죠. 왜? 의당히 어디 강대상 앉아서 설교하는 거 봤습니까? 큰 교회 중에서 없잖아요. 왜 앉아서 하면 안 되는데? 그걸 미처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서서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머진 창고에 처박아 놓은 거예요. 그 처박아 놓은 걸 다시 불러 와야 되는 이유는, 현재 있는 서서 한다는 것 가지고는 뭔가 서서 하는 것이 옳다. 라는 것 가지고도 뭔가 아주 성이 안 차. 뭔가 미흡한 게 있어요.
자,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룰 때 아마 약속은 우리 둘이 이삭과 리브가하고 만나서 아기 낳아서 아기 자라서 칼싸움 잘하는 주몽처럼 잘해서 원수의 성문을 얻읍시다. 이거는 우리가 익히 아는 우리가 현재 아는 그 범위 내에서 시나리오 짠 거지요. 드라마를 짠 건데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빼돌린 우리가 생각지도 않은 그것을 끄집어 와서 현재 우리가 진리라는 것을 흔들어놓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역사합니다.
여러분 인생 한번 보세요. 지금까지 하나님 뜻이 어떤 뜻이었습니까? 항상 예상 외로 일해요. 항상 예상외입니다. 그래서 그 예상 외로 들이닥친 사태가 우리를 놀랍게 감격시킵니다. 예상치도 못한 것을 인하여 우리는 인도함을 받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상한 것은 행함이 되기 때문에. 내가 미리 사람이 행위로 구원받지 못해요. 은혜로 구원받거든요.
그런데 은혜는 행위가 아닌 바깥에 은혜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줄기차게 행위만 주장하거든요. 하나님, 내일은 요 식대로 몇 명 손님이 오게 하시고, 장사 잘되게 하옵소서. 딱 요 식대로 하는데 그거 빼놓고 은혜입니다. 이거 젖히고 은혜가 우리에게 찾아와요. 오라는 손님은 안 오고 엉뚱한 사람이 와서 그 사람이 나를 뭔가 도와줄 때 우리는 감격과 희열을 느낍니다. 주여, 나 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뭐냐? 우리는 뭐든지 내가 이익과 소유하려고 애쓰다보니까 그게 죄가 되거든요. 우리는 이 죄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내 시나리오에 의하면 내 대에는 평생가도 내가 존재하는 이유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줄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 칠십, 팔십 되서 똥 싸고 오줌 싸 보세요. 그거 책임을 누가 집니까? 돈이고, 시간이고 자식들 바쁜데 와서 들여다 볼 때 그만큼 장사 못하고 문 닫아야 돼요. 차비 들지요. 대구에 부모 있다. 서울서 한번 왕래할 때마다 돈이 얼마나 깨집니까? 그거 피해주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아픈데 우에 합니까? 아픈데 자식이 들여다봐야지요. 결국은 뭐냐? 내가 안 죽고 살아있다는 자체가 남한테 피핼 주는 거예요.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요. 그 아들이 케이티엑스 오는 가운데서 뭘 느끼느냐 하면, 나도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죽는다는 거, 그걸 예상 못한 은혜를 받게 하실 때에 그건 우리 아버지 생각에 없었던 건데 하나님이 창고에서 끄집어내어서 약속의 일부를 내 방식이 아니라 나는 그냥 죽고 하나님이 따로 다른 노선을 통해서 아들에게 은혜를 그냥 줘버릴 때, 아버지. 나 아버지 아파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나는 한 것 없어 그냥 아파 누웠어.
아이고, 아버진 아파 누웠어도 아버지 아픈 것보다 은혜 됩니다. 라는 소리가 골백번 튀어나올 때 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구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것 가지고 자투리 가지고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우리 행함으로 다 우리가 써먹고, 항상 하나님의 일은 우릴 피해 갑니다. 그래야 은혜가 은혜답지요. 그래야 면류관 반납하지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뜻입니다. 면류관 반납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어릴 때부터 십일조 했고, 뭐 했고 잔소리 많으면 안 돼요. 그거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데모할 인간이에요. 진짜 나는 한 것도 없는데 무능력자인데 질문만 해댔을 뿐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자꾸 질문을 하게 하는 현상이 일어나거든 여러분, 성도라 여기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아니면 이런 거 관심도 없어요. 질문을 해대는데 답은 항상 엉뚱한 거.
오늘도 울산에 계시는 강성규 목사님. 길메리. 이름이 와 이래. 길가에 있다고 길메리가. 길메리 병원에 602호실에 계셔서 뵙고 왔어요. 내가 거기서 말씀을 같이 봅시다. 그냥 가기 뭐해서 말씀을 같이 봅시다. 하고 성경구절 했는데 성경구절 뭘 뽑았느냐 하면, 요한복음 12장 24절인가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예수님은 멀쩡한 몸인데 죽었잖아요. 왜? 밀알이기 때문에 밀알 값을 해야 되거든요.
성도도 마찬가지라고요. 멀쩡한데 왜 죽이십니까? 머리가 왜 아픕니까? 수술했거든요. 멀쩡한데 따지지 말아요. 주님은 안 멀쩡했느냐 말이죠. 주님은 멀쩡한 정도가 아니고, 죄도 없어요. 죄도 없을 정도로 멀쩡한 분이 갑자기 죄 뒤집어쓰고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저주받잖아요. 그게 우리가 생각 못한 우리의 자존심 가지고 도저히 나올 수 못한 하나님의 특수한 일입니다. 그 특수한 일이 성도를 통해서 이루어져요.
자꾸 사람들은 소유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희생으로 다가와요. 우리는 희생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기껏 희생했다. 소유로 보상받기를 원해요. 백날 희생해 봐야 이게 소유로 되돌아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교회 청소했잖아요. 보상해 주세요. 맨 날 이 식이라. 희생이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잠깐 희생이고 결국 그것은 천배, 백배로 받기를 보상으로 되돌아오기를 특히 소유로 오기를 바래요.
그런데 그것이 다 깨지는 순간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냥 죽는 거예요. 아픈 사람 아프다고 할 게 아니고, 주님은 어떻게 살았느냐를 보자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아픈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사나 죽으나 주의 뜻으로 받자 이 말입니다. 제가 그 자리에 누웠다고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우리 주님만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선.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 같으면 뭐 아이고, 건강하이소. 기도해 드릴게. 낫겠습니다. 이래 하겠는데 그런 소리 하기 싫어요. 나아봐야 또 남한테 피해주는데. 마찬가지.
한 알의 밀알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잖아요. 왜? 우리 행위와 우리 소유만 생각하기 때문에 밀알 생각은 안 한다고요. 안 하지만 하나님은 우릴 밀알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원수의 대적이란 뭐냐? 그걸 설명을 해야지요. 원수의 문을 연다는 것은 뭐냐? 인간의 진정한 원수는 뭐냐 하면, 축복이 없다. 여호와의 축복은 없다. 또는 하나님의 여호와 하시는 그러한 놀라운 축복 같은 건 기대하지 마라. 라는 것이 원수가 됩니다. 어려우니까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여호와의 축복이 떨어졌잖아요. 힘들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많이 피곤한 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데서 원수도 없지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원수도 없고 축복도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떨어지면 그 축복을 비아냥거리는, 축복을 비웃는 세력이 이 축복과 더불어 짝으로 한 짝으로 같이 생깁니다.
원수라 하는 것이 이삭 인간성 보고 원수가 아니라 이삭이 받았던 약속에 대한 원수가 약속 주어짐과 세트로 같이 오게 돼있어요. 원수가 뭐냐 하는 것은 어떤 게 원수냐 하는 것은, 약속이 뭐냐를 밝혀내고, 그 약속을 비웃고 조롱하는 데가 원숩니다. 그래 돼있어요. 그렇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보면,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면 원수다. 이런 것은 세상 사람하고 다 같이 이거는 성경하고 아무 관계없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왜 지옥 가느냐 하면, 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지옥 가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지옥 가는 이유를 모르지요. 왜? 예수는 사대 성자 중에 한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 이에요. 자기가 주의 원수된 것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신자는 압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리고 거기 대해서 오케이. 일 잘했어. 이래 되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의 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에 따라서 그때그때 달라요. 원수가. 원수의 질이 다르다고. 만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부활이라면 원수가 뭡니까? 부활을 없다고 하는 것이 원수가 되고. 만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십자가의 용서라면, 십자가의 용서를 비웃는 것이 뭐가 됩니까? 원수가 되고.
또 만약에 아브라함의 축복이 그 축복이라면 아브라함의 축복을 비웃는 것이 원수가 되고. 욥이 의롭다는 것이 약속이라면 욥을 비웃는 세 친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겠지요.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사람은 원수를 유발시키는 없는 원수 만들어내기 위해서 우린 약속의 사람으로서 이 땅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 되는 겁니다.
참, 말을 해놓고 보니 참 어렵네요. 원수가 뭐냐? 그건 주어진 축복이 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이걸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죠. 이제부터 쉽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는 것, 이것을 비웃는 것이 뭐가 되겠어요? 원수가 되겠지요. 그러면 원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아브라함 자손들은 뭐냐? 없는데서 생겨나야 되고, 죽은데서 살아나야 되는 거예요. 이걸 누가 합니까? 이걸 어느 자식이 해요? 못해요. 아무도 못해요. 우리가 합니까? 우리가 무슨 수로 부활합니까? 죽어볼까요? 부활되는가. 안 되지. 아무도 못해요. 아무도 못하니까 원수는 기가 살아서 더욱더 비웃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만약에 우리 예수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 하거든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용서 받거든요. 원수가, 당신 돌았어? 무슨 피가 알에이치 플러스 에이형이 뭐가? 이거 발라볼까요? 용서 받는가? 예수의 피와 살이 없으면 아무도 생명이 없거든요. 아니 어떻게 사람이 오래 살아야 생명이지, 예수의 살과 피가 어떻게 우리 죄를 용서한다 말인고. 그러면 진짜로 예수의 살과 피가 용서한다면 교회에서 그 이야기만 하겠다. 근데 교회 가봐. 그 이야기하는가? 피를 봐라. 돈 번다. 그 이야기만 하지. 진짜 교회가 당신같이 이야기하는 사람 못 봤다. 교회 가봐라. 어떤 사람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았다 그 소리만 하지, 예수의 피와 살이 하면서 그 소리 누가 한다고? 안 하지. 그러니까 당신 말이 틀렸다고. 대부분의 교회가 안 그런데 당신은 왜 하느냐? 이카거든요.
제가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개혁주의 이야기해요. 바른 삶. 성령에 따른 바른 삶, 바른 윤리, 도덕. 그게 원수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인간이 못한 걸 이야기했다고.
제가 언젠가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광주에서 그런 이야기했던가? 행함과 믿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머리만 구원한다. 할 때 저 대머리입니다. 하고 나오는 사람은 믿음인데, 있는 머리 쥐 뜯는 건 행함이다. 대머리 구원한다 하니까 자기 행함을 있는 머리 쥐 뜯는 거예요. 그럼 그 대머린 또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버지가 부르지 않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짜로 죽은데서 살아난 사람은 누구냐 이 말이에요. 나 죽어 마땅한데 주 때문에 살아났습니다. 하는 사람 누구냐 이 말이죠. 그걸 하기 위해서 일부러 죽을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냥 사세요. 돈 벌고 살아도 이미 죽은데서 살아난 사람 맞아요.
예수의 피로 용서받았다. 그걸 믿음을 성령으로 받은 사람은 예수의 피로 용서받는다 하면, 그거 맞잖아. 그래. 당연하거 아니냐? 뭐, 이상하노. 이래 되는데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그러면 나쁜 짓 해도 괜찮다 말인가? 무슨 그런 기독교가 있노. 성경에 하라, 하라 명령법도 많은데 다 거짓말 했겠네. 본인 대머리가 아니니까 대머리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결국은 십자가, 십자가 나중에는 행함으로 가버린 겁니다. 왜? 기껏 지가 할 수 있는 걸 내놓기 때문에.
십자가 죽었다가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한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되듯이, 그 십자가 피가 우리 죄 용서한다는 걸 믿어진다는 것도 절대로 우리 행함으로 안 되는 겁니다. 이거는 뭔가 하늘에서 덤터기로 물 붓듯이 부음 받아야 이거는 편하게 그것도 억지가 아니라 맞잖아. 그 말. 피로 용서 다 받잖아. 맞는 이야기를. 맞는데 뭐가 이상해. 이상하게 믿어지잖아. 그게 뭐가 이상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저쪽에서 나, 안 믿어지는데. 몰라. 나보고 우에란 말이고. 믿음 없다 말인가? 내 보기 믿음 없네. 믿음 있는데, 기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 백날 해봐라. 대머리 되는가?
리브가와 이삭이 이 실험에 동원돼요. 아이들 둘 낳아 주니까 그 애가 자기들 편에 속한 줄 알고, 네 식구가 전부다 나는 이 애를 좋아하고 나는 에서를 좋아한다. 나는 야곱을 좋아한다. 전부다 하는데 실은 그 약속을 이룬 분은 그 네 명 중에 한 사람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다 무능한 자로 다 만들어버려요.
하나님의 약속은 한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완료된 것이다. 완료된 게 뭡니까? 목사님. 그거는 십자가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십자가에서 죽은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고, 부활된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힘이다. 그래서 어쨌다고요? 그걸 미리 앞당겨서 어디로 오는데요? 앞당겨서 이삭에게 터진 거예요. 오늘날 우리에게 터지면, 그것도 리브가에게 터지면 둘 다 애기 없지, 뭐.
왜? 아브라함하고 마찬가지에요. 애기 낳을 능력을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애기를 줄 때는 그 애기는 절대로 내 능력으로 생긴 애기가 아니고, 이 약속, 인간이 모르는 이 약속을 담겨서 그 안에 캡슐 안에 담아서 이삭, 리브가 식으로 터뜨리기 폭격하기 위해서 터뜨려버리면 이삭과 리브가는 아, 우리가 무능자구나. 우리 힘으로 약속 이루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통해서 약속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가 지금도 우리한테 마찬가지에요. 여기 오늘 본문에 어디를 보느냐 하면, 25장 7절 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칠십오 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지요. 죽는다 이 말이죠.
아브라함을 그 약속의 땅에서다 묻어버려요. 그 1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 되었더라” 사람은 죽어도 약속은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라 하는 것은 아브라함, 사라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이게 나중에 예수님 당시에 영생으로 이어지기 위한 바탕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음조차도 개인적으로는 손을 털었지만 주님께서는 그 죽음조차도 손 안 털고, 죽음조차도 사람이 못하는 사람이 죽었으면 지가 어떻게 일어납니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명 얻는 표본으로 계속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죽어도 우리 할 일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 부활될 할 일이 남아있어요. 끝까지 이용하십니다. 이용한다는 말 이상한데, 하나님이 끝까지 우릴 사용해서 죽여 놓고 다 살리죠. 누구냐? 스데반 집사. 죽여 놓고 예수님 우편에서 영접당하고. 그런 스토리가 우리한테 내장되어있다. 우리한테 주어집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
얼마 전에 오리고기를 먹는데 오리고기 내 잘 못 먹잖아요. 하여튼 몸에 좋은 건 다 못 먹어. 개고기 못 먹고, 오리고기 못 먹는데. 오리고기 이렇게 먹는데 맛있게 먹었어요. 그걸 먹으면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왜 잘 안 좋아하는 오리고기를 먹게 하느냐? 그것은 내 취향과 상관없이 주께서 다룬다는 것을 내가 다시 느꼈어요. 오리고기 그거와 관계없이 내 인생은 이미 내 소유를 제 손에서 이미 떠나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래 돼버리면 뭘 제거해 버렸는가? 자아가 흐물흐물 해져요. 사진을 찍어놓으면 아, 내가 거기 있던 걸 알지만 사진 찍기 전까진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 있는지 그게 별 중요한 문제가 안 돼요. 안 중요해요. 내 할 일만 중요하지, 내가 별로 안 중요하더라 말이죠.
내가 안 중요하니까 나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도 할 필요가 없더라 말이죠.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요. 나는 귀신인데 흐물흐물한데. 별 의미 없어요. 나란 존재가 별 의미 없으니까 내 걱정을 의미 없는 인간을 왜 걱정합니까? 주님 복음만 생각해야지. 주님 주신 내일은 무슨 일을 주시렵니까? 그게 중요하지 이거해서 얼마 건졌다. 이거해서 얼마 이익 봤다. 내 생각을 할 필요 없다고.
이 밤에 강의마치면서 아브라함 죽음까지라도 주께서 끝까지 사용해서 기어이 부활동산에 주님의 약속의 날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같이 부활돼서 주님을 영접했거든요. 천국 가는 것처럼 죽어도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만 생각하면 우린 흐물흐물해져버립니다. 오늘은 무슨 약속을 주실 거고, 내일은 또 무슨 은혜를 주실 건지 기다려집니다. 내 성깔대로 살게 하고 내 식대로 다 살면서도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도리를 다 하시고 은혜는 은혜대로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 은총을 저희들이 이 땅에 살면서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마치겠습니다.
|